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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아베 신조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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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은 2006년 9월 26일 아베 신조가 총리로 선출되면서 출범했다. 아베 신조는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를 내세우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구조개혁 정책을 계승하고 교육기본법 개정, 방위성 승격, 헌법 개정 절차에 관한 국민투표법 제정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각료들의 잇따른 실언과 불상사, 연금 기록 문제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했고, 2007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후 아베 신조는 내각을 개편했지만, 지지율 회복에 실패했고, 결국 건강 문제를 이유로 2007년 9월 26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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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아베 신조 내각
내각 정보
내각 이름제1차 아베 내각
내각 번호90대
관할일본
국기[[File:Flag of Japan.svg|일본의 국기]]
존속 기간2006년 9월 26일 – 2007년 9월 26일
[[아베 신조]] 총리 (앞줄 중앙)와 새로 선출된 내각, [[총리 관저]], 2006년 9월 26일
총리 아베 신조(앞줄 중앙)와 새로 선출된 내각, 총리 관저, 2006년 9월 26일
출범일2006년 9월 26일
해산일2007년 9월 26일
정부 수반아베 신조
국가 원수아키히토 천황
정당자민당공명당 연립
입법부 현황중의원: 자민당-공명당 연립 과반수 의석
참의원: 자민당-공명당 연립 과반수
야당민주당 (일본)
야당 대표오자와 이치로
선거2007년 참의원 선거
임기제172회 국회
이전제3차 고이즈미 내각
이후후쿠다 야스오 내각
기타 정보
일본어 표기(다이이치지 아베 신조 나이카쿠)
한자 표기第1次安倍内閣

2. 아베 신조 총리 선출 과정

아베 신조는 1993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정치 경력을 쌓아왔다. 1999년에는 자유민주당의 보건복지위원회 이사 및 사회부 이사로 활동했고,[4] 2003년에는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선출되었으며, 2년 후 내각관방장관이 되었다.

2006년 9월 26일, 아베는 일본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되었다. 중의원참의원 양원 모두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었다.[4] 아베는 전후 출생한 최초의 일본 총리였다.[4]

아베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뒤를 이었다.

2. 1. 중의원 투표 결과

중의원선택1차 투표득표수width="1" bgcolor="green"|아베 신조bgcolor="red"|오자와 이치로출처


2. 2. 참의원 투표 결과

2006년 9월 26일
선택득표수
아베 신조
오자와 이치로
출처


3. 제1차 아베 신조 내각 (2006.9.26.~2007.8.27.)

아베 신조 총리는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내각’(美しい国づくり内閣일본어)을 표방하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구조개혁 정책을 가속화·강화하겠다고 밝혔다.[11] 경제계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언론에서는 200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를 지지한 의원들을 우대한 ‘논공행상 내각’이라고 비판했다.[11] 이에 아베 총리는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택했다”고 반박했다.[11]

자민당 내에서는 각료 경험이 없는 시오자키 야스히사를 내각관방장관에 기용한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아베는 신인 의원 시절부터 정책 집단에서 함께 활동해 온 시오자키를 발탁하고 납치 문제 담당 대신을 겸임하게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외무대신에는 총재 선거에서 경쟁했던 아소 다로를 재임명했지만, 또 다른 경쟁자였던 타니가키 사다카즈 (전 재무대신), 타니가키파 의원은 입각하지 못했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에서는 전 내각과 마찬가지로 후유시바 데쓰조 (당 상임 고문)를 국토교통대신에 기용했다.

내각총리대신 관저에서 활동하는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을 기존 2명에서 5명으로 늘리고, 일본판 NSC의 초안이 되는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관저 기능 강화 회의를 설치하여 관저 기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내각총리대신과 다른 대신들의 관계를 맺는 내각관방장관 및 내각관방 부장관 3명과 내각총리대신 보좌관 5명의 역할 분담이 불명확해져, 제1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는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이 5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아베 자신도 "유감스럽게도 기능했다고는 할 수 없네요"[6]라고 인정했다.

관례를 깨고 관료의 실질적인 수장인 내각관방 부장관(사무)에 대장성 출신 마토바 준조를 기용한 것도 특징이다.

3. 1. 주요 슬로건 및 표어

3. 2. 내각 구성 및 특징

아베 신조 총리는 내각의 이름을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내각’으로 정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구조개혁 정책을 가속화하고 강화하는 방침을 표명했다. 경제계에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지만, 언론에서는 2006년의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를 지지한 의원들을 우대한 ‘논공행상 내각’이라고 평했다. 아베 총리는 이에 대해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택했다”고 답했다.[11]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에 대해서는 그 담당을 괄호 안에, 내각부 이외의 다른 성청(내각관방 포함)의 특명사항을 담당하는 국무대신의 직무는 꺾은 괄호(〈〉) 안에 기술하였다.

내각총리대신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 보좌관국가안전보장문제 담당: 고이케 유리코 ( ~ 2007년 7월 4일)
경제재정 담당: 네모토 다쿠미
북조선에 의한 납치문제 담당: 나카야마 교코
교육재생 담당: 야마타니 에리코()
홍보 담당: 세코 히로시게()
총무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지방분권 개혁 담당)
〈우정민영화 담당〉
스가 요시히데
법무대신나가세 진엔
외무대신아소 다로
재무대신오미 고지
문부과학대신
국립국회도서관 연락조정위원회 위원
이부키 분메이
후생노동대신야나기사와 하쿠오
농림수산대신마쓰오카 도시카쓰 ( ~ 2007년 5월 28일)
아카기 노리히코 (2007년 6월 1일 ~ 8월 1일)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환경대신 겸임, 2007년 8월 1일 ~ )
경제산업대신아마리 아키라
국토교통대신
〈관광입국 담당〉
후유시바 데쓰조
환경대신
〈지구환경문제 담당〉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방위대신규마 후미오 ( ~ 2007년 7월 3일)
고이케 유리코 (2007년 7월 4일 ~ )
내각관방장관
〈납치문제 담당〉
시오자키 야스히사
내각관방 부장관시모무라 하쿠분
스즈키 세이지()
마토바 준조
내각위기관리감: 노다 다케시
내각법제국 장관미야자키 레이이치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방재담당)
미조테 겐세이()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오키나와 및 북방대책, 과학기술정책, 이노베이션, 저출산·남녀공동참여, 식품안전 담당)다카이치 사나에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금융담당)
〈재도전 담당〉
야마모토 유지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경제재정정책 담당)오타 히로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규제개혁 담당)
〈국가·지방행정개혁, 공무원제도개혁, 지역활성화, 도주제 담당〉
사다 겐이치로 ( ~ 2006년 12월 28일)
와타나베 요시미 (2006년 12월 28일 ~ )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취임 예정 순위는 제1순위 시오자키 야스히사, 제2순위 아소 다로, 제3순위 야나기사와 하쿠오, 제4순위 규마 후미오, 제5순위 오미 고지였다.

스가 요시히데 총무대신의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지방분권개혁 담당)직은 2006년 12월 15일에 발령되었다. 방위대신직은 2007년 1월 9일에 설치, 발령되었으며 구 직명은 방위청 장관이었다.

아베는 2006년 9월 26일에 내각을 발표했다.[4] 자유민주당 내 최대 파벌인 모리 파벌이 가장 많은 임명을 받았다.

각료 경험이 없는 시오자키 야스히사의 내각관방장관 기용에는 자민당 내에서도 우려가 있었지만, 아베는 신인 의원 시절부터 정책 집단에서 함께 활동해 온 시오자키를 발탁하여 납치 문제 담당 대신을 겸임하게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외무대신에는 총재 선거에서 대립 후보였던 아소 다로를 재임명했지만, 또 다른 대립 후보였던 타니가키 사다카즈 (전 재무대신), 타니가키파 의원은 입각하지 못했다. 연립을 맺은 공명당에서는 전 내각과 같은 국토교통대신 자리에 후유시바 테츠조 (당 상임 고문)를 기용했다.

내각총리대신 관저에서 활동하는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을 기존 2명에서 5명 체제로 증원하고, 일본판 NSC의 초안이 되는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관저 기능 강화 회의를 설치하여 관저 기능을 강화하려 했지만, 내각총리대신과 기타 대신들과의 관계를 맺는 내각관방장관 및 내각관방 부장관 3명과 내각총리대신 보좌관 5명과의 분담 관계가 불명확해져, 제1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는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은 5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아베 자신도 "유감스럽게도 기능했다고는 할 수 없네요"[6]라고 말했다.

내각의 관례를 깨는 수법으로 관료의 실질적인 수장인 내각관방 부장관(사무)에 대장성 출신 마토바 준조를 기용했다.

이 조각과 관련하여 경제계에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매스 미디어에서는 2006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를 지지한 의원을 우대했다는 점에서 "논공행상 내각" 혹은 "측근 내각" 등으로 비난을 받았다.[7][8]。이에 대해 아베는 "결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7]

3. 3. 내각의 주요 활동 및 정책

아베 신조 내각은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내각’(美しい国づくり内閣일본어)을 표방하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구조개혁을 가속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경제계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언론은 200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를 지지한 의원들을 우대한 ‘논공행상 내각’이라고 비판했다. 아베 총리는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택했다”고 반박했다.[11]

아베 내각은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각'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다음과 같은 구호를 사용했다.

3. 3. 1. 주요 법안

성립일법률 이름
2006년 12월 15일교육 기본법 개정
2006년 12월 15일방위청 설치법 등 개정 (방위청·성 승격법)
2006년 12월 20일대부업법 개정 (대부업의 규제 등에 관한 법률 등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
2007년 4월 19일해양 기본법 제정
2007년 5월 14일일본국 헌법의 개정 절차에 관한 법률 (국민투표법) 제정
2007년 5월 15일이라크 부흥 지원 특별 조치법 개정
2007년 5월 25일아동 학대 방지법 개정
2007년 5월 25일파트타임 노동법 개정
2007년 6월 27일학교 교육법, 교육 직원 면허법, 교육 공무원법, 지방 교육 행정의 조직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 (교육 개혁 관련 3법)
2007년 6월 30일일본 연금 기구법, 국민 연금법 개정 (사회 보험청 개혁 관련법)
2007년 6월 30일후생 연금 보험의 보험 급부 및 국민 연금의 급부에 관한 시효의 특례 등에 관한 법률 (연금 시효 철폐 특례법) 제정
2007년 6월 30일국가 공무원법 개정 (공무원 제도 개혁 관련법)


3. 4. 내각의 문제점 및 비판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은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와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피"를 표방하며 출범했지만, 여러 문제점과 비판에 직면했다.
각료들의 불상사와 실언:

2006년 12월 사다 겐이치로 행정개혁 담당 대신의 사무소비 문제를 시작으로, 여러 각료들의 불상사와 실언이 이어졌다. 마쓰오카 도시카쓰, 아카기 도쿠히코 농림수산대신의 사무소비 문제와 구마 후미오 방위대신의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다"는 발언 등으로 인해 각료 4명이 교체되었다.[9]

발생 시기관련 각료직책문제 내용
2006년 12월혼마 마사아키내각부 세제조사회 회장공무원 관사 명의를 아내 이름으로 하고 애인과 동거, 사임
2006년 12월사타 겐이치로규제개혁 담당 대신존재하지 않는 사무실에 10년간 총 7,800만 엔 경비 지출 허위 보고, 사임
2007년 1월이부키 분메이문부과학대신사무실 임대료가 없는 의원회관에 약 900만 엔 사무실 비용 지출
2007년 1월야나기사와 하쿠오후생노동대신"여성은 아이를 낳는 기계" 발언 논란
2007년 6월구마 후미오방위대신"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다" 발언, 사임


사회보험청 연금 기록 누락 문제:

사회보험청의 연금 기록 누락 문제[9]는 국민들의 불신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문제들은 내각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언론 NPO의 2007년 1월 조사에서 지지율은 24.0%에 불과했으며, 70% 이상이 "기대 이하",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9] 결국 2007년 7월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여당은 과반수 미만의 참패를 겪었다.

4. 제1차 아베 신조 개조 내각 (2007.8.27.~2007.9.26.)

지방분권개혁 담당 대신
지역격차 시정 담당 대신
지방자치 담당 대신 (도슈세이)
우정 민영화 담당 대신마스다 히로야법무대신하토야마 구니오외무대신마치무라 노부타카재무대신누카가 후쿠시로문부과학대신이부키 분메이후생노동대신마스조에 요이치농림수산대신엔도 다케히코와카바야시 마사토시경제산업대신아마리 아키라국토교통대신
해양정책 담당 대신후유시바 테츠조환경대신
지구 환경 문제 담당 대신가모시타 이치로방위대신고무라 마사히코내각관방장관
납치문제 담당 대신요사노 가오루국립공안위원회 위원장
방재 담당 대신 및 식품 안전 담당 대신이즈미 신야오키나와북방 영토 문제 담당 대신
삶의 질 정책 담당 대신
과학기술 정책 담당 대신
"재도전" 구상 담당 대신
규제 개혁 담당 대신기시다 후미오금융 서비스 및 행정 개혁 담당 대신와타나베 요시미경제재정 정책 담당 대신오타 히로코남녀공동참획 및 사회 담당 대신가미카와 요코부대신부내각관방장관 (정무 – 중의원)오노 마쓰시게부내각관방장관 (정무 – 참의원)이와키 미쓰히데부내각관방장관 (관료)소토바 준조



개각 이후에도 엔도 다케히코 농림수산대신이 정치자금 문제로 사임하는 등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며, 아베 내각은 위기를 겪게 된다.

4. 1. 개각 배경

2007년 7월 29일에 실시된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여당인 자민당공명 연립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특히 자민당은 참의원에서 제1당 지위를 민주당에게 내주며 큰 타격을 입었다.[1] 이러한 참패는 아베 신조 내각의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고,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선거 참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각료들의 잇따른 불상사와 연금 기록 문제였다.[1] 이로 인해 국민들의 불신이 커졌고, 아베 내각은 지지율 회복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이에 따라 내각 개편을 통해 분위기를 쇄신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등용하여 국면 전환을 꾀하고자 하였다.

4. 2. 주요 인사

지방분권개혁 담당 대신
지역격차 시정 담당 대신
지방자치 담당 대신 (도슈세이)
우정 민영화 담당 대신마스다 히로야-2007년 8월 27일 – 2008년 9월 24일법무대신하토야마 구니오유임2007년 8월 27일 – 2008년 8월 2일외무대신마치무라 노부타카유임2007년 8월 27일 – 2007년 9월 26일재무대신누카가 후쿠시로유임2007년 8월 27일 – 2008년 8월 2일문부과학대신이부키 분메이유임2006년 9월 26일 – 2007년 9월 26일후생노동대신마스조에 요이치첫 입각2007년 8월 27일 – 2009년 9월 26일농림수산대신엔도 다케히코유임2007년 8월 27일 – 2007년 9월 3일와카바야시 마사토시첫 입각[1]2007년 9월 3일 – 2008년 8월 2일경제산업대신아마리 아키라유임2006년 9월 26일 – 2008년 8월 2일국토교통대신
해양정책 담당 대신후유시바 테츠조유임2006년 9월 26일 – 2008년 8월 2일환경대신
지구 환경 문제 담당 대신가모시타 이치로유임2007년 8월 27일 – 2008년 8월 2일방위대신고무라 마사히코유임2007년 8월 27일 – 2007년 9월 26일내각관방장관
납치문제 담당 대신요사노 가오루유임2007년 8월 27일 – 2007년 9월 26일국립공안위원회 위원장
방재 담당 대신 및 식품 안전 담당 대신이즈미 신야첫 입각2007년 8월 27일 – 2007년 9월 26일오키나와북방 영토 문제 담당 대신
삶의 질 정책 담당 대신
과학기술 정책 담당 대신
"재도전" 구상 담당 대신
규제 개혁 담당 대신기시다 후미오유임2007년 8월 27일 – 2007년 9월 26일금융 서비스 및 행정 개혁 담당 대신와타나베 요시미유임2007년 8월 27일 – 2008년 9월 24일경제재정 정책 담당 대신오타 히로코-2006년 9월 26일 – 2008년 9월 24일남녀공동참획 및 사회 담당 대신가미카와 요코유임2006년 9월 26일 – 2008년 9월 24일부대신부내각관방장관 (정무 – 중의원)오노 마쓰시게유임2007년 8월 27일 – 2007년 9월 26일부내각관방장관 (정무 – 참의원)이와키 미쓰히데첫 입각2007년 8월 27일 – 2008년 9월 24일부내각관방장관 (관료)소토바 준조-2006년 9월 26일 – 2007년 9월 26일


4. 3. 개각의 특징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한 후, 아베 신조 총리는 국정 운영의 안정을 위해 경험 많은 중진 의원들을 내각에 기용하였다.

가미카와 요코를 남녀공동참획 및 사회 담당 대신으로 임명하는 등 여성 각료를 중용한 점도 특징이다.[1]

4. 4. 개각 이후

2007년 8월 27일 단행된 내각 개조 이후에도, 아베 신조 내각은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엔도 다케히코 농림수산대신은 취임 직후 정치자금 문제로 2007년 9월 3일 사임했고,[3] 그의 전임자였던 와카바야시 마사토시가 다시 농림수산대신을 맡게 되었다.[3]

1월 10일에는 이부키 분메이 문부과학대신의 자금 관리 단체가 의원회관을 소재지로 하면서도 약 900만 엔의 사무실 비용을 지출한 사실이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 1월 27일에는 야나기사와 하쿠오 후생노동대신이 "여성은 아이를 낳는 기계"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여론의 비판을 받았고, 야당은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3월 5일에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마쓰오카 농림수산대신(자살)의 자금 관리 단체가 난방비가 무료인 의원회관에 사무실을 두고 있음에도 500만 엔의 난방비를 계상한 사실이 드러났다.

6월 30일에는 구마 후미오 방위대신(당시)이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다"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7월 3일, 이 발언으로 인해 구마는 방위대신을 사임했고, 고이케 유리코가 후임 방위대신이 되었다. 7월 7일에는 아카기 노리히코 농림수산대신의 정치 단체가 사무실 실체가 없는 부모님 댁을 주된 사무실로 하고 약 9045만 엔을 경비로 계상한 사실이 밝혀졌다.

8월 1일, 아카기 농림수산대신이 사무실 비용 문제로 사임하고,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환경대신이 농림수산대신을 겸임하게 되었다. 8월 24일에는 고이케 유리코 방위대신이 이지스함 정보 유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아베 내각의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고, 결국 아베 총리는 건강 문제를 이유로 2007년 9월 26일 총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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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The Japan Society – Utsukushii Kuni E (Toward a Beautiful Country) https://www.japansoc[...] 2022-12-08
[3] 뉴스 Explainer: What do we know about the health of Japan's Shinzo Abe? https://www.reuters.[...] 202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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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뉴스 요미우리 신문 200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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