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다 규이치
1. 개요
도쿠다 규이치는 1894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나 일본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코민테른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수감되었으며, 석방 후 공산당 재건과 노동 운동에 헌신했다. 1946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미군정의 추방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반제국주의, 반천황제 사상을 펼쳤으며, 51년 강령을 통해 무장 투쟁 노선을 주도했다. 일본 공산당에서는 비판받았지만, 마오주의자들에게는 혁명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그의 묘소는 도쿄와 오키나와에 위치해 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본명 | 도쿠다 규이치 |
|---|---|
| 로마자 표기 | Tokuda Kyūichi |
| 출생일 | 1894년 9월 12일 |
| 출생지 | 일본 제국 오키나와현 나고시 |
| 사망일 | 1953년 10월 14일 |
| 사망지 | 중국 베이징시 |
| 직업 | 변호사 |
| 학력 | 니혼대학 전문부 법률과 졸업 |
| 배우자 | 도쿠다 다쓰 |
| 자녀 | 장남, 쇼 (일찍 사망) |
| 친족 (정치인) | 야노 도쿠오 (참의원 의원, 여동생 가쓰코의 남편) |
| 소속 정당 | 일본 공산당 |
|---|---|
| 이전 소속 정당 | 노동농민당 |
| 직책 | 초대 일본 공산당 서기장 |
| 취임일 | 1945년 12월 3일 |
| 퇴임일 | 1953년 10월 14일 |
| 직책 2 | 중의원 의원 |
| 선거구 2 | (구 도쿄도 제2구) 도쿄도 제3구 |
| 당선 횟수 2 | 3회 |
| 취임일 2 | 1946년 4월 11일 |
| 퇴임일 2 | 1950년 6월 6일 |
-
분류 값 없이 쓰인 위키공용분류 -
라우토카
라우토카는 피지 비치레부섬 서부에 위치한 피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사탕수수 산업이 발달하여 "설탕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온 계약 노동자들의 거주와 미 해군 기지 건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피지 산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
분류 값 없이 쓰인 위키공용분류 -
코코넛
코코넛은 코코넛 야자나무의 열매로 식용 및 유지로 사용되며, 조리되지 않은 과육은 100g당 354kcal의 열량을 내는 다양한 영양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코코넛 파우더의 식이섬유는 대부분 불용성 식이섬유인 셀룰로오스이며, 태국 일부 지역에서는 코코넛 수확에 훈련된 원숭이를 이용하는 동물 학대 문제가 있다. -
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같은 위키공용분류 -
라우토카
라우토카는 피지 비치레부섬 서부에 위치한 피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사탕수수 산업이 발달하여 "설탕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온 계약 노동자들의 거주와 미 해군 기지 건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피지 산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
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같은 위키공용분류 -
코코넛
코코넛은 코코넛 야자나무의 열매로 식용 및 유지로 사용되며, 조리되지 않은 과육은 100g당 354kcal의 열량을 내는 다양한 영양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코코넛 파우더의 식이섬유는 대부분 불용성 식이섬유인 셀룰로오스이며, 태국 일부 지역에서는 코코넛 수확에 훈련된 원숭이를 이용하는 동물 학대 문제가 있다. -
반수정주의자 -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중국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군사 전략가, 공산주의 이론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아버지로서, 중국 공산당을 이끌며 최고지도자로서 중국을 통치했고, 마오쩌둥 사상의 창시자로서 그의 정책과 통치는 중국 사회, 경제, 문화, 외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반수정주의자 -
미하일 칼리닌
미하일 칼리닌은 러시아 혁명가이자 소련의 정치인으로, 볼셰비키 혁명에 기여하여 소련의 국가 원수를 역임했으며, 스탈린 시대에는 명목상의 국가 원수 역할을 수행하다 사망 후 국장으로 예우받았다.
2. 생애
1894년 오키나와현 나고에서 태어나 1920년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1922년 가타야마 센과 함께 일본 공산당을 창당하고 코민테른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3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8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1945년 10월 석방되었다. 석방 후 일본 공산당을 재창당하고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에 투신했으며,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도쿠다 규이치는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중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8년에는 연설 중 다이너마이트를 묶은 병이 투척되는 암살 기도를 겪었으나 살아남았다. 1950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956년 2월 14일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 개회식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도쿠다 규이치를 스탈린과 동등한 지위로 언급하여 스탈린을 간접적으로 격하시켰다. 이는 같은 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한 연설의 서두가 되었다.
도쿠다 규이치는 일본의 마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높게 평가받으며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일본공산당 행동파는 도쿠다 규이치를 혁명 영웅으로 부르며 일본 사회주의의 위대한 선구자로 칭하고 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1894년 오키나와현 나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고시마현 출신의 거상이었고, 어머니는 우치난츄였다. 집안은 오키나와 내에서는 부유한 편이었으며, "규이치"라는 이름은 "류큐 제일의 인물"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졌다. 어린 시절 도쿠다는 외할머니의 고리대금업을 도우면서도, 돈을 빌리러 온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등 정의감이 강한 아이였다.
구제 오키나와현립 제1중학교(현 오키나와현립 슈리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의사를 목표로 구제 제7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차별적인 대우와 경제적인 문제로 퇴학했다. 1917년 상경하여 체신성 도쿄 저금국에서 일하면서 니혼 대학 전문부 법률학과 야간부에 다녔다. 1918년 쌀 소동에 참가했으며, 야마카와 히토시의 문하생이 되었다.
1920년 니혼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판사 검사 등용 시험에 합격한 뒤 이듬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1922년 가타야마 센과 함께 일본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코민테른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2. 일본 공산당 창당과 투옥
1922년 가타야마 센과 함께 일본 공산당을 창당하고 코민테른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일제 검거로 제1차 공산당이 해산되자, 코민테른은 도쿠다 규이치를 당 재건 책임자로 임명했다. 1926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회의에 참석했다. 1927년 도요타마 형무소 수감 후 다시 소련으로 건너가 27년 테제를 책정했다.
1928년 3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8년간 투옥되었다가 1945년 10월 석방되었다. 후추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도쿠다는 프랑스 언론인 로베르 기랭에 의해 발견되어 석방되었다. 감옥 동기로는 시가 요시오가 있었다. 도쿠다는 아바시리 형무소(1934-1940), 지바(1940-1941), 도요타마(1941-1945) 등 일본 국내 형무소를 전전했는데, 혹한의 아바시리 형무소에서는 신경통으로 오른팔에 장애를 입기도 했다.
도쿠다 규이치는 옥중에서도 공산주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비전향 투쟁을 이어갔다. 석방 후 해산된 일본 공산당을 재창당하고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에 투신했으며,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2.3. 해방 후 정치 활동과 일본 공산당 재건
1945년 10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도쿠다 규이치는 18년간의 옥중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그는 석방 직후,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던 일본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여,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이끌었다. 같은 해 12월, 일본 공산당 제4차 당대회에서 서기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도쿠다는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노사카 산조 등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전후 일본 사회의 민주화와 노동자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1948년에는 연설 도중 다이너마이트를 묶은 병이 투척되는 암살 시도를 겪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도쿠다는 일본 공산당 내에서 노사카 산조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당내 2인자로 여겨졌다.
2.4. 한국과의 관계
도쿠다 규이치는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인물이다. 1922년 일본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8년 동안 수감되었다. 1945년 석방 후 일본 공산당을 재건하고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해방 이후 도쿠다는 조선공산당 및 남로당과 관계를 맺었다. 직접적인 연관성은 명확하지 않지만, 일본 공산당 지도자로서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적색 숙청으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망명한 후에도 일본 공산당 "주류" 파벌을 이끌며 지하 "자유 일본 라디오"를 통해 일본 내 폭력적인 작전을 조직했는데, 이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도쿠다 규이치는 1953년 베이징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사망 소식은 1955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1955년 9월 13일 베이징에서 열린 추도식에는 3만 명이 참석했다.
2.5. 중국 망명과 사망
1950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오사카 항구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에서 일본 공산당 지도부(베이징 기관)를 조직했다. 도쿠다는 망명 중에도 당의 일반 정책에 대한 결정을 계속 내렸으며, 지하 "자유 일본 라디오"를 통해 일본에서 무장 투쟁 노선을 지시했다.
도쿠다 규이치는 1953년 베이징에서 병사했으나, 그의 사망 소식은 1955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1955년 9월 13일 베이징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3만 명이 참석했다.
3. 사상과 노선
도쿠다 규이치는 오키나와현 나고 출신의 일본 공산당 창립 멤버이자 코민테른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다.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8년간 수감되었으며, 1945년 석방 후 일본 공산당 재건과 노동 운동, 농민 운동에 투신했다.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중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48년에는 암살 기도를 겪기도 했다. 1950년 일공 공산당 의장 노사카 산조를 지지했으나, 미 군정의 탄압으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망명했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도쿠다를 스탈린과 동등하게 언급하며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의 서두를 열었다.
도쿠다는 일본 공산당에서 평가절하되었으나, 일본의 마오주의자들에게는 혁명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공산당 행동파는 그를 일본 사회주의의 위대한 선구자로 칭송한다.
3.1. 반제국주의, 반천황제 사상
도쿠다 규이치는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는 1922년 가타야마 센과 함께 일본 공산당을 창당하고 코민테른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3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8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1945년 10월 석방되었다. 석방된 이후에는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해산된 일본 공산당을 재창당하고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 전선에 투신했으며,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3.3. 무장 투쟁 노선
미국 군정에 영향을 받은 도쿠다 규이치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망명한 후, 일본 공산당 간부 및 당원들과 함께 추방되어 망명지에서 무장 투쟁 노선을 채택하고 발전시켰다.
3.4. 51년 강령
徳田 球一일본어 등은 1951년 '51년 강령'을 작성하였다.
4. 유산과 평가
도쿠다 규이치는 일본 공산당 창립 멤버이자 코민테른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8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석방 후에는 일본 공산당 재건과 노동·농민 운동에 헌신하며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맞섰다. 1946년 중의원에 당선되었고, 1948년에는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1950년 일본 공산당 의장 노사카 산조를 지지했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도쿠다 규이치를 스탈린과 동등한 지위로 언급하며 스탈린을 간접적으로 격하시켰다.
일본 공산당은 도쿠다 규이치 관련 자료를 폐기 처분했으며, 현재 그의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도쿠다의 출신지인 나고시 가주마루 공원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는 "인민을 위해 기대 없이 헌신한다(為人民無期待献身)"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하치오지시 도쿄 영원에는 일본 공산당(행동파)가 세운 "혁명 영웅 기념비"가 있다.
4.1. 일본 공산당의 공식 평가
宮本 顕治일본어가 당수가 되어 1966년에 중국 공산당과 결별하고 "자주 독립의 당"을 표방하게 된 이후의 일본 공산당에서는 "1950년부터 1955년에 걸쳐 도쿠다 규이치와 노사카 산조의 분파가 소련이나 중국의 말을 듣고 무장 투쟁 노선을 도입하려고 했지만, 미야모토 겐지는 이에 반대했다", "50년 문제로 소련 등 간섭자의 지휘 아래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은 당 중앙의 일부 간부, 도쿠다·노사카 분파에 속하는 극소수의 자에 그친다", "50년 문제를 거쳐 당은 자주 독립의 입장을 확립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도쿠다 규이치는 부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그 이전, 여전히 일본 공산당이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 공산당의 영향 아래에 있던 시대의 1955년(쇼와 30년) 제6회 전국 협의회(육전협)에서도 도쿠다 규이치는 엄격하게 비판받고 있다. 육전협은 도쿠다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토 리쓰 등 측근만을 편중하고, 동지들을 널리 공평하게 등용하지 않았다며 "가부장적인 개인 중심 지도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4.2. 일본 내 좌파 진영의 평가
도쿠다 규이치는 일본공산당이 개량주의 정당으로 변절한 이후 평가절하를 당하며 많은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일본 내 마오주의자들은 도쿠다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일본공산당 행동파는 도쿠다 규이치를 혁명 영웅으로 칭하며 일본 사회주의의 위대한 선구자로 평가하고 있다.
4.3. 대한민국에서의 평가
도쿠다 규이치는 일제강점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8년 동안 투옥되는 등 탄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ശക്ത히 반대하며 일본 공산당 재건과 노동·농민 운동에 헌신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좌익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일본 공산당이 코민포름의 비판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도쿠다 규이치는 해방 후 남북한 정치 지형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쿠다 규이치가 스탈린과 동등한 지위로 언급되었다는 점, 일본공산당 행동파와 같은 일부 마오주의자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다는 점 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4.4. 기타 평가
도쿠다 규이치는 "돗큐"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친근한 인물이었지만, 당내에서는 "도쿠다 천황"이라고 비판받을 정도로 가부장적인 지도 체제를 구축했다는 평가도 있다. 특히 문화 운동에서 사위인 니시자와 류지의 방침을 지지하며 사교 댄스를 도입한 것은 도쿠나가 나오의 소설 『고요한 산들』에도 묘사될 정도로 논란이 되었다.
요시다 시게루는 정치적으로는 도쿠다와 대립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며 "적이지만, 유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요시다는 도쿠다가 의회에서는 격렬하게 공격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신을 돕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며 "감탄스러운 남자"라고 회고했다.
이시바시 단잔 역시 도쿠다에 대해 "재미있는 남자였다. 매우 정직한 인간입니다. 게다가 이치에 밝은 편이죠."라며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사망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추모하면서, 소련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도쿠다의 이름을 이오시프 스탈린과 동등하게 언급했다. 이는 스탈린에 대한 명백한 모욕이었으며, 흐루쇼프가 이후 스탈린의 개인 숭배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6. 기념물
도쿠다 규이치의 묘는 도쿄도 후추시 다마 영원과 도쿄도 미나토구 아오야마 영원의 "해방 운동 무명 전사 묘"에 분골되어 있다. 다마 영원의 묘에는 마오쩌둥이 도쿠다의 죽음에 즈음하여 보낸 고별 제사("영원 불후"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묘비명 글자는 저우언라이가 썼다. 장례식에는 마오쩌둥이 직접 쓴 "도쿠다 규이치 동지 영원 불후" 현수막이 중국 측으로부터 보내졌지만, 와타나베 토미야에 따르면 현재 행방불명이라고 한다.
도쿠다의 출신지인 오키나와현 나고시 가주마루 공원에는 시에서 건립한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초상 부조와 함께 "인민을 위해 기대 없이 헌신한다(為人民無期待献身)"라는 도쿠다가 즐겨 쓰던 말이 조각되어 있다.
하치오지시 도쿄 영원에는 일본 공산당(행동파)가 독자적으로 세운 "혁명 영웅 기념비"가 있으며, 도쿠다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