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크 5세 당주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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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풀크 5세는 12세기 앙주 백작이자 예루살렘의 국왕이었다. 1109년 앙주 백작위를 물려받아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고,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2세의 딸 멜리장드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했다. 그는 멜리장드를 배제하고 친정을 강화하려 했으나 반대에 직면했고, 재위 기간 중 변경 방어에 힘썼다. 1143년 낙마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십자군 국가들은 위협을 받았다. 그는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시조인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의 아버지이자,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와 아모리 1세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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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크 5세 당주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풀크 |
프랑스어 표기 | Foulque |
라틴어 표기 | Fulco |
칭호 | 엘사렘 왕 |
기타 칭호 | 앙주 백작 (풀크 5세) 메인 백작 |
출생 | 1089년/1092년 경, 프랑스 왕국, 앙제 |
사망 | 1143년 11월 13일,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
매장지 | 예루살렘 왕국, 성분묘 교회 |
![]() | |
통치 | |
즉위 | 1131년 |
퇴위 | 1143년 |
이전 통치자 | 보두앵 2세 |
다음 통치자 | 멜리장드와 보두앵 3세 |
섭정 | 멜리장드 (공동 통치) |
가문 | |
왕가 | 샤토뒤 가문 |
아버지 | 풀크 4세 |
어머니 |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 |
배우자 | 에랑부르주 드 메느 멜리장드 |
자녀 | 조프루아 5세 시빌라 (플랑드르 백작 부인) 마틸다 (노르망디 공작 부인) 엘리아스 2세 보두앵 3세 아모리 |
앙주 백작 | |
재위 기간 | 1109년 – 1129년 |
이전 통치자 | 풀크 4세 |
다음 통치자 | 조프루아 5세 |
메느 백작 | |
재위 기간 | 1110년 – 1126년 |
이전 통치자 | 엘리아 1세 |
다음 통치자 | 조프루아 |
섭정 | 에랑부르주 (공동 통치) |
2. 생애
풀크는 풀크 4세 당주 백작과 몽포르의 베르트라데의 아들로 출생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1109년 아버지 풀크가 죽자 앙주의 백작지위를 물려받았고 멘의 에멩가르데와 결혼하여 멘의 영지도 받았다.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분쟁에 가담하여 원래 잉글랜드의 헨리 1세와 루이 6세의 분쟁에서 루이를 지지했으나 1127년 아들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을 헨리의 딸 마틸다와 약혼시켜 헨리의 편으로 돌아섰다.
1120년 그는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여 성지로 갔으며 그곳에서 무훈을 세웠다. 1127년 앙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가 자신의 딸 멜리장드와의 혼인을 제안했다. 보두앵은 아들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강력하고 부유한 풀크를 사위로 삼아 후계를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앙주로 돌아온 풀크는 아들 조프루아에게 지위를 물려주고 아들을 잉글랜드의 마틸다와 결혼시켰다. 이것이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왕가의 시초가 된다.
1129년 6월 2일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풀크는 멜리장드와 결혼하였고 이듬해 아들 보두앵을 낳았다. 1131년 장인 보두앵 2세가 죽자 풀크는 멜리장드와 공동으로 예루살렘의 왕위에 올랐다. 왕에 오르자 그는 멜리장드를 배제하고 자신의 친정을 강화했고 앙주 출신의 귀족들을 선호하며 다른 십자군 국가에 대한 예루살렘의 종주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즉위 초기 풀크는 본토 십자군 2세대 귀족들과 세력드의 저항을 받았다. 아내 멜리장드의 동생 알리스가 안티오키아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1134년에는 멜리장드에게만 충성을 맹세하는 르 퓌제의 위그가 반란을 일으켜 아스칼론의 이슬람과 손을 잡았다. 이때 풀크는 위그와 멜리장드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여겼는데 마침 위그를 암살하여는 시도가 있었다. 그 배후에 풀크가 있다고 의심받았기 때문에 풀크는 급속하게 왕국내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멜리장드를 따르는 분파가 권력을 잡았다.
풀크는 재위 시절 왕국의 변경의 방위에 힘썼다. 1137년 모술의 아타베그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점차 세력을 키워 다마스쿠스를 위협했는데 1140년에 풀크는 다마스쿠스를 도와 장기의 군대를 물리쳤다. 또한 남쪽 변경에 알 카라크, 이벨린등 요새를 세워 방위를 튼튼하게 했다.
1143년 풀크는 아내 멜리장드와 함께 아크레에서 사냥을 하던 중 낙마사고를 당했는데 사흘을 의식없이 보내다가 결국 11월 3일 아크레에서 죽었다.[2] 티레의 기욤의 기록에 의하면 비록 멜리장드는 풀크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의 무덤(혹은 보두앵 3세의 무덤)에서 나온 대리석 패널이 현재 테라 산타 박물관(Terra Sancta Museum), 예루살렘에 보관되어 있다.[3] 그 패널에는 로제트가 새겨져 있으며, 그 중 하나는 중심에 십자 파테가 있다.
그의 사후 장기는 십자군 국가에 대한 진군을 계속하여 1144년 에데사 백국이 무너졌고 이는 제2차 십자군의 발흥의 계기가 되었다.
2. 1. 앙주 백작 시대
풀크는 풀크 4세 당주 백작과 몽포르의 베르트라데의 아들로, 출생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1089년에서 1092년 사이 앙제에서 태어났다. 1092년 베르트라데는 남편을 버리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결혼했다. 1109년 아버지 풀크 4세가 죽자 앙주 백작 지위를 물려받았고,[5] 이듬해 1110년 메인 백작 엘리 1세의 딸이자 여성 상속인인 에랑부르주와 결혼하여 장인 엘리 1세가 사망하자 메인 백작령을 병합했다.[5] 아내 에랑부르주와 함께 메인을 공동 통치했다.앙주 백작은 대대로 노르망디 공국 공작과 대립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프랑스 왕국 왕 루이 6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왕국 왕 겸 노르망디 공작 헨리 1세와 적대했다.[6][7] 그의 조카이자 노르망디 공작위를 요구했던 기욤 클리토와 손을 잡고, 차녀 시빌과 기욤의 약혼을 계획했으며, 헨리 1세에게 반항하는 슈루즈베리 백작 등 노르만 귀족들과 루이 6세, 외삼촌인 몽포르 경 아모리와의 연계를 통해 헨리 1세를 괴롭혔다.[6][7]
그러나 헨리 1세가 반격하여 1112년 슈루즈베리 백작을 체포하고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자 화해했고, 이듬해 1113년 메인에서 헨리 1세에게 신종(臣從)했으며, 윌리엄 아델린 왕세자와 장녀 마틸드를 약혼시켰다((1119년 결혼).[8] 루이 6세도 헨리 1세와 화해하여 일시적으로 평화가 찾아왔지만, 몽포르 경이 다시 헨리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루이 6세와 함께 헨리 1세의 적으로 돌아섰고, 플랑드르 백작보두앵 7세도 더해 노르망디를 침공, 1118년 알랑송에서 헨리 1세에게 승리했다.[8]
같은 해 보두앵 7세가 부상으로 물러나자 헨리 1세와 다시 화해했고, 1120년 윌리엄 왕세자가 화이트 쉽 난파 사고로 사고사한 후, 1123년 차녀 시빌과 기욤 클리토를 결혼시켜 또다시 헨리 1세에게 반항하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헨리 1세의 의향을 받은 로마 교황의 개입으로 시빌과 기욤의 결혼은 무효 처리되었다.
이후 헨리 1세 편에 서서, 1128년 적자 조프루아를 헨리 1세의 딸이자 윌리엄 아델린의 친누이이며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마틸다(모드)와 약혼시켰다(기욤 클리토는 같은 해 전사, 일련의 반란은 평정되었다).[9] 1127년 아들 조프루아를 헨리의 딸 마틸다와 약혼시켜 헨리의 편으로 돌아섰다.[9] 1133년 조프루아와 마틸다의 아들로 태어난 조프루아가 훗날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로서 플랜태저넷 왕조를 창시한다.
2. 2. 십자군 및 예루살렘 국왕 시대
1120년경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 십자군에 참가한 풀크 5세는 성전 기사단과 함께 성지를 지켰다.[10] 1127년 앙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가 자신의 딸 멜리장드와의 혼인을 제안했다.[10] 보두앵은 아들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강력하고 부유한 풀크를 사위로 삼아 후계를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보두앵 2세는 딸을 강력한 영주와 결혼시켜 상속을 보호하고 싶어했다. 풀크는 단순한 왕비의 배필 이상의 조건을 요구했는데, 멜리장드와 함께 왕이 되기를 원했다. 보두앵 2세는 풀크의 재산과 군사적 업적을 고려하여 이를 수락했다.앙주로 돌아온 풀크는 아들 조프루아에게 지위를 물려주고 아들을 잉글랜드의 마틸다와 결혼시켰다. 이것이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왕가의 시초가 된다. 1129년 6월 2일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풀크는 멜리장드와 결혼하였고 이듬해 아들 보두앵을 낳았다.[10] 1131년 장인 보두앵 2세가 죽자 풀크는 멜리장드와 공동으로 예루살렘의 왕위에 올랐다.[10]
왕에 오르자 그는 멜리장드를 배제하고 자신의 친정을 강화했고 앙주 출신의 귀족들을 선호하며 다른 십자군 국가에 대한 예루살렘의 종주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즉위 초기 풀크는 본토 십자군 2세대 귀족들과 세력들의 저항을 받았다. 아내 멜리장드의 동생 알리스가 안티오키아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1134년에는 멜리장드에게만 충성을 맹세하는 르 퓌제의 위그가 반란을 일으켜 아스칼론의 이슬람과 손을 잡았다. 이때 풀크는 위그와 멜리장드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여겼는데 마침 위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배후에 풀크가 있다고 의심받았기 때문에 풀크는 급속하게 왕국 내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멜리장드를 따르는 분파가 권력을 잡았다.

풀크는 재위 시절 왕국의 변경의 방위에 힘썼다. 1137년 모술의 아타베그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점차 세력을 키워 다마스쿠스를 위협했는데 1140년에 풀크는 다마스쿠스를 도와 장기의 군대를 물리쳤다. 또한 남쪽 변경에 알 카라크, 이벨린등 요새를 세워 방위를 튼튼하게 했다.
1143년 풀크는 아내 멜리장드와 함께 아크(Akko)에서 사냥을 하던 중 낙마사고를 당했는데 사흘을 의식없이 보내다가 결국 11월 3일 아크레에서 죽었다.[2] 티레의 기욤의 기록에 의하면 비록 멜리장드는 풀크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의 무덤(혹은 발두인 3세의 무덤)에서 나온 대리석 패널이 현재 테라 산타 박물관(Terra Sancta Museum), 예루살렘에 보관되어 있다.[3] 그 패널에는 로제트가 새겨져 있으며, 그 중 하나는 중심에 십자 파테가 있다.
그의 사후 장기는 십자군 국가에 대한 진군을 계속하여 1144년 에데사 백국이 무너졌고 이는 제2차 십자군의 발흥의 계기가 되었다.
3. 가족 관계
풀크 5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멘의 에멩가르데(1126년 사망)로, 1110년에 결혼했다. 이 둘 사이에서는 4명의 자녀를 두었다.
- 조프루아 플랜태저넷: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시조이자, 헨리 2세의 아버지이다.
- 시빌라: 1123년 윌리엄 클리토와 결혼했다가 1124년에 이혼했고, 1134년에 플랑드르의 티에리 백작과 재혼했다.
- 마틸다: 윌리엄 아델린과 결혼했으나, 1120년 ''화이트 쉽'' 사고로 남편이 사망한 후 수녀가 되었다. 1149년에는 퐁트브로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 엘리아스 2세: 1151년에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예루살렘의 멜리장드 여왕으로, 1129년에 결혼했다. 풀크 5세와 멜리장드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다.
- 보두앵 3세
- 아모리 1세
4. 평가
윌리엄 오브 타이어에 따르면, 풀크는 "다윗과 같은, 붉은 기색을 띤 남자... 충실하고 온화하며, 상냥하고 친절했다... 군사 문제에 있어 인내와 지혜가 넘치는 노련한 전사"였다. 그는 풀크를 유능한 군인이자 뛰어난 정치가로 묘사했지만, 풀크가 북쪽의 십자군 국가 방어에 적절히 신경 쓰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풀크의 가장 큰 단점은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븐 알-칼라니시는 그를 "앙주의 백작"의 아랍어 표현인 ''알-쿤드 안주르''(al-Kund Anjur)라고 부르며, "그는 판단력이 좋지 않았고 그의 행정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잔기 왕조는 십자군 국가에 대한 진격을 계속했고, 이는 1144년 에데사 공방전 이후의 영토 몰락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제2차 십자군으로 이어졌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II: The Kingdom of Jerusale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2
[2]
간행물
Life among the Europeans in Palestine and Syria in the Twelfth and Thirteenth Centuries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77
[3]
서적
Jerusalem, 1000–1400
https://books.googl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6
[4]
문서
ベルトラードが王妃になったことにより、廃妃ベルトが産んだ継子コンスタンス姫はフルク4世による妻奪還を阻む味方を作るべく、王フィリップ1世により早々にブロワ家に嫁がされ、ベルトラードは理由を付けて王家に残ったルイ王太子を王宮からサン=ドニ大聖堂やポントワーズに追い出す等冷遇した。フランス王家の後継者争いにおいて、フルク5世は実母ベルトラードがフィリップ1世との間に産んだ異父弟マント伯フィリップ派に付き、フィリップ1世崩御後にルイ6世即位の妨害に加わっている。
[5]
문서
ルゴエレル、P28、朝治、P26。
[6]
문서
ルゴエレル、P29。
[7]
문서
朝治、P25 - P26、君塚、P53。
[8]
문서
朝治、P26 - P27。
[9]
문서
ルゴエレル、P29 - P30、朝治、P27 - P29、君塚、P53 - P56。
[10]
문서
ペルヌー(1992)、P77 - P82、ルゴエレル、P30、朝治、P29、ジョティシュキー、P118、佐藤、P56、P72、P7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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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ペルヌー(1992)、P106、ジョティシュキー、P208。
[14]
문서
グルッセ、P53 - P54、ペルヌー(1992)、P106 - P112。
[15]
문서
ペルヌー(1988)、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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