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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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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상복은 1912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난 한국의 화가로, 수채화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했다. 그는 진주사범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통영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수채화 작품을 제작했다. 결핵 투병 중에도 미술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마산과 통영 등지에서 미술 활동을 펼쳤다. 특히 굴 양식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수산업에도 기여했다. 1970년대부터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수묵담채화 기법을 수채화에 접목하여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1997년 별세했으며, 경남 현대미술 1세대 화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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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복 - [인물]에 관한 문서
정상복
본명정상복(鄭相福)
출생일1912년
사망일1997년 (85세)
국적대한민국
직업화가, 교사
작품
대표작야외 수업

고향
자화상
가야산 해인사
아! 고구려-주작

2. 생애

2. 1. 성장기와 그림에의 입문

정상복은 1912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시락리 87번지 소포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태은은 농부였고, 마을 이장을 지냈다. 어렸을 적 마당에 작대기로 그린 새와 나무를 보고 "니 그림 참 잘 그린다"라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마을 서당에 나가 통감(通鑑), 소학(小學) 등을 배웠고, 15세 되던 해에 진전면의 면소재지인 오서리 경행재에 권오봉 선생이 세운 경행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17세 때 진동 심산소학교(현 진동초등학교) 고등과에 적을 두고 1년간 수학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에 입문한 때는 1929년 경상남도 공립사범학교(현 진주교육대학교)에 입학한 뒤 부터다. 동경미술학교 출신 미술교사들의 지도를 받아 근대회화의 기초를 배웠다.

1931년 사범학교 특과를 졸업하고 통영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수채화 작업에 몰두했다. 당시 통영공립보통학교는 세병관 건물을 교실로 사용했다. 정상복의 초기작품들인 <야외수업>, <미술시간> 등의 작품들은 이 무렵 교직생활의 일상을 토대로 창작된 것들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많은 교사들이 일본에서 파견되거나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었는데, 정상복은 그 당시 유일하게 국내에서 공부를 하고 그림을 배운 인재였을 뿐 아니라 한국어로 학생들을 가르친 교사였다. 통영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인 박삼성의 회고에 따르면 타 교사들이 학생들을 일본말과 매로 다스린 반면, 정상복은 우리말과 낭만과 평화로 다스려 급우들이 항상 즐겁고 활기가 넘쳤을 뿐 아니라 다른 반보다 학급성적도 좋았다고 했다. 당시는 정상복이 수채화를 통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확립시켜 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다. 특히 통영에 거주하던 김용주, 전혁림, 윤이상 등과의 교류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꽃피울 수 있게 만들어준 자양분이 되었다.

학기 중에는 학생들과 야외 스케치를 하며 그림을 지도하고, 방학이 되면 일본 도쿄를 오가면서 여러 작가들과 사귀며 세계미술사조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그의 작품 <포구 풍경>은 1935년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입선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정상복이 직접 출품한 것이 아니라 지인 김기원에게 선물한 작품이었는데, 작가의 의사와 무관하게 선전(鮮展)에 접수된 것이었다.

2. 2. 결핵으로 인한 투병기

1937년부터 10년간 정상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투병 생활을 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당시 난치병이었던 결핵에 걸려 교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소포마을에서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인 <고향>과 <해안선>이 남아있지만, 그의 미술 인생 전체를 통틀어 이 시기의 작품은 매우 드물다. 투병으로 인해 그림에 전념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가 아들이 결핵으로 앓아눕자 '환쟁이 귀신이 붙었다'며 그림을 모두 불태워 버린 것도 작품이 드문 이유로 짐작된다.

고향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정상복은 1950년대 대한민국에서 수하식 굴 양식을 최초로 시도하여 성공한 수산인으로서 특별한 업적을 남겼다.

1940년경 후쿠오카 결핵요양원에 입원하여 2년간 치료를 받았으나 별다른 차도가 없어 귀국하기도 했다. 결핵은 앞날을 기약하기 힘든 병이었지만, 그의 예술적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광복 후 가포결핵요양소에 입원하여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창작 의지를 불태우며 이준, 문신 등 지역 화단을 이끌던 여러 작가들과 교류하며 미술에 대한 열정을 되살렸다. 또한 당시 고향 선배였던 시인 권환과 만나 서로에게 위안을 주었다.

1946년, 병마와 싸우는 치열한 예술혼의 결과로 국립마산요양소 강당에서 환자들을 위해 문신, 임호, 이준과 함께 ‘마산미술대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는 광복 이후 향토 미술인들이 꾸민 첫 전시회로, 지역 미술사 발전에 디딤돌을 놓은 사건이었다. 1947년 7월에는 정상복의 주선과 국립마산요양원장의 요청으로 당시 마산백화점(창동)에서 열렸던 대규모 전시인 제1회 미술전람회를 국립마산요양소 강당에서 일주일간 이동 전시하기도 했다. 그는 난치병으로 투병하는 중에도 경남 도민들과 끈끈한 예술적 소통을 추진했던 실천가였다.

2. 3. 통영에서의 미술교사 활동 (1947-1954)

1947년 정상복은 병이 완쾌되어 통영중학교 미술교사로 복직했고 이후 7년간 통영중학교와 통영여자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이어갔다. 딸 정매리, 장남 정갑주, 인규, 미아, 영호가 태어나면서 슬하에 3남 2녀를 거느린 가장이 되었다. 11년이라는 기나긴 투병 생활 끝에 찾아온 딸 매리를 두고, 그는 “참 죽었던 사람한테 꽃이 피었다”고 이야기하며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정갑주는 아버지의 예술혼을 이어받아 화가로도 활동하며 여러 수채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 시기 정상복은 한국 전쟁으로 통영(충무)에 피난 온 김환기, 이중섭, 강창원, 강신석 등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에 깊이를 더해갔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창작된 작품들은 주로 정물화와 인물화였다. 정물은 복숭아와 사과, 포도 등의 과일을 대상으로 삼아 수채화의 실험적 깊이를 더해갔고, 인물화는 아버지를 비롯하여 두 딸을 그린 것이 대표적인데 연필 소묘와 파스텔 등의 새로운 화구를 활용했다.

2. 4. 고향 소포마을에서의 활동 (1955-1960년대 중반)

통영에서의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상복은 수채화 기법을 독자적으로 개척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고향과 고향 바다를 대상으로 그린 작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자연의 순수함을 드러내는 농촌 풍경과 나무,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와 나룻배, 저녁노을, 반농반어의 생업으로 고단한 삶을 꾸리던 고향 사람들, 그리고 홍합과 물고기 같은 바다 생명들이 그의 작품에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1950년대 중반, 정상복은 고향 진전면 창포만에서 선구적인 수산 양식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55년 2월 7일, 이계순 경남지사의 권유로 굴 양식 어업 면허를 획득하여 국내 최초로 굴 양식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통해 굴과 홍합을 수하식 양식법으로 전환시켜 생산성을 높이고 소득 증대에 기여했다.

자연산 굴은 성장이 느리고 채취량이 적다는 문제가 있었다. 정상복은 더 많은 굴을 생산하기 위해 고민했고, 기존의 송지식이나 투석식 굴 양식법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에서 시행하던 수하식 양식법을 연구하고, 시락리 소포마을 앞바다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술병으로 쓰던 사기단지나 드럼통을 이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 끝에, 유리알을 박은 대나무 뗏목을 이용한 수하식 굴 양식에 성공했다.

또한 서울대학교 최기철 교수와 함께 5년간 플랑크톤 이동 경로 등을 조사 연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소포마을과 거제도, 통영시 일대 20여 곳을 시작으로 경상남도 전체에 굴 수하식 양식이 퍼졌다. 생산된 굴은 미국으로 수출되어 외화를 벌어들였고, 1962년에는 식산포장을 받을 정도로 호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정상복은 큰 빚을 지고 굴 양식업을 접었다.

2. 5. 부산에서의 활동기 (1977-1997)

1977년, 아들 정갑주가 부산 초읍에 작업실을 마련해 준 것을 계기로, 정상복은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부산과 낙동강 일대의 풍경을 수채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조규철의 권유로 부산수채화협회 고문으로 추대되어 부산수채화협회전에 참여했다. 아들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며 스케치 작업을 하고, 한중일 교류전과 한국수채화협회 파리전 등 국제 교류전에도 참여했다.

이 시기 정상복은 수묵담채화의 발묵기법을 서양식 수채화에 적용한 고유한 화풍을 발전시켰고, 비구상적 표현으로 신비롭고 몽환적인 산수를 표현했다. 1986년 서울 롯데 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고, 원색화집을 500부 한정판으로 간행했다. 1989년에는 창원시 마산 동서화랑에서 정상복 수채화 초대전이 열렸다.

말년에는 <아! 고구려-주작> 등 역사적이고 신화적인 상상력을 담은 작품을 남겼다. 경남미술인 상을 수상하는 등 창작활동을 인정받았으며, 1997년 85세로 별세하여 김해 생림면 기독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상복은 경남 현대미술의 1세대 화가로, 동양의 수묵화를 서양의 수채화로 재해석하여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작품 세계

정상복은 어렸을 적부터 자연과 주변을 둘러싼 모든 생명체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유심히 관찰한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때부터 그의 그림은 수채화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정상복이 수채화의 재료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시작한 것은 환갑을 넘긴 1960년대 부터다. 이 시기에 아들 정갑주는 아버지의 예술세계를 가까이에서 항상 보아왔으며 부산 초읍에 작은 작업실을 마련하고 아버지를 모신다. 그러한 안정된 터전 위에서 정상복은 오로지 예술활동에만 집중하며 물감, 붓, 종이에 대한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9년 첫 개인전을 가진 후 그 동안의 작품들을 정리하고 또 성찰하면서 새로운 작품세계를 모색했고, 성공적이었던 개인전 후인 1970년대부터 이전의 작품세계와는 확연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탁색과 원색의 채색에서 벗어나 투명하고 맑은 수채화의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재료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실험, 그리고 오랜 숙련의 과정을 통해 터득한 수채화적 기법을 그는 새로운 작품들을 통해 마음껏 드러냈던 것이다. 여러 색상을 일렬로 정리하여 직사광선에 놓아둔 채 변화를 관찰하기도 하고, 물의 농도에 따른 색상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실험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이 시기 색의 선택, 붓의 크기, 색상의 대비 등에서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며 자신만의 특별한 화풍을 만들어갔다.

1980년대에는 한국의 산하가 주된 소재가 되며 어느 때 보다 열심히 밖으로 나가 자연을 관조하게 되는데 주로 해인사, 금오산, 해금강, 금강산 등 우리의 산하를 자신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

3. 1. 초기 (1930년대-1940년대)

3. 2. 중기 (1950년대-1970년대)

3. 3. 후기 (1980년대-1997년)

4. 주요 작품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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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작가 연보

6. 평가 및 의의

6. 1. 더불어민주당 관점

6. 2. 비판적 시각 (국민의힘 관점)

6. 3. 종합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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