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일본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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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일본공산당은 1926년 12월 재건된 일본의 비합법 공산주의 정당으로,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았다. 1920년대 후반 후쿠모토주의와 야마카와주의의 대립과 코민테른의 개입으로 당내 혼란을 겪었으며, 1928년 3·15 사건과 4·16 사건을 거치며 당원들이 대거 검거되어 궤멸되었다. 이후 무장공산당, 비상시공산당, 린치공산당 등으로 분열되었고, 스파이 침투와 지도부 검거, 당원들의 전향 등으로 1935년 사실상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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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일본공산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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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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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 일본 공산당 |
유형 | 비합법 정당 |
존속 기간 | 1926년 ~ 1928년 |
이념 |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
정치적 입장 | 극좌 |
국제 연대 | 코민테른 |
관련 단체 | 일본 노동 조합 전국 협의회 |
해산 사유 | 3.15 사건으로 인한 탄압 |
역사 | |
결성 | 1926년 12월 4일 |
해산 | 1928년 |
지도부 | |
서기장 | 후쿠모토 가즈오 |
중앙 집행 위원장 |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
당원 | |
당원 수 | 약 1000명 |
관련 항목 | |
관련 항목 | 일본 공산당 코민테른 27년 테제 3.15 사건 |
로마자 표기 | |
로마자 표기 | Dai-niji Kyōsantō |
2. 역사
1922년 일본공산당이 창당되었으나, 1924년에 해산되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일본공산당 측에서 당원 수를 부풀려 보고했기 때문에 일본공산당의 세력을 과대평가하여, 제1차 일본공산당의 해산을 인정하지 않고 공산당 재건을 요구했다. 1925년 8월, 사노 마나부를 중심으로 당 재건을 위한 공산주의자 그룹 뷰로가 발족했다. 이 뷰로는 1926년 12월 4일 야마가타현의 고시키온천에서 제3회 당대회를 개최하여 일본공산당 재건을 결의하면서 발전하였다(제2차 일본공산당). 이 대회는 어느 회사의 송년회를 위장하여 17명이 모여서 진행되었다.
당시 중앙집행위원으로 취임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중앙집행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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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마사노스케 |
토쿠다 큐이치 |
사노 마나부 |
후쿠모토 카즈오 |
사노 후미오 |
미타무라 시로 |
나베야마 사다치카 |
이치카와 쇼이치 |
이들 대부분은 후쿠모토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활동가들이었다. 제2차 일본공산당은 제1차와 마찬가지로 비합법 정당이었으며, 코민테른의 지도성을 승인하여 코민테른 일본지부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1927년 코민테른은 27년 테제를 통해 후쿠모토주의와 야마카와주의를 모두 부정하였고, 후쿠모토는 실각해서 두 번 다시 당권을 잡지 못했다. 1928년 2월에는 기관지 『적기』(당시에는 셋키せっき라고 읽었다)가 창간되었고, 같은 달 치러진 제1회 보통선거에서 공산당의 프론트 조직인 노동농민당(1926년 3월 창당)을 통해 야마모토 센지 등 2명의 당선자를 냈다. 한편, 아라하타 칸손, 야마카와 히토시 등은 잡지 『노농』을 창간해 비공산당 사회주의자 집단 노농파를 출범한다.
1928년 3·15 사건으로 당원 약 1,600명이 검거되고, 노동농민당 등 관련 단체들이 해산되었다. 1929년 4·16 사건으로 지하당원들까지 검거되면서 당 중앙이 궤멸되었다. 이후 제2차 일본공산당은 무장공산당(1929-1930년), 비상시공산당(1931-1932년), 린치공산당(1933-1935년)으로 세분화된다.
1933년 일본 공산당 스파이 사문 사건으로 지도부가 검거되면서 사실상 붕괴했다. 1935년 마지막 중앙위원 하카마다 사토미가 검거되면서 제2차 일본공산당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소련에 망명했던 노사카 산조, 야마모토 겐조 등이 당 재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해방 이후, 도쿠다 규이치, 시가 요시오, 미야모토 겐지 등 옥중에서 전향하지 않은 이들이 당을 재건하고 주도권을 장악했다.
2. 1. 재건과 코민테른의 개입 (1925-1927)
코민테른은 제1차 일본공산당의 해산을 인정하지 않고 공산당 재건을 요구했다. 코민테른이 일본공산당의 세력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인데, 이는 일본공산당 측에서 당원 수를 부풀려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재건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웠다.1925년 8월, 사노 마나부를 중심으로 당 재건을 위한 공산주의자 그룹 뷰로가 발족했다. 이 뷰로가 발전하여 1926년 12월 4일 야마가타현의 고시키온천에서 제3회 당대회가 개최되어 일본공산당 재건이 결의되었다(제2차 일본공산당). 이 대회는 어느 회사의 송년회를 위장하여 17명이 모여서 진행되었다. 이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취임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중앙집행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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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마사노스케 |
토쿠다 큐이치 |
사노 마나부 |
후쿠모토 카즈오 |
사노 후미오 |
미타무라 시로 |
나베야마 사다치카 |
이치카와 쇼이치 |
이들 대부분은 후쿠모토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활동가들이었다. 제2차 일본공산당은 제1차와 마찬가지로 비합법 정당이었으며, 코민테른의 지도성을 승인하여 코민테른 일본지부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2. 2. 27년 테제와 노농파의 분열 (1927-1928)
1927년, 코민테른은 후쿠모토주의와 야마카와주의의 대립으로 인한 일본 당 조직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문제위원회를 열었고, 일본공산당의 와타나베, 후쿠모토, 도쿠다 규이치, 사노 후미오가 소환되었다. 반대측의 야마카와 히토시도 소환되었으나 불응했다. 같은 해 7월, 동 위원회에서 27년 테제를 발령하여 후쿠모토주의와 야마카와주의가 모두 부정당했고(일본에서 공표된 것은 1928년 3월), 1926년 일본 사상계를 휩쓸었던 후쿠모토는 실각해서 두 번 다시 당권을 잡지 못했다. 이에 따라 12월 후쿠모토파가 일소된 새로운 당 지도부가 조직되었고, 당 위원장에 사노 마나부, 기타 임원에 와타나베, 나베야마 사다치카, 이치카와 쇼이치 등이 취임했다.이듬해 1928년 2월에는 기관지 『적기』(이 때는 셋키せっき라고 읽었다)가 창간되었고, 같은 달 치러진 제1회 보통선거에서 공산당의 프론트 조직인 노동농민당(1926년 3월 창당)을 통해 야마모토 센지 등 2명의 당선자를 냈다.
한편, 제1차 일본공산당 창당의 중심 세력이었으나 제2차 일본공산당에 참여하지 않은 아라하타 칸손, 야마카와 히토시 등 노장파 사회주의자들은 잡지 『노농』을 창간해 비공산당 사회주의자 집단 노농파를 출범한다. 공산당에서 이들을 제명했으나, 노농파 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제2차 공산당에 참여한 적이 없으므로 이 제명 처분은 무의미한 것이다.
2. 3. 탄압과 궤멸 (1928-1935)
1928년 3·15 사건으로 당원 약 1,600명이 검거되고, 노동농민당 등 관련 단체들이 해산되었다. 1929년 4·16 사건으로 지하당원들까지 검거되면서 당 중앙이 궤멸되었다.이후 제2차 일본공산당은 무장공산당(1929-1930년), 비상시공산당(1931-1932년), 린치공산당(1933-1935년)으로 세분화된다.
무장공산당 시기에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극좌적 무장 투쟁과 합법 무산 정당 해소 운동을 벌였다. 비상시공산당 시기에는 당세를 회복했지만, 32년 테제의 '천황제 폐지' 슬로건 강요와 특고 스파이 침투로 다시 궤멸되었다.
린치공산당 시기에는 옥중 지도부의 전향과 스파이 문제로 쇠퇴했다. 1933년 일본 공산당 스파이 사문 사건으로 지도부가 검거되면서 사실상 붕괴했다. 1935년 마지막 중앙위원 하카마다 사토미가 검거되면서 제2차 일본공산당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2. 4. 해방 이후의 재건 운동
1945년 광복 이후, 소련에 망명했던 노사카 산조, 야마모토 겐조 등이 당 재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해방 이후, 도쿠다 규이치, 시가 요시오, 미야모토 겐지 등 옥중에서 전향하지 않은 이들이 당을 재건하고 주도권을 장악했다.3. 주요 인물
wiki
초기 지도부와 기타 인물로 나눌 수 있다.
구분 | 이름 | 비고 |
---|---|---|
초기 지도부 | 도쿠다 규이치 | 중앙집행위원 |
사노 마나부 | 중앙집행위원장 | |
후쿠모토 가즈오 | 중앙집행위원 | |
사노 후미오 | 중앙집행위원 | |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 중앙집행위원 | |
기타 인물 | 고바야시 다키지 | 프롤레타리아 작가, 특고에 의해 고문 살해 |
이치카와 쇼이치 | 중앙집행위원 | |
미타무라 시로 | 중앙집행위원 | |
나베야마 사다치카 | 중앙집행위원, 옥중 전향 성명 발표 | |
하카마다 사토미 | 마지막 중앙위원, 1935년 검거로 일본공산당 사실상 궤멸 | |
노사카 산조 | 소련 망명, 당 재건 시도 | |
야마모토 겐조 | 노사카 산조와 함께 당 재건 시도 | |
미야모토 겐지 | 해방 이후 옥중 비전향자 그룹 일원으로 당 재건, 주도권 장악 |
3. 1. 초기 지도부
1925년 8월, 사노 마나부를 중심으로 일본공산당 재건을 위한 공산주의자 그룹 "뷰로"가 발족했다. 이 뷰로는 1926년 12월 4일 제3회 당대회로 이어져 일본공산당 재건으로 이어졌다. 이 대회는 야마가타현의 고시키온천에서 회사 송년회를 가장하여 17명이 모여 개최되었다.이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도쿠다 규이치, 사노 마나부, 후쿠모토 가즈오, 사노 후미오, 미타무라 시로, 나베야마 사다치카, 이치카와 쇼이치 등이 선출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후쿠모토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활동가들이었다.
1927년 코민테른의 27년 테제에 따라 12월에 새로운 당 지도부가 조직되었고, 위원장에는 사노 마나부가, 기타 임원에는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나베야마 사다치카, 이치카와 쇼이치 등이 취임하여 후쿠모토 그룹은 배제되었다.
3. 2. 노농파
야마카와 히토시, 아라하타 칸손 등 제1차 일본공산당 창당 중심 세력이었으나 제2차 일본공산당에 참여하지 않은 노장파 사회주의자들은 잡지 『노농』을 창간해 비공산당 사회주의자 집단 노농파를 출범시켰다. 공산당에서 이들을 제명했으나, 노농파 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제2차 공산당에 참여한 적이 없으므로 이 제명 처분은 무의미한 것이다.3. 3. 기타 인물
4.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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