일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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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지록》은 명나라 멸망을 통치 시스템 붕괴의 결과로 보고, 당시 성리학의 폐해를 지적하며 경세(經世)를 위한 학문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고염무의 저작이다. 1676년에 완성되었으며, 고염무 사후인 1695년에 문인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3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학을 중심으로 하는 경세적인 학문 태도를 강조하며 정치 개혁론의 성격을 띤다. 이 책은 철저한 문헌 고증을 통해 사실을 밝히려는 학문적 태도를 보여주며, 조선 실학 사상과 일본의 《일지록》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고염무의 사상이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日知錄중국어은 고염무가 평생 독서하여 얻은 바를 수시로 필기한 것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일지(日知)'라는 제목은 논어 <자장>편의 "날마다 알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고 달마다 할 수 있는 것을 잊지 않으면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고염무는 《일지록》 머리말에서 "어릴 적부터 책을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으면 그때마다 기록해 두었는데 합치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때때로 다시 고쳤다… 자하(子夏)의 말을 취해 이름 짓기를 일지록이라 했으니 이를 통해 후대의 군자를 바로잡겠다"라고 밝혔다.
고염무는 평생 독서하여 얻은 바를 수시로 《일지록》에 기록했다. 그는 매일 알지 못하던 것을 깨닫고, 매달 할 수 있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논어의 구절을 인용하여, 이 책을 통해 후대의 군자를 바로잡고자 했다.
2. 저술 배경 및 내용
고염무는 명나라의 멸망 원인을 분석하고, 청나라 초기의 사회적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식에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명나라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당시 학계의 폐단을 지적하며, 성리학이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방향으로 흘러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적인 학문, 즉 경세(經世)를 위한 학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지록》은 고염무 사후인 1695년에 문인들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황여성(黃汝成)이 제가의 말을 수집하여 만든 주석서인 《일지록집석(日知錄集釋)》과, 《일지록》에 미수록된 글을 수집한 《일지록지여(日知錄之餘)》가 있다.
2. 1. 명나라 멸망의 원인 분석
고염무는 명나라의 멸망을 통치 시스템 붕괴의 결과로 보았다. 그는 특히 통치 이념이었던 성리학이 본래 지닌 실용적이고 경세적인 측면이 쇠락하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원리로 변질되면서 체제 내부의 문제에 대응하지 못했다고 파악했다. 성리학의 심학화(心學化)는 개인의 수양에 국한된 세계관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정치 과정에 진입한 관료들 역시 해결 능력 부족 및 통치 기제의 합리성에 대한 몰이해라는 문제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고염무는 명나라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당시의 학술적 폐해를 지적하며, 관념적·추상적 원리로 경도된 심학으로서의 이학(理學)에서 벗어나 경전에 대한 충실한 독서와 경전에 내포된 본래의 의미, 즉 경세(經世)를 위한 학문으로서의 취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학을 중심으로 하는 경세적인 학문 태도로 복귀하고, 이에 의거해 학습된 인재를 등용하여 명나라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이 책은 실패한 통치 기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정치 개혁론의 성격을 지닌다.
2. 2. 내용 구성
《일지록》은 32권으로 1676년 작품인데, 고염무 사후인 1695년에 문인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고염무가 평생 독서하여 얻은 바를 수시로 필기한 것이므로 《일지록》이라고 이름하였다.
짧은 논문을 수록한 독서잡기(讀書雜記) 형식으로, 체계적인 구성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다음과 같이 부분별로 편찬되어 있다.
자연·인문의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으며,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의식에서 저작되었다. 수록된 논문은 한 가지 일마다 반드시 그 시종을 분명하게 하고 이동(異同)을 철저히 궁구한다는 정밀한 고증을 시도한 것으로, 완성되기까지 30여 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일지록》은 고염무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이를 일관하는 정밀한 고증 속에 청조 고증학의 맹아가 엿보인다.
3. 학문적 특징 및 영향
《일지록》은 독서잡기(讀書雜記) 형식으로 짧은 논문들을 수록하고 있으며, 체계적인 구성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의(經義), 정사(政事), 세풍(世風), 예제(禮制), 과거(科擧), 예문(藝文), 명의(名義), 고사진망(古事眞妄), 사법(史法), 주서(註書), 잡사(雜事), 병(兵) 및 외국의 사(事), 천상술수(天象術數), 지리(地理), 잡고증(雜考證) 등 부분별로 편찬되어 자연과 인문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의식에서 저술된 것이다.
《일지록》은 고염무의 대표작 중 하나로, 정밀한 고증을 통해 청조 고증학의 맹아(싹)를 보여준다.
3. 1. 경학 중심의 실용적 학문 태도
고염무는 명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통치 이념이었던 성리학이 본래의 실용적이고 경세적인(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제하는) 측면을 잃고,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원리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성리학이 개인의 수양에만 치중하는 심학(心學)으로 변화하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관료들 역시 문제 해결 능력이 부족하고 통치 체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파악했다.
고염무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당시 학술의 폐해, 즉 심학으로서의 이학(理學)이 가진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경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전을 충실하게 읽고 그 안에 담긴 본래의 의미, 즉 경세(經世)를 위한 학문으로서의 뜻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고염무는 경학(經學)을 중심으로 하는 경세적인 학문 태도로 돌아가고, 이를 바탕으로 학습된 인재를 등용하여 명나라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일지록》은 실패한 통치 체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정치 개혁론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3. 2. 고증학의 맹아
《일지록》은 철저한 문헌 고증을 통해 사실을 밝히려 한 고염무의 학문적 태도를 보여준다. 고염무는 한 가지 일마다 반드시 그 시종을 분명하게 하고, 이동(異同)을 철저히 파고드는 정밀한 고증을 시도했는데, 이러한 고증 방법은 30여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청나라 고증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4. 한국 및 일본과의 관계
《일지록》은 조선과 일본의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4. 1. 일본에서의 연구
일본에서도 《일지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시미즈 시게루의 번역 및 연구, 노마 후미히토의 연구 등이 대표적이다.제목 | 저자 | 출판사 | 출판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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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l.ndl.go.jp/ja/pid/12212413/1/3 중국 문명선 7 顧炎武집 | 시미즈 시게루 | 아사히 신문사 | 1974년 (재판 1977년) |
청조 초기의 상서 연구: 顧炎武의 『일지록』과 옌뤄취의 『상서고문소증』 | 노마 후미히토 | 명덕출판사 | 2023년 |
顧炎武와 히라가 주난의 춘추학 | 노마 후미히토 | 명덕출판사 | 2024년 |
5. 현대적 의의
고염무의 《일지록》은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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