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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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안세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무제의 총애를 받아 상서령을 거쳐 소제 때 우장군, 광록훈을 역임했다. 곽광의 신임을 얻어 부평후에 봉해졌으며, 창읍왕 유하를 폐위하고 선제를 옹립하는 데 기여했다. 곽광 사후 선제에게 신임을 얻어 대사마 위장군이 되었으나, 권력 행사를 자제했다. 원강 4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경이다. 아들 장연수가 부평후를 계승했고, 후손들은 왕망 시대에 작위가 격하되기도 했으나, 후한 광무제를 섬기며 다시 무시후에 봉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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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62년 사망 -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는 로마의 귀족 출신으로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나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사망했으며, 로마 문학에서 악당으로 묘사되지만 현대에는 개혁 시도가 재평가되기도 한다. - 기원전 62년 사망 - 윤옹귀
윤옹귀는 전한 시대에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곽광의 권세에도 흔들리지 않아 칭송받은 관리로, 동해 태수와 우부풍 재임 시절 청렴하고 엄격한 통치로 백성을 안정시키고 호족을 견제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사후 선제가 그의 청렴함을 기려 그의 아들들에게 황금을 하사할 정도였다. - 경조 장씨 - 장탕
장탕은 전한 무제 시대에 율령 정비, 염철 전매 정책, 고민령 제정을 주도하여 국가 재정 확보에 기여했으며, 무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모함으로 자살했다. - 경조 장씨 - 장연수
장연수는 전한 시대의 관료이자 제후로, 장안세의 아들이며 선제 즉위에 기여한 공로로 중랑장, 시중, 북지태수, 태복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평후에 봉해져 사후 애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 전한의 우장군 - 마궁 (전한)
마궁은 전한 말기 관료로, 《엄씨춘추》를 익혀 여러 관직을 거쳐 광록훈, 우장군, 대사도 등을 역임했으며, 부태후 시호 결정에 참여했다가 왕망 집권 후 사죄하고 물러났으며, 신나라 건국 후에는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가 사망하여, 그의 생애는 기술 발전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 전한의 우장군 - 견한
견한은 전한과 신나라 시대의 관리로, 왕망의 측근으로서 시중, 봉거도위, 광록훈 등을 역임하고 종묘 보전 공로로 승양후에 봉해졌으며, 신나라 건국 후 대사마가 되어 승신공에 봉해졌다.
장안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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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장안세는 아버지의 음서로 낭(郞)이 되었고, 상서에 임명되어 승진했다. 행차 중이던 무제가 아끼던 어떤 서적을 분실했는데, 우연히 장안세가 그 책의 내용을 암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무제를 위해 그 내용을 전부 암송했고, 무제는 그를 상서령으로 발탁했다.
소제 때 우장군·광록훈이 되었고, 대사마대장군 곽광의 신임을 얻어 부평후(富平侯)에 봉해졌다. 원강 4년(기원전 62년)에 죽어 시호를 경(敬)이라 하였다.
장안세는 선제로부터 신뢰를 받아 막대한 권력을 쥐었지만, 가능한 한 눈에 띄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일부러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한 것을 숨기거나, 자신이나 일족에 대한 선제의 은총을 사퇴하는 등의 일이 잦았다.[1]
무제가 붕어하고, 그의 막내 아들인 소제의 시대가 되자, 우장군·광록훈이 되었다. 대사마대장군 곽광의 신임도 두터웠고, 부평후(富平侯)에 봉해졌다. 원평 원년(기원전 74년)에 소제가 사망하고 창읍왕 유하가 즉위하자, 곽광의 명으로 장안세는 거기장군·광록훈이 되어, 근위병을 이끌고 창읍왕의 가신 300명을 체포했다.
이어서 곽광과 장안세 등은 선제를 옹립했다. 기원전 68년에 곽광이 죽자, 선제는 전횡을 일삼던 곽씨 세력의 약화를 위해 일단 장안세를 해임했지만, 그는 선제의 신임이 두터웠기에 곧 대사마 위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위위·성문·북군의 병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선제가 곽광이 생존해 있을 때 수레를 곽광과 나란히 탔을 때는 어깨가 뻣뻣해지고 표정이 굳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곽광이 죽고 대신 장안세가 나란히 탔을 때는 선제는 긴장감을 풀고 표정도 온화했다고 한다.
원강 4년(기원전 62년)에 사망했고, 경후의 시호를 받았다.
장안세는 선제로부터 신뢰를 받아 막대한 권력을 쥐었지만, 가능한 한 눈에 띄는 것을 피하려고 했고, 일부러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한 것을 숨기거나, 자신이나 일족에 대한 선제의 은총을 사퇴하는 등의 일이 잦았다.
장안세는 세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장천추는 총명하였고, 장연수는 성품이 검소하였고 장안세의 작위를 이었다. 막내아들 장팽조는 형 장하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3. 가족 관계 및 후손
장안세는 세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장천추는 총명하였고, 장연수는 성품이 검소하여 장안세의 작위를 이었다. 막내아들 장팽조는 형 장하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장연수(애후)가 부평후를 이었고, 그의 아들인 장박 (전한)|label=장박영어(묘후), 손자인 张临|label=장림중국어(공후), 증손인 장방 (사후)으로 부평후가 세습되었다. 그러나 왕망 시대에 장향후로 격하되었다. 장방의 아들인 장순은 후한의 유수를 섬겼고, 다시 무시후에 봉해졌다. 그가 죽자 아들인 장분이 뒤를 이었고, 손자인 장보, 증손인 장길로 이어졌지만, 장길에게 후사가 없어 장안세 이래의 열후 계통은 결국 단절되었다.
4. 평가
곽광이 살아있을 때 선제가 곽광과 수레를 같이 타면 어깨가 뻣뻣해지고 표정이 굳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곽광이 죽고 장안세가 대신 수레에 같이 탔을 때는 선제가 긴장을 풀고 표정도 온화했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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