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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루아 5세 당주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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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프루아 5세 당주 백작은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장남으로, 금작화 가지를 투구에 꽂아 플랜태저넷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노르망디, 앙주 간의 평화를 도모했으며, 앙주 백작, 노르망디 공작을 역임했다. 조프루아는 세 아들을 두었으며, 장남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었다. 조프루아의 장례 기념 명판은 유럽 문장학의 초기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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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루아 5세 당주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르망에 있는 조프루아의 묘비에 새겨진 에나멜 조각상. 그의 방패에 그려진 문양은 잉글랜드 왕가의 문장의 기원이다.
칭호조프루아 플랜태저넷
프랑스어 이름Geoffroy d'Anjou
작위
앙주 백작1129년 - 1151년 9월 7일
이전풀크 5세
이후헨리 2세
노르망디 공작1144년 - 1150년
이전스티븐
이후헨리 2세
메인의 영주1126년 - 1151년
이전에랑부르주, 풀크 5세(혼인 관계)
이후엘리아스 2세
모르탱 백작1141년 - 1144년
이전외스타슈 4세
이후기욤 1세
가문
가문잉겔게르 가문 (출생 시), 플랜태저넷 가문 (창시자)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마틸다 (1128년 결혼)
자녀잉글랜드 왕 헨리 2세
낭트 백작 조프루아 6세



메리, 샤프츠베리 수도원장
출생과 사망
출생일1113년 8월 24일
사망일1151년 9월 7일 (향년 38세)
사망 장소프랑스 샤토뒤루아르
매장 장소르망 르망 대성당
부모
아버지예루살렘 왕 풀크 5세
어머니메인 여백작 에랑부르주

2. 생애 초기

조프루아는 앙주 백작 풀크 5세와 메인 백작 부인 에르망가르드의 장남이었다.[1] 연대기 작가 존 오브 마르무티에는 조프루아를 잘생기고,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유쾌하고, 위대한 전사라고 묘사했다.[1] 그는 전투에 나갈 때마다 금작화 가지를 투구에 꽂은 것 때문에 플랜태저넷(Plantagenet)이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이는 모자에 꽂았던 금작화의 노란 꽃가지(genêt|즈네프랑스어는 planta genista|플란타 게니스타la, 즉 금작화의 프랑스어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2][3][4]

잉글랜드의 헨리 1세는 조프루아의 재능과 용맹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자신의 딸이자 후계자인 25세의 마틸다와의 결혼을 협상하기 위해 앙주에 사절을 보냈다.[1] 이 결혼은 본래 1119년 조프루아의 누나 마틸드와 마틸다 황후의 남동생 윌리엄 아델린 사이에 정략결혼이 추진되었으나, 1120년 화이트 쉽 난파 사고로 윌리엄 아델린이 사망하면서 무산된 후, 새로운 상대로 조프루아와 마틸다가 선택된 것이었다.[16]

양측의 동의가 이루어져, 1128년 6월 10일, 15세의 조프루아는 노르망디 공작이기도 한 헨리 1세에 의해 루앙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1] 같은 해, 그는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했으며[15], 결혼식에서 장인인 헨리 1세로부터 금사자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하사받았다.[16] 이듬해인 1129년, 아버지 풀크 5세가 예루살렘 왕국으로 떠나 멜리상드와 재혼하고 1131년 예루살렘 왕위에 오르면서[15], 조프루아는 앙주 백작령을 물려받았다.[15]

3. 결혼

1119년 조프루아의 아버지 풀크 5세와 헨리 1세는 조프루아의 누나 마틸드와 헨리 1세의 아들 윌리엄 아델린의 결혼을 결정했다. 그러나 1120년 화이트 쉽 난파 사고로 윌리엄 아델린이 사망하면서 이 결혼은 무산되었고, 새로운 정략 결혼 상대가 필요하게 되었다.[16]

이에 따라 1128년 6월 11일, 조프루아는 헨리 1세의 딸이자 추정상속인인 마틸다와 결혼했다.[23][15] 이 결혼은 잉글랜드 및 노르망디와 앙주 사이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동맹을 맺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23][2] 결혼 당시 마틸다는 조프루아보다 11살 연상이었으며,[23][2] 과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의 황후였던 자신의 지위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23][2][21] 이 때문에 마틸다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앙주 백작 가문의 아들이자 나이 어린 조프루아와의 결혼에 불만을 품었다.[23]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아 격렬한 다툼 끝에 자주 오랜 기간 별거하는 등 관계가 불안정했다.[23] 마틸다는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궁정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헨리 1세의 중재로 다시 조프루아에게 돌아왔다.[2] 비록 두 사람의 관계는 격정적이었지만,[2]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서로에게 정치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23] 관계는 지속되었고, 마틸다는 조프루아보다 더 오래 살았다.[23]

1133년 장남 앙리(훗날 헨리 2세)가 태어났으나,[16] 조프루아 부부는 노르망디와 앙주 경계 지역의 성 지배권을 헨리 1세에게 요구하며 대립했다. 또한 잉글랜드 귀족들은 숙적인 앙주 가문에 왕위 계승권이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이 결혼에 반감을 가졌다.[16]

조프루아는 결혼할 때 장인 헨리 1세로부터 금사자 방패 문장을 하사받았다.[15]

마틸다와의 사이에서는 세 아들이 태어났다.[23][2]

이름생몰년주요 작위
헨리1133년–1189년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앙주 백작
조프루아1134년–1158년앙주 백작, 멘 백작, 낭트 백작
기욤1136년–1164년푸아티에 백작



또한, 조프루아에게는 다음과 같은 서자가 있었다.


  • Hamelin de Warenne, Earl of Surrey|하멜린 드 와렌영어: 서리 여백작 Isabel de Warenne, Countess of Surrey|이자벨 드 와렌영어과 결혼하여 서리 백작이 되었다.

4. 앙주 백작

1129년, 아버지 풀크예루살렘 왕국으로 떠나면서 조프루아는 앙주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풀크는 1128년 보두앵 2세의 상속녀인 멜리장드와 결혼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1131년에는 멜리장드와 함께 예루살렘의 공동 왕이 되었다.[24][15]

마르무티에의 존은 조프루아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이자, 쾌활하고 위대한 전사였다고 묘사했다. 반면 디케토의 랄프는 그의 매력이 차갑고 이기적인 본성을 감추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교양 있는 인물로, 앙제의 궁정에 학자들을 초청해 토론을 즐겼다고 전해진다.[21]

1135년 장인인 헨리 1세가 사망하자, 아내 마틸다는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노르망디로 향했다. 노르망디 국경 지역 영주들은 마틸다에게 복종했으나, 잉글랜드에서는 마틸다의 사촌인 블루아의 스티븐을 왕으로 선출했다.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많은 귀족들은 여성 군주에 대한 거부감과 앙주 가문에 대한 오랜 경계심 때문에 스티븐을 지지했다.[17] 노르망디 역시 곧 스티븐 지지로 돌아섰다. 조프루아는 아내의 권리를 위해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고, 쥐엘 드 마옌에게 앙주 국경의 성들(앰비에르, 고론, 샤틸롱-쉬르-콜몽)을 넘겨주는 대가로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5]

1139년 마틸다는 140명의 기사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내전이 시작되었다. 1141년 2월, 스티븐 왕이 링컨 전투에서 사로잡혔고,[6] 4월에는 윈체스터에서 열린 잉글랜드 교회 회의에서 스티븐의 폐위를 선언하고 마틸다를 "잉글랜드의 여주인"(Lady of the English영어)으로 선포했다.[6] 그러나 마틸다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곧 풀려난 스티븐에 의해 퇴각해야 했다.

1142년 노르망디 지도
앙주의 조프루아의 노르망디 침공, 1142–43


한편 조프루아는 1141년부터 노르망디 공략에 집중했다. 1142년1143년에 걸쳐 센 강 서쪽과 남쪽의 노르망디 전역을 장악했으며, 1144년 1월 14일에는 루앙에 입성하여 여름에는 노르망디 공작 칭호를 얻었다.[18] 같은 해, 그는 앙주에 샤토-레르미타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세웠다.[7] 1145년 루이 7세는 조프루아의 노르망디 공작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조프루아는 1149년까지 노르망디를 다스리다가 아들 앙리에게 공작위를 물려주었고, 이는 다음 해인 1150년 루이 7세에 의해 다시 승인되었다.[8]

조프루아의 통치 기간 동안 앙주에서는 1129년, 1135년, 그리고 1145년부터 115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남작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9] 그는 남동생 엘리아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자주 다투었으며, 결국 엘리아스를 1151년 사망할 때까지 투옥하기도 했다. 이러한 내부 반란의 위협은 그가 노르망디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했고, 잉글랜드 내전에 직접 개입할 여력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다.

1150년 조프루아는 루이 7세의 봉신인 지로 베르레를 체포하면서 왕과 갈등을 빚었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로부터 파문당했다. 쉬제르의 중재로 잠시 분쟁이 멈췄으나, 1151년 쉬제르가 사망하자 갈등이 재개되었다. 그해 8월, 조프루아는 아들 앙리와 함께 파리의 시테 궁전에 나타나 루이 7세와 대면했으나, 베르나르두스가 제안한 화해 조건을 거부하고 떠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태도를 바꿔 베르레를 석방하고, 앙리가 루이 7세에게 신종 서약을 하여 노르망디 공작위를 보장받는 대신 파문에서 해제되고 분쟁 지역이었던 벡상까지 넘겨받았다. 이러한 조프루아의 입장 변화는 루이 7세와 사이가 좋지 않던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앙리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의 일부였다는 해석도 있다.[19]

1151년 9월, 조프루아는 르망으로 가던 중 샤토-뒤-로아르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유해는 아들 앙리에 의해 르망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유언으로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는 장남 앙리에게, 앙주는 차남 조프루아가 상속하도록 정했으며, 잉글랜드 계승 전에는 시농, 루덩, 미르보 외의 앙주를 앙리가 물려받는다는 조건도 덧붙였다. 그러나 앙리는 이 약속을 어기고 동생의 상속권을 빼앗아 앙주 전체를 차지했고, 분노한 조프루아는 1152년 루이 7세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앙리에게 패배하고 루덩만을 영유하게 되었다.[20] 조프루아 사후 1153년 월링포드 조약이 체결되어, 스티븐 왕 사후 앙리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기로 결정되었고, 1154년 앙리가 헨리 2세로 즉위하며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10]

5. 노르망디 공작

1135년 장인인 잉글랜드 왕 헨리 1세가 사망하자, 조프루아는 아내 마틸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노르망디 진입을 지지했다. 노르망디 국경 지역 영주들은 마틸다에게 복종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그녀의 사촌 블루아의 스티븐이 왕으로 즉위했고 노르망디의 남작 대부분도 스티븐을 지지했다. 이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많은 남작들이 동일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부 남작들은 헨리 1세의 생전 약속을 지키며 마틸다를 지지했다. 이듬해인 1136년, 조프루아는 마틸다의 상속을 돕는 대가로 앰비에르, 고론, 샤틸롱-쉬르-콜몽을 쥐엘 드 마옌에게 넘겨주었다.[5]

1139년, 마틸다는 140명의 기사와 함께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어룬델 성에서 스티븐 왕에게 포위되기도 했으나, 이는 무정부 시대라 불리는 내전의 시작이었다. 1141년 2월, 스티븐은 링컨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로잡혔고[6], 4월 윈체스터에서 열린 교회 회의는 스티븐의 폐위를 선언하고 마틸다를 '잉글랜드의 여주인'으로 선포했다.[6] 그러나 마틸다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풀려난 스티븐에 의해 다시 밀려났다.

한편, 조프루아는 1141년부터 노르망디 공략에 집중했다. 1142년1143년에 걸쳐 센 강 서쪽과 남쪽의 노르망디 전역을 장악했고,[18] 1144년 1월 14일에는 센 강을 건너 루앙에 입성했다. 같은 해 여름, 그는 노르망디 공작 칭호를 얻었으며[18], 앙주에는 샤토-레르미타주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세웠다.[7] 이듬해인 1145년, 루이 7세는 조프루아의 노르망디 공작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18][8]

조프루아는 1149년까지 공작령을 다스렸고, 그해 마틸다와 함께 아들 앙리에게 공작령을 양도했다. 이 승계는 1150년 루이 7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비준되었다.[8] 그러나 같은 해, 조프루아는 루이 7세의 푸아티에 대관 지로 베르레와의 분쟁으로 왕과 대립하게 되었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로부터 파문까지 당했다. 루이 7세의 측근 쉬제르의 중재로 잠시 분쟁이 멈췄으나, 1151년 1월 쉬제르가 사망하자 대립이 재개되었다. 8월, 조프루아는 아들 앙리와 함께 파리의 시테 궁전에 나타나 베르나르두스가 제안한 베르레 석방과 파문 해제 교환을 거부했다. 하지만 같은 달 말, 그는 돌연 태도를 바꿔 베르레를 석방하고 앙리를 루이 7세에게 신종시켜 노르망디 공작위를 보장받았으며, 파문이 해제되고 분쟁 지역인 벡상까지 넘겨받았다. 이러한 변화는 루이 7세와 사이가 좋지 않던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앙리와 재혼시키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 있다.[19]

조프루아는 재위 기간 동안 1129년, 1135년, 그리고 1145년부터 115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앙주에서 발생한 남작들의 반란을 모두 진압했다.[9] 또한 동생 엘리아스와도 자주 충돌하여 결국 그를 사망할 때까지 투옥하기도 했다.[9] 이러한 내부 반란의 위협은 그가 노르망디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 시간을 지연시켰고, 잉글랜드 내전에 직접 개입할 여력을 갖지 못하게 한 주요 원인이었다.

1151년 9월, 조프루아는 르망으로 가던 중 샤토-뒤-로아르에서 물놀이를 한 후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3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아들 앙리에 의해 르망 대성당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20] 그의 사후, 1153년 월링포드 조약이 체결되어 스티븐이 종신토록 잉글랜드 왕위를 유지하되, 사후에는 조프루아와 마틸다의 아들 앙리가 왕위를 계승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10]

6. 앙주 내 반란 진압

조프루아가 앙주를 다스리는 동안, 영지 내 남작들은 1129년, 1135년, 그리고 1145년부터 1151년까지 총 세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프루아는 이 반란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그는 자신의 남동생인 엘리아와도 관계가 좋지 않아 자주 충돌했으며, 결국 엘리아를 1151년까지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이러한 영지 내의 잦은 반란은 조프루아가 노르망디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으며,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7. 사망

1151년 8월, 조프루아는 아들 앙리와 함께 파리 (시테 섬)의 시테 궁전에 나타났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가 제안한 푸아티에 대관 지로 베르레의 석방과 교환하는 파문 해제를 거부하고 떠났으나, 같은 달 말 태도를 바꿔 베르레를 석방했다. 이후 앙리를 프랑스 왕 루이 7세에게 신종시켜 노르망디 공작위를 보장받고 파문도 해제되었으며, 분쟁지였던 벡상도 넘겨받았다. 이는 루이 7세와 사이가 좋지 않던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앙리와 재혼시키려는 의도와 관련된 움직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9]

1150년경 프랑스 북서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151년 9월 7일, 조프루아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마르무티에의 존에 따르면, 조프루아는 왕립 회의에서 돌아오던 중 열병에 걸렸다고 한다.[10] 다른 기록에서는 9월에 르 망으로 가던 중 샤토-뒤-루아르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열병에 걸려 곧 사망했다고 전한다.[20] 그는 샤토-뒤-루아르에 도착하여 소파에 쓰러진 뒤, 선물과 자선에 대한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10]

임종이 가까워지자 조프루아는 아들 앙리에게, 그가 잉글랜드 왕이 된 후에 앙주 백작령과 멘 백작령을 동생 낭뜨 백작 조프루아에게 넘기겠다는 맹세를 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앙리는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영지를 동생에게 넘기기를 거부하며 한동안 아버지의 시신을 그대로 두었으나, 결국 주변 사람들의 설득으로 앙주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25] 그의 유해는 아들 앙리에 의해 르 망의 생 쥘리앙 대성당에 안장되었다.[10][20]

조프루아는 유언을 통해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는 앙리에게, 앙주는 차남 조프루아에게 상속하도록 정했다. 또한 앙리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기 전까지는 시농, Loudun|루덩프랑스어, Mirebeau|미르보프랑스어를 제외한 앙주 지역을 앙리가 관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앙리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동생의 상속권을 빼앗아 앙주 전체를 차지했다. 이에 분노한 동생 조프루아는 1152년 루이 7세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앙리에게 패배하고 항복했으며, 상속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루덩만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 1154년 앙리는 스테판 왕 사후 잉글랜드 왕위까지 계승하여 헨리 2세로 즉위했고, 이로써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20]

8. 유산

조프루아와 마틸다 사이에는 세 아들이 있었다.

# 헨리 2세, 잉글랜드 왕 (1133–1189)

# 조프루아, 낭트 백작 (1134–1158)

# 윌리엄, 디에프 자작 (1136–1164)

또한, 조프루아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부(들)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두기도 했다.

# 하멜린, 서리 백작 이사벨 드 바렌과 결혼

# 엠마, 북웨일스의 왕자 다비드 압 오와인 기네드와 결혼

# 메리, 수녀가 되어 샤프츠베리 수녀원장이 되었으며, 시인 마리 드 프랑스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8. 1. 정치적 유산

1128년, 조프루아 5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딸이자 후계자인 마틸다와 결혼하였다. 이듬해인 1129년에는 아버지로부터 앙주 백작령을 물려받았다.[15] 이 결혼은 훗날 잉글랜드 왕위 계승 문제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마틸다의 사촌인 블루아 백작 스테판이 재빨리 런던을 장악하고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 당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제후들은 여성 군주에 대한 거부감과 더불어, 오랜 숙적이었던 앙주 가문 출신의 조프루아 5세가 마틸다의 남편이라는 점 때문에 스테판의 즉위를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17] 이에 마틸다는 자신의 정당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1139년 이복 오빠인 로버트를 비롯한 반대파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잉글랜드에 상륙, 왕위 계승 전쟁(무정부 시대)이 시작되었다.[18]

이 기간 동안 조프루아 5세는 1141년부터 노르망디 공략에 집중하여 1144년에는 노르망디 전역을 평정하고 현지 제후들의 충성을 받아냈다. 나아가 프랑스 왕 루이 7세로부터 노르망디 공작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며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18] 1150년에는 장남 앙리(훗날 헨리 2세)에게 노르망디 공작위를 넘겨주었다. 이후 루이 7세와 잠시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1151년 아들 앙리를 루이 7세에게 신종(臣從)시키고 노르망디 공작위를 재확인받는 등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이는 당시 루이 7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앙리와 재혼시키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19]

1151년 9월, 조프루아 5세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장남 앙리에게는 노르망디와 (아직 확보하지 못한) 잉글랜드를, 차남 조프루아에게는 앙주 백작령을 상속하도록 했다. 또한 앙리가 잉글랜드 왕위를 얻기 전까지는 시농, 루덩, 미르보 외의 앙주 지역을 앙리가 관리하도록 덧붙였다.[20]

그러나 앙리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동생 조프루아가 상속받아야 할 앙주 백작령까지 모두 차지했다. 이에 반발한 동생 조프루아가 1152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앙리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결국 1154년, 앙리는 스테판 왕 사후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 헨리 2세로 즉위하며 플랜태저넷 왕조 시대를 열었다. 이는 조프루아 5세의 군사적, 외교적 노력이 아들 대에 이르러 광대한 앙주 제국 형성의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음을 보여준다.[20]

조프루아 5세는 외모가 뛰어나 "미남 공작"이라 불렸지만, 냉혹하고 독선적인 면모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궁정에서 학자들과 토론을 즐겼으며, 제프리 오브 몬머스에게 『브리타니아 열왕사』 집필을 의뢰하기도 했다. 이는 아서 왕 전설의 원형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장차 잉글랜드를 지배하게 될 노르만족과 브리튼인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21] 또한, 장인 헨리 1세로부터 하사받은 금사자 방패 문장은 그의 서자(庶子)의 아들, 즉 손자인 윌리엄 롱스페에게 계승되어 영국 문장학 역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22]

8. 2. 문화적 유산

조프루아 5세의 미망인이 그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의뢰한 유리질 에나멜 상(像)(장례 기념 명판)은 유럽 문장학의 가장 초창기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12세기 후반의 연대기 작가인 장 드 마르망티에는 1128년 헨리 1세가 사위인 조프루아를 기사로 임명하면서 금 사자가 그려진 방패 문장을 수여했다고 기록했다.[11] 이 금 사자 문양은 헨리 1세 자신의 문장이었을 수도 있으며, 그의 많은 후손들이 다양한 사자 문양을 사용하게 되었다. 에나멜 상에는 조프루아가 금 사자들이 그려진 파란색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손자인 윌리엄 롱스페가 사용한 문양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12] 영국 역사가 짐 브래드버리는 이것이 문장의 첫 번째 진정한 표현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13] "영국 왕실 문장의 초기 사용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14] 이 금사자 방패 문장은 조프루아 5세의 아들인 헨리 2세가 아닌, 서자이자 손자인 윌리엄 롱스페 (1176년경 - 1226년)에게 계승되었다. 솔즈베리 대성당에 있는 롱스페의 묘상에서도 이 금사자 방패 문장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는 영국 최초의 문장 사용자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22]

조프루아 5세는 교양 있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앙제의 궁정에 학자들을 초빙하여 논쟁을 즐겼으며, 장래의 잉글랜드 지배를 염두에 둔 문화적 기반 마련에도 힘썼다. 그는 측근인 제프리 오브 몬머스에게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집필을 의뢰했는데, 이 책은 아서 왕 전설의 원형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의 노르만족과 브리튼 섬의 원주민인 브리튼인을 역사적으로 연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21]

참조

[1] 서적 England Under the Angevin Kings General Books LLC 1887
[2] 서적 The Conquering Family https://archive.org/[...] New York: Popular Library 1962
[3] 서적 The Plantagenets: The Warrior Kings and Queens Who Made England Viking Press 2013
[4] 서적 The Heraldic Register https://books.google[...]
[5] 서적 Geoffrey V of Anjou, Count and Knight Boydell Press 1990
[6] 서적 King Stephen's Reign Woodbridge 2008
[7] 서적 The Haskins Society Journal Boydell 2014
[8] 서적 Henry II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7
[9] 서적 Chroniques des comtes https://archive.org/[...] 1913
[10] 간행물 Normandy Under Geoffrey Plantagenet 1912-07
[11] 서적 The Oxford Guide to Heraldry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12] 서적 The Origins of The Royal Arms of England Graduate Center for Medieval Studies, University of Reading
[13] 서적 Color and Culture: Practice and Meaning from Antiquity to Abstraction 1999
[14] 서적 The Routledge Companion to Medieval Warfare 2004
[15] 문서 森、P54 - P55、ルゴエレル、P29 - P30、朝治、P28 - P29。
[16] 문서 森、P34 - P35、ペルヌー(1996)、P92、ルゴエレル、P29、朝治、P29、君塚、P53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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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문서 ペルヌー(1996)、P93、ルゴエレル、P32 - P33、朝治、P29 - P31、君塚、P60 - P61。
[19] 문서 桐生、P74 - P78、石井、P195 - P196、ペルヌー(1996)、P93 - P96、P102、ルゴエレル、P33 - P35、君塚、P62 - P63。
[20] 문서 桐生、P78、P87、石井、P204、P211 - P212、ペルヌー(1996)、P96、P117、ルゴエレル、P35 - P40。
[21] 문서 ペルヌー(1988)、P189 - P190、桐生、P88、石井、P195、P209、ペルヌー(1996)、P95、P103、ベルトゥロ、P37 - P39、ルゴエレル、P29、君塚、P55。
[22] 문서 森、P54 - P56。
[23] 서적
[24] 문서 1131년 보두앵 2세가 사망하자 풀크는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다.
[2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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