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니콜라 푸생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니콜라 푸생은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생애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다. 그는 고전주의 화풍을 추구하며, 균형 잡힌 구도, 명확한 윤곽선, 절제된 색채, 인물의 섬세한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푸생은 종교화, 신화, 고전 문학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풍경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의 화풍은 샤를 르 브룅을 통해 프랑스 미술에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큐비즘, 현대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외르주 출신 - 프랑수아 케네
    프랑수아 케네는 프랑스의 의사이자 경제학자로, 중농학파의 창시자이며, 농업을 부의 유일한 원천으로 보는 경제 순환 모델을 제시하고 자유방임주의 경제 정책을 주창하여 경제학과 프랑스 경제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외르주 출신 - 우스만 뎀벨레
    우스만 뎀벨레는 프랑스 국적의 축구 선수로, 윙어로서 스타드 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FC 바르셀로나를 거쳐 현재 파리 생제르맹에서 뛰고 있으며, 뛰어난 드리블과 양발 능력으로 여러 클럽 우승과 2018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지만 잦은 부상과 논란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 1665년 사망 - 마리아 아나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1610년)
    마리아 아나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은 페르디난트 2세의 딸로 태어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여 바이에른 선제후비가 되었으며, 남편 사후 아들의 섭정을 맡아 바이에른 정치에 참여하다가 뮌헨에서 사망했다.
  • 1665년 사망 - 피에르 드 페르마
    피에르 드 페르마는 17세기 프랑스의 변호사이자 수학자로, 해석기하학, 확률론, 정수론, 미적분학 등 여러 분야에 기여했으며, 특히 정수론에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비롯한 업적을 남기고 '페르마의 원리'로 물리학에도 공헌했다.
  • 1594년 출생 - 이로하히메
    이로하히메는 다테 마사무네와 아이히메 사이에서 태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계략으로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와 결혼했으나 이혼 후 센다이에서 여생을 보낸 인물로, 미모와 총명함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독교 신앙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고 대중문화 작품에도 등장한다.
  • 1594년 출생 - 인열왕후
    인열왕후는 조선 16대 왕 인조의 정비로, 청주 한씨 한준겸의 딸이며 인조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고, 인조반정 후 왕비가 되어 내명부를 다스리며 인조에게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나 산후병으로 승하하여 파주 장릉에 묻혔다.
니콜라 푸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푸생의 자화상, 1650년
자화상 (1650년)
본명니콜라 푸생
출생일1594년 6월
출생지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레자ンド리 근처
사망일1665년 11월 19일
사망지교황령, 로마
국적프랑스
서명Poussin autograph.png
활동
분야회화
사조고전주의
바로크
대표 작품아르카디아에도 내가 있었다, 1637–1638
그 외 정보

2. 생애

니콜라 푸생의 초기 전기 작가로는 친구인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3]와 앙드레 펠리비엥[4]이 있었다. 벨로리는 푸생이 노르망디의 레장들리 근처에서 태어나 라틴어 교육을 받았다고 전한다. 펠리비엥은 푸생이 다양한 인물들로 스케치북을 채우는 데 열중했다고 기록했다. 초기 스케치는 캉탱 바랭의 주목을 받았으나, 바랭에게서 정식 훈련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푸생의 부모는 그가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고, 1612년경 18세의 나이에 파리로 가출했다.[4]

파리에 도착한 푸생은 마리 드 메디치의 섭정 시기에 왕실과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으로 예술이 번성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푸생은 화가 및 조각가 길드의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5] 그는 페르디난트 엘레와 조르주 랄르망의 화실에서 잠시 일했지만, 혼자 느리게 작업하는 것을 선호했다.[5] 법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빚을 많이 졌다. 파리에서 줄리오 로마노와 라파엘로의 작품을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았다. 1617년 또는 1618년, 그리고 1622년에 로마로 가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622년 예수회의 의뢰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시성식을 기념하는 그림을 그려 명성을 얻었다. 잠바티스타 마리노의 후원으로 오비디우스변신 이야기[7] 삽화 등을 그렸으며, 1624년 봄 마리노의 권유로 로마로 이주했다.

1624년 로마에 도착했을 때 푸생은 서른 살이었다. 당시 로마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후원으로 예술의 중심지였다. 푸생은 라파엘로와 다른 르네상스 화가들, 카라치, 귀도 레니, 카라바조 등의 작품을 연구하고, 도메니키노의 아카데미에서 누드화를 공부했다.[8] 프랑수아 뒤케스누아, 자크 스텔라, 클로드 로랭 등 고전주의적 경향의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다.[11] 마리노를 통해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과 카시아노 델 포초를 만나 후원을 받았다. 초기에는 매독으로 고생했으나, 요리사 자크 뒤게 가족의 도움으로 회복하고, 1630년 그의 딸 안느 마리 뒤게와 결혼했다.[8][10]

1627년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의뢰로 『게르마니쿠스의 죽음』(미니애폴리스 미술관)을 그려 명성을 얻었다.[12] 1628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제단화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바티칸 미술관)를 그렸으나, 바로크적인 양식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13] 이후 대규모 공공 의뢰를 포기하고 개인 수집가들을 위한 작품 활동에 집중했다. 바르베리니 추기경, 카시아노 델 포초 외에도 다양한 후원자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했다.[14] 1632년 비아 파올리나에 집을 마련하고 안정적인 창작 환경을 구축했다.[14]

루이 13세는 푸생에게 왕실 수석 화가 칭호와 튈르리 궁전의 거주지를 제안하며 파리로 초청했다. 푸생은 1640년 12월 파리로 돌아왔으나, 수많은 의뢰와 궁정의 음모에 압도되어 1642년 가을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1]

1642년 로마로 돌아온 푸생은 우르바노 8세 교황이 사망하고, 인노첸시오 10세 새 교황은 예술 후원에 소극적인 상황에 직면했다.[4] 푸생은 로마와 파리의 후원자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며 활동을 이어갔다.[4] 1643년 10월, 파리 튈르리에 있는 집의 가구를 팔고 남은 생을 로마에서 보냈다.[4]

1647년 앙드레 펠리비엥이 푸생의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고, 푸생에 대한 최초의 책을 출판했다.[5] 루이 14세의 재무 총감이었던 니콜라 푸케의 형제 아베 루이 푸케를 포함하여 프랑스 후원자들이 늘어났다.[5] 1655년 푸케는 푸생이 국왕 수석 화가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도록 했다.[5] 푸생은 검소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으며, 조수 없이 천천히 작업했다.[6] 샤를르 르 브룅은 3년 동안 로마에서 푸생과 함께 지내며 큰 영향을 받았다.[6] 1647년, 후원자들의 요청으로 푸생은 두 점의 자화상을 제작했다.[6]

1650년 이후 푸생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손 떨림 증세가 심해졌다.[7] 1664년 아내 안느 마리가 사망한 후 푸생의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1665년 9월 21일 유언장을 작성했고, 11월 19일 로마에서 사망하여 산 로렌초 인 루치나 교회에 안장되었다.[8]

2. 1. 초기 (레장들리와 파리)

니콜라 푸생은 1594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레장들리 근처 빌레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 루앙파리에서 화가 수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4]

1612년경, 18세의 나이에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갔다.[4] 당시 파리는 마리 드 메디치의 섭정 아래 예술이 번성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푸생은 대부분의 예술 의뢰를 독점하고 있던 강력한 화가 및 조각가 길드의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5]

그는 플랑드르 화가 페르디난트 엘레의 화실에서 3개월, 조르주 랄르망의 화실에서 한 달 정도 있었으나, 독자적인 작업 방식을 선호하여 독립하였다.[6] 이후 그는 혼자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며[5] 해부학과 원근법을 공부했다. 파리에서 그는 줄리오 로마노와 라파엘로의 작품을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았다.

1617년 또는 1618년, 그리고 1622년에 로마로 가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622년, 예수회로부터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시성식을 기념하는 그림을 의뢰받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잠바티스타 마리노의 후원으로 오비디우스변신 이야기[7] 삽화 등을 그렸으며, 그의 권유로 1624년 봄 로마로 이주하게 되었다.

2. 2. 로마에서의 첫 번째 시기 (1624–1640)

1624년, 30세의 나이에 로마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로마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후원 아래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였다.[8] 푸생은 라파엘로, 카라치, 귀도 레니, 카라바조 등 다양한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도메니키노의 아카데미에서 누드화를 공부하는 등 폭넓은 예술적 자양분을 흡수했다.[8] 프랑수아 뒤케스누아, 자크 스텔라, 클로드 로랭 등 고전주의적 경향의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다.[11]

잠바티스타 마리노를 통해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과 그의 비서 카시아노 델 포초를 만나 후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들은 푸생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8] 초기에는 매독으로 고생했으나, 요리사 자크 뒤게 가족의 도움으로 회복하고, 1630년 그의 딸 안느 마리 뒤게와 결혼했다.[8][10]

1627년,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의뢰로 미니애폴리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그려 명성을 얻었다.[12] 1628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제단화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바티칸 미술관 소장)를 그렸으나, 바로크적인 양식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13] 이후 대규모 공공 의뢰를 포기하고, 개인 수집가들을 위한 작품 활동에 집중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다.

바르베리니 추기경, 카시아노 델 포초 외에도 지안 마리아 로시올리, 라스피글리오시 추기경, 루이지 오모데이 추기경, 빈첸초 주스티니아니, 파브리치오 발구아르네라 등 다양한 후원자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했다.[14] 1632년, 비아 파올리나에 집을 마련하고 안정적인 창작 환경을 구축했다.[14]

푸생의 로마에서의 첫 번째 시기 주요 작품
작품명제작 연도소장처
게르마니쿠스의 죽음1628미니애폴리스 미술관
비너스와 아도니스1628-1629킴벨 미술관
시인의 영감1629–1630루브르 박물관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1630바티칸 미술관


2. 3. 프랑스 체류 (1640–1642)

푸생의 작품이 로마에서 널리 알려지자, 루이 13세의 건축 감독관인 수블레 드 노이에가 제안한 중요한 왕실 의뢰를 위해 파리로 돌아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푸생이 이를 거절하자, 노이에르는 그의 사촌인 롤랑 프레아르 드 샹브레와 폴 프레아르를 로마로 보내 그를 설득하여, 왕의 수석 화가 칭호와 튈르리 궁전에 상당한 규모의 거주지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푸생은 이에 굴복하여 1640년 12월에 파리로 돌아왔다.

푸생이 카시아노 델 포초와 로마에 있는 다른 친구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그는 돈과 명예에 감사했지만, 특히 천천히 신중하게 작업하는 습관이 있었기에 엄청난 수의 의뢰에 압도당했다. 그의 새로운 프로젝트에는 생 제르맹 앙 레 성 예배당을 위한 ''성찬의 제정''과 예수회 수련원 교회의 제단을 위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이 포함되었다.

또한 그는 루브르 박물관의 대형 갤러리의 천장과 아치에 그림을 그려야 했고, ''질투와 불화의 공격으로부터 진실을 지키는 시간''이라는 주제로 리슐리외 추기경의 연구를 위해 "진실"의 형상이 리슐리외 추기경을 분명히 나타내는 대규모 우화 작품을 그려야 했다.

그는 또한 왕실 태피스트리를 위한 디자인과 왕립 인쇄소에서 발행되는 책의 앞면을 제공해야 했다.

그는 또한 그의 오랜 친구인 시몽 부에를 포함한 다른 프랑스 화가들의 지지자들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최후의 만찬''(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장), 고블랭 태피스트리 공방을 위한 8개의 밑그림, 루브르 박물관을 위한 ''헤라클레스의 노동''에 대한 그리자유 그림 연작을 제안하기 위한 드로잉, 그리고 리슐리외 추기경을 위한 ''진실의 승리'' 그림(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장)을 완성했다. 그는 궁정의 음모와 압도적인 수의 의뢰에 점점 더 불만을 느꼈다. 1642년 가을, 국왕과 궁정이 랑그도크 지방에 파리를 떠나 있는 동안, 그는 파리를 떠나 영구적으로 로마로 돌아갈 구실을 찾았다.[1]

2. 4. 로마에서의 마지막 시기 (1642–1665)

1642년 푸생은 로마로 돌아와 변화된 미술계 상황에 직면했다. 1644년 우르바노 8세 교황이 사망하고, 인노첸시오 10세 새 교황은 예술 후원에 소극적이었으며 프랑스 문화보다 스페인 문화를 선호했다.[4] 푸생의 주요 후원자였던 바르베리니 가는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갔다.[4] 푸생은 카시아노 달 포초, 추기경 카밀로 마시미 등 로마의 주요 후원자들과 관계를 유지했지만, 파리의 후원자들을 위한 작품을 더 많이 제작하기 시작했다.[4] 1642년 리슐리외 추기경이 사망하고,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면서 푸생의 파리 후원자였던 수블레 드 노이에가 지위를 잃었지만, 리슐리외의 후임자 마자랭 추기경이 푸생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4] 1643년 10월, 푸생은 파리 튈르리에 있는 집의 가구를 팔고 남은 생을 로마에서 보냈다.[4]

1647년,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관 서기였던 앙드레 펠리비엥은 푸생의 친구이자 그림 제자가 되었고, 그의 작품에만 헌정된 최초의 책을 출판했다.[5] 푸생의 프랑스 후원자는 점점 늘어났는데, 루이 14세의 재무 총감이었던 니콜라 푸케의 형제 아베 루이 푸케도 그중 한 명이었다.[5] 1655년 푸케는 푸생이 이전에 프랑스에서 받았던 의뢰에 대한 보상과 함께 국왕 수석 화가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도록 했다.[5] 푸생은 감사의 표시로 푸케가 보르-르-비콩트에 건설 중이던 성의 목욕탕 설계를 맡았다.[5]

이 시기 푸생의 또 다른 주요 프랑스 후원자는 1643년 로마에 와서 여러 달 동안 머물렀던 폴 프레아르 드 샹텔루였다.[5] 그는 1644년에서 1648년 사이에 그려진 두 번째 ''7성사'' 연작과 ''디오게네스가 있는 풍경'' 등 푸생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의뢰했다.[5] 1649년에는 희극 시인 폴 스카론을 위해 ''성 바오로의 환상''을 그렸고, 1651년에는 크레키 공작을 위해 ''성가족''을 그렸다.[5] 초기 작품에서 풍경은 부차적인 요소였지만, 후기 작품에서는 자연과 풍경이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5]

푸생은 검소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으며, 조수 없이 천천히 작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6] 화가 샤를르 르 브룅은 3년 동안 로마에서 푸생과 함께 지냈으며, 푸생의 작품은 르 브룅의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6] 1647년, 후원자 샹텔루와 퐁텔은 푸생에게 초상화를 요청했고, 푸생은 1649년에 완성된 두 점의 자화상으로 화답했다.[6]

1650년 이후 푸생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손 떨림 증세가 심해져 말년 작품에서 그 흔적이 나타났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 8년 동안 ''바쿠스의 탄생'', ''눈먼 오리온, 떠오르는 태양을 찾다(Blind Orion Searching for the Rising Sun)'', ''헤라클레스와 카쿠스가 있는 풍경'', ''사계'' 4점, ''다프네와 사랑에 빠진 아폴로'' 등 가장 야심차고 유명한 작품들을 그렸다.[7]

1664년 아내 안느 마리가 사망한 후 푸생의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1665년 9월 21일 유언장을 작성했고, 11월 19일 로마에서 사망하여 산 로렌초 인 루치나 교회에 안장되었다.[8]

3. 주요 작품

니콜라 푸생은 종교화, 신화와 고전 문학, 풍경화 등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 시인의 영감, 아스돗의 페스트, 플로라의 왕국, 유아 학살, 파르나소스, 사비니 여인의 강탈, 판의 승리, 인생의 춤, 만나 수집, 아르카디아의 목자들, 파트모스 섬의 성 요한이 있는 풍경, 일본 가고시마에서 딸을 되살리는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일곱 성사, 계단의 성 가족, 엘리에젤과 리브가, 솔로몬의 재판, 폴리페모스가 있는 풍경, 자화상,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있는 풍경, 퓌라모스와 티스베가 있는 풍경, 코리올라누스, 사피라의 죽음, 에우다미다스의 유언, 바쿠스의 탄생, 해돋이를 찾는 눈먼 오리온, 사계 등이 있다. 각 주제별 주요 작품은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3. 1. 종교화

푸생은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이는 교회가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후원자였고, 부유한 후원자들이 가정에서 종교화를 찾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가져왔는데, 특히 이야기가 모호하여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엘리에젤과 리브가의 이야기를 여러 버전으로 그렸고, ''물에서 구출된 모세''를 세 번 그렸다. 신약성서는 그의 가장 극적인 그림 중 하나인 무고한 자들의 학살의 주제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일반적인 학살은 단 하나의 잔혹한 사건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솔로몬의 심판''(1649)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표정을 통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15]

그의 종교 그림은 때때로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본 가고시마에서 딸을 되살리는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르''에서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그림은 시몽 부에의 지지자들로부터 "너무 많은 자만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비의 하나님보다는 주피터 신을 더 닮았다"라고 비판받았다. 푸생은 "그가 세상에 인간과 함께 있을 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온화한 아버지처럼 보이는 그리스도를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해서도 안 된다"라고 답했다.[17]

그의 대표적인 종교화로는 두 개의 ''7성사'' 연작이 있다. 이 연작은 교회의 주요 의식에 담긴 도덕적 의미를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묘사했다. 첫 번째 연작은 그의 초기 후원자인 카시아노 달 포초를 위해 로마에서 그려졌으며 1642년에 완성되었다. 이후 그의 후원자인 폴 프레아르 드 샹텔루가 복사본을 요청하자, 푸생은 완전히 새로운 연작을 그려 1647년에 완성했다. 두 번째 연작은 인물의 균형, 다양한 표정, 색상의 조화를 통해 그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15]

푸생의 주요 종교화는 다음과 같다:

제목제작 연도소장처
게르마니쿠스의 죽음1627년미니애폴리스 미술관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1628-29년바티칸 미술관
아스돗의 페스트1631년루브르 박물관
만나 수집1637-39년루브르 박물관
일본 가고시마에서 딸을 되살리는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르1641년루브르 박물관
7성사 (첫 번째 연작)1636-42년벨보어 성 (개인 소장)
7성사 (두 번째 연작)1644-48년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
엘리에젤과 리브가1648년루브르 박물관
솔로몬의 재판1649년루브르 박물관


3. 2. 신화와 고전 문학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 역사, 문학은 니콜라 푸생 작품의 중요한 주제였다. 초기에는 주로 바쿠스, 비너스, 플로라 등 사랑과 쾌락의 신들을 주제로 한 밝고 화려한 작품들을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플로라의 왕국』(1631), 『판의 승리』(1636) 등이 있다.[18] 『사비니 여인의 강탈』(1633-34, 1637-38)과 같이 로마 건국 신화를 다룬 작품도 그렸다.[18] 후기에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비극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의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있는 풍경』(1650),[15] 『퓌라모스와 티스베가 있는 풍경』(1650-51),[15] 『눈먼 오리온, 떠오르는 태양을 찾다』(1658) 등이 있다.[15]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1630, 1638-39)는 "죽음은 낙원에도 존재한다"는 메멘토 모리의 메시지를 담은 알레고리 작품으로, 푸생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푸생의 신화와 고전 문학을 주제로 한 주요 작품
제목제작 연도소장처그림
플로라의 왕국1631년젬알데갈레리 드레스덴--
사비니 여인의 강탈1637-38루브르 박물관--
아폴로와 다프네1664년루브르 박물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있는 풍경1650–51루브르 박물관--
눈먼 오리온, 떠오르는 태양을 찾다1658메트로폴리탄 미술관--


3. 3. 풍경화

푸생은 풍경화 발전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초기 그림에서 풍경은 인물들의 배경이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풍경이 더 큰 역할을 하며 성경, 신화, 고대 역사, 문학에서 가져온 이야기들을 묘사했다. 그의 풍경은 수직적인 나무와 고전적인 기둥, 수평적인 물과 평평한 건물 돌이 조심스럽게 균형을 이루도록 구성되었고, 종종 작은 인물들에게 시선을 이끌도록 정리되었다. 그의 하늘은 평온함을 묘사하는 푸른 하늘과 밝은 햇살이 비치는 회색 구름(프랑스에서 종종 "푸생의 하늘"이라고 불림)부터, 비극적인 사건의 배경으로 어둡고 격동적인 하늘까지 다양했다.

많은 푸생의 풍경화에는 수수께끼 같은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라무스와 티스베가 있는 풍경』에서는 폭풍이 몰아치는 하늘에도 불구하고 호수의 표면은 잔잔하며 나무를 비추고 있다.

1650년과 1655년 사이에는 고전적인 건축물이 배경에서 나무와 산을 대체하는 "타운스케이프" 연작을 그리기도 했다. 『사피라의 죽음』에서는 앞쪽에는 부유한 상인의 아내가 성 베드로에게 질책을 받은 후 죽고, 배경에서는 다른 남자가 거지에게 자선을 베푸는 두 이야기를 동시에 보여준다.

3. 4. 기타

La Danse du temps|시간의 춤프랑스어(1634-36)은 줄리오 로스피글리오시에게서 영감을 받은 알레고리 작품으로, 인생의 순환을 춤추는 인물들로 표현했다.[15] 자화상(1650)을 통해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16]

4. 화풍 및 기법

푸생은 당대 프랑스 미술의 주류였던 바로크 양식에서 벗어나, 고대와 르네상스 미술을 이상으로 삼는 고전주의 화풍을 추구했다. 그의 작품은 균형 잡힌 구도, 명확한 윤곽선, 절제된 색채, 인물들의 섬세한 표정과 몸짓 등을 특징으로 한다.[7] 지성(데생)을 색채보다 중시했으며, 조형적인 질서와 균형을 통해 이성적이고 명료한 표현을 추구했다.[21]

1620년대 후반과 1630년대에 푸생은 루도비시 카지노에서 티치아노의 바커스 축제 (''안드리아인들의 주신제'',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비너스 숭배'')를 연구하고, 도메니키노와 귀도 레니의 그림도 연구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실험하고 정립했다. 초기 그림의 따뜻하고 분위기 있는 스타일과 대조적으로, 1630년대에 더 차가운 색상, 더 건조한 터치, 그리고 잘 정의된 공간 내에 배치된 인물들의 무대와 같은 표현 방식을 발전시켰다.[7]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밀랍 인형을 이용해 극장 무대와 같은 공간을 연출하고,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연구하는 등 독특한 작업 방식을 사용했다. 꼼꼼하고 신중한 작업 방식으로 인해 작품 수가 많지 않으며, 평생 조수를 두지 않고 혼자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5. 영향 및 유산

니콜라 푸생은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그의 작품은 후대 프랑스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샤를 르 브룅은 로마에서 푸생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며, 푸생처럼 국왕의 궁정 화가가 되었고, 나중에는 프랑스 로마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다. 르 브룅을 통해 푸생의 화풍은 프랑스 미술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22]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자크 루이 다비드는 푸생의 화풍을 옹호하며 혁명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다비드의 작품인 ''브루투스''와 ''마라의 죽음'' 등에서 푸생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미국 화가 벤자민 웨스트는 푸생의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아 ''울프 장군의 죽음''을 그리기도 했다.

19세기에는 푸생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작가들은 국가적인 미술 운동을 만들고자 했고, 푸생은 그들의 영웅 중 한 명이 되었다.[10] 앵그르는 "역사화의 위대한 화가만이 아름다운 풍경을 그릴 수 있다. 그는 이탈리아의 본질을 포착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인물이었다."라며 푸생을 극찬했다. 앵그르의 라이벌이었던 외젠 들라크루아 역시 푸생을 "회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신가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폴 세잔은 푸생의 고전주의를 높이 평가하며 "푸생이 어떻게 자연을 완전히 다시 만들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내가 의미하는 고전주의입니다."라고 말했다. 세잔은 1907년 모리스 드니에 의해 "인상주의의 푸생"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조르주 쇠라 역시 푸생 작품의 형식적 특징을 칭찬했다.[23]

20세기에도 푸생의 영향은 계속되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푸생의 ''사비니 여인의 강간''을 바탕으로 일련의 그림을 그렸으며, 앙드레 드랭],][24]

6. 작품 목록



작품명제작 연도소장처
성모의 죽음1623년스테르베이크, 성 팡크라스 성당
바커스의 축제1624–1625년프라도 미술관
게르마니쿠스의 죽음1627년미네아폴리스 미술관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1628-29년바티칸 미술관
시인의 영감1629-30년경루브르 박물관
플로라의 왕국1630-31년알테 피나코텍
유아 학살1625-1632년콩데 미술관
아스돗의 페스트1631년루브르 박물관
파르나소스1631-1633년경프라도 미술관
사비니 여인의 강탈1633-34년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사비니 여인의 강탈1637-38년루브르 박물관
판의 승리1635-36년런던 내셔널 갤러리
인생의 춤1634-36년월리스 컬렉션
만나 수집1637-39년루브르 박물관
파트모스 섬의 성 요한이 있는 풍경1640년시카고 미술관
나는 아르카디아에도 있다 (아르카디아의 목자)1638-1639년경루브르 박물관
일본 가고시마에서 딸을 되살리는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르1641년루브르 박물관
일곱 성사1644-48년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에 위탁
계단의 성 가족1648년클리블랜드 미술관, 워싱턴 국립 갤러리
엘리에젤과 리브가1648년루브르 박물관
솔로몬의 재판1649년루브르 박물관
폴리페모스가 있는 풍경1649년에르미타주 미술관
자화상1650년루브르 박물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있는 풍경1650년경루브르 박물관
퓌라모스와 티스베가 있는 풍경1650-51년슈테델 미술관
코리올라누스1652-53년레장드리, 니콜라 푸생 미술관
사피라의 죽음1652년경루브르 박물관
에우다미다스의 유언1650-55년경코펜하겐 국립 미술관
바쿠스의 탄생1657년포그 미술관
해돋이를 찾는 눈먼 오리온1658년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사계1660-64년루브르 박물관


7. 참고 문헌


  • 프리드렌더, 『푸생』 (와카쿠와 미도리 역) 미술출판사, 1970년
  • 곤도 아키라, 『회화의 아버지 푸생』 신초샤, 1974년
  • 다카시나 슈지 『푸생』(세계 미술 전집 16) 슈에이샤, 1977년
  • 키무라 사부로 외 『푸생』 (캔버스 세계의 거장 14) 주오코론샤, 1984년
  • 『푸생과 라파엘로 차용과 창조의 비밀』 아이치현 미술관, 아시카가 시립 미술관, 1999년
  • 루이 마랭, 『숭고한 푸생』 (야바시 토오루 역) 미스즈 서방, 2000년
  • 키무라 사부로, 『니콜라 푸생과 예수회 도상 연구』 주오코론 미술출판, 2007년
  • 모치즈키 노리코, 『니콜라 푸생 회화적 비유를 읽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출판회, 2010년
  • 쿠리타 히데노리, 『푸생에서의 이야기와 우의』 산겐샤, 2014년
  • Henry Keazor, ''Nicolas Poussin'', Taschen, 2007.


푸생에 관해서는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의 『현대 화가·조각가·건축가전』(1672)[27], 앙드레 펠리비앙 데 자보의 『고금의 가장 뛰어난 화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강론』(1666-88)에서 전기적 사실과 회화 이론을 확인할 수 있으며, 푸생이 후원자들에게 보낸 수많은 서간이 남아 있다.

참조

[1] LPD
[2] EPD
[3] 서적 Lives of the Painters Rome 1672
[4] harvnb 1994
[5] harvnb 1994
[6] harvnb 2007
[7] harvnb
[8] harvnb 1994
[9] 문서
[10] 서적 La Maison de Nicolas Poussin via del Babuino a Rome in Actes di Colloque
[11] 웹사이트 The British Museum: Collection online http://www.britishmu[...]
[12] 문서
[13] 서적 Nicolas Poussin Pantheon
[14] harvnb 1994
[15] harvnb 1994
[16] 간행물 Poussin's Cartesian Meditations: Self and Other in the Self-Portraits of Poussin and Matisse
[17] harvnb 1994
[18] 서적 Poussin; The Early Years in Rome: The Origins of French Classicism Hudson Hills Press
[19] harvnb 2016
[20] harvnb 1994
[21] 간행물 Poussin Drawings from British Collections. Oxford
[22] 서적 History of Art Thames & Hudson
[23] 서적 Impressionism Hachette Réalités
[24] 서적 On Classic Ground: Picasso, Léger, de Chirico and the New Classicism 1910–1930 Tate Gallery
[25] 서적 Jean Hélion Paul Holberton
[26] 서적 Balthus Harry N. Abrams
[27] 서적 Lives of the Painters Rome 167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