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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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화왕후는 고려 태조 왕건의 두 번째 정실 부인으로, 고려 혜종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로, 왕건과의 혼인으로 고려 왕실과 연을 맺었다. 장화왕후는 934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후 혜종을 폄하하려는 세력에 의해 비하되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겨지기도 했다. 그녀는 2000년 드라마 《태조 왕건》과 2002년 드라마 《제국의 아침》 등 대중 매체에서도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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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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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장화 (莊和) |
씨족 | 나주 오씨 |
아버지 | 오다련 |
어머니 | 연덕교 |
배우자 | 태조 |
자녀 | 혜종 |
출생지 | 금성, 신라 |
사망 추정 시기 | 934년 또는 943년 |
사망 추정 장소 | ??개성시, 고려 |
시호 | 장화 (莊和; "엄숙하고 조화로운") |
생애 | |
왕후 책봉 | ?–? |
전임 | 신혜왕후 |
후임 | 신명순성왕후 |
2. 생애
장화왕후는 나주 지역으로 이주한 가문 출신으로, 오다련의 딸로 태어났다. 오다련은 태조가 고려를 건국하는데 기여하였다.[2][3] 왕건은 903년과 909년에 나주를 공략하였고, 혜종이 912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 장화왕후는 이 시기에 왕건과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5][6]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장화왕후의 조부는 오방(825~?)이며, 자는 부순(富純), 호는 한송정(寒松亭)이라 하였다. 오방은 통일신라 말에 문과 율령전박사 겸 병부시랑을 역임하였으며, 최치원 등과 함께 명승지를 유람하였고, 875년에 함양에서 나주로 이주해 왔다.[2] 장화왕후의 아버지 오희(856~944)는 신라 헌강왕 때(877) 공자묘당 경학박사를 제수받았다. 고려 태조 921년에 다련군(多憐君)에 봉해졌고, 고려 혜종 원년(944)에 타계하였다.하지만 장화왕후의 조부가 오방이고 부친이 오희라는 주장은 1940년 전후로 공개된 '오씨삼십세계도(吳氏三十世系圖)' 필사본에만 있는 내용으로, 이 필사본은 조작된 위서(僞書)로 평가받고 있다. 이 필사본은 오씨 가문의 족보 원전으로 여겨지는 나주 오씨 정묘보(1747년), 보성 오씨 병술보(1766년), 해주 오씨 정해보(1767년)와 내용이 다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화왕후 집안이 대대로 나주의 목포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필사본은 이와도 내용이 다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나주목 편에는 장화왕후의 조부는 오부돈, 부는 다련군으로 대대로 나주의 목포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오다련으로 표기되었다.
왕건은 903년과 909년에 나주에 출진하였는데, 장화왕후의 아들인 혜종이 912년에 태어났으므로 장화왕후는 왕건과 903년이나 909년 경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5][6]
장화왕후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2. 2. 왕건과의 만남과 혼인
견훤이 무진주에서 전주로 중심지를 옮겨 후백제 건국을 선포하려던 계획이 9년 동안이나 지체될 정도로, 처음부터 전남 해안 지역 세력들과 견훤과는 우호적인 정황이 보이지 않았다. 그 틈을 노린 왕건은 서남해안을 공략하였고, 오다련 등 전남 해안 지역 호족들은 왕건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다.[2] 왕건이 갑판 선상에서 시내 위를 바라보다가 오색(五色)의 운기를 보고 달려갔다가 빨래하고 있는 오씨를 보았다.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던 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다가, 나주 금성산 남쪽에 상서로운 오색 구름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말을 타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태조가 이상히 여겨 버드나무 잎을 띄운 까닭을 물으니, 처녀는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감동한 태조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 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장화왕후는 오다련의 딸이다.[3]
2. 3. 왕비 책봉과 혜종 출산
태조는 혜종이 임금될 자격이 있음을 알았으나 다른 지역 호족들의 반발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징표로 옷상자에 황제가 입는 옷 자황포(黃袍)를 담아 전해주었다. 뒤에 왕건이 태자 무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오씨에게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大匡) 박술희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혜종을 정윤(正胤) 태자 무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1]2. 4. 사망과 관련된 논란
장화왕후와 그 소생인 혜종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장화왕후 사후에 그를 비하하는 기록이 덧붙여졌다. 이러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수록되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태조가 빨래터에서 만난 오씨(장화왕후)를 불러 잠자리를 가졌으나 임신시키기를 원치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1] 물론 오씨 측 가문이 미약했으나, 임신을 원치 않았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은 의도적으로 장화왕후와 혜종을 비하하려는 의도였음을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1]일찍이 왕건에게 투항하여 그의 삼한 지역 통일을 도운 장화왕후의 집안은, 후백제의 견훤이 금성 지역에 쳐들어오면서 보복을 당해 가문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1] 고려 건국 후 태조 왕건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장화왕후의 부친을 다련군(多憐君)으로 봉했는데, 이는 오씨 가문이 본래 한미한 집안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1] 다만, 통일신라 말기 호족 세력들의 합종연횡 속에서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을 제거하려는 연합 세력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1]
혜종이 태어난 마을은 왕을 상징하는 '용'자를 써서 '흥룡동'이라 불렀다.[2] 당시 처녀가 빨래하던 샘인 완사천은 지금도 나주 시청 앞 도로 옆에 남아있고, 그 옆에는 왕비의 비(碑)가 남아있다.[2] 흥룡동에는 혜종의 소상(塑像)을 모신 혜종사(惠宗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조선 세종 11년(1429년) 이안관이 혜종의 소상과 진영을 옥교자에 모시고 한양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2]
3. 사후
장화왕후 사후, 정치적으로 유씨와 남궁씨 등이 연합하여 제2대 혜종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혜종이 타계하자, 장화왕후와 그의 소생인 혜종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장화왕후를 비하하는 기록이 추가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태조가 빨래터에서 만난 오씨를 불러 시침했으나 임신을 원치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학자들은 오씨 가문이 미약했음에도 임신을 원치 않았다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장화왕후와 혜종을 비하하려는 의도였다고 인정한다.[1]
장화왕후의 집안은 왕건에게 투항하여 그의 삼한 지역 통일에 도움을 주었으나, 후백제의 견훤이 금성 지역을 침공했을 때 보복을 당해 가문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고려 건국 후, 태조 왕건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장화왕후의 부친을 다련군(多憐君)으로 봉했다. 이는 오씨 가문이 본래 한미한 집안이 아니었으며, 통일신라 말기 호족 세력들의 합종연횡 속에서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을 제거하려는 연합 세력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보여준다.[1]
혜종이 태어난 마을은 왕을 상징하는 '용'자를 써서 '흥룡동'이라 불렸다. 당시 처녀가 빨래하던 샘인 완사천은 현재 나주 시청 앞 도로 옆에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왕비의 비(碑)가 있다. 흥룡동에는 혜종의 소상(塑像)을 모신 혜종사(惠宗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조선 세종 11년(1429년) 이안관이 혜종의 소상과 진영을 옥교자에 모시고 한양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1]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친정 | ||
조부 | 오방(吳昉) 또는 오부순(吳富純) | |
조모 | 미상 | |
아버지 | 오희(多憐君 吳禧, 856~944)[7] | |
외조부 | 신라 사간 연위(沙干 連位) | |
외조모 | 미상 | |
어머니 | 연덕교(連德交) | |
형제 | 오상(吳相) | |
형제 | 오환(吳桓) | |
형제 | 오검(吳檢) | |
왕가 | ||
시아버지 | 추존 세조(世祖, ? ~897) | |
시어머니 | 추존 위숙왕후(威肅王后) | |
남편 | 제1대 태조(太祖, 877~943, 재위: 918~943) | |
장남 | 제2대 혜종(惠宗, 912~945, 재위:943~945) | |
며느리 | 의화왕후(義和王后) | |
손자 | 흥화궁군(興化宮君, ? ~960?) | |
손녀 |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 | 광종의 제2비 |
손녀 | 정헌공주(貞憲公主) | |
며느리 |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 |
며느리 |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 |
며느리 | 궁인 애이주(宮人 哀伊主) | |
손자 | 태자 왕제(太子 王齊) | |
손녀 | 명혜부인(明惠夫人) |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웹사이트
성씨정보 고려 왕후록(王后錄) - 고려의 왕비 :+
http://www.surname.i[...]
2021-10-04
[2]
서적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9〉오씨(呉氏)、해주오씨
http://www.segye.com[...]
Segye Ilbo
2017-02-16
[3]
서적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장화왕후 莊和王后
http://terms.naver.c[...]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17-02-16
[4]
기타
世界日報
2013
[5]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고려사〉태조 후비
https://terms.naver.[...]
[6]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부 자료
https://terms.naver.[...]
[7]
웨이백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s://people.aks.a[...]
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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