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
1. 개요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1942년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인이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유학했으며, 1972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여러 차례 당선되어 후생대신, 우정대신 등을 역임했다. 2001년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어 내각총리대신에 취임, 2006년까지 재임하며 우정 민영화를 비롯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퇴임 후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탈핵 정책을 지지하는 등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을 이어갔다.
| 이름 | 고이즈미 준이치로 |
|---|---|
| 원어 이름 | 小泉 純一郎일본어 |
| 로마자 표기 | Junichiro Koizumi |
| 가나 표기 | こいずみ じゅんいちろう |
| 한자 표기 | 小泉純一郎 |
| 한국어 표기 (남) | 고이즈미 준이치로 |
| 한국어 표기 (북) | 코이즈미 준이치로 |
| 출생일 | 1942년 1월 8일 |
| 출생지 |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
| 배우자 | 고이즈미 가요코 (1978년 - 1982년, 이혼) |
| 자녀 | 고이즈미 고타로 (장남) 고이즈미 신지로 (차남) 미야모토 요시나가 (삼남) |
| 부모 | 고이즈미 준야 (아버지), 고이즈미 요시에 (어머니) |
| 친척 | 고이즈미 마타지로 (할아버지) |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
| 당내 계파 | 모리파 → 무파벌 |
| 학력 |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 학사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
| 전직 | 후쿠다 다케오 국회의원 비서 |
| 칭호 및 훈장 | 경제학사 (게이오기주쿠 대학, 1967년)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직책 | 내각총리대신 |
|---|---|
| 재임 기간 | 2001년 4월 26일 ~ 2006년 9월 26일 |
| 재임 내각 |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1차 고이즈미 제1차 개조 내각 제1차 고이즈미 제2차 개조 내각 제2차 고이즈미 내각 제2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 제3차 고이즈미 내각 제3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 |
| 천황 | 상황 (아키히토) |
| 전임 총리 | 모리 요시로 |
| 후임 총리 | 아베 신조 |
| 직책 | 농림수산대신 |
|---|---|
| 재임 기간 | 2005년 8월 8일 ~ 2005년 8월 11일 (총리 겸임) |
| 직책 | 외무대신 |
| 재임 기간 | 2002년 1월 30일 ~ 2002년 2월 1일 (총리 겸임) |
| 직책 | 후생대신 |
| 재임 기간 | 1988년 12월 27일 ~ 1989년 8월 10일 |
| 재임 기간 | 1996년 11월 7일 ~ 1998년 7월 30일 |
| 내각 | 다케시타 개조 내각 우노 내각 제2차 하시모토 내각 제2차 하시모토 개조 내각 |
| 직책 | 우정대신 |
| 재임 기간 | 1992년 12월 12일 ~ 1993년 7월 20일 |
| 내각 | 미야자와 개조 내각 |
| 직책 | 중의원 의원 |
|---|---|
| 선거구 | 구 가나가와 2구 가나가와 11구 |
| 당선 횟수 | 12회 |
| 재임 기간 | 1972년 12월 10일 ~ 2009년 7월 21일 |
| 전임 | 다수 선거구 |
| 후임 | 고이즈미 신지로 |
| 직책 | 자유민주당 총재 |
|---|---|
| 재임 기간 | 2001년 4월 24일 ~ 2006년 9월 20일 |
| 부총재 | 야마자키 다쿠 |
| 간사장 | 와타누키 다미스케 아베 신조 다케베 쓰토무 |
| 전임 총재 | 모리 요시로 |
| 후임 총재 | 아베 신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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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가 -
고이즈미 준야
고이즈미 준야는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입헌민정당에서 정계에 입문하여 자유민주당 요직을 거쳐 법무정무차관과 방위청 장관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으로, 그의 삶과 정치적 입장은 논쟁적인 평가를 받는다. -
고이즈미가 -
고이즈미 신지로
고이즈미 신지로는 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아들이자 일본 정치인으로, 중의원 의원, 자유민주당 주요 직책, 환경대신을 역임하며 활동했고 신자유주의적 경제관과 환경·젠더 문제에 대한 입장을 보였으며, 2024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 -
일본 외무성 -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는 조선인 도공 후손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만주, 스위스, 독일, 소련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소일 중립 조약 체결에 기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무대신으로서 미일 관계 개선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전범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며, 종전 과정에서 포츠담 선언 수용을 주장하여 일본 항복에 기여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
일본 외무성 -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신, 참모총장,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진주만 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일본의 농림수산대신 -
하타 쓰토무
하타 쓰토무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농림수산대신, 대장대신 등을 거쳐 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자민당을 탈당 후 신생당을 창당, 정치 개혁에 힘썼으나 짧은 수상 임기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
일본의 농림수산대신 -
가노 미치히코
가노 미치히코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운수성 정무차관, 농림수산대신 등을 지냈고, 여러 정당을 거쳐 간 나오토 내각과 노다 요시히코 내각에서 농림수산성 장관을 세 차례 역임했으며, 농림수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2. 성장 배경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1942년 1월 8일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고이즈미 준야와 요시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준야는 방위청 장관과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고, 외할아버지 고이즈미 마타지로는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우정대신을 지냈으며, 젊은 시절 온몸에 문신을 새겨 "문신 장관"으로 불렸다.
요코스카시 야마자키 소학교, 요코스카시 마보리 중학교를 거쳐 1960년 3월 가나가와현립 요코스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도쿄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2년간 재수했으나,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 유학했으나, 1969년 8월 아버지의 급사로 귀국했다. 공식 프로필에는 유학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청강생으로 학점 취득은 없었다.
1969년 12월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70년 중의원 의원 후쿠다 다케오(후에 수상)의 비서가 되었다. 1972년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공인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계속 당선되었다.
3. 정치 경력
1942년 1월 8일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의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7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9년까지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유학했다. 1969년 부친상을 당해 귀국, 같은 해 12월 27일 제32회 중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1970년 후에 총리가 되는 후쿠다 다케오 중의원 의원의 개인비서로 들어갔다.
1972년 12월 10일 제33회 중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첫 당선되었으며, 이후 계속 당선되었다. 세이와카이(후쿠다파)에 소속되었으며, 야마자키 타쿠, 가토 고이치와 친분을 쌓아 YKK(정치동맹)로 불리게 되었다. 1979년 11월 제2차 오히라 내각에서 대장정무차관에 취임했다.
1988년 다케시타 개조내각에서 후생대신으로 첫 입각했다. 1989년 우노 정권에서도 후생대신에 취임했다. 1992년 미야자와 개조내각에서 우정대신에 취임했다.
1994년, 자민당이 야당이었을 때 고이즈미는 야마사키 다쿠, 가토 고이치와 함께 신세기(新世紀)라는 새로운 자민당 파벌에 참여했으며, 이 그룹은 "YKK"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95년 9월과 1998년 7월에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하시모토 류타로와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2000년 YKK의 다른 멤버들이 모리 요시로 수상에 대한 불신임 투표 시도에 실패하면서, 고이즈미는 당내 개혁 지향적 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2001년 4월 24일, 고이즈미는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3.1. 중의원 의원 시절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1942년 1월 8일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의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7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9년까지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유학했다. 1969년 부친상을 당해 귀국, 같은 해 12월 제32회 중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1970년 후쿠다 다케오 중의원 의원의 개인비서로 들어갔다.
1972년 12월 10일, 제33회 중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첫 당선되었으며, 이후 계속 당선되었다. 세이와카이(후쿠다파)에 소속되었으며, 야마자키 타쿠, 가토 고이치와 친분을 쌓아 YKK(정치동맹)로 불리게 되었다. 1979년 11월, 제2차 오히라 내각에서 대장정무차관에 취임했다.
1988년 다케시타 개조내각에서 후생대신으로 첫 입각했다. 1989년 리쿠르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정권이 붕괴되고, 이어지는 우노 정권도 참의원 선거 참패로 퇴진하면서 정치 불신이 고조되자, 고이즈미는 소선거구제 도입에 강하게 반대했다.
199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우노 슨키에 대항하여 야마자키 타쿠, 가토 고이치와 협력하여 "우노 잔류 저지", "경세회 지배 타도"를 내세웠다. 1992년 미야자와 개조내각에서 우정대신에 취임하여 우정민영화론에 기초, 노인 소액저축 비과세제도(마루유) 한도액 인상 등 종래의 우편저축 사업 확장 정책 재검토를 주장했지만, 반대파 의원(우정족) 등의 반발로 실패했다.
1993년, 국제연합 캄보디아 잠정기구에 파병되었던 일본 민간 경찰관이 무장 단체에 습격당해 사망자와 중경상자가 발생했을 때, 자위대 캄보디아 파병에 반대했다. 같은 해,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수를 밑돌았고, 고이즈미는 미야자와의 책임과 퇴진을 요구하며 우정대신을 사임했다.
1994년, 자민당이 야당이었을 때 고이즈미는 야마사키 다쿠, 가토 고이치와 함께 신세기(新世紀)라는 새로운 자민당 파벌에 참여했으며, 이 그룹은 "YKK"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95년 9월과 1998년 7월에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하시모토 류타로와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2000년 YKK의 다른 멤버들이 모리 요시로 수상에 대한 불신임 투표 시도에 실패하면서, 고이즈미는 당내 개혁 지향적 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2001년 4월 24일, 고이즈미는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3.2. 내각총리대신 시절 (2001년 4월 26일 ~ 2006년 9월 26일)
1942년 1월 8일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의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1967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9년까지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유학했다. 1972년 12월 10일 제33회 중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된 후, 1979년 대장성 정무차관, 1988년 후생성 대신, 1992년 우정성 대신을 역임했다.
1995년과 199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했다. 2001년 4월 24일 3번째 도전한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여, 4월 26일 제87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고이즈미는 내각 구성에서 파벌의 추천을 받지 않고 스스로 각료와 당 인사를 결정하는 '관저 주도' 방식을 확립했다. 다나카 마키코를 외무대신에, 다케나카 헤이조를 경제 재정 정책 담당 대신에 임명하는 등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구조 개혁 없이는 경기 회복 없다"는 슬로건 아래 우정 민영화를 포함한 '성역 없는 구조 개혁'을 추진했다. "Basic Policies for Economic and Fiscal Management and Reform"을 발표하여 중앙 정부의 대대적인 개편을 계획했다. 다케나카 헤이조를 금융청(FSA) 장관으로 임명하여 은행 위기를 해결하고, 우정사업 민영화를 추진했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고 이라크 전쟁에 일본 자위대를 파병했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및 핵 개발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며, 2002년 9월 17일 북한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조일평양선언에 서명했다. 2004년 5월 22일 재차 방북하여 정상회담을 통해 5명의 납치 피해자 가족 귀국을 실현했다.
2001년 8월 13일 수상 취임 후 처음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이후 매년 참배를 강행했다. 2006년 8월 15일에는 공약대로 종전 기념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2005년 7월 5일 우정 민영화 법안이 중의원 본회의에서 가결되었으나, 8월 8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헌법 7조에 의거해 중의원을 해산했다. 9월 11일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9월 21일 제89대 수상에 취임했다.
2006년 9월 26일 내각 총사퇴로 5년 5개월간의 임기를 마감했다.
3.3. 퇴임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006년 9월 26일 내각총리대신에서 물러났다. 총리 퇴임 후에는 언론 인터뷰나 텔레비전 출연 요청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연설을 하거나 언론인들과 비공개로 만난 적은 있다. 2006년 12월 15일에는 자민당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개혁가속의원연맹'의 고문에 취임했다.
고이즈미는 아베 신조와 후쿠다 야스오 정권 내내 국회의원직을 유지했지만, 아소 다로가 총리로 선출된 직후인 2008년 9월 25일에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다음 총선까지 의석을 유지했으며, 그의 아들 고이즈미 신지로가 가나가와현 제11구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13년 10월, 고이즈미는 나고야에서 기업 임원들에게 연설하며 "우리는 탈핵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재건을 상기시키며 재생에너지 기반 사회라는 꿈을 향해 국가가 단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고이즈미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원자력 발전을 지지했지만,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입장을 바꾸었다. 2013년 11월 아사히 신문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중의 54%가 고이즈미의 반핵 성명을 지지했다.
고이즈미는 2014년 2월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아베 정권의 친핵 정책에 반대하는 플랫폼으로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 호소카와는 고이즈미의 지지로 선거에 출마했지만 자유민주당이 지지한 마스조에 요이치 후보에게 패했다. 고이즈미와 호소카와는 이 패배 이후에도 협력을 계속하여 2014년 5월 반핵 포럼을 개최했다.
2016년, 고이즈미는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방사선 피폭으로 질병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오퍼레이션 토모다치 참가자들의 소송을 지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4. 주요 정책 및 업적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침체된 일본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상업 은행의 부실 채무 해결, 우정 사업 민영화, 자민당 내 파벌 구조 재편을 목표로 했으며, 미래를 개선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2001년 경제재정자문회의(CEFP)를 설치하고, "Basic Policies for Economic and Fiscal Management and Reform"을 발표하여 중앙 정부 개편을 추진했다. 2002년에는 다케나카 헤이조를 금융 서비스 담당 장관 겸 금융청(FSA) 장관으로 임명하여 은행 위기를 해결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주요 은행의 부실 채무가 감소하고 일본 경제는 회복세를 보였다. 2004년 GDP 성장률은 G7 국가 중 최고 수준이었다.
고이즈미는 자민당의 지지 기반을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시키려 했으며, 농촌 지역 보조금을 삭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은 논란을 야기했지만, 그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대중적 인기는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의 포퓰리즘적 변형"으로 평가받는다.
2005년 우정민영화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중의원을 해산하고(우정해산) 총선을 실시하여 자민당이 압승, 법안을 통과시켰다. 고이즈미가 우정민영화에 집착한 이유는 특정우체국장회와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紺谷典子(こんたに のりこ)에 따르면, 2004년 9월 자민당 내부의 여당 절차에서는 다수결을 채택하지 않고, 고성 속에 “다수로 인정합니다”라는 선언만 이루어져 “소수결”이라고 비판받았다. 이후의 절차는 중앙성청개혁법 33조 6항 “민영화 등의 재검토는 하지 않는다”를 삭제 수정하지 않고, 이에 반하여 진행되었다고 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본인은 “우정민화는 아버지 때부터의 목표였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발언에 대한 증거는 없다. 또한, 미일 구조 협의나 연차 개혁 요망서에 존재함으로써, 이 우정민영화가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가져온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이즈미의 정치 수법은 텔레비전과 언론 보도를 이용한 "연극형 정치"나 "원프레이즈 폴리틱스"라고 평가받곤 했다. 소이즈미 준이치로는 항상 자신의 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하루 두 번 총리 관저에서 총리가 기자단 앞에 서서 질문에 답하는 "붙어있는 기자회견"도 소이즈미 정권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저항 세력"이라고 부르며, 그 세력이 자민당 내에 있더라도 선거에서는 저항 세력으로 분류된 의원들의 선거구에 "암살 후보"를 적극적으로 내세워 대결했다. 그 암살 후보는 소이즈미가 지향하는 정책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선출되었고,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라이브도어 사장 호리에 타카후미가 있다.
이러한 정치 수법은 국민에게 정치를 알기 쉽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선거 때는 고이즈미 돌풍이 일어나 자민당이 승리했다.
고이즈미 돌풍은 구체적인 정책 논의보다는 소이즈미 자신의 캐릭터와 화제성에 크게 의존하는 면이 컸고, 여론에서는 소이즈미의 정치는 포퓰리즘 정치라는 평가를 자주 받았다.
또한 소이즈미가 지향하는 정부는 "작은 정부"였으며, 이는 세이와카이 출신자들에게 많은 정책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개인에게는 상속세 감세(최고 세율 70%→50%)와 사회 보장비 삭감을, 법인에게는 연구 개발 투자 감세와 공공 사업비 삭감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택 금융 문제와 방위청 의혹을 추궁했던 민주당 이시이 히로키 중의원 의원이 피살되는 등 불투명한 정부 지출과 사건이 다수 발생하여 정부에 대한 신뢰감이 저하되었던 시대이기도 하다.
2001년 소신표명연설에서 타운미팅 구상을 제시하고 전국적으로 개최했으나, 조작 질문, 덴츠(電通) 직원에게 과도한 일당 지급 등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고이즈미 내각은 매년 국채 발행액을 30조 엔 이하로 억제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초기와 말기 예산에서만 달성되었다. 긴축 재정 정책은 디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에너지 안보 악화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성역 없는 구조개혁을 통해 금융재생 프로그램을 추진하여 부실채권을 처리하고, 특수법인 개혁, 정책금융기관 재편 등을 추진했다. "저축에서 투자로" 슬로건 아래 증권 우대 세제를 실시하여 개인 투자를 장려했다.
프라이머리 밸런스 회복을 목표로 재정 재건을 추진하여 공공사업을 감축하고 사회보장비를 억제했다. 도로공단 민영화, 거시경제 슬라이드 도입 등이 이루어졌으나, 사회보장비 감축은 의료 제도 문제로 이어졌다. 소비세 증세는 논의가 저조했고, 긴축 재정과 신자유주의적 민영화는 일본의 경제 침체를 장기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연금 제도를 개혁하여 거시경제 슬라이드를 도입하고, 고령자 공제 폐지, 공적연금 공제 축소 등을 단행했다. 의료비 억제를 위해 의료 제도 개혁을 추진하여, 건강보험 자기부담금 인상, 진료수가 인하 등을 실시했다.
2003년 시정방침 연설에서 방일캠페인(ビジット・ジャパン・キャンペーン)을 실시하여 관광객 유치를 추진했다. 비자 발급 완화 등을 통해 방일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했으며, 2030년까지 60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황실전범에 관한 전문가 회의를 설치하여 여성 천황, 여계 천황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황실전범 개정을 추진했으나, 히사히토 친왕 출생 이후 논의가 보류되었다. 고이즈미는 퇴임 후 여성 천황 논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 외에도 다케나카 헤이조를 각료로 임명하여 개혁을 추진하고, 금융빅뱅을 계승하여 금융 제도를 개정했다. 경제재정자문회의를 활용하여 관저 주도로 정책 결정을 전환하고, 삼위일체 개혁으로 지방교부세를 삭감했다. 파견근로자법 개정, 근로기준법 개정, 생활보호비 삭감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도로공단 총재 경질, 산업재생기구 설립, 유사시 관련 법안 성립, 자원유효이용촉진법 성립 등도 이루어졌다. 나병예방법 위헌 국가배상 소송에서 국가 패소 판결을 수용하고 사과했다. 지적재산전략본부 설립, 지적재산고등법원 설치 등 지적재산권 관련 정책도 추진했다.
4.1. 국내 정책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침체된 일본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상업 은행의 부실 채무 해결, 우정 사업 민영화, 자민당 내 파벌 구조 재편을 목표로 했으며, 미래를 개선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2001년 경제재정자문회의(CEFP)를 설치하여 경제 정책을 수립하고, "Basic Policies for Economic and Fiscal Management and Reform"을 발표하여 중앙 정부 개편을 추진했다. 2002년에는 다케나카 헤이조를 금융 서비스 담당 장관 겸 금융청(FSA) 장관으로 임명하여 은행 위기를 해결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주요 은행의 부실 채무가 감소하고 일본 경제는 회복세를 보였다. 2004년 GDP 성장률은 G7 국가 중 최고 수준이었다.
고이즈미는 자민당의 지지 기반을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시키려 했으며, 농촌 지역 보조금을 삭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은 논란을 야기했지만, 그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대중적 인기는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의 포퓰리즘적 변형"으로 평가받는다.
2005년 우정민영화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중의원을 해산하고(우정해산) 총선을 실시하여 자민당이 압승, 법안을 통과시켰다. 고이즈미가 우정민영화에 집착한 이유는 특정우체국장회와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2001년 소신표명연설에서 타운미팅 구상을 제시하고 전국적으로 개최했으나, 조작 질문, 덴츠(電通) 직원에게 과도한 일당 지급 등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고이즈미 내각은 매년 국채 발행액을 30조 엔 이하로 억제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초기와 말기 예산에서만 달성되었다. 긴축 재정 정책은 디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에너지 안보 악화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성역 없는 구조개혁을 통해 금융재생 프로그램을 추진하여 부실채권을 처리하고, 특수법인 개혁, 정책금융기관 재편 등을 추진했다. "저축에서 투자로" 슬로건 아래 증권 우대 세제를 실시하여 개인 투자를 장려했다.
프라이머리 밸런스 회복을 목표로 재정 재건을 추진하여 공공사업을 감축하고 사회보장비를 억제했다. 도로공단 민영화, 거시경제 슬라이드 도입 등이 이루어졌으나, 사회보장비 감축은 의료 제도 문제로 이어졌다. 소비세 증세는 논의가 저조했고, 긴축 재정과 신자유주의적 민영화는 일본의 경제 침체를 장기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연금 제도를 개혁하여 거시경제 슬라이드를 도입하고, 고령자 공제 폐지, 공적연금 공제 축소 등을 단행했다. 의료비 억제를 위해 의료 제도 개혁을 추진하여, 건강보험 자기부담금 인상, 진료수가 인하 등을 실시했다.
2003년 시정방침 연설에서 방일캠페인(ビジット・ジャパン・キャンペーン)을 실시하여 관광객 유치를 추진했다. 비자 발급 완화 등을 통해 방일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했으며, 2030년까지 60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황실전범에 관한 전문가 회의를 설치하여 여성 천황, 여계 천황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황실전범 개정을 추진했으나, 히사히토 친왕 출생 이후 논의가 보류되었다. 고이즈미는 퇴임 후 여성 천황 논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 외에도 다케나카 헤이조를 각료로 임명하여 개혁을 추진하고, 금융빅뱅을 계승하여 금융 제도를 개정했다. 경제재정자문회의를 활용하여 관저 주도로 정책 결정을 전환하고, 삼위일체 개혁으로 지방교부세를 삭감했다. 파견근로자법 개정, 근로기준법 개정, 생활보호비 삭감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도로공단 총재 경질, 산업재생기구 설립, 유사시 관련 법안 성립, 자원유효이용촉진법 성립 등도 이루어졌다. 나병예방법 위헌 국가배상 소송에서 국가 패소 판결을 수용하고 사과했다. 지적재산전략본부 설립, 지적재산고등법원 설치 등 지적재산권 관련 정책도 추진했다.
4.2. 외교 및 안보 정책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외교 정책은 이전 총리들이 채택했던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및 UN 중심 외교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며 이라크 전쟁에 자위대를 파병하는 등 더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활동적인 외국 전쟁 지역에 대한 최초의 군사 작전이었다. 많은 일본 논평가들은 미국과 일본의 우호적인 관계가 고이즈미와 조지 W. 부시 대통령 간의 개인적인 친분에 기반한다고 지적했으며, 백악관 관계자들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두 정상의 첫 만남을 "매우 따뜻했다"고 묘사했다. 퇴임 후에도 고이즈미는 일본군을 이라크에 파병한 결정을 옹호했다.
고이즈미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및 핵 개발 문제에 대해 전임자들보다 더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2002년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총비서와 공식 회담을 가졌고, 북한 정부는 일본인 납치에 대한 직접적인 관여를 인정했다. 또한 5명이 생존해 일본으로 귀국했다.
고이즈미 정부는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격상하는 법안을 제출하여 2007년 1월 9일 방위성이 설치되었다.
200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고이즈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공약했으나, 2001년부터 2005년까지는 국내외 비판을 고려하여 8월 15일 이외의 날에 참배했다. 2006년에는 공약대로 8월 15일에 참배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중국, 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고이즈미는 정부개발원조를 감축하면서도, 정상 외교와 다자 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동중국해 가스전 문제에서는 임페리얼석유에 시추권을 부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이후 온건 노선으로 전환했다.
2005년8월 15일, 고이즈미는 종전 60주년을 맞아 과거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하는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 것으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 인식으로 취급된다.
고이즈미는 재임 중 총 51회, 49개국(총 81개국)을 방문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여러 국가를 적극적으로 방문했다. 특히 미국을 8회, 대한민국을 7회 방문했다. 외무성 기밀비 유용 사건 등으로 문제가 되었던 외무성에 대해서는, 차관 경험자들을 경질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일중한 정상회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정상회의 등 아시아 지역 중심의 다국간 협의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서밋에도 6회 참석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인해 중국 및 한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특히 중국과는 정상 회담이 어려울 정도로 관계가 경색되었으며,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중국의 반대로 인해 상임이사국 진입을 단념해야 했다.
미국 동시다발 테러 사건 이후 테러 대책 특별 조치법을 제정하고 해상 자위대를 인도양에 파병했으며, 이라크 전쟁 이후 육상·항공 자위대 파병을 결정했다.
YOKOSO!JAPAN 캠페인을 실행하여 중국인, 한국인, 대만인 등 관광객에 대한 비자 면제를 실시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에어포스원에 탑승하여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 초대되었다. 북한에 대해서는 "대화와 압력"을 내걸고 강경과 온건을 병행하는 대응을 했다.
5. 비판 및 논란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001년 8월 13일부터 총리 재임 중 6차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전범들과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한 일본 전몰자들을 기리는 곳으로, 그의 참배는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일본 시민들의 강한 비난을 샀다. 특히 한국과 중국은 20세기 전반 일본의 침략과 점령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어, 고이즈미의 참배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중국에서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인해 대규모 반일 폭동이 발생했고, 중국 정부는 4년간 양국 정상의 상호 방문을 거부했다. 2001년 APEC 참석차 상하이를 방문한 고이즈미는 항일전쟁기념관을 방문하여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헌화했지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계속하면서 중일 관계는 악화되었다. 2005년 반일 시위와 고이즈미의 5번째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중국 정부는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이며 국제회의를 이용해 중일 정상회담과 외교장관 회담을 거부했다. 고이즈미는 이에 대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했으니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중국을 비판했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여야 정당, 언론은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고이즈미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국내(대중)을 위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2002년 월드컵에 참석하는 등 관계가 원만했지만,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고이즈미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이유로 2005년 한일 셔틀 외교 중단을 요구했고, 독도 문제와 맞물려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고이즈미는 신사 방명록에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라고 서명했지만, 자신의 참배는 사적인 행위이며 어떤 정치적 입장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은 이러한 변명을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는 2006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항복 기념일에 참배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마지막 참배를 했다.
200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60주년을 맞아 고이즈미는 "깊은 후회와 진심 어린 사과를 표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며 일본이 다시는 "전쟁의 길"을 걷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퇴임 후에도 고이즈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2007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항복 6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그는 "많은 전몰자에게 경의와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 왔다"며, "만약 많은 국민이 나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한다면, 그런 국민의 총리 대신이 되고 싶지 않다"고 발언했다.
6. 역대 선거 결과
| 선거명 | 선거구 | 정당명 | 득표수 | 득표율 | 득표순위 | 당락 | 비고 |
|---|---|---|---|---|---|---|---|
| 1972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22,188표 | 16.8%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6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17,698표 | 14.5%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9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05,125표 | 16.4%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0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46,681표 | 17.5%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3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15,274표 | 15.1%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6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67,838표 | 20.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0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68,997표 | 18.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3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49,269표 | 16.9%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6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11구 | 자유민주당 | 118,955표 | 58.16% | 1위 | 당선 | |
| 2000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11구 | 자유민주당 | 157,355표 | 69.03% | 1위 | 당선 | |
| 2003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11구 | 자유민주당 | 174,374표 | 74.42% | 1위 | 당선 | |
| 2005년 총선거 | 가나가와현 제11구 | 자유민주당 | 197,037표 | 73.16% | 1위 |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