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카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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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카펠 전쟁은 1529년 스위스에서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종교적 갈등으로 발발한 전쟁이다.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개신교 세력과 가톨릭 간의 대립은 투르가우 지역의 행정권 다툼, 종교 개혁에 대한 반발, 슈탐하임 사건 등을 거치며 심화되었다. 개신교는 기독교 도시 동맹을 결성하고, 가톨릭은 기독교 연합을 맺으며 대립했다. 결국 취리히가 가톨릭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카펠에서 양측 군대가 휴전하고 식사를 함께 하는 '카펠의 우유죽' 일화로 대표되는 중재를 통해 '제1차 카펠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가톨릭 측에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2년 후 제2차 카펠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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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카펠 전쟁 | |
---|---|
분쟁 개요 | |
명칭 | 제1차 카펠 전쟁 |
다른 명칭 | 카펠 죽 끓이기 |
시기 | 1529년 6월 |
장소 | 카펠 암 알비스 근처 |
원인 | 스위스 종교개혁 관련 갈등 |
결과 | 제1차 카펠란트 평화 조약 |
교전 세력 | |
취리히 | 주츠빙글리 |
가톨릭 5개 주 |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루체른 추크 |
지휘관 및 지도자 | |
전력 | |
취리히 | 약 30,000명 |
가톨릭 5개 주 | 약 9,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취리히 | 소수 |
가톨릭 5개 주 | 소수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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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교의 분열과 두 동맹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개신교 칸톤이자 도시인 취리히는 다른 개신교 칸톤들과 방어 동맹인 ''크리스트리히 부르크레히트''를 맺었는데, 여기에는 콘스탄츠와 스트라스부르의 자유 제국 도시들도 포함되었다. 이에 카톨릭 칸톤들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와 동맹을 맺으며 대응했다.
두 종교 간의 갈등은 그들의 영토, 특히 칸톤 간 행정부가 격년으로 바뀌어 가톨릭과 개신교 규칙이 교체되는 투르가우의 상황을 놓고 발생했다. 1526년 바덴에서의 논쟁과 같은 여러 중재 시도가 실패했다.
1528년 5월 투르가우에서 카톨릭 사제가 처형되고, 1529년 개신교 목사 J. 키저가 슈비츠에서 화형을 당하는 등, 양측에서 수많은 사소한 사건과 도발이 발생했다.[1] 마지막으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바덴에 카톨릭 포크트를 임명한 것이었다.
2. 1.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16세기 초,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종교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성당 설교자로 활동하며 가톨릭 교리에 반하는 설교를 시작했고, 이는 스위스뿐만 아니라 인근 독일어권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취리히 시는 츠빙글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1524년에 종교 개혁을 실천한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츠빙글리의 종교 개혁은 만인 사제주의와 친화성이 높은 게노센샤프트 공동체였던 스위스 도시 국가들의 특성과 맞물려 빠르게 확산되었다. 장크트갈렌, 바젤, 베른, 그라우뷘덴 등 여러 주가 복음주의로 개종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당시 스위스 경제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용병 사업을 비판했는데, 이는 이탈리아 전쟁에 종군 사제로 참전했던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츠빙글리는 노바라 전투와 label=마리냐노 전투/Schlacht bei Marignanode에서 스위스 용병군의 참상을 목격했다.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개신교 주와 취리히시는 다른 개신교 주와 방어 동맹인 크리스트리히 부르크레히트를 체결했으며, 여기에는 콘스탄츠와 스트라스부르의 자유 제국 도시도 포함되었다.[1] 가톨릭 주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두 종교 사이의 갈등은 또한 그들의 영토, 특히 투르가우의 상황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1526년 바덴 논쟁과 같은 여러 중재 시도가 실패했다.[1] 1528년 5월 투르가우에서 가톨릭 신부가 처형되고, 1529년 슈비츠에서 개신교 목사 J. 키저가 화형을 당하는 등 양측에서 수많은 사소한 사건과 도발이 일어났다.[6][1]
2. 2. 슈탐하임 사건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개신교 주와 취리히시는 콘스탄츠, 스트라스부르 등의 다른 개신교 주와 방어 동맹인 기독교 동맹(''Christliches Burgrecht'')을 체결했다. 이에 가톨릭 주들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어 대응했다.[6][1]종교 간의 갈등은 특히 투르가우의 상황을 둘러싸고 발생했는데, 이곳에서는 행정부가 2년마다 칸톤으로 바뀌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규칙이 번갈아 적용되었다. 1526년 바덴 논쟁과 같은 중재 시도가 실패한 후, 양측에서 여러 사건과 도발이 일어났다.[6][1] 1528년 5월 투르가우에서 가톨릭 사제가 처형되고, 1529년 슈비츠에서 개신교 목사 J. 키저가 화형을 당했다.[6][1]
투르가우 지방의 Unterstammheim(슈탐하임)]은 취리히와 인접하여 일찍부터 복음주의가 확산되었다. 복음주의 사제가 성상을 철거하려다 가톨릭과 충돌이 발생했고, 투르가우가 서약 동맹의 공동 지배지였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졌다. 취리히가 하급 재판권을, 서약 동맹 7개 주가 상급 재판권을 가진 상황에서, 복음주의 사제가 체포되자 분노한 주민들이 Kartause Ittingen(가톨릭 수도원)]을 습격하여 불태웠다.
취리히와 서약 동맹의 협의 결과, 신앙 문제는 보류하고 수도원 습격 주모자인 하급 재판소 부자가 가톨릭에 인도되었으나, 가톨릭은 이들을 고문하고 참수했다. 이 사건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들을 순교자로 여기게 했고, 가톨릭에 대한 무장 조직 필요성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 개신교의 기독교 도시 동맹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개신교 주와 취리히시는 콘스탄츠와 스트라스부르의 자유 제국 도시들을 포함한 다른 개신교 주와 방어 동맹인 기독교 동맹(''Christliches Burgrecht'')을 체결했다.[6] 가톨릭 주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에 대응했다.[6]
츠빙글리는 종교 개혁파에 대한 무력 공격이 가해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1527년 여름,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에 독일 남서부의 여러 도시들과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호소했다. 당시 독일 남서부에서는 독일 농민 전쟁으로 인해 제국 자유 도시들이 특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었고, 황제와 교회가 "이단 척결"을 구실로 자유 도시를 제압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527년 말 취리히와 콘스탄츠 사이에 동맹이 성립되었다.[4] 이후 베른, 장크트갈렌, 바젤, 샤프하우젠, 비엘, 뮐루즈, 스트라스부르, 울름, 아우크스부르크가 동맹에 참여했다. 이 동맹은 '''기독교 도시 동맹'''(크리스트리헤 부르크레히테/Christliche Burgrechtede)이라고 불린다.
2. 4. 가톨릭의 기독교 연합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개신교 세력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루체른,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 프리부르 등 가톨릭 주들은 1524년에 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숲의 주"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스위스 독립의 계기가 된 서약 동맹의 발상지였다.1529년, 가톨릭 주들은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고 '''기독교 연합'''(크리스트리헤 페어아이니궁/Christliche Vereinigungde)을 결성했다. 이는 스위스 연방의 오랜 숙적이었던 합스부르크가와의 동맹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들은 독일 남서부의 에서 회합을 가졌다. 페르디난트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동생이며, 가톨릭 세력으로는 인근에서 최대 규모의 실력자였다.
3. 전쟁의 경과
베른이 츠빙글리파로 전향하면서 베른의 지배하에 있던 오버란트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오버란트의 농민들은 인터라켄을 중심으로 베른으로부터의 독립을 꾀하며 가톨릭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폐지된 수도원(Kloster Interlaken)의 자산을 확보하여 농촌 방으로 자립하려 했다. 그러나 그 자산은 베른 시에 빼앗겼고,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1528년 4월에 봉기했다.
가톨릭으로 복귀한 오버란트 농민들은 각지에서 폐지된 미사를 다시 시작했다. 기독교 연합의 5개 주는 "가톨릭 신자를 구원한다"라고 칭하며 군대를 오버란트로 진격시키기로 결정했지만, 이는 스위스의 각 영방이 서로의 지배 지역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한 슈탄스 협정 위반이었다.
가톨릭 5개 주의 원군 소식을 접한 오버란트 농민들은 1528년 10월 22일 수도원을 점거했다. 베른은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고, 운터발덴도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농민들은 11월 4일에 간단하게 진압되었고, 베른군은 인터라켄을 제압했다.
취리히는 1529년 5월, 공동 지배지인 투르가우 지방에서 가톨릭파 집행관 막스 베어리를 체포하여 참수했다. 가톨릭파는 이에 대항하여 같은 해 5월 29일에 취리히의 야코프 카이저(Jakob Kaiser)라는 목사를 납치하여 슈비츠로 연행하여 화형에 처했다. 이후 취리히와 베른은 운터발덴 주의 슈탄스 협정 위반을 규탄하고, 공동 통치 지역에서 운터발덴을 추방하려 했다. 그러나 가톨릭 5개 주는 이에 응하지 않아 양측의 대립은 무력 충돌 직전까지 높아졌다.
결국 취리히는 1529년 6월 8일에 가톨릭 5개 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취리히는 투르가우와 장크트갈 수도원의 영토를 점령하고, 추크 국경에 있는 카펠로 진군했다. 취리히에는 동맹 각지에서 30,000명의 병력이 모였다. 한편 연합 측에서는 페르디난트 1세가 원군을 보내지 않아 9,000명밖에 병력이 없었다. 취리히군을 이끄는 것은 울리히 츠빙글리였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동부의 요지를 확보한 다음, 스스로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취리히에서 가톨릭 지방인 추크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양군은 국경 마을 카펠에서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취리히는 6월 8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투르가우와 장크트갈 수도원의 영토를 점령하고, 추크 국경에 있는 카펠로 진군했다. 타크자충에서의 중재를 통해 공개 전쟁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양측 군대는 취리히와 추크 사이의 카펠에서 대치했지만, 병사들은 도발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중립적인 입장이었던 글라루스의 수장 한스 에블리(Hans Aebli) 등이 중재에 나섰다. 중재자들은 전사자의 아내와 아이들의 비참함을 호소하며, 스위스 내부의 분열은 외부가 틈탈 틈이 될 뿐이라고 설득했다.
하인리히 불링거는 훗날 '카펠의 우유죽'(''Kappeler Milchsuppe'')이라는 일화를 남겼는데, 취리히가 빵을 제공하고 추크가 우유를 제공하여 양측 군대가 함께 식사를 했다는 내용이다. 양측 군대의 병사들은 국경선 바로 위에 불을 지펴 냄비를 꺼내어 각각 우유와 빵을 가져와 교환하여 밀크 수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양측 군대 대표자들은 병사들에게 싸울 의지가 없음을 깨닫고, 무기를 거두고 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 고사는 스위스에서 신구 양 종파의 화해의 상징이 되었다.
3. 1. 오버란트를 둘러싼 양측의 대립
베른이 츠빙글리파로 전향하면서 베른의 지배하에 있던 오버란트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오버란트의 농민들은 인터라켄을 중심으로 베른으로부터의 독립을 꾀하며 가톨릭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폐지된 수도원(Kloster Interlaken)의 자산을 확보하여 농촌 방으로 자립하려 했다. 그러나 그 자산은 베른 시에 빼앗겼고,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1528년 4월에 봉기했다.가톨릭으로 복귀한 오버란트 농민들은 각지에서 폐지된 미사를 다시 시작했다. 기독교 연합의 5개 주는 "가톨릭 신자를 구원한다"라고 칭하며 군대를 오버란트로 진격시키기로 결정했지만, 이는 스위스의 각 영방이 서로의 지배 지역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한 슈탄스 협정(Stanser Verkommnis) 위반이었다.
가톨릭 5개 주의 원군 소식을 접한 오버란트 농민들은 1528년 10월 22일 수도원을 점거했다. 베른은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고, 운터발덴도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농민들은 11월 4일에 간단하게 진압되었고, 베른군은 인터라켄을 제압했다.
3. 2. 선전 포고
취리히는 1529년 5월, 공동 지배지인 투르가우 지방에서 가톨릭파 집행관 막스 베어리를 체포하여 참수했다. 가톨릭파는 이에 대항하여 같은 해 5월 29일에 취리히의 야코프 카이저(Jakob Kaiser)라는 목사를 납치하여 슈비츠로 연행하여 화형에 처했다. 이후 취리히와 베른은 운터발덴 주의 슈탄스 협정 위반을 규탄하고, 공동 통치 지역에서 운터발덴을 추방하려 했다. 그러나 가톨릭 5개 주는 이에 응하지 않아 양측의 대립은 무력 충돌 직전까지 높아졌다.결국 취리히는 1529년 6월 8일에 가톨릭 5개 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취리히는 투르가우와 장크트갈 수도원의 영토를 점령하고, 추크 국경에 있는 카펠로 진군했다. 취리히에는 동맹 각지에서 30,000명의 병력이 모였다. 한편 연합 측에서는 페르디난트 1세가 원군을 보내지 않아 9,000명밖에 병력이 없었다. 취리히군을 이끄는 것은 울리히 츠빙글리였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동부의 요지를 확보한 다음, 스스로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취리히에서 가톨릭 지방인 추크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양군은 국경 마을 카펠에서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3. 3. 카펠의 우유죽
취리히는 6월 8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투르가우와 장크트갈 수도원의 영토를 점령하고, 추크 국경에 있는 카펠로 진군했다. 타크자충에서의 중재를 통해 공개 전쟁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양측 군대는 취리히와 추크 사이의 카펠에서 대치했지만, 병사들은 도발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중립적인 입장이었던 글라루스의 수장 한스 에블리(Hans Aebli) 등이 중재에 나섰다. 중재자들은 전사자의 아내와 아이들의 비참함을 호소하며, 스위스 내부의 분열은 외부가 틈탈 틈이 될 뿐이라고 설득했다.
하인리히 불링거는 훗날 '카펠의 우유죽'(''Kappeler Milchsuppe'')이라는 일화를 남겼는데, 취리히가 빵을 제공하고 추크가 우유를 제공하여 양측 군대가 함께 식사를 했다는 내용이다. 양측 군대의 병사들은 국경선 바로 위에 불을 지펴 냄비를 꺼내어 각각 우유와 빵을 가져와 교환하여 밀크 수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양측 군대 대표자들은 병사들에게 싸울 의지가 없음을 깨닫고, 무기를 거두고 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 고사는 스위스에서 신구 양 종파의 화해의 상징이 되었다.
4. 제1차 카펠 평화
1529년 6월 26일, "제1차 카펠 평화"(''Erster Kappeler Landfriede'')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가톨릭 측에 불리한 내용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맹을 해산해야 했다.[1] 공개적인 전쟁은 연방 의회(Tagsatzung)의 중재를 통해 간신히 피할 수 있었고, 양측 군대는 카펠에서 협상을 진행했다. 양측 군인들은 도발을 피하기로 합의했으며, 요하네스 살라트는 양측 진영 사람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했다. 하인리히 불링거는 이를 "카펠의 밀크 수프"(Kappeler Milchsuppe)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는 취리히 측이 빵을, 추크 측이 우유를 제공하여 함께 식사를 나눈 일화를 가리킨다. 이는 연방 구성원들 간의 화해와 타협의 상징이 되었다.[1]
한편, 울리히 츠빙글리는 무력을 통해 종교 개혁을 스위스 전역으로 확산시키려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 후 츠빙글리는 헤센 방백필리프 1세의 초청으로 마르부르크에서 열린 마르부르크 종교 회담/Marburger Religionsgesprächde에 참석했다. 그러나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찬에 대한 견해 차이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페스트 발생으로 회담은 급히 해산되었다. 1530년 제국 회의에서도 타협이 결렬되면서, 루터파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츠빙글리파는 『신앙의 변명』(Fidei ratio)을 발표하며 양측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결국 1531년 제2차 카펠 전쟁이 발발하여 츠빙글리는 전사하고, 그의 시신은 훼손되었다.
5. 평화 이후
제1차 카펠 평화 협정(''Erster Landfriede'')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맹을 해산해야 했던 가톨릭교도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2] 긴장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2년 후 제2차 카펠 전쟁에서 다시 불거지게 된다.[2]
이 합의는 가톨릭 측에서 볼 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력이 축소되어 양보를 할 수 밖에 없는 형태가 되었다. 한편 츠빙글리 측에서는 무력으로 제압해서라도 종교 개혁을 스위스 전역으로 확대하고 싶어했기에, 그 야망이 좌절되었다。
이후 츠빙글리는 헤센 방백필리프 1세가 통치하는 마르부르크로 향했다. 헤센 방백은 마르부르크 종교 회담을 열어 복음주의의 대동 단결을 실현하려 했다. 루터파에서는 루터와 멜란히톤, 츠빙글리파에서는 츠빙글리와 요하네스 오에콜람파디우스/Johannes Oekolampadde가 회담에 참석했으나, 성찬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합의에 실패했다.
1530년 제국 회의에서도 타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렬되었으며, 루터파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츠빙글리파는 『신앙의 변명』(Fidei ratio)이라는 별도의 주장을 하게 되었다. 결국 독일 슈말칼덴 동맹이 결성되었고, 동맹 상대를 잃은 츠빙글리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손을 잡는 것을 모색했지만 실패했고, 취리히에서의 구심력도 약화되었다.
6. 기념
카펠 마을 언덕 위에는 '카펠의 우유죽'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다만, 실제로 "카펠의 우유죽"이 행해진 장소는 이 기념비가 있는 언덕과는 다른 장소였다는 설도 있다.
참조
[1]
HDS
First War of Kappel
[2]
HDS
Second War of Kappel
[3]
문서
現在もスイスの正式な国号は「Schweizerische Eidgenossenschaft(スイス誓約同盟)」である。
[4]
문서
ドイツとスイスの国境は[[ボーデン湖]]を通っている。コンスタンツはその南岸(スイス側)にある都市で、ドイツの飛び地状になっている。
[5]
문서
ツヴィングリ自身が妻帯者だった。
[6]
HDS
First War of Kap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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