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노농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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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남노농협의회는 1931년 12월 19일 광주에서 결성된 조직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김기선, 이응규 등은 1920년대 후반부터 공산주의 운동을 준비하며, 광주, 목포, 전주 등 전남 지역에 조직 기반을 마련했다. 전남노농협의회는 조직부, 노동농민부, 반제부 등 3개 부서로 시작하여, 재정, 출판, 교육, 조사를 추가하여 7부 체제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각 부서별로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학생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전남노농협의회 사건으로 117명이 기소되었으며,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가 적용되었다. 관련자들은 재판을 통해 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김호선, 윤승현, 김준수 등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강환진, 송성수, 김재동 등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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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노농협의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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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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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 1989년 3월 12일 |
해산일 | 1994년 5월 10일 |
유형 | 사회운동 단체 |
이념 |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NLPDR) |
관련 단체 |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농)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전노운협) |
후신 단체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주노총) |
역사 | |
결성 배경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 운동 확산 농민 운동 내부의 NL (민족 해방) 계열 주도 |
주요 활동 | 농산물 수입 개방 반대 투쟁 반미 투쟁 전남 지역 노동 운동 지원 |
해산 이유 | 내부 갈등 및 조직 와해 |
조직 | |
조직 체계 | 중앙 지도부 지역 조직 산하 농민회 및 노동조합 |
주요 인물 | 강기갑 김선동 이정희 |
평가 | |
긍정적 평가 | 농민 및 노동자의 권익 보호에 기여 사회 운동의 활성화에 기여 |
부정적 평가 | 과격한 투쟁 방식으로 사회적 갈등 야기 NL 계열 이념에 치우쳐 대중적 지지 확대에 실패 |
기타 | |
관련 사건 | 임수경 방북 사건 박홍 교수 강연 저지 사건 |
2. 조직전 배경
1927년 김기선, 이응규, 이병호, 권대형은 동경 유학 중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제3차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5월 사건이 발각되자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하려고 1929년 7월까지 전후하여 조선에 돌아왔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전하면서 이응규는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원사에, 김기선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에 잠복하였다. 1929년 8월경 산청군 대원사에서 김기선, 이응규, 강갑영, 권대형, 김계영, 박원효, 이병호가 회합하여 장래의 공산주의 운동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1930년 8월 권대형은 김기선과의 협의에서 먼저 전라남도 광주의 상황을 탐지하기로 한다. 권대형은 강갑영을 전남 조직책으로 하여 1930년 9월에 광주에, 김기선은 윤영기를 1930년 9월 목포에 보내고, 김기선 자신은 이응규와 함께 전주에 잠입하여 박만춘, 송기종 외 수명을 동지로 획득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박만춘, 송기종 두 사람을 1932년 2월 광주로 보내게 된다. 1931년 1월 이응규는 김기선의 명령에 의하여 광주에 잠입하여 강갑영을 방문한 후 목포에 들어가 목포에 잠입 중이던 윤영기를 만나 광주, 목포 지역의 운동상황을 점검하였다.
2. 1. 경성 유학생들의 귀국과 지리산 회합
1927년 김기선, 이응규, 이병호, 권대형은 동경 유학 중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제3차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5월 사건이 발각되자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하려고 1929년 7월까지 전후하여 조선에 돌아왔다.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전하면서 이응규는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원사에, 김기선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에 잠복하였다. 1929년 8월경 산청군 대원사에서 김기선, 이응규, 강갑영, 권대형, 김계영, 박원효, 이병호가 회합하여 장래의 공산주의 운동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1930년 8월 권대형은 김기선과의 협의에서 먼저 전라남도 광주의 상황을 탐지하기로 한다. 권대형은 강갑영을 전남 조직책으로 하여 1930년 9월에 광주에, 김기선은 윤영기를 1930년 9월 목포에 보내고, 김기선 자신은 이응규와 함께 전주에 잠입하여 박만춘, 송기종 외 수명을 동지로 획득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박만춘, 송기종 두 사람을 1932년 2월 광주로 보내게 된다. 1931년 1월 이응규는 김기선의 명령에 의하여 광주에 잠입하여 강갑영을 방문한 후 목포에 들어가 목포에 잠입 중이던 윤영기를 만나 광주, 목포 지역의 운동상황을 점검하였다.
2. 2. 광주, 목포, 전주 지역 조직 준비
1927년 김기선, 이응규, 이병호, 권대형은 도쿄 유학 중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제3차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5월 사건이 발각되자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1929년 7월까지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은신하며, 이응규는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원사에, 김기선은 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에 잠복하였다. 1929년 8월경 산청군 대원사에서 김기선, 이응규, 강갑영, 권대형, 김계영, 박원효, 이병호가 모여 앞으로의 공산주의 운동을 약속하고 헤어졌다.1930년 8월, 권대형은 김기선과의 협의를 통해 전남 광주의 상황을 파악하기로 결정하였다. 권대형은 강갑영을 전남 조직책으로 하여 1930년 9월에 광주로 보냈고, 김기선은 윤영기를 1930년 9월 목포로 파견하였다. 김기선 자신은 이응규와 함께 전주에 잠입하여 박만춘, 송기종 외 여러 명을 동지로 확보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1932년 2월 박만춘, 송기종 두 사람을 광주로 보냈다. 1931년 1월, 이응규는 김기선의 명령으로 광주에 잠입하여 강갑영을 만난 후, 목포로 가서 윤영기를 만나 광주, 목포 지역의 운동 상황을 점검하였다.
3. 전남노농협의회 조직
1931년 12월 19일 광주읍 동정(東町) 소재 안채수의 집에서 김기선, 이응규, 김호선, 윤승현, 김준수, 송기종, 박만춘, 김백동, 김영석, 정시환이 회합하여 전남노농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내부조직으로 조직부, 노동농민부, 반제(反帝)부 3부를 두었다.
다음날 김기선, 윤승현은 3부의 책임자로 김호선, 박만춘, 김백동을 선출하고, 1931년 12월 하순 김호선 등은 협의결과 기존 3부외에 재정, 출판, 교육, 조사의 4부를 추가로 정하여 7부로 하였다.
각 부서별 책임과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조직부 (책임: 김호선, 김백동): 목포 지역 조직으로 김백동은 김상만, 김용길과 함께 동아고무, 동아직포 선하(船荷)노동조합에 조직을 심으려고 노력하였다.
- 화학부 (책임: 송기종): 전남 도시(道是)제사회사, 조일고무공장에 조직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 정미(精米)부 (책임: 김호선): 광주 정미소 인원 획득을 위해 노력하였다.
- 교통부 (책임: 이응규, 박만춘, 송기종, 오정환, 박춘래, 안채수): 4명을 획득한 후 40회에 걸쳐 연구강좌를 열었다.
- 방적(紡績)부 (책임: 김기선, 윤영기, 송기종): 전남 도시제사주식회사(윤영기), 양림제사 주식회사(김기선), 종연(鍾淵)방적(송기종)에 각 공장위원회 조직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 농민부: 지역별로 김재동, 윤승현, 정시환이 책임을 맡았다.
- 옥과 무명 비밀결사: 정동화, 이정윤, 김재룡, 한덕명이 주동이 되어 옥과노동회를 장악하여 이를 좌경화 시키려고 하였다.
- 나주군 남평면 우산리 민풍진흥회: 윤승현, 송성수
- 순천과학연구회: 정시환, 박영진, 김완근이 주동이 되어 야학교를 운영하면서 계급의식을 고취하였다.
- '자외선'과 보성 적색 농민부: 정은찬, 강환진, 최창진, 선태섭
- 반제부:
- 사회과학연구회: 최정기, 김호선, 최차도, 최인식(최인봉)가 광주고등보통학교 생도들을 지도하였다.
- 무명 비밀결사: 이계철, 김문술, 조기원
- 재건 광주학생 비밀결사: 최차도, 조기원, 최창진, 이천례
- 무산소년 획득동맹: 고재휴, 이응규, 최희원, 최창진
- 정치부 (책임: 박만춘)
- 노동부 (책임: 김기선)
- 재정부 (책임: 박만춘)
- 출판부 (책임: 윤승현)
- 교육부 (책임: 이응규)
- 조사부 (책임: 김기선)
3. 1. 결성 과정과 초기 조직
1931년 12월 19일 광주읍 동정(東町) 소재 안채수의 집에서 김기선, 이응규, 김호선, 윤승현, 김준수, 송기종, 박만춘, 김백동, 김영석, 정시환이 회합하여 전남노농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내부조직으로 조직부, 노동농민부, 반제(反帝)부 3부를 두었다.다음날 김기선, 윤승현은 3부의 책임자로 김호선, 박만춘, 김백동을 선출하였다. 1931년 12월 하순 김호선 등은 협의하여 기존 3부 외에 재정, 출판, 교육, 조사의 4부를 추가, 7부로 하기로 하였다. 책임은 김호선이 맡았고, 조직부는 김호선과 김백동, 정치부는 박만춘, 노동부는 김기선, 농민부는 윤승현, 반제부는 김준수, 재정부는 박만춘, 출판부는 윤승현, 교육부는 이응규, 조사부는 김기선이 담당했다.
3. 2. 조직 확대와 7부 체제 구축
1931년 12월 19일 광주읍 동정(東町) 소재 안채수의 집에서 김기선, 이응규, 김호선, 윤승현, 김준수, 송기종, 박만춘, 김백동, 김영석, 정시환이 회합하여 전남노농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내부 조직으로 조직부, 노동농민부, 반제(反帝)부 3부를 두었다.그 다음날 김기선, 윤승현은 3부의 책임자로 김호선, 박만춘, 김백동을 선출하고, 1931년 12월 하순 김호선 등은 협의 결과 기존 3부 외에 재정, 출판, 교육, 조사의 4부를 추가하여 7부 체제로 확대하였다.
각 부의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부서 | 책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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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부 | 김호선, 김백동 |
정치부 | 박만춘 |
노동부 | 김기선 |
농민부 | 윤승현 |
반제부 | 김준수 |
재정부 | 박만춘 |
출판부 | 윤승현 |
교육부 | 이응규 |
조사부 | 김기선 |
조직부는 목포, 화학, 정미, 교통, 방적 부문으로 나누어 조직 확대를 추진했다. 김백동은 목포지역 조직을 책임지고 동아고무, 동아직포 선하(船荷)노동조합에 조직을 심으려고 노력하였고, 송기종은 화학부 조직을 책임지고 전남 도시(道是)제사회사, 조일고무공장에 조직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김호선은 정미(精米)부 조직을 책임지고 광주 정미소 인원을 획득하고자 노력했다. 이응규는 교통부 조직을 책임지고 박만춘, 송기종, 오정환, 박춘래, 안채수와 함께 4명을 획득한 후 40회에 걸쳐 연구강좌를 열었다. 김기선은 방적(紡績)부 책임을 맡아 윤영기, 송기종과 함께 전남 도시제사주식회사(윤영기), 양림제사 주식회사(김기선), 종연(鍾淵)방적(송기종)에 각 공장위원회 조직을 추진하였다. 농민부는 김재동, 윤승현, 정시환이 지역별로 책임을 맡았다.
이외에도 옥과 무명 비밀결사, 나주군 남평면 우산리 민풍진흥회, 순천과학연구회, '자외선'과 보성 적색 농민부, 사회과학연구회, 무명 비밀결사, 재건 광주학생 비밀결사, 무산소년 획득동맹 등 다양한 조직 활동이 전개되었다.
3. 3. 각 부서별 주요 활동
전남노농협의회는 1931년 12월 19일 광주읍 동정(東町) 안채수의 집에서 김기선, 이응규, 김호선, 윤승현, 김준수, 송기종, 박만춘, 김백동, 김영석, 정시환의 회합으로 조직되었다. 내부 조직으로 조직부, 노동농민부, 반제(反帝)부 3부를 두었다가 다음날 김기선, 윤승현은 3부의 책임자로 김호선, 박만춘, 김백동을 선출하고, 1931년 12월 하순 김호선등은 협의결과 기존 3부외에 재정, 출판, 교육, 조사의 4부를 추가로 정하여 7부로 하였다.각 부서별 책임과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조직부 (책임: 김호선, 김백동): 목포 지역 조직으로 김백동은 김상만, 김용길과 함께 동아고무, 동아직포 선하(船荷)노동조합에 조직을 심으려고 노력하였다.
- 화학부 (책임: 송기종): 전남 도시(道是)제사회사, 조일고무공장에 조직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 정미(精米)부 (책임: 김호선): 광주 정미소 인원 획득을 위해 노력하였다.
- 교통부 (책임: 이응규, 박만춘, 송기종, 오정환, 박춘래, 안채수): 4명을 획득한 후 40회에 걸쳐 연구강좌를 열었다.
- 방적(紡績)부 (책임: 김기선, 윤영기, 송기종): 전남 도시제사주식회사(윤영기), 양림제사 주식회사(김기선), 종연(鍾淵)방적(송기종)에 각 공장위원회 조직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 농민부: 지역별로 김재동, 윤승현, 정시환이 책임을 맡았다.
- 옥과 무명 비밀결사: 정동화, 이정윤, 김재룡, 한덕명이 주동이 되어 옥과노동회를 장악하여 이를 좌경화 시키려고 하였다.
- 나주군 남평면 우산리 민풍진흥회: 윤승현, 송성수
- 순천과학연구회: 정시환, 박영진, 김완근이 주동이 되어 야학교를 운영하면서 계급의식을 고취하였다.
- '자외선'과 보성 적색 농민부: 정은찬, 강환진, 최창진, 선태섭
- 반제부:
- 사회과학연구회: 최정기, 김호선, 최차도, 최인식(최인봉)가 광주고등보통학교 생도들을 지도하였다.
- 무명 비밀결사: 이계철, 김문술, 조기원
- 재건 광주학생 비밀결사: 최차도, 조기원, 최창진, 이천례
- 무산소년 획득동맹: 고재휴, 이응규, 최희원, 최창진
- 정치부 (책임: 박만춘)
- 노동부 (책임: 김기선)
- 재정부 (책임: 박만춘)
- 출판부 (책임: 윤승현)
- 교육부 (책임: 이응규)
- 조사부 (책임: 김기선)
4. 관련 단체 및 사건
4. 1. 옥과 무명 비밀결사
4. 2. 나주군 남평면 우산리 민풍진흥회
4. 3. 순천과학연구회
4. 4. '자외선'과 보성 적색 농민부
4. 5. 사회과학연구회와 학생 운동
4. 6. 기타 비밀결사 활동
5. 피고인 및 죄명
전남노농협의회 사건으로 체포, 기소된 주요 인물들과 적용된 죄명은 다음과 같다.
주요 피고인: 김호선, 윤승현, 최창진, 최차도, 이응규, 김기선, 강갑영, 김재동, 안종익, 윤영기, 전갑선(여), 김질선(여), 이인형, 임종대, 이흥연, 송기종, 박만춘, 김영석, 정시환, 김백동, 이병식, 김수일, 김공금, 이기준, 조병철, 김정수, 박준구, 허원동, 이계호, 배사채, 최인봉(최인식), 김준수, 송성수, 조기원, 최정기, 고재휴, 최희원, 안채수, 김완근, 선태섭, 정은찬, 정동화, 이정윤, 김재룡, 한덕명 등 총 117명이 전남노농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었다.
적용 죄명: 전남노농협의회 회원 117명에게는 일제강점기의 악법인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폭력행위 등 처벌법 위반, 업무방해 등의 죄목이 적용되었다.
5. 1. 주요 피고인
김호선, 윤승현, 최창진, 최차도, 이응규, 김기선, 강갑영, 김재동, 안종익, 윤영기, 전갑선(여), 김질선(여), 이인형, 임종대, 이흥연, 송기종, 박만춘, 김영석, 정시환, 김백동, 이병식, 김수일, 김공금, 이기준, 조병철, 김정수, 박준구, 허원동, 이계호, 배사채, 최인봉(최인식), 김준수, 송성수, 조기원, 최정기, 고재휴, 최희원, 안채수, 김완근, 선태섭, 정은찬, 정동화, 이정윤, 김재룡, 한덕명 등 총 117명이 전남노농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폭력행위 등 처벌법 위반,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되었다.5. 2. 적용 죄명
전남노농협의회 회원 117명에게는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폭력행위 등 처벌법 위반, 업무방해 등의 죄목이 적용되었다. 주요 피고인으로는 김호선, 윤승현, 최창진, 최차도, 이응규, 김기선, 강갑영, 김재동, 안종익, 윤영기, 전갑선(여), 김질선(여), 이인형, 임종대, 이흥연, 송기종, 박만춘, 김영석, 정시환, 김백동, 이병식, 김수일, 김공금, 이기준, 조병철, 김정수, 박준구, 허원동, 이계호, 배사채, 최인봉(최인식), 김준수, 송성수, 조기원, 최정기, 고재휴, 최희원, 안채수, 김완근, 선태섭, 정은찬, 정동화, 이정윤, 김재룡, 한덕명 등이 있다.6. 재판 결과 및 역사적 평가
전남노농협의회 사건 관련자들은 재판을 통해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역사적 평가를 통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으며, 김호선, 윤승현, 김준수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강환진, 송성수, 김재동, 신문선, 고재휴, 권대형, 최정기, 김봉수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6. 1. 재판 결과
6. 2. 독립유공자 서훈
김호선, 윤승현, 김준수 등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강환진, 송성수, 김재동, 신문선, 고재휴, 권대형, 최정기, 김봉수 등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이들의 공적은 더불어민주당의 독립운동가 예우 기조를 반영한다.6. 3. 역사적 의의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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