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치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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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칸치푸람은 초기 타밀어와 산스크리트 문헌에서 '칸치' 또는 '카치페두'로 불렸으며, 굽타 제국 시대에는 '칸치푸람'으로 표기되었다. 팔라바 왕조 시대에 수도가 되면서 중요성이 커졌으며, 힌두교와 불교 학습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촐라, 판디아, 비자야나가라 제국 등 다양한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실크 사리 직조 산업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타밀나두 주의 칸치푸람 구의 수도이며, 주요 산업은 실크 사리 직조와 농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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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치푸람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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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칸치푸람 |
다른 이름 | 콘지베람 |
별칭 | 타밀 나두의 영적 수도 천 개의 사원의 도시 실크 도시 사원 도시 팔라바 나두의 수도 |
주 | 타밀나두주 |
구역 | 톤다이 나두 |
하위 구역 | 칸치푸람 |
설립 | 기원전 300년 |
명칭 유래 | 불명 |
지리 | |
면적 | 36.14 km2 |
고도 | 105 m |
인구 통계 | |
인구 (2011년) | 232,816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인구 순위 | 15위 |
거주민 | 칸치푸람 시민 |
언어 (공식) | 타밀어 |
행정 | |
정치 체제 | 시장-의회 |
행정 기관 | 칸치푸람 시립 공사 |
시장 | M. 마할락슈미 (DMK) |
시 공사 위원 | G. 칸난 I.A.S |
입법 의원 | C.V.M.P. 에질라라산 |
국회 의원 | G. 셀밤 |
경제 | |
명목 GDP (2023-24) | 14425000000 루피 |
식별 번호 | |
우편 번호 | 631501-631503 |
전화 지역 번호 | 044 |
차량 등록 번호 | TN-21 |
기타 정보 | |
시간대 | IST |
UTC 오프셋 | +5:30 |
웹사이트 | 칸치푸람 시립 공사 웹사이트 |
이미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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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
칸치푸람은 초기 타밀어와 산스크리트 문헌에서 '칸치(Kanchi)' 또는 '카치페두(Kachipedu)'로 알려졌다. 산스크리트어에서 'Ka'는 브라흐마를, 'anchi'는 숭배를 의미하며, 칸치는 브라흐마가 바라다라자 페루말을 숭배했던 장소를 의미한다. 브라흐마는 아티 바라다르(Athi Varadhar)를 조각하여 이곳에서 숭배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Kanci'라는 용어는 허리띠를 의미하며, 이 도시는 지구의 허리띠와 같다는 설명이 있다.[4]
칸치푸람은 고대부터 팔라바 왕조, 촐라 왕조, 비자야나가라 제국 등 여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번영과 쇠퇴를 반복했다. 6세기부터 9세기까지 팔라바 왕조의 수도로서 힌두교와 불교 학습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굽타 제국(4세기 초 ~ 5세기 말)의 가장 초기의 산스크리트 비문은 이 도시를 '칸치푸람(Kanchipuram)'으로 표기하며, 사무드라굽타가 비슈누고파 왕을 격파한 곳이다. 파타잘리(기원전 150년 또는 기원전 2세기)는 그의 저서 ''마하바샤(Mahabhasya)''에서 이 도시를 '칸치푸라카(Kanchipuraka)'라고 언급했다. 이 도시는 '칸치(Kanchi)', '칸치페두(Kanchipedu)', '칸치푸람(Kanchipuram)'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250~355년의 팔라바 비문과 찰루키아 왕조의 비문에서는 이 도시를 ''칸치푸라''(Kanchipura)라고 언급한다. ''자이나 칸치''(Jaina Kanchi)는 티루파루티 쿤드람 주변 지역을 지칭한다.
영국 통치 시대에는 이 도시를 '콘지바람(Conjeevaram)'이라고 불렀으며, 이후 '칸치푸람(Kanchipuram)'으로 변경되었다. 시정부는 '칸치푸람(Kancheepuram)'으로 개명되었지만, 구와 도시는 '칸치푸람(Kanchipuram)'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칸치푸람은 파니니의 아슈타드야이에서 칸치-프라스타(Kanchi-prastha)로 언급되며, 여러 푸라나에서도 등장한다. 또한 해탈을 제공하는 일곱 개의 도시 중 하나이다.
칸치푸람의 표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현지어인 타밀어 표기에서는 '''칸치푸람'''(காஞ்சீபுரம்ta)이라고 표기된다. 영국 통치 하에서는 '''칸지바람'''(Conjeevaram영어)이라고 표기되었다.
또한 칸치푸람은 줄여서 '''칸치''' (காஞ்சிta, Kanchi영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타밀어의 고전에는 '''칸지''' (கஞ்சிta)나 '''카치''' (கச்சிta)라는 이름으로, 불전에서는 '''향지'''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다.
3. 역사
13세기 말부터 판디아 왕조를 비롯한 여러 세력들이 칸치푸람의 지배권을 두고 각축을 벌였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칸치푸람을 통치하며 안정적인 시기를 보냈지만, 제국 멸망 이후 다시 혼란기를 겪었다.
17세기 후반부터 무굴 제국, 마라타 제국, 영국 동인도 회사 등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영국 동인도 회사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 간의 카르나틱 전쟁과 마이소르 술탄국과의 영마이소르 전쟁에서 칸치푸람은 중요한 전장이 되었다. 1780년 폴릴루 전투는 칸치푸람 근처 풀랄루르 마을에서 벌어졌으며, 마이소르의 하이데르 알리가 로켓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 이후 칸치푸람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를 거쳐 1947년 인도가 독립한 후 칸치푸람 구의 수도가 되었다.
3. 1. 고대
칸치푸람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은 기원전 3세기와 2세기 사이에 살았던 산스크리트 문법학자 파탄잘리의 저서에서 발견된다.[5] 이 도시는 마하바라타의 드라비다 왕국의 일부였으며, 4세기 산스크리트 시인 칼리다사는 "도시 중 최고" (나가레슈 칸치sa)로 묘사했다. 기원전 300년경의 고전 타밀어 상감 문학인 마니메갈라이와 페룸파나르루파다이에도 칸치푸람이 언급되어 있다. 칸치푸람이 초기 촐라의 수도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인도 역사가 P. T. 스리니바사 아이엔가르는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칸치푸람은 북쪽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침략을 우려한 팔라바 왕조가 6세기에 수도를 남쪽으로 이 도시로 옮기면서 중요성이 커졌다. 팔라바족은 성벽, 넓은 해자, 잘 정돈된 도로, 예술적인 사원으로 도시를 요새화했다. 팔라바 왕 마헨드라바르만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찰루키아 왕 풀라케신 2세 (610~642)는 카베리 강까지 팔라바 왕국을 침략했다. 팔라바족은 칸치푸람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 도시를 점령하려는 반복적인 시도를 좌절시켰다. 두 번째 침략은 풀라케신 2세에게 재앙으로 끝났는데, 풀라케신 2세는 수도 바타피로 후퇴해야 했고, 바타피는 포위되었으며, 풀라케신 2세는 마헨드라바르만 1세(600~630)의 아들인 나라심하바르만 1세 (630~668)에 의해 바타피 전투에서 사망했다. 팔라바족 통치하에서 칸치푸람은 힌두교와 불교 학습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나라심하바르만 2세 왕은 도시의 중요한 힌두 사원인 바이쿤타 페루말 사원, 칸치 카일라사나타르 사원, 바라다라자 페루말 사원, 이라바타네스와라 사원을 건설했다. 640년에 칸치푸람을 방문한 중국 여행가 현장은 이 도시의 둘레가 약 9.66km이고, 그 사람들은 용기, 경건함, 정의 사랑, 학습 존경으로 유명하다고 기록했다.
3. 2. 팔라바 왕조 시대 (6세기 ~ 9세기)
팔라바 왕조는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을 우려하여 6세기에 수도를 칸치푸람으로 옮기면서 이 도시는 중요성이 커졌다.[5] 팔라바 왕조는 성벽, 넓은 해자, 잘 정돈된 도로, 예술적인 사원으로 도시를 요새화했다. 팔라바 왕 마헨드라바르만 1세 통치 기간 동안, 찰루키아 왕 풀라케신 2세(610년 ~ 642년)는 카베리 강까지 팔라바 왕국을 침략했다. 팔라바 왕조는 칸치푸람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 도시를 점령하려는 반복적인 시도를 좌절시켰다.[5] 두 번째 침략은 풀라케신 2세에게 재앙으로 끝났는데, 풀라케신 2세는 수도 바타피로 후퇴해야 했고, 바타피는 포위되었으며, 풀라케신 2세는 마헨드라바르만 1세(600년 ~ 630년)의 아들인 나라심하바르만 1세(630년 ~ 668년)에 의해 바타피 전투에서 사망했다.[5] 팔라바 왕조 통치하에서 칸치푸람은 힌두교와 불교 학습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나라심하바르만 2세 왕은 도시의 중요한 힌두 사원인 바이쿤타 페루말 사원, 칸치 카일라사나타르 사원, 바라다라자 페루말 사원, 이라바타네스와라 사원을 건설했다.[5] 640년에 칸치푸람을 방문한 중국 여행가 현장은 이 도시의 둘레가 약 9.66km이고, 그 사람들은 용기, 경건함, 정의 사랑, 학습 존경으로 유명하다고 기록했다.[5]
3. 3. 촐라 왕조 시대 (9세기 ~ 13세기)
촐라 왕조는 9세기 후반 아디티야 1세가 팔라바 왕조의 아파라지타바르만을 격파하고 칸치푸람을 포함한 팔라바 왕국을 정복하면서 칸치푸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5] 촐라족 통치 하에 칸치푸람은 북부 부왕의 본부 역할을 수행했다.[6] 라자 라자 촐라 1세 (985-1014) 통치 기간 동안 칸치푸람은 '자얌콘다 촐라만달람'으로 개명되었으며,[7][8] 그는 카르차페스와라 사원을 건설하고 카막시 암만 사원을 개조했다.[8] 그의 아들 라젠드라 촐라 1세 (1012-1044)는 야토트카리 페루말 사원을 건설했다.[9] 트리로카나 시바차리아의 ''싯단타사라발리''에 따르면, 라젠드라 촐라 1세는 북인도 촐라 원정에서 돌아오면서 샤이바들을 데려와 칸치푸람에 정착시켰다고 한다.[10]
1218년경, 판디아 왕조의 마라바르만 순다라 판디안 (1216-1238)이 촐라국을 침략하여 왕국 깊숙이 침투했으나, 호이살라 왕조의 비라 나라심하 2세 (1220-1235)가 촐라 왕 쿨로퉁가 촐라 3세의 편에서 싸우면서 개입하여 구제되었다.[11][12] 비문은 칸치푸람에 강력한 호이살라 수비대가 존재했음을 나타내며, 1230년경까지 이 도시에 남아 있었다.[13] 그 직후 칸치푸람은 촐라족에게 정복당했으며, 자타바르만 순다라 판디안 1세가 1258년에 이 도시를 점령했다.[14] 칸치푸람은 1311년, 삼부바라야르가 말리크 카푸르의 침략으로 인한 무정부 상태를 이용하여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판디아족의 지배하에 있었다.[15][16]
3. 4. 판디아 왕조 및 기타 세력 (13세기 ~ 14세기)
1218년경, 판디아 왕 마라바르만 순다라 판디안 (1216~1238)이 촐라국을 침략하여 왕국 깊숙이 침투했으나, 호이살라 왕 비라 나라심하 2세 (1220~1235)가 촐라 왕 쿨로퉁가 촐라 3세의 편에서 싸우면서 개입하여 구제되었다.[5] 비문은 칸치푸람에 강력한 호이살라 수비대가 존재했으며, 1230년경까지 이 도시에 남아 있었음을 나타낸다.[5] 그 직후 칸치푸람은 촐라족에게 정복당했으며, 자타바르만 순다라 판디안 1세가 1258년에 이 도시를 점령했다.[5] 1311년, 삼부바라야르가 말리크 카푸르의 침략으로 인한 무정부 상태를 이용하여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이 도시는 판디아족의 지배하에 있었다.[5] 1313~1314년 베나드 (킬론, 케랄라)의 라비바르만 쿨라세카라와 카카티야 통치자 프라타파루드라 2세의 짧은 점령 기간을 거친 후,[5] 칸치푸람은 1361년에 마두라이 술탄국을 격파한 비자야나가라 제국 장군 쿠마라 캄파나에게 정복되었다.[5]
3. 5. 비자야나가라 제국 시대 (14세기 ~ 17세기)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1361년부터 1645년까지 칸치푸람을 통치했다.[1] 비자야나가라 통치를 증명하는 가장 초기의 비문은 1364년과 1367년 쿠마라 캄파나의 것으로, 카일라사나타르 사원과 바라다라자 페루말 사원에서 각각 발견되었다.[1] 이 비문들에는 무슬림 침략 기간 동안 버려졌던 카일라사나타르 사원의 힌두교 의식 재건이 기록되어 있다.[1]
하리하라 2세, 데바 라야 2세, 크리슈나 데바 라야, 아추타 데바 라야, 스리랑가 1세, 벤카타 2세 등 비자야나가라 왕들의 비문이 칸치푸람에서 발견된다.[1] 하리하라 2세는 바라다라자 페루말 사원에 보조금을 기부했다.[1] 15세기에 칸치푸람은 1437년 벨라마 나야크족, 1463년~1465년과 1474년~1475년 가자파티 왕국, 약 1480년 바흐마니 술탄국에게 침략당했다.[1] 비루팍샤 라야 2세의 1467년 비문에는 칸치푸람 인근 주둔지가 언급되어 있다.[1] 1486년, 칸치푸람 지역 총독 살루바 나라심하 데바 라야는 비자야나가라의 상가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살루바 왕조를 세웠다.[1] 그는 전임자들처럼 바라다라자 페루말 사원에 많은 기부를 했다.[1]
비자야나가라 통치자 중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크리슈나 데바 라야는 칸치푸람을 두 번 방문했으며, 그 시대의 비문 16개가 바라다라자 페루말 사원에서 발견되었다.[1] 타밀어, 텔루구어, 칸나다어, 산스크리트어 등 4개 언어로 된 비문에는 툴루바 왕조 왕들의 계보와 사원 유지를 위한 그들과 귀족들의 기여가 기록되어 있다.[1] 그의 후계자 아추타 데바 라야는 칸치푸람에서 진주로 자신의 몸무게를 재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진다.[1]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 아라비두 왕조는 탈리코타 전투에서 북부 영토를 잃은 후 남부 지역에서 권위를 유지하려 했다.[1] 벤카타 2세(1586년~1614년)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부흥시키려 했으나, 그의 사후 왕국은 혼란에 빠졌고, 1646년 골콘다와 비자푸르 술탄국에 대한 비자야나가라 왕 스리랑가 3세의 패배로 급격히 쇠퇴했다.[1]
비자야나가라 제국 멸망 후, 칸치푸람은 20년 이상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1]
3. 6. 근세 (17세기 ~ 19세기)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몰락한 후, 칸치푸람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1672년 골콘다 술탄국이 이 도시를 장악했지만, 3년 후 비자푸르에게 빼앗겼다. 1676년, 시바지는 비자푸르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골콘다 술탄국의 초청을 받아 칸치푸람에 도착했다. 그의 군사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칸치푸람은 1687년 10월 아우랑제브가 이끄는 무굴 제국에게 정복될 때까지 골콘다 술탄국의 지배를 받았다. 1688년 무굴군은 남부 원정 중에 시바지의 장남인 삼바지 휘하의 마라타군을 칸치푸람 근처 전투에서 격파했는데, 이로 인해 도시에 큰 피해가 발생했지만 무굴 통치는 확고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라다라자 페루말, 에캄바레스와라르, 카막시 암만 사원의 사제들은 아우랑제브의 우상 파괴에 대한 악명을 염두에 두고 우상들을 남부 타밀나두로 옮겼고, 1707년 아우랑제브가 사망한 후에야 복원되었다. 무굴 통치하에서 칸치푸람은 1700년대 초에 독립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카르나틱의 부왕령의 일부였으며, 무굴 통치에 대한 형식적인 승인만을 유지했다. 마라타족은 1724년과 1740년 카르나틱 시대 이슬람 침략으로 인해, 그리고 1742년에는 하이데라바드의 니잠에 의해 칸치푸람을 통치했다.
칸치푸람은 영국 동인도 회사가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의 카르나틱 전쟁과 마이소르 술탄국과의 영마이소르 전쟁에서 격전지였다. 2차 영마이소르 전쟁 중 유명한 1780년 폴릴루 전투는 마이소르의 하이데르 알리가 로켓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칸치푸람 근처의 풀랄루르 마을에서 벌어졌다. 1763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카르나틱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현재의 칸치푸람과 티루발루르 구를 포함하는 옛 친글푸트 구에 대한 카르나틱의 나바브로부터 간접적인 통제를 인수했다. 회사는 2차 영마이소르 전쟁 중에 이 지역을 직접 통제하에 두었고, 1794년에 친글푸트 수집국이 설립되었다. 1997년에 이 구는 둘로 나뉘었고 칸치푸람은 새로 만들어진 칸치푸람 구의 수도가 되었다.
3. 7. 현대 (20세기 ~ 현재)
칸치푸람은 20세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겪었다. 1763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카르나틱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현재의 칸치푸람과 티루발루르 구를 포함하는 옛 칭글푸트 구에 대한 간접적인 통제를 카르나틱의 나바브로부터 인수했다. 1794년 칭글푸트 수집국이 설립되었고, 1997년에 이 구는 둘로 나뉘어 칸치푸람이 새로 만들어진 칸치푸람 구의 수도가 되었다.
칸치푸람은 영국 동인도 회사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 간의 카르나틱 전쟁과 마이소르 술탄국과의 영마이소르 전쟁에서 중요한 전장이었다. 특히, 2차 영마이소르 전쟁 중 1780년에 벌어진 폴릴루 전투는 칸치푸람 근처의 풀랄루르 마을에서 벌어졌으며, 이 전투에서 마이소르의 하이데르 알리가 로켓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지리
칸치푸람은 첸나이에서 남서쪽으로 72km 떨어진 베가바티 강 유역에 위치해 있다. 베가바티 강은 팔라르 강의 지류이다. 도시 면적은 11.6km2이며 해발 83.2m이다. 칸치푸람 주변 지형은 평평하며 남쪽과 동쪽으로 경사져 있다. 이 지역의 토양은 주로 점토이며, 일부 양토, 점토, 모래가 있어 건설에 적합하다. 바라다라자 페루말 사원에 필요한 화강암은 칸치푸람에서 동쪽으로 10마일 떨어진 시바람 언덕에서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지진대 II 지역으로 분류되며, 리히터 규모 6까지의 지진이 예상될 수 있다.
칸치푸람은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 빅 칸치(시바 칸치): 도시의 서쪽 부분을 차지하며 두 구역 중 더 크다. 대부분의 시바 사원이 이곳에 있다.
- 리틀 칸치(비슈누 칸치): 도시의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대부분의 비슈누 사원이 이곳에 있다.
지하수는 관개에 사용되는 주요 수원이며, 칸치푸람 지역에는 24개의 운하, 2809개의 저수지, 1878개의 튜브 우물 및 3206개의 일반 우물이 있다. 이 지역은 약용 식물이 풍부하며, 역사적 비문에도 약용 가치가 언급되어 있다. Dimeria acutipes와 Cynodon barberi는 칸치푸람과 첸나이에서만 발견되는 식물이다.
4. 1. 기후
칸치푸람은 일반적인 열대 몬순 기후(쾨펜 ''Aw'')를 띤다.[18] 4월과 7월 사이에 평균 최고 기온은 37.5°C이며, 12월과 2월 사이에는 평균 최저 기온 16°C를 기록한다. 연중 상대 습도는 58%에서 84% 사이를 유지하며, 아침에 최고조에 달하고 저녁에 가장 낮다. 상대 습도는 11월과 1월 사이에 높고 6월에 가장 낮다.강우량은 대부분 북동 몬순 기간 동안 벵골만의 저기압으로 인한 사이클론성 폭풍의 형태로 발생한다. 칸치푸람은 북동 몬순과 남서 몬순 모두에서 강우량을 받는다. 1943년 10월 10일, 칸치푸람에서 기록된 가장 높은 일일 강수량은 450mm였다. 지배적인 풍향은 아침에는 남서풍이고 저녁에는 남동풍이다. 2015년 칸치푸람 지구는 북동 몬순 기간에 타밀나두에서 가장 높은 강수량인 182cm을 기록했으며, 같은 해 11월 13일에는 340mm의 비가 내려 심각한 홍수가 발생했다.
5. 정치 및 행정
칸치푸람 시는 1866년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으며, 1947년에 1급 시, 1983년에는 선발급 시, 2008년에는 특별급 시로 승격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면적은 이며, 51개 구역을 가지고 있고 칸치푸람 지구에서 가장 큰 시이다. 2011년 칸치푸람의 인구는 234,353명이었다. 시의 기능은 일반, 공학, 세입, 공중 보건, 도시 계획 및 컴퓨터의 6개 부서로 나뉘며, 이 모든 부서는 최고 행정 책임자인 시 위원의 통제를 받는다. 입법 권한은 각 구역을 대표하는 51명의 구성원에게 있으며, 입법 기관은 부의장의 보좌를 받는 선출된 의장이 이끈다. 2021년 8월 24일, 주 정부는 칸치푸람 읍을 칸치푸람 시 시립 회사로 승격한다고 발표했다.[7]
시청 공무원 | |
---|---|
시장 | M. 마할락시미 |
시 위원 | G. 칸난 |
부시장 | R. 쿠마라구루나탄 |
선출된 구성원 | |
입법부 의원 | C. V. M. P. 에질라라산 |
국회의원 | G. 셀밤 |
칸치푸람은 칸치푸람 주 의회 선거구에 속한다. 1971년과 2011년 사이에 치러진 10번의 선거 중 7번을 전 인도 안나 드라비다 문네트라 카자감 (AIADMK)이 승리했다. 드라비다 문네트라 카자감 (DMK)은 1971년과 1989년 선거에서, 동맹인 파탈리 마칼 카치는 2006년 선거에서 이 지역구를 차지했다. 현재 입법부 의원은 AIADMK 소속 V. 소마순다람이다.
칸치푸람 록 사바 선거구는 2008년 획정 이후 새롭게 형성된 인도 의회 선거구이다. 이 선거구는 1951년 선거에 존재했으며, 2008년에는 첸갈푸트 선거구와 첸나이 남부 선거구의 일부를 병합하여 형성되었다. 이 선거구는 지정 카스트 (SC) 후보를 위해 예약되어 있다. 전 인도 안나 드라비다 문네트라 카자감의 K. 마라가탐이 이 선거구의 현 국회의원이다. 인도 작가이자 정치인이자 DMK의 창립자인 C. N. 안나두라이는 칸치푸람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최초의 드라비다 정당 출신이자 탈식민지 인도에서 과반수 정부를 구성한 최초의 비-의회 지도자였다.
칸치푸람의 치안은 부경찰감의 지휘를 받는 타밀나두 경찰의 칸치푸람 하위 부서에서 제공한다. 이 부대의 특별 부대에는 지구 수준에서 운영되는 금지 시행, 지구 범죄, 사회 정의 및 인권, 지구 범죄 기록 및 특별 부대가 포함되며, 이 부대는 경찰감의 지휘를 받는다.
5. 1. 인권 문제
칸치푸람은 전국 평균보다 아동 노동 및 강제 노동 비율이 높다.[1] [2] 1999년부터 칸치푸람에 야간 학교를 개설하여 아동 노동을 돕고 있다는 혐의로 지역 행정부가 기소되었다.[1] 칸치푸람에는 약 40,000명에서 50,000명의 아동 노동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바라나시의 동일 산업에는 85,000명이 있다.[2]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1만인도 루피(200USD)에서 1.5만인도 루피(300USD)에 거래되며, 가족 전체가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2] 아동 노동은 인도에서 아동 (노동 서약) 법 및 아동 노동 (금지 및 규제) 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지만, 이러한 법률은 엄격하게 시행되지 않고 있다.[3]6. 인구
칸치푸람의 인구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7세기 나라심하 바르만 1세 시대에는 약 10km2 면적에 10,000명이 거주했다.[9] 이후 인구가 13,000명으로 증가하면서 도시는 사각형 거리와 교차로 형태로 발전했다.[10] 도시 정착지는 주로 카스트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10] 난디바르만 팔라반 2세 시대에는 높은 플랫폼과 구운 벽돌로 지어진 집들이 등장했으며, 앞마당 베란다, 뒷마당 정원, 환기 시설, 빗물 배수 시설 등이 도입되었다.[10] 티르베카 사원과 농업 노동자들의 집은 도시 외곽에 위치했다.[11]
촐라 시대에 칸치푸람은 수도는 아니었지만 왕궁이 있었고, 도시 개발은 동쪽으로 확장되었다.[10] 비자야나가라 시대에는 인구가 25,000명으로 증가했다.[10] 1901년 영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칸치푸람의 인구는 46,164명이었으며, 힌두교도 44,684명, 무슬림 1,313명, 기독교인 49명, 자이나교도 118명이었다.[12]
201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칸치푸람의 인구는 164,384명이며, 성비는 남성 1,000명당 여성 1,005명으로 전국 평균보다 높았다.[17] 6세 미만 인구는 15,955명(남자 8,158명, 여자 7,797명)이었다. 지정 카스트 및 지정 부족은 인구의 각각 3.55%와 0.09%를 차지했다. 평균 문맹률은 79.51%로 전국 평균보다 높았다.[17]
2011년 종교 인구 조사에 따르면 칸치푸람에는 힌두교 신자가 93.38%, 무슬림이 5.24%, 기독교 신자가 0.83%, 시크교 신자가 0.01%, 불교 신자가 0.01%, 자이나교 신자가 0.4%, 기타 종교 신자가 0.11%, 무교 또는 종교적 선호도를 밝히지 않은 사람이 0.01%였다.[18]
칸치푸람에는 416ha의 주거용 부동산이 있으며, 대부분 사원 주변에 있다. 상업 지역은 62ha로 도시의 6.58%를 차지한다. 산업 개발은 약 65ha이며, 대부분 수직물 방적, 실크 직조, 염색 및 쌀 생산 시설이 위치해 있다. 89.06ha는 교통 및 통신 기반 시설에 사용된다.
7. 경제
칸치푸람의 주요 산업은 실크 사리 직조와 농업이다. 2008년 기준으로 약 5,000가구가 사리 생산에 종사했다. 주요 산업으로는 면 생산, 경공업, 전기 제품 제조, 식품 가공 등이 있다. 칸치푸람에는 25개의 실크 및 면사 산업, 60개의 염색 공장, 50개의 쌀 가공 공장, 42개의 기타 산업이 있다. 관광, 호텔, 레스토랑, 지역 교통과 같은 서비스업 또한 중요한 산업이다.
국유 은행인 비자야 은행, 인도 스테이트 은행, 인디안 은행, 카나라 은행, 펀자브 국립 은행, 데나 은행 및 ICICI 은행과 같은 사립 은행 등 주요 은행들이 칸치푸람에 지점을 두고 있다. 이 은행들은 도시 곳곳에 현금 자동 입출금기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7. 1. 칸치푸람 사리
칸치푸람 사리는 칸치푸람의 전통적인 실크 직조 및 수공예 산업 중심지이다. 이 산업의 가치는 10억인도 루피(1818만달러)에 달하지만, 직조 공동체는 열악한 마케팅 기법과 중복된 시장 참여자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1] 2005년에 "칸치푸람 실크 사리"는 지리적 표시 태그를 받았는데, 이는 이 라벨을 받은 인도 최초의 제품이다.[2][3]
칸치푸람의 실크 거래는 라자 라자 촐라 1세(985–1014) 왕이 사우라슈트라 구자라트에서 온 직공들을 칸치로 이주하도록 초청하면서 시작되었다.[1] 이 기술은 비자야나가라 제국 시대인 15세기에 안드라프라데시에서 대규모 직공 이주로 증가했다.[1] 1757년 프랑스 군의 포위 공격으로 이 도시는 파괴되었지만, 18세기 말에 직조가 다시 나타났다.[1]
칸치푸람은 비단 직물 사리의 수공업 산업으로 유명하다.
7. 2. 기타 산업
칸치푸람은 비단 직물 사리 수공업 산업으로 유명하다.8. 교통
첸나이-방갈로르 국도, NH 4가 도시 외곽을 통과한다. 타밀나두 주 교통 공사(TNSTC)에서 첸나이, 방갈로르, 빌루푸람, 티루파티, 티루타니, 티루반나말라이, 벨로르, 살렘, 코임바토르, 틴디바남 및 폰디체리로 매일 버스 서비스를 제공한다. 첸나이로 가는 주요 버스 노선은 2개로, 하나는 푸남말리를 경유하고 다른 하나는 탐바람을 경유한다. 타밀나두 주 교통 공사의 빌루푸람 지부에서 시내 버스 서비스를 제공한다. 2006년 기준으로, 도시에서 운행되는 총 191개 노선에 403대의 버스가 있었다.[11]
이 도시는 또한 칸치푸람 역을 통해 철도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다. 첸갈패트-아라코남 철도 노선이 칸치푸람을 지나가며, 여행객들은 해당 목적지로 가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매일 폰디체리와 티루파티행 기차가 운행되며, 마두라이행 주 1회 급행 열차와 나가르코일행 주 2회 급행 열차가 운행된다. 첸갈패투와 아라코남 양쪽에서 출발하는 2대의 여객 열차가 칸치푸람을 통과한다.[11]
가장 가까운 국내선 및 국제선 공항은 도시에서 72km 떨어진 첸나이 국제공항이다. 제안된 새 첸나이 국제공항은 칸치푸람 인근의 파란두르에 건설될 예정이다.[11]
9. 교육
칸치푸람은 전통적으로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신앙의 종교 교육 중심지였다.[1] 불교 수도원은 불교 교육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했다. 마헨드라 바르만 1세 통치 기간 동안 힌두교가 점차 부활하면서 산스크리트어가 공용어로 부상함에 따라 힌두교 교육 시스템이 두각을 나타냈다.[2]
2011년 기준으로 칸치푸람에는 49개의 등록된 학교가 있으며, 그 중 16개는 시에서 운영한다.[3] 지구 행정부는 비단 직조 산업에 종사하는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야간 학교를 개설했는데, 2001년 12월 현재 이 학교들은 1999년 9월부터 총 127명을 교육하고 260명의 학생을 등록했다.[4] Larsen & Toubro는 2012년 5월 24일 칸치푸람에 인도 최초의 철도 건설 훈련 센터를 개관하여 연간 300명의 기술자와 180명의 중간 관리자 및 엔지니어를 양성할 수 있다.[5] 스리 찬드라세카렌드라 사라스와티 비스와 마하비디알라야와 체티나드 연구 교육 아카데미(CARE)는 칸치푸람에 있는 두 개의 인도 정부가 지정한 대학이다.[6] 65년 역사를 자랑하는 파차이아파르 남자 대학은 발랄 파차이아파르가 설립하였으며 베가바티 강둑에 있다. 이 대학은 다양한 과목의 학부 및 대학원 과정을 제공하며, 칸치푸람 탈루크에 있는 유일한 정부 지원 기관이다.
칸치푸람에는 정보 기술 분야의 학부 및 대학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공-민간 파트너십 기관인 4개의 인도 정보 기술 연구소 중 하나가 있다.[7] 이 도시에는 2개의 의과 대학이 있는데, 1969년에 설립된 아리그나르 안나 기념 암 연구소 병원은 타밀나두 주 정부 보건부에서 운영하며[8], 민간 소유의 미낙시 의과 대학이 있다.[9] 이 도시에는 6개의 공학 대학,[10] 3개의 폴리텍 대학, 6개의 인문 및 과학 대학이 있다.[11]
10. 종교
칸치푸람은 팔라바 왕조 시대부터 수많은 사원이 건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바 신을 모시는 에칸바라나타 사원은 시바교의 5대 성지 중 하나로 꼽히며, 시바 신이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중 "지(地)"의 모습을 나타내는 곳으로 여겨진다. 그 외에 카마크시 암만 사원, 바라다라자 페루말 사원, 쿠마라 코탐 사원, 가자페슈바랄 사원, 카일라사나타 사원 등이 있다.
동쪽으로 65km 떨어진 벵골 만 연안에는 팔라바 왕조의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마하발리푸람이 있으며, 7세기를 주 시기로 하는 건조물군은 그 중요성으로 인해 세계 유산의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10. 1. 힌두교

힌두교도들은 칸치푸람을 인도의 7대 성지 중 하나인 사프타 푸리로 여긴다.[9] 힌두교에 따르면, 크셰트라는 성스러운 땅, 활력의 장, 최종적인 성취, 즉 ''모크샤''를 얻을 수 있는 장소이다. ''가루다 푸라나''는 칸치푸람을 포함한 7개의 도시가 ''모크샤''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이 도시는 바이슈나바와 사이바 모두에게 순례지이다.
바라다라자 페루말 사원은 마하 비슈누에게 헌정되었으며, 칸치푸람에서 가장 큰 비슈누 사원이다. 이 사원에는 촐라, 판디야, 칸다바라야스, 체라s, 카카티야, 삼부바라야, 호이살라 및 비자야나가라와 같은 다양한 왕조의 약 350개의 비문이 있는데, 이는 사원에 대한 다양한 기부와 칸치푸람의 정치적 상황을 나타낸다.[10][11] 1053년에 촐라에 의해 개조되었으며,[12] 위대한 촐라 왕 쿨로퉁가 촐라 1세와 비크라마 촐라의 통치 기간 동안 확장되었다. 14세기에는 후기 촐라 왕들이 또 다른 벽과 고푸람을 건설했다. 이곳은 마하 비슈누의 108개의 신성한 거처인 ''디비아 데삼'' 중 하나이다.[13] 성소 위에 금과 은으로 도금된 조각된 도마뱀이 있으며, 로버트 클라이브가 선물한 에메랄드 목걸이(클라이브 마카라칸디)는 여전히 의식 때 신을 장식하는 데 사용된다. 이 사원은 이 도시가 '''칸치'''라는 이름을 얻게 된 주요 이유인데, 산스크리트어로 Ka는 브라흐마를, anchi는 예배를 의미하며, 칸치는 브라흐마가 '''바라다라자 페루말'''을 숭배했던 장소를 뜻한다. 브라흐마는 아티 바라다르를 조각하여 이곳에서 숭배했다.
야토트카리 페루말 사원은 ''알바르'' 성자 포이가이 알바르의 탄생지이다. 파탄잘리가 쓴 페룸파아나트루파다이, 실라파티카람(서기 2~3세기), 파탄잘리 마하바라탐, 톨카피암(기원전 3세기)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7~9세기의 바이슈나바 정전인 날라야이라 디비야 프라반담에서 포이가이 알바르, 페얄바르, 부타탈바르, 티루말라이사이 아바르에 의해 존경받고 있다.
티루 파라메스와라 빈나가람 중앙 신전에는 비슈누가 각각 묘사된 세 층의 신전이 있다. 성소 주변의 복도에는 팔라바 통치와 정복을 묘사한 일련의 조각품이 있다. 이 도시는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비슈누 사원이며 팔라바 왕 파라메스와라바르만 2세(728–731)에 의해 건설되었다.
아슈타부자카람, 티루트탕카, 티루벨루카이, 울라갈란타 페루말 사원, 티루 파블라 바남, 판다바 투타르 페루말 사원은 이 도시의 비슈누의 108개 유명한 사원인 디비야 데삼 중 하나이다. 울라갈란타 페루말 사원 안에 3개, 카마크시 암만 사원과 에캄바레스와라르 사원에 각각 1개씩 총 5개의 디비야 데삼이 더 있다.
에캄바레스와라르 사원은 칸치푸람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바에게 헌정되었으며,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이 사원의 관문 탑 또는 ''고푸람''은 59m 높이로, 인도에서 가장 높은 사원 탑 중 하나이다. 이 사원은 자연의 다섯 가지 주요 요소인 땅, 물, 공기, 하늘, 불의 현현을 나타내는 ''판차 부타 스탈람''이라고 불리는 다섯 사원 중 하나이며, 땅을 나타낸다. 또한 에캄바라나타르 사원 안에 찬드라추다 페루말 또는 닐라팅갈 툰담 페루말 사원이라고 불리는 마하 비슈누 사원의 108개 성지가 있다.
카일라사나타르 사원은 시바에게 헌정되었으며, 팔라바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힌두 사원이며, 인도 고고학 조사국에 의해 고고학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사원에는 조각품이 있는 일련의 셀이 있다.
카마크시 암만 사원에서 여신 파르바티는 ''얀트라'', ''차크라'' 또는 ''피탐''(지하실)의 형태로 묘사된다. 이 사원에서 ''얀트라''는 신상 앞에 놓여 있다. 아디 상카라는 이 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 사원 이후에 칸치 마타를 설립한 것으로 믿어진다.
난디바르만 2세(720-796)에 의해 건설된 묵티스와라르 사원과 나라심하바르만 팔라바 2세(720-728)에 의해 건설된 이라바타네스와라 사원은 팔라바 시대의 다른 시바 사원이다. 카치 메트랄리 – 카르차페스와라르 사원,[9] 오나칸탄 탈리, 카치 아네카탕가파담, 쿠랑가닐루탐, 그리고 티루칼리메두의 카라이티루나타르 사원은 7~8세기의 타밀 사이바 정전인 ''테바람''에서 존경받는 도시의 시바 사원이다.

쿠마라코탐 사원은 무루가에게 헌정되었으며, 에캄바레스와라르 사원과 카마크시 암만 사원 사이에 위치하여 소마스칸다 (시바와 파르바티 사이의 아이인 스칸다) 숭배로 이어진다. 산스크리트어 ''스칸다푸라나''에서 번역된 타밀 종교 저서 ''칸다푸라남''은 1625년 카치아파 시바차르야에 의해 이 사원에서 작곡되었다.
칸치 마타는 힌두교 수도원 기관으로, 공식 역사에 따르면 칼라디의 아디 상카라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그 역사는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 관련된 주장으로는 아디 상카라가 칸치푸람에 와서 칸치 마타를 "다크시나 뭄라야 사르바그나 스리 칸치 카마코티 피탐"이라고 명명하고, 죽기 전에 다른 대륙의 마타(종교 기관) 위에 사르바그나 피타, 즉 최고 지위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다른 역사적 기록에서는 이 마타가 아마도 18세기 쿰바코남에서 싱게리 마타의 지부로 설립되었으며, 독립을 선언했다고 한다.
고대 시대에 유명했던 또 다른 마타는 칸치푸람의 카일라사나타르 사원 근처에 위치한 우파니샤드 브람함 무트였다. 이 마타는 힌두교의 모든 주요 우파니샤드에 대한 주석을 쓴 성자인 우파니샤드 브라흐마요긴의 마하사마디가 있다. 위대한 현자 사다시바 브라흐멘드라가 이 마타에서 산야사를 취했다고 한다.
인지메두는 또한 많은 야그나 의식이 마을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야그나 베디카이라고도 불린다. 페르나말루르 타운에서 3km 떨어져 있다. 팔라바 왕조 시대부터 수많은 사원이 건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바 신을 모시는 에칸바라나타 사원은 시바교의 5대 성지 중 하나로 꼽히며, 시바 신이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중 "지(地)"의 모습을 나타내는 곳으로 여겨진다.
그 외에 카마크시 암만 사원, 바라다라자 페루말 사원, 쿠마라 코탐 사원, 가자페슈바랄 사원, 카일라사나타 사원 등이 있다.
10. 2. 불교

불교는 칸치푸람에서 1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번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1] 칸치푸람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불교도에는 아리아데바(2~3세기) - 날란다 대학교의 나가르주나의 후계자 - , 디그나가, 그리고 팔리어 주석가인 붓다고사와 담마팔라가 있다.[2] 민간 전승에 따르면, 5/6세기 불교 승려이자 소림쿵푸의 창시자인 보리달마는 칸치푸람 출신 팔라바 왕의 셋째 아들이었다.[3] 하지만, 다른 전승에서는 그의 기원을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돌린다.[4] 칸치푸람의 불교 기관들은 상좌부 불교를 미얀마와 태국의 몬족에게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몬족은 다시 이 종교를 유입되는 버마족과 태국인에게 전파했다.[5]
쿠르키하르 (비하르 주 가야 인근의 아파나카 비하라)에서 발굴된 여러 청동상들은 기증자 대다수가 칸치 출신임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쿠르키하르가 9세기에서 11세기 동안 칸치에서 온 방문객들의 주요 중심지였음을 나타낸다. 팔라바 왕조 시대부터 수많은 사원이 건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0. 3. 자이나교


칸치푸람은 자이나교의 주요 중심지였으며, Samantabhadra와 Akalanka와 같은 몇몇 유명한 자이나교 아차리아와 관련이 있다. 자이나교는 쿤다 쿤다차르야(1세기)에 의해 칸치푸람에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 Akalanka (3세기)에 의해 이 도시로 전파되었다. 팔라바 왕조 이전 칸치푸람을 통치했던 칼라브라는 자이나교를 따랐으며, 왕족의 후원으로 인기를 얻었다.[14] 팔라바 왕 신하비슈누, 마헨드라 바르만, 심하바르만(550-560)은 6세기와 7세기 동안 ''Nayanmars''와 ''알바르''가 등장하기 전까지 자이나교를 따랐다.[14] Mahendravarman I은 Naynamar의 Appar의 영향으로 자이나교에서 힌두교로 개종했는데, 이는 종교 지형의 전환점이 되었다.[14] 힌두교의 두 종파인 샤이비즘과 바이슈나비즘은 각각 아디 상카라와 라마누자의 영향으로 부활했다. 이후 촐라와 비자야나가라 왕들은 자이나교를 관용했고, 자이나교는 여전히 칸치에서 행해졌다.[14]
Jina Kanchi 재단 수도원의 원래 세트는 칸치푸람에 있었다. 그 원래 부지는 현재 Thiruparthikundram에 있는 Trilokyanatha/Chandraprabha 사원으로 대표된다. 이 사원은 팔라바 왕 Narasimhavarman II, 촐라 왕 Rajendra Chola I, Kulothunga Chola I, Vikrama Chola의 비문, 그리고 크리슈나데바라야의 칸나다 비문이 있는 쌍둥이 자이나교 사원이다. 이 사원은 타밀나두 고고학 부서에서 관리한다. Jina Kanchi 수도원은 16세기에 빌루푸람 지구의 깅기 인근 멜시타무르로 이전되었다. 칸치푸람 인근 여러 마을에는 자이나교 신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많은 역사적인 자이나교 유적지가 존재한다.[14]
10. 4. 기타 종교
이 도시에는 두 개의 모스크가 있다. 하나는 에캄바레스와라르 사원 근처에 있는데, 17세기에 아르코트의 나바브가 통치하는 동안 지어졌고, 다른 하나는 바이쿤타 페루말 사원 근처에 있는데, 힌두 사원과 공동 연못을 사용한다. 무슬림들은 바라다라자(스와미) 사원의 축제에 참여한다. 칸치푸람에는 1921년 맥클린이라는 영국인에 의해 지어진,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교회인 크리스트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아치와 기둥이 있는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벽돌 구조로 지어졌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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