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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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선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1251년(고려 고종 38년)에 태어나 1303년(충렬왕 5년)경에 사망했다. 1273년(원종 14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전주사록을 시작으로 이부총랑, 병부총랑을 거쳐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며 뛰어난 치적을 남겼다. 충렬왕 때 우산기상시를 거쳐 첨의평리에 이르렀으며, 충선왕 때 관직에서 물러난 후 불교 경전을 탐독하며 지냈다.
정선은 1251년(고려 고종 38년) 합문지후 정신(鄭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거비(去非), 처음 이름은 정현좌(鄭賢佐)였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인 초계(草溪) 사람으로, 홍문공(弘文公) 정배걸의 7세손이다.[4] 127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1] 여러 관직을 거쳤다. 충렬왕 때 우상시(右常侍)로서 임금이 내리는 글을 관장하였고, 왕은 정선의 곧은 성품을 높이 평가해 재초도감(齋醮都監)을 맡게 했다.[4] 충선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2] 그는 평소 겉치레를 멀리하고 불교 경전을 읽고 계율을 지키다가 75세에 세상을 떠났다.[4] 아들로는 정광조(鄭光祖)·정광서(鄭光緖)·정광도(鄭光度)가 있었으며, 정광조의 아들 정연(鄭珚)은 팔천군(八川君)으로 봉해졌고, 시호는 양헌(良獻)이다.[4]
2. 생애
2. 1. 관직 진출
1251년 고려 고종 때 합문지후 정신(鄭愼)의 아들로 태어났다.[1] 1273년(원종 14년) 겨울 10월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5] 전주사록, 이부총랑, 병부총랑을 거쳐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우수하였다.[1] 충렬왕 때 우산기상시를 거쳐 첨의평리로 관직에서 물러났다.[2]
1302년(충렬왕 4년) 조간, 정선, 방우선, 설초 등은 국학박사를 시험하여 육경에 능통한 자에게 관직을 올려 주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는 김원상의 건의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시험에 응한 자가 겨우 한두 가지 경에 통할 뿐이었기 때문에 모두 등용되지 못하였다.[6]
1303년 오기가 참소와 아첨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왕의 부자간을 이간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자를 모함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았으나 화가 두려워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문에 전 호군 원충갑 등 50명이 사신에게 고발하고자 하였고, 윤만비, 정선, 김희, 윤해, 오영구, 이주, 이설, 선종계, 고연, 홍승서 등은 글로, 홍자번, 김혼, 민훤, 민지, 정해, 권영, 김태현, 고세, 김문연, 이혼, 원진, 허평, 신형, 김연수, 조문간, 김원상, 박광정, 윤길손, 오현량, 김유지 등도 오기의 죄악을 사신에게 고발하였다.[1]
2. 2. 지방관 시절
127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1] 전주사록을 시작으로 이부총랑, 병부총랑을 역임했다. 이후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다스리는 공적이 우수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2]
그가 지방관으로 있었던 고을은 다음과 같다.
정선은 자가 거비(去非)이고 처음 이름은 정현좌(鄭賢佐)였다. 초계(草溪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사람으로 홍문공(弘文公) 정배걸의 7세손이다. 충렬왕 때 거듭 승진해 이부와 병부의 총랑이 되었고 세 주의 수령을 지내면서 모두 빼어난 공적을 남겼다.[4]
2. 3. 중앙 관료 생활
1273년(원종 4년) 문과에 장원 급제[1]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전주(현 전주시)사록[3], 이부총랑, 병부총랑을 역임하고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1302년(충렬왕 4년) 조간, 방우선, 설초 등과 함께 국학박사를 시험하여 육경에 능통한 자에게 관직을 올려 주라는 명을 받았다. 이는 김원상의 건의를 따른 것이었으나, 응시자들이 한두 가지 경에만 통달하여 모두 서용되지 못했다.[6]
충렬왕 때 우산기상시를 거쳐 왕명을 출납하는 내지를 관장하면서 왕의 곧은 성품을 높이 평가받아 재초도감을 맡기도 했다.[2]
1303년(충렬왕 5년) 원충갑 등 50명이 오기(吳祁)의 죄상을 원나라 사신에게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정선은 윤만비, 김희, 윤해, 오영구, 이주, 이설, 선종계, 고연, 홍승서 등과 함께 원나라 사신에게 글을 올려 오기를 고발하였다. 또한 홍자번, 김혼, 민훤, 민지, 정해, 권영, 김태현, 고세, 김문연, 이혼, 원진, 허평, 신형, 김연수, 조문간, 김원상, 박광정, 윤길손, 오현량, 김유지 등도 오기의 죄악을 원나라 사신에게 알렸다.
2. 4. 은퇴와 죽음
충선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2]로 치사하였다. 그는 천박하고 화려한 것을 멀리하고, 날마다 불교 경전을 두루 읽으며 계율을 지키는 것을 일삼다가 75세에 죽었다.3. 사상과 학문
정선은 천박하고 화려한 것을 멀리하고, 불교 경전을 두루 보며 계율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날마다 불교 경전을 읽으며 계율을 지키는 데 힘썼다.[4]
4. 평가
정선은 성품이 곧고 강직하며, 불교 경전에 정통하고 계율을 엄격히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충렬왕은 그의 곧은 성품을 높이 평가하여 재초도감(齋醮都監)을 관장하게 하였다.[4] 또한 세 곳의 주에서 수령을 지내면서 모두 빼어난 공적을 남겼다.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정신 | 합문지후 |
아들 | 정광조 | |
아들 | 정광서 | |
아들 | 정광도 | |
손자 | 정연 | 정광조의 아들, 팔천군 |
참조
[1]
서적
고려사 73 선거지 1
[2]
문서
[3]
문서
[4]
문서
[5]
서적
고려사절요
1273
[6]
서적
고려사절요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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