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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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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은 1780년부터 1784년까지 영국 동인도 회사와 마이소르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이다. 하이데르 알리의 마이소르 왕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마라타 제국, 니잠 왕국과 삼자 동맹을 결성하여 영국에 대항했다. 전쟁 초기 마이소르군은 폴릴루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우세를 보였으나, 하이데르 알리의 사망 이후 프랑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1784년 망갈로르 조약을 통해 전쟁 전 상태로 영토를 되돌리고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인도 세력이 영국에 대항하여 조건을 제시한 마지막 사례로, 영국이 인도 내 지배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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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카다롤 포위전 (1783년)
카다롤 포위전 묘사 (1783년)
시기1780년 – 1784년
장소남인도
원인불명
결과현상 유지 (Status quo ante bellum), 망갈로르 조약 체결
관련 분쟁영국-마이소르 전쟁,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교전 세력
교전국 1마이소르 왕국
아라칼 왕국
사와누르 번왕국
방가나팔레 번왕국
프랑스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교전국 2영국 왕국
하노버 선제후국
영국 동인도 회사
트라방코르
지휘관 및 지도자
마이소르 왕국하이데르 알리
티푸 술탄
카림 칸 사히브
사이드 사히브
사르다르 알리 칸 사히브
막둠 알리
카말루딘
후사인 알리 칸 바하두르
프랑스피에르 앙드레 드 쉬프랑
샤를 조제프 파티시에 드 비ュシー
영국조지 매카트니
에어 쿠트
헥터 먼로
리처드 매튜스
윌리엄 베일리 (포로)
조지 엠프티지
영국 해군에드워드 휴즈
규모
마이소르 왕국불명
영국불명
사상자 및 피해
마이소르 왕국불명
영국불명

2. 배경

하이데르 알리마이소르 왕국을 통치했지만 왕의 칭호는 없었다. 하이데르 알리는 이전 마라타와의 전쟁에서 영국이 약속을 어겼다고 여겨 영국에 복수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동맹을 맺었다. 벤자민 프랭클린 대사의 인기에 힘입어 1778년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선전포고가 있자, 영국 동인도 회사는 아대륙에 남아있는 소수의 프랑스 영토를 점령하여 인도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회사는 1778년 퐁디셰리와 기타 프랑스 전초 기지를 점령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들은 1779년 말라바르 해안의 프랑스 지배 항구 마헤를 점령했다. 마헤는 프랑스를 통해 무기와 탄약을 공급받던 하이데르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하이데르는 영국에게 마헤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방어를 위해 군대도 제공했다. 하이데르는 프랑스 외에 마라타 제국과 니잠 왕국을 포함하는 대영국 동맹을 결성하기 시작했다.[7]

제1차 마이소르 전쟁 이후, 마이소르 왕국과 영국 사이에는 별다른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마드라스 조약에 따른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마이소르 왕국의 지배자 하이데르 알리는 국력 증강에 힘쓰며, 다음 전쟁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남인도에는 영불 간의 미국 독립 전쟁의 여파가 전해졌고, 1778년에는 영국이 프랑스의 거점 퐁디셰리를 포위했으며(퐁디셰리 포위전), 1779년에는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케랄라 지방의 도시 마히를 빼앗았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던 이 지역을 영국이 빼앗은 것으로 인해 남인도에서 영국의 위협이 커졌고, 마이소르 왕국과의 대립이 재연되었다[7]

한편, 마라타 제국을 중심으로 한 마라타 동맹은 전쟁 후 나나 파드나비스와 라구나트 라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고, 영국이 후자를 지원하면서 제1차 마라타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불리해진 나나 파드나비스는 1780년 2월 7일 마이소르의 하이데르 알리와 반영 동맹을 맺게 되었다[8]

이로 인해, 마이소르 왕국, 마라타 제국, 니잠 왕국 간에 삼자 동맹이 성립되었고, 하이데르 알리는 영국과의 대결 자세를 보였다.

2. 1. 영국-프랑스 간 대립과 마이소르의 입장

1778년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미국 독립 전쟁에 프랑스가 참전하면서,벤자민 프랭클린 대사의 인기에 힘입어 영국과 프랑스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 내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퐁디셰리 등 프랑스 거점을 공격했다.[7] 1779년에는 케랄라 지방의 마헤를 점령했다.[7]

피에르 앙드레 드 쉬프랑과 만나는 하이데르 알리(1782년)


마헤는 하이데르 알리에게 무기와 탄약을 공급받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하이데르 알리는 영국에게 마헤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다고 경고하고 군대도 제공했지만, 영국은 마헤를 점령했다.

제1차 마이소르 전쟁 이후 마드라스 조약에 따른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미국 독립 전쟁의 여파가 남인도에 전해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7] 마이소르 왕국의 지배자 하이데르 알리는 영국에 복수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마라타 제국, 니잠 왕국과 함께 반영 동맹을 결성했다.[8]

유럽 본토는 물론, 남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더욱 상반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에서의 영국-프랑스 간의 싸움은 제2차 마이소르 전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마이소르 왕국과의 동맹에 따라 샤를 조제프 파티시에르 드 뷔시, 피에르 앙드레 드 쉬프랑을 파견했다. 1782년 2월 7일 사드라스 해전에서 쉬프랑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를 격파하는 등 프랑스는 이 전쟁 후반에 큰 활약을 했다.

1783년 6월 7일 영국군이 프랑스령 깐다룰을 포위하자(깐다룰 포위전) 쉬프랑의 프랑스 함대가 진격하여 6월 20일 깐다룰 해역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했다. 같은 해 9월 3일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강화했고, 남인도에서 양국 간의 분쟁도 종식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에 점령지를 반환했고, 이후 프랑스는 남인도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2. 2. 마라타 제국, 니잠 왕국과의 동맹

하이데르 알리마라타 제국, 니잠 왕국과 대영국 동맹을 결성하기 시작했다.[7] 제1차 마이소르 전쟁 이후 마이소르 왕국과 영국 사이에는 마드라스 조약에 따른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미국 독립 전쟁의 여파로 1778년 영국이 프랑스의 거점 퐁디셰리를 포위하고(퐁디셰리 포위전), 1779년에는 마히를 점령하면서 양국 간 대립이 재연되었다.[7]

한편, 마라타 제국에서는 제1차 마라타 전쟁 이후 나나 파드나비스와 라구나트 라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고, 영국이 후자를 지원하자 불리해진 나나 파드나비스는 1780년 2월 7일 하이데르 알리와 반영 동맹을 맺었다.[8] 이로써 마이소르 왕국, 마라타 제국, 니잠 왕국 간의 삼자 동맹이 성립되었고, 하이데르 알리는 영국에 대한 대결 자세를 강화하였다.

3. 전쟁의 경과

제1차 영국-마이소르 전쟁과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의 전장 지도


1780년 7월, 하이데르 알리는 8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카르나틱을 침공, 동 가트 산맥의 고개를 넘어 아르코트의 영국 요새들을 포위했다. 영국군은 포위를 풀기 위해 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나, 하이데르 알리는 티푸 술탄에게 별동대를 맡겨 윌리엄 베일리 대령 휘하의 영국군을 공격하게 했다. 폴릴루 전투에서 티푸 술탄은 마이소르 로켓과 로켓 포병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영국군을 대파했다. 이 패배는 당시 동인도 회사의 인도에서의 가장 큰 타격으로 여겨졌다. 엑토르 먼로는 마드라스로 후퇴했고, 짐을 버리고 대포를 칸치푸람의 물탱크에 버렸다.

폴릴루 전투에서 마이소르 군은 로켓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하이데르 알리는 마드라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대신, 11월 3일에 함락된 아르코트 포위를 재개했다. 이 결정으로 영국군은 남부에서 방어선을 강화하고 에어 코트 경의 지휘하에 증원군을 마드라스에 파견할 시간을 벌었다. 코트는 치담바람에서 격퇴되었으나, 포르토 노보 전투[3]와 숄린가르 전투에서 하이데르 알리를 연이어 격파했다.

쇼린가르 암석 아래에 야영한 영국군


티푸 술탄은 완디와시 포위를 풀고 벨로르를 포위했다. 1781년 여름, 맥카트니 경이 마드라스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전쟁 소식이 전해졌다. 맥카트니는 인도 내 네덜란드 거점 점령을 명령했고, 영국군은 1781년 11월 네가파탐에서 3주간의 포위 끝에 네덜란드의 주요 거점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하이데르 알리의 병사 2,000명이 포함된 방어선이 있었으나, 영국 해군의 지원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한편, 티푸 술탄은 1782년 2월 18일 탄조르 근처 아나구디에서 브레이스웨이트 대령을 격파하고,[2] 1781년 12월에는 영국군으로부터 치투르를 점령하는 등 활약했다. 하이데르 알리와 티푸 술탄은 알리 라자 비비 주나무베 2세 및 마필라 무슬림 공동체와 동맹을 맺었고, 이후 네덜란드 용병으로 활동하는 네덜란드령 말라카 출신 무슬림 말레이인과도 합류했다.

1782년 여름, 봄베이의 회사 관계자들은 텔리체리에 추가 병력을 보냈고, 그곳에서 말라바르에 있는 마이소르의 보유지에 대한 작전을 시작했다. 하이데르 알리는 티푸와 강력한 군대를 이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보냈고, 티푸는 하이데르 알리가 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파니애니에서 이 군대를 묶어두었다.[4]

동부 해안에서는 제임스 스튜어트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포위된 요새에 보급품을 전달하고 마이소르군과 합류한 프랑스군이 도착한 쿠들로르를 다투기 위해 마드라스에서 진군했다. 스튜어트는 병력이 거의 동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들로르를 포위했다. 피에르 앙드레 드 쉬프렌의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를 물리치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쿠들로르의 방어를 지원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예비 평화 협정이 맺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포위는 종료되었다.

영국군은 1783년 3월 망갈로르를 점령했지만 티푸는 주력 부대를 데려와 베드노르를 재점령한 후 망갈로르를 포위하고 결국 점령했다. 동시에, 스튜어트의 군대에서 온 병력은 윌리엄 풀러턴 대령의 병력과 탄조르 지역에서 합류했고, 그는 11월에 팔갓체리의 요새를 점령한 다음 저항 없이 코임바토르로 들어갔다.

3. 1. 마이소르 군의 초기 승리 (1780년-1781년)

1780년 7월, 하이데르 알리는 8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카르나틱을 침공, 동 가트 산맥의 고개를 넘어 아르코트의 영국 요새들을 포위했다.[9][10] 마이소르 군은 약탈, 방화, 살육을 자행하여 카르나틱 전역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10] 그러나 이러한 파괴는 무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인도 회사에 물자 공급 및 수송을 어렵게 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10]

영국군은 포위를 풀기 위해 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나, 하이데르 알리는 티푸 술탄에게 별동대를 맡겨 윌리엄 베일리 대령 휘하의 영국군을 공격하게 했다.[11] 폴릴루 전투에서 티푸 술탄은 마이소르 로켓과 로켓 포병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영국군을 대파했다.[2] 이 패배는 당시 동인도 회사의 인도에서의 가장 큰 타격으로 여겨졌다. 엑토르 먼로는 마드라스로 후퇴했고, 짐을 버리고 대포를 칸치푸람의 물탱크에 버렸다.[11]

하이데르 알리는 마드라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대신, 11월 3일에 함락된 아르코트 포위를 재개했다.[12] 이 결정으로 영국군은 남부에서 방어선을 강화하고 에어 코트 경의 지휘하에 증원군을 마드라스에 파견할 시간을 벌었다.

벵골 총독 워렌 헤이스팅스는 캘커타에서 아일 쿠트를 마드라스 구원에 파견했다.[11] 아일 쿠트는 카르나틱 전역이 마이소르 측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지만,[13] 포르토 노보에서 하이데르 알리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14]

같은 해 여름, 조지 매카트니가 마드라스 장관으로 도착하여 네덜란드령 나가파티남 점령을 명령했다. 영국군은 마이소르 군의 지원을 받은 네덜란드군을 격파하고 나가파티남을 점령했다(나가파티남 포위전).[3]

1781년 12월, 티푸 술탄은 영국으로부터 치토르를 빼앗았다. 또한, 하이데르 알리와 티푸 술탄은 알리 라자 비비 주나무베 2세 및 마필라 무슬림 공동체의 지지를 얻었고, 나중에 네덜란드령 말라카에서 온 무슬림 말레이인과도 합류했다.

3. 2. 영국의 반격과 교착 상태 (1781년-1782년)

1780년 하이데르 알리가 카르나틱을 침공한 후, 영국은 에어 코트 경의 지휘 하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남부 방어선을 강화했다. 코트는 치담바람에서 격퇴되었으나, 포르토 노보 전투와 숄린가르 전투에서 하이데르 알리를 연이어 격파했다.

티푸 술탄은 완디와시 포위를 풀고 벨로르를 포위했다. 1781년 여름, 맥카트니 경이 마드라스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전쟁 소식이 전해졌다. 맥카트니는 인도 내 네덜란드 거점 점령을 명령했고, 영국군은 1781년 11월 네가파탐에서 3주간의 포위 끝에 네덜란드의 주요 거점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하이데르 알리의 병사 2,000명이 포함된 방어선이 있었으나, 영국 해군의 지원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한편, 티푸 술탄은 1782년 2월 18일 탄조르 근처 아나구디에서 브레이스웨이트 대령을 격파하고, 1781년 12월에는 영국군으로부터 치투르를 점령하는 등 활약했다. 하이데르 알리와 티푸 술탄은 알리 라자 비비 주나무베 2세 및 마필라 무슬림 공동체와 동맹을 맺었고, 이후 네덜란드 용병으로 활동하는 네덜란드령 말라카 출신 무슬림 말레이인과도 합류했다.

3. 3. 하이데르 알리의 사망과 티푸 술탄의 계승 (1782년)



1782년 여름, 봄베이의 회사 관계자들은 텔리체리에 추가 병력을 보냈고, 그곳에서 말라바르에 있는 마이소르의 보유지에 대한 작전을 시작했다.[4] 하이데르 알리는 티푸와 강력한 군대를 이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보냈고, 티푸는 하이데르 알리가 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파니애니에서 이 군대를 묶어두었다.[4] 1782년 12월, 치투르 근교의 나라야나페트 야영지에서 하이데르 알리가 사망했다.[8][16]

그 뒤를 이어 군 총사령관이 된 것은 아들 티푸 술탄이었다.[16] 그는 마이소르 고지대에서 카르나타카로 이어지는 무수한 계곡 중 어딘가에 영국군을 굴러들어가게 했다.[17] 티푸 술탄은 총명한 인물로, 매우 대국적으로 사물을 파악하고 군사에도 뛰어나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마이소르의 호랑이'라고 불렸다.[17]

3. 4. 프랑스의 개입과 해전 (1782년-1783년)

피에르 앙드레 드 쉬프랑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1782년 2월 7일 벵골 만 사드라스 해역에서 에드워드 휴즈가 이끄는 영국 함대를 격파했다(사드라스 해전). 이 해전은 미국 독립 전쟁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해전이 더 벌어졌다.

1783년 6월 7일, 제임스 스튜어트 장군이 이끄는 마드라스 군은 프랑스 지배하에 있던 쿠들로르를 포위했다 (쿠들로르 포위전). 쉬프랑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쿠들로르 포위를 풀기 위해 진격했고, 6월 20일 쿠들로르 해역에서 영국 함대와 격돌하여 또다시 승리했다 (쿠들로르 해전 (1783)). 그러나 같은 해 9월 3일, 미국 독립 전쟁의 강화 조약인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강화했고, 남인도에서의 전투도 끝을 맺었다. 영국은 프랑스에 점령지를 반환했지만, 이후 프랑스가 남인도에 깊이 관여하는 일은 없어졌다.

3. 5. 전쟁의 종결 (1783년-1784년)

쉬프렌이 1782년 하이데르 알리를 만나는 모습, J. B. 모레의 판화, 1789년.

이 기간 동안, 동인도 회사 관계자들은 런던의 회사 본부로부터 전쟁을 종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티푸 술탄과 협상에 들어갔다. 예비 휴전 조항에 따라, 풀러턴 대령은 최근 정복한 모든 지역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티푸가 망갈로르에서 휴전 조건을 위반했다는 의혹으로 인해 풀러턴은 팔가우트체리에 머물렀다. 1월 30일 망갈로르 주둔군은 티푸 술탄에게 항복했다.

마라타 제국은 1782년 5월 살바이 조약을 통해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에서 이탈했으며, 영국이 마이소르로부터 영토를 회복하는데 지원을 약속했다.[12] 니잠 왕국 또한 군투르 현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전선에서 이탈했다.[12]

1784년 3월 11일, 망갈로르 조약이 체결되면서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은 종결되었다.[9] 양측은 서로의 영토를 ''전쟁 전 상태''로 되돌리는데 동의했다.[2] 이 조약은 인도의 역사에서 중요한 문서인데, 인도 세력이 회사에 조건을 제시한 마지막 사례였기 때문이다. 전후, 헤이스팅스(Hastings)는 이를 굴욕적인 강화라고 칭하며, 국왕과 의회에 "영국 국민의 신의와 명예가 동등하게 침해되었다"라고 하며 마드라스 정부를 벌할 것을 호소했다.

4. 주요 전투 및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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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7월, 하이데르 알리는 8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카르나틱을 침공하여 아르코트를 포위했다. 윌리엄 베일리 대령이 이끄는 영국군은 군투르에서 엑토르 먼로 대령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폴릴루에서 티푸 술탄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고 항복했다. 이 패배는 당시 동인도 회사의 인도에서의 가장 큰 타격으로 여겨졌다. 이후, 하이데르 알리는 아르코트 포위를 재개하여 11월 3일에 함락시켰다.

1780년 9월, 티푸 술탄이 이끄는 마이소르 군은 폴릴루 전투에서 윌리엄 베일리 대령 휘하의 영국군을 대파했다. 에어 코트 경이 이끄는 영국군은 포르토 노보 전투[3]와 숄린가르 전투에서 마이소르 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벨로르 포위를 풀었다.

1781년, 영국군은 네가파탐에서 3주간의 포위 끝에 네덜란드의 주요 전초 기지를 점령했다.

1782년 2월, 티푸 술탄은 탄조르 근처 아나구디에서 브레이스웨이트 대령이 지휘하는 영국군을 격파하고 모든 총을 탈취하고 전체 부대를 포로로 잡았다.[2] 같은 해 12월에는 치투르를 점령했다. 그러나 하이데르 알리가 암으로 사망하면서 티푸 술탄은 베드노르로 이동했다.

1783년, 영국군은 망갈로르를 점령했지만, 티푸 술탄은 망갈로르를 포위하고 결국 점령했다.[4] 한편, 윌리엄 풀러턴 대령은 팔갓체리와 코임바토르를 점령했다.

전투 서훈인 ''카르나틱''은 2개의 기간에 걸쳐 수여되었다.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1780년–1784년) 당시 하이데르 알리가 마드라스를 위협했을 때와,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1790년–1792년) 당시 마이소르 포위전까지이다.

4. 1. 주요 전투



1780년 9월, 티푸 술탄이 이끄는 마이소르 군은 폴릴루 전투에서 윌리엄 베일리 대령 휘하의 영국군을 대파했다. 이 패배는 당시 동인도 회사의 인도에서의 가장 큰 타격으로 여겨졌다.[2]

에어 코트 경이 이끄는 영국군은 포르토 노보 전투[3]와 숄린가르 전투에서 마이소르 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1782년 2월, 티푸 술탄은 탄조르 근처 아나구디에서 브레이스웨이트 대령이 지휘하는 영국군을 격파하고 모든 총을 탈취하고 전체 부대를 포로로 잡았다.[2]

같은 해, 사드라스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를 격파했다.

1783년, 쿠들로르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다시 한번 영국 함대를 격파했다.

전투 서훈인 ''카르나틱''은 2개의 기간에 걸쳐 수여되었다.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1780년–1784년) 당시 하이데르 알리가 마드라스를 위협했을 때와,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1790년–1792년) 당시 마이소르 포위전까지이다.

4. 2. 주요 사건



1780년 7월, 하이데르 알리는 8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카르나틱을 침공하여 아르코트를 포위했다. 윌리엄 베일리 대령이 이끄는 영국군은 군투르에서 엑토르 먼로 대령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폴릴루에서 티푸 술탄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고 항복했다. 이 패배 이후, 하이데르 알리는 아르코트 포위를 재개하여 11월 3일에 함락시켰다.

에어 코트 경이 이끄는 영국군은 포르토 노보와 숄린가르 전투에서 하이데르 알리를 격파하고, 벨로르 포위를 풀었다. 1781년, 영국군은 네가파탐에서 3주간의 포위 끝에 네덜란드의 주요 전초 기지를 점령했다.

1782년 2월, 티푸 술탄은 탄조르 근처 아나구디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2월에는 치투르를 점령했다. 그러나 하이데르 알리가 암으로 사망하면서 티푸 술탄은 베드노르로 이동했다. 1783년, 영국군은 망갈로르를 점령했지만, 티푸 술탄은 망갈로르를 포위하고 결국 점령했다. 한편, 윌리엄 풀러턴 대령은 팔갓체리와 코임바토르를 점령했다.

5. 망갈로르 조약과 전쟁의 결과

1784년 3월 11일,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은 망갈로르 조약을 체결하여 제2차 마이소르 전쟁을 종결지었다.[9] 양측은 서로의 영토를 ''전쟁 전 상태''로 되돌리는 데 동의했다.[2] 망갈로르 포위전은 해제되었고, 영토는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했으며, 티푸 술탄은 슈리랑가파트나로 귀환했다. 이 조약은 인도 역사에서 중요한 문서로 평가받는데, 이는 인도 세력이 영국 동인도 회사에 조건을 제시한 마지막 사례였기 때문이다.

5. 1. 조약의 내용

1784년 3월 11일,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은 망갈로르 조약을 체결하여 제2차 마이소르 전쟁을 종결지었다.[9] 양측은 서로의 영토를 ''전쟁 전 상태''로 되돌리는 데 동의했다.[2] 망갈로르 포위전은 해제되었고, 영토는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했으며, 티푸 술탄은 슈리랑가파트나로 귀환했다. 이 조약은 인도 역사에서 중요한 문서로 평가받는데, 이는 인도 세력이 영국 동인도 회사에 조건을 제시한 마지막 사례였기 때문이다.

5. 2. 전쟁의 결과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은 어느 한쪽의 결정적인 승리 없이 무승부로 끝났다. 1784년 3월 11일 체결된 망갈로르 조약에 따라 양측은 전쟁 이전 상태로 영토를 회복했고,[12] 망갈로르 포위전은 해제되었다. 티푸 술탄은 슈리랑가파트나로 귀환했다.

이 조약은 인도 세력이 영국에 조건을 제시한 마지막 사례로 기록되었다.[9] 전후 헤이스팅스는 이를 굴욕적인 강화라고 칭하며 마드라스 정부를 벌할 것을 호소했다.[9]

한편, 마라타 제국은 1782년 5월 살바이 조약을 통해 영국과 강화하면서 마이소르를 지원하기로 약속했고,[12] 니잠 왕국 또한 군투르 현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전선에서 이탈했다.[12] 이로써 삼자 동맹은 붕괴되었고, 마이소르는 고립되었다.

영국은 이후 마이소르와의 관계에서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이는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과 제4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으로 이어졌다. 영국 의회는 피트의 인도법을 통과시켜 동인도 회사를 정부 통제하에 두었다.

6. 전쟁의 의의 및 영향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은 인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이 전쟁은 인도 세력이 영국에 대항하여 협상 조건을 제시한 마지막 사례였다. 전쟁 이후 영국은 인도 내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망갈로르 조약의 조건에 따라, 영국은 1785년에 시작된 마이소르와 주변 국가인 마라타 제국 및 하이데라바드 니잠 간의 마라타-마이소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 의회에서 피트 행정부는 정치 문제에서 동인도 회사를 정부가 통제하도록 하는 피트의 인도법을 통과시켰다. 결국 영국이 남부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마이소르 군은 로켓 포병 등 신무기를 활용하여 영국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티푸 술탄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영국군에 맞섰다. 프랑스 해군의 개입은 영국 해군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은 제국주의 시대 강대국 간 각축전 속에서 지역 강국이 어떻게 생존을 위해 투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이데르 알리티푸 술탄은 외교적 동맹과 군사적 혁신을 통해 강대국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국제 정세의 변화와 내부적인 한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사건은 자주적인 외교와 국방력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교훈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4차례의 영국-마이소르 전쟁 중 두 번째 전쟁으로, 결국 영국이 남부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망갈로르 조약의 조건에 따라, 영국은 1785년에 시작된 마이소르와 주변 국가인 마라타 제국 및 하이데라바드 니잠 간의 마라타-마이소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 의회에서 피트 행정부는 정치 문제에서 동인도 회사를 정부가 통제하도록 하는 피트의 인도법을 통과시켰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와 자주 국방을 통해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6. 1. 인도 역사에서의 의의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은 인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이 전쟁은 인도 세력이 영국에 대항하여 협상 조건을 제시한 마지막 사례였다. 전쟁 이후 영국은 인도 내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망갈로르 조약의 조건에 따라, 영국은 1785년에 시작된 마이소르와 주변 국가인 마라타 제국 및 하이데라바드 니잠 간의 마라타-마이소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 의회에서 피트 행정부는 정치 문제에서 동인도 회사를 정부가 통제하도록 하는 피트의 인도법을 통과시켰다. 결국 영국이 남부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6. 2. 군사적 측면

마이소르 군은 로켓 포병 등 신무기를 활용하여 영국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티푸 술탄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영국군에 맞섰다. 프랑스 해군의 개입은 영국 해군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6. 3. 한국의 관점에서의 분석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은 제국주의 시대 강대국 간 각축전 속에서 지역 강국이 어떻게 생존을 위해 투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이데르 알리와 티푸 술탄은 외교적 동맹과 군사적 혁신을 통해 강대국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국제 정세의 변화와 내부적인 한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사건은 자주적인 외교와 국방력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교훈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전쟁은 4차례의 영국-마이소르 전쟁 중 두 번째 전쟁으로, 결국 영국이 남부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망갈로르 조약의 조건에 따라, 영국은 1785년에 시작된 마이소르와 주변 국가인 마라타 제국 및 하이데라바드 니잠 간의 마라타-마이소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 의회에서 피트 행정부는 정치 문제에서 동인도 회사를 정부가 통제하도록 하는 피트의 인도법을 통과시켰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와 자주 국방을 통해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참조

[1] 논문 Hanoverians, Germans, and Europeans: Colonial Identity in Early British India 2010-06
[2] 서적 Battles of the Honourable East India Company: Making of the Raj A.P.H. Publishing Corporation
[3] 서적 The decisive battles of India : from 1746 to 1849 inclusive https://archive.org/[...] London : Reeves & Turner 2022-05-04
[4] 논문 Searching for Gopal Drooge and the Murder of Captain William Richardson https://victorianweb[...] 2021-10-03
[5] 논문 The East India Company 'Interest' and the English Government, 1783–4 1937-12
[6] 서적 Battle Honours of the Indian Army, 1757–1971 Vision Books
[7] 문서 Bowring, p.84
[8] 문서 辛島『世界歴史大系 南アジア史3―南インド―』年表、p.42
[9] 문서 辛島『世界歴史大系 南アジア史3―南インド―』、p.205
[10] 문서 ガードナー『イギリス東インド会社』、p.148
[11] 문서 ガードナー『イギリス東インド会社』、p.149
[12] 문서 チャンドラ『近代インドの歴史』、p.71
[13] 문서 ガードナー『イギリス東インド会社』、p.150
[14] 문서 ガードナー『イギリス東インド会社』、p.151
[15] 웹사이트 Battle of Annagudi https://books.google[...]
[16] 웹사이트 KHUDADAD The Family of Tipu Sultan GENEALOGY http://www.royalark.[...]
[17] 문서 ガードナー『イギリス東インド会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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