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드 라 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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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르주 드 라 투르는 17세기 프랑스 화가로, 종교화와 풍속화를 주로 그렸으며, 밤을 배경으로 촛불과 같은 단일 광원을 사용하여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표현하는 독특한 화풍으로 유명하다. 그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 작품에서는 네덜란드 카라바지스트들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점차 자신만의 단순하고 고요한 화풍을 발전시켰다. 라 투르는 18세기에 잊혀졌다가 20세기 초에 재발견되었으며, 좁은 레퍼토리와 반복되는 주제 및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사기꾼', '점쟁이',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 요셉의 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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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드 라 투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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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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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 수 없음) |
출생일 | 1593년 3월 13일 |
출생지 | 로렌 공국 [[File:Lorraine.svg|25px]] 빅쉬르세유 |
사망일 | 1652년 1월 30일 |
사망지 | 프랑스 [[File:FRA987.svg|25px]] 뤼네빌 |
국적 | (알 수 없음) |
활동 시기 | 바로크 |
직업 | 화가 |
후원자 | 로렌 공작 앙리 2세 |
대표작 | 점쟁이 목수 성 요셉 거울 앞의 막달레나 다이아몬드 에이스 사기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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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조르주 드 라 투르는 1593년 당시 프랑스의 일부가 아니었던 로렌 공국(로트링겐 공국)의 작은 마을 빅쉬르세유에서 태어났다. 제빵사 집안 출신으로, 소년 시절이나 수련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1617년부터 로렌 지방의 뤼네빌에서 활동했고, 1620년에는 제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화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39년 파리로 가서 루이 13세로부터 "국왕 소속 화가" 칭호를 받았다. 루이 13세는 라 투르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레네에게 간호받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뤼네빌로 돌아와 활동을 계속했으나, 1652년 1월 페스트로 추정되는 전염병으로 아내와 자식을 잃고 자신도 사망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조르주 드 라 투르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술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메스 주교구의 빅쉬르세유 마을에서 태어났다. 세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제빵사 장 드 라 투르(Jean de La Tour)와 몰리앙(Molian) 출신 시빌 드 라 투르(Sybille de La Tour)의 아들이었다. 시빌이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다.[1] 그의 부모는 모두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고, 조르주는 둘째였다.라 투르의 교육 배경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경력 초기에 이탈리아나 네덜란드로 여행을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로렌 공국의 수도인 낭시에서 자크 벨랑주(Jacques Bellange) 밑에서 수련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두 사람의 화풍은 매우 다르다. 그의 그림은 카라바조의 바로크식 자연주의를 반영하지만, 이는 아마도 우트레흐트파의 네덜란드 카라바지스트(Caravaggisti)와 다른 북부(프랑스와 네덜란드) 동시대 화가들을 통해 전해졌을 것이다. 특히 라 투르는 네덜란드 화가 헨드릭 테르브르헌(Hendrick Terbrugghen)과 자주 비교된다.[2]
1617년부터는 같은 로렌 지방의 마을 뤼네빌로 이주하여 활동했고, 1620년에는 제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 무렵에는 화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화가들의 일반적인 상황처럼 라 투르도 수업 시절에는 이탈리아 등 외국을 떠돌아다녔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탈리아 등지에 체류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2. 2. 뤼네빌에서의 활동과 명성
1617년 라 투르는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인 디안느 르 네르프(Diane Le Nerf)와 결혼했고, 1620년에는 뤼네빌에 작업실을 열었다.[2] 뤼네빌은 로렌 공국의 일부였으며, 1641년부터 1648년까지는 프랑스에 점령되기도 했다. 라 투르는 주로 종교화와 일부 풍속화를 그렸으며, 1623년부터 1624년까지는 로렌 공작을 위해 일하기도 했지만, 주된 고객은 지역 부르주아였다.[2] 그는 이들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1638년에는 프랑스 국왕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2] 1639년부터 1642년까지는 뤼네빌에 기록이 없어, 이 시기에 다시 여행을 떠났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앤서니 블런트는 이 시기 이후 라 투르의 그림에서 게릿 판 혼토르스트의 영향을 감지했다.[2] 라 투르는 로렌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주도하는 종교 부흥 운동에 참여했으며, 풍속화의 영향을 받은 기법으로 종교적인 주제를 주로 그렸다.[2]1639년 파리로 나가 루이 13세로부터 "국왕 소속 화가" 칭호를 받았다. 루이 13세는 라 투르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레네에게 간호받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뤼네빌로 돌아와 활동을 계속했지만, 1652년 1월 페스트로 추정되는 전염병으로 인해 15일에 아내, 22일에 자식을 잇달아 잃고, 30일에는 라 투르 자신도 사망했다.
2. 3. 사망
조르주 드 라 투르와 그의 가족은 1652년 뤼네빌에서 발생한 전염병(페스트로 추정)으로 사망했다.[2] 1월 15일에 아내, 1월 22일에 아들을 잃었고, 라 투르 자신도 1월 30일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에티엔(Étienne, 1621-1692)은 그의 제자였다.3. 작품 세계
라 투르는 17세기 전반 바로크 미술의 전성기에 활동했던 프랑스 화가이다. 당시 프랑스 화단에서는 니콜라 푸생과 같은 고전주의 거장들이 활동했지만, 라 투르가 활동했던 로렌 지방에는 대도시와는 다른 독자적인 화풍을 가진 화가들이 존재했다.
라 투르는 1652년 뤼네빌에서 사망한 후 잊혀졌다가 1915년 독일 미술사가 헤르만 포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4] 포스는 르네 미술관의 『갓난아기 (성탄)』, 낭트 미술관의 『성 요셉의 꿈』과 『베드로의 부인』을 라 투르의 작품으로 확인했다. 이후 1934년 파리 "현실의 화가들" 전시회와 1972년 파리 대규모 라 투르 전을 통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1972년 전시회 이후 라 투르의 작품으로 새롭게 인정된 작품이 늘었지만, 진품 여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존하는 라 투르의 진품을 20여 점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지만, 60여 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1. 초기 작품: 카라바조와 네덜란드 화풍의 영향
라 투르의 초기 작품에는 카라바조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아마도 그의 네덜란드 추종자들을 통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점쟁이와 같이 사기꾼을 그린 장르 그림과 싸우는 거지들을 그린 그림들은 분명 네덜란드 카라바지스트들과 그의 동향인인 자크 벨랑주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의 경력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라 투르는 야간 조명 효과를 발전시켜, 네덜란드 카라바지스트들이 장르 주제에 사용하던 것을 종교화에 적용했다. 카라바조와 달리 그의 종교화에는 극적인 효과가 부족하다. 그는 1640년대부터 키아로스쿠로를 사용하고, 기하학적 구성과 단순화된 형태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후세페 데 리베라와 테네브리스트 추종자들과는 다른 특성을 보이며, 더 큰 단순성과 고요함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종종 같은 주제에 대한 여러 변형을 그렸으며, 남아있는 작품은 비교적 적다. 그의 아들 에티엔은 그의 제자였으며, 라 투르의 구성에 대한 여러 버전에서 그들의 작품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프릭 컬렉션에 있는 ''성모의 교육''이 그 예시이며, 박물관 자체도 이를 인정한다. 라 투르의 작품과는 다른 화풍이라고 주장되는, 뛰어난 기술을 보이지만 또 다른 그림들은 알려지지 않은 "허디거디 화가"에게 돌려졌다. 이들은 모두 나이 든 남성 인물(말리부의 한 그룹에는 여성이 포함됨)을 주로 고독하게, 거지 또는 성인으로 보여준다.[3]
3. 2. 키아로스쿠로와 단순화된 형태
라 투르는 야간 조명 효과를 통해 키아로스쿠로를 사용하고, 신중한 기하학적 구성과 매우 단순화된 형태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종교화에는 카라바조와 달리 극적인 효과가 부족하다. 그는 후세페 데 리베라와 그의 테네브리스트 추종자들과는 또 다른 특성을 받아들였다.라 투르의 작품 중 성서를 소재로 한 작품은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 요셉』과 같이 밤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 많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화면의 상당 부분을 어둠이 차지하고 있으며, 인물을 비추는 빛은 촛불, 횃불 등 단일 광원에서 나와 "밝음"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인물 등의 형태는 평면화, 단순화되고, 모티프는 최대한으로 간략화되어 있지만, 화면에는 깊은 정신성과 종교적 감정이 느껴진다.
라 투르는 같은 주제, 같은 구도의 작품을 여러 점 그린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4점이 있다.
3. 3. 반복되는 주제와 구도
라 투르는 그의 예술적 선배들보다 훨씬 더 발전시킨 야간 조명 효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네덜란드 카라바지스트들의 그림에서 장르 주제에 사용되던 것을 그의 종교화에 적용했다. 카라바조와 달리 그의 종교화에는 극적인 효과가 부족하다. 그는 키아로스쿠로를 사용하고, 신중한 기하학적 구성과 매우 단순화된 형태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경력이 진행됨에 따라 더 큰 단순성과 고요함을 향해 나아갔다.그는 종종 같은 주제에 대한 여러 변형을 그렸고, 그의 남아있는 작품은 비교적 적다. 그의 아들 에티엔은 그의 제자였으며, 라 투르의 구성에 대한 여러 버전에서 그들의 작품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프릭 컬렉션에 있는 ''성모의 교육'' 버전이 그 예시이다.[3]
라 투르의 작품에는 『사기꾼』, 『점쟁이』와 같은 풍속화 계열의 작품과 성서를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 후자의 계열은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 요셉』과 같이 밤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 많다. 이러한 작품들의 대부분은 화면의 상당 부분을 어둠이 차지하고 있으며, 인물을 비추는 빛은 촛불, 횃불 등 단일 광원에서 나와 "밝음"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인물 등의 형태는 평면화, 단순화되고, 모티프는 최대한으로 간략화되어 있지만, 화면에는 깊은 정신성과 종교적 감정이 느껴진다.
라 투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레퍼토리가 좁고, 같은 주제, 같은 구도의 작품이 여러 점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밤중에 촛불 아래에서 명상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그린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4점이 있으며, 『사기꾼』은 완전히 같은 구도의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과 김벨 미술관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화가 자신이 여러 점의 같은 작품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아들 에티엔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설이 있다.
4. 주요 작품
조르주 드 라 투르는 종교화와 풍속화를 모두 남겼으며, 작품 제작 연도는 연구자와 문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명암 대비가 뚜렷한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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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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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쟁이''', 1633년–1639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
- '''노인의 초상''', 1624년–1650년경, 드 영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 '''노부인의 초상''', 1624년–1650년경, 드 영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 『편지를 읽는 성 히에로니무스』 (1621~1623년경) 햄튼 코트 영국 왕실 컬렉션(런던)
- 『성 토마스』 (1624년경) 국립 서양 미술관 (도쿄)
- 『바이올린 연주자』 (1620-1625년경) 낭트 미술관
- 『개를 데리고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 (1622-1625년경) Musée du Mont-de-Piété de Bergues영어
- 『편지를 읽는 성 히에로니무스』 (1627-1629년) 프라도 미술관에 기탁
-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 (1620-1630년) 프라도 미술관
- 『노인』 (1624-1650년경) 드 영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 『사기꾼』 (1625년경) - 루브르 박물관 소장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가진 사기꾼』, 킴벨 미술관 소장 『클럽 에이스를 가진 사기꾼』
- 『거리 음악가들의 싸움』 (1625~1630년경) J. 폴 게티 미술관
- 『돈의 지불』 (1630년경) 리비우 미술관(우크라이나)[6]
-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 (1630-1635년경) 그르노블 미술관,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 『성 요셉의 꿈』 (1642년경) 낭트 미술관
- 『점쟁이 여자』 (1632~1635년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벼룩을 잡는 여자』 (1632~1635년경) Palace of the Dukes of Lorraine영어 (로렌 역사 박물관)
- 『거울 앞의 막달라 마리아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635-40년경)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 『흔들리는 불꽃이 있는 막달라 마리아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638-40년경)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 『두 개의 불꽃이 있는 막달라 마리아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640년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등불 앞의 막달라 마리아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640년경) 루브르 박물관
- 『목수 성 요셉』 (1642년경) 루브르 박물관
- 『양치기들의 경배』 (1644년경) 루브르 박물관
- 『신생아 (성탄)』 (1648년경) 렌 미술관
- 『담배 피우는 남자』 (1646년경) 도쿄 후지 미술관
- 『성 이레네에게 간호받는 성 세바스티앙』 (1649년경) 루브르 박물관, 베를린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작품의 복제)
- 『아내에게 조롱당하는 욥』 (1620-1650년) Musée départemental d'Art ancien et contemporain영어, 에피날
- 『성 베드로의 부인』 (1650년) 낭트 미술관
-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들』 (1650년경) 프레스턴 공원 미술관(영국)
4. 1. 종교화
조르주 드 라 투르는 종교적인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많이 남겼다. 이 그림들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강렬하게 사용하여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욥의 아내에게 조롱받는 욥''' (1625년–1650년경, 에피날 고대 및 현대 미술 박물관): 욥이 시련을 겪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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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꽃을 든 마리아 막달레나''' (1640년경,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마리아 막달레나가 촛불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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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난아기 예수''' (1645년–1648년경, 렌 미술관): 갓 태어난 아기 예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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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의 교육''' (1650년경, 프릭 컬렉션): 성모 마리아가 교육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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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안드레아''' (''알비의 사도들'' 연작 중 하나, 162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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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1635-1640년경, 국립 미술관 (워싱턴 D.C.)): 마리아 막달레나가 거울을 보며 참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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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토마스』 (1624년경) 국립 서양 미술관
- 『성 요셉의 꿈』 (1642년경) 낭트 미술관
-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 (1630-1635년경) 두 점의 버전이 있으며, 각각 그르노블 미술관,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에 소장
- 『목수 성 요셉』 (1642년경) 루브르 박물관
- 『양치기들의 경배』 (1644년경) 루브르 박물관
- 『신생아 (성탄)』 (1648년경) 렌 미술관
- 『성 이레네에게 간호받는 성 세바스티앙』 (1649년경) 루브르 박물관, 베를린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작품의 복제)
- 『성 베드로의 부인』 (1650년) 낭트 미술관
4. 2. 풍속화
조르주 드 라 투르의 풍속화 제작 연도는 연구자나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제목 | 제작 연도 | 소장처 | 비고 | 이미지 |
---|---|---|---|---|
사기꾼 | 1625년경 | 루브르 박물관 (다이아몬드 에이스), 킴벨 미술관 (클럽 에이스) | 두 점이 남아 있으며, 같은 구도이지만 세부 사항에 차이가 있음 | -- |
점쟁이 | 1633년–1639년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
허디거디 연주자 | 1610년–1630년경 | 프라도 미술관 | -- | |
거리 음악가들의 싸움 | 1625~1630년경 | J. 폴 게티 미술관 | ||
돈의 지불 | 1630년경 | 리비우 미술관(우크라이나) | [6] | |
점쟁이 여자 | 1632~1635년경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
벼룩을 잡는 여자 | 1632~1635년경 | Palace of the Dukes of Lorraine영어 (로렌 역사 박물관) | -- | |
담배 피우는 남자 | 1646년경 | 도쿄 후지 미술관 | -- | |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들 | 1650년경 | 프레스턴 공원 미술관(영국) | ||
바이올린 연주자 | 1620-1625년경 | 낭트 미술관 | ||
개를 데리고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 | 1622-1625년경 | Musée du Mont-de-Piété de Bergues영어 | ||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 | 1620-1630년 | 프라도 미술관 |
5. 재발견과 영향
라 투르는 18세기에 잊혔다가 20세기 초에 재발견되었다. 독일의 연구자 헬만 포스는 1915년에 르네 미술관의 『갓난아기 (성탄)』, 낭트 미술관의 『성 요셉의 꿈』, 『베드로의 부인』 3점을 라 투르의 작품으로 확인했다. 1934년 파리에서 열린 "현실의 화가들" 전시회에서 라 투르는 다시 주목받았고, 1972년 파리에서 대규모 라 투르 전이 개최되었다.
라 투르 작품은 주제와 구도가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4점이 있고, 『사기꾼』은 루브르 박물관과 김벨 미술관에 같은 구도의 그림이 있다. 이는 라 투르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 에티엔의 작품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참조
[1]
논문
Crissy Bergeron Thesis
https://digitalcommo[...]
[2]
서적
Art and Architecture in France, 1500–1700
Penguin
[3]
서적
(제목 정보 부족)
[4]
웹사이트
Voss, Hermann
https://arthistorian[...]
2018-02-21
[5]
서적
欲望の美術史
光文社新書
[6]
서적
しぐさで読む美術史
筑摩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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