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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클리퍼드 펨버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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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클리퍼드 펨버턴은 멕시코-미국 전쟁과 남북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남북 전쟁 발발 후 남부 연합에 합류하여 빅스버그 방어 임무를 맡았다. 펨버턴은 빅스버그 포위전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의 북군에 맞서 6주 이상을 버텼지만, 결국 항복했다. 전쟁 후에는 농장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가 1881년 사망했으며, 빅스버그 전투에서의 그의 역할은 사후에도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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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클리퍼드 펨버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 C. 펨버턴
존 C. 펨버턴
인물 정보
이름존 클리퍼드 펨버턴
출생1814년 8월 1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사망1881년 7월 1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펜린
매장지로럴 힐 묘지,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미국
배우자마사 톰슨
군사 정보
소속미국 (1837–61)
남부 연합 (1861–65)
복무 기간1837년–61년 (미국)
1861년–65년 (남부 연합)
최종 계급명예 소령(미국)
중장(남부 연합)
지휘미시시피군
주요 참전제2차 세미놀 전쟁
록사하치 전투
미국-멕시코 전쟁
팔로 알토 전투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몬테레이 전투
베라크루스 공성전
세로 고르도 전투
추루부스코 전투
몰리노 델 레이 전투
차풀테펙 전투
미국 남북 전쟁
챔피언 힐 전투
빅 블랙 강 다리 전투
빅스버그 공성전 (항복)

2. 초기 생애와 경력

존 클리퍼드 펨버턴은 1814년 가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존 펨버턴과 레베카 클리포드 펨버턴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 피니어스 펨버턴은 1682년 윌리엄 펜과 함께 잉글랜드 랭커셔에서 펜실베이니아 식민지로 이주했다.[1]

펨버턴은 1833년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여, 훗날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남군을 격파하게 되는 조지 G. 미드와 룸메이트이자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2] 그는 1837년 50명의 생도 중 27등으로 졸업하고[3][21], 같은 해 7월 1일 미국 육군 제4 포병 연대의 소위로 임관했다.[4][22]

임관 후 펨버턴은 1837년1838년 플로리다주에서 벌어진 두 번째 세미놀 전쟁에 참전하여 1838년 1월 24일 록스해치 전투를 경험했다.[4][22] 이후 뉴욕주의 포트 콜럼버스, 뉴저지주 트렌턴 인근 훈련소, 애루스투크 전쟁 당시의 북부 국경 지대, 미시간주의 여러 요새(디트로이트, 포트 매키낵, 포트 브래디), 뉴욕주 버팔로 등지에서 복무했다.[4][22] 1842년 3월 19일 중위로 진급했으며,[4][22] 버지니아주의 요새 먼로와 펜실베이니아주 칼라일 병영미국 육군 기병 학교 등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다.[4][22]

이후 멕시코-미국 전쟁에 참전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이 공로로 명예 대위와 명예 소령 계급을 받았다.[4][5] 전쟁 중에는 훗날 남북 전쟁에서 그의 주요 적수가 되는 율리시스 S. 그랜트와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4]

1848년에는 버지니아주 노퍽 출신의 마사 톰슨과 결혼했다.[6]

멕시코 전쟁 이후에도 미국 전역의 여러 요새와 변경 지역에서 복무를 이어갔으며, 1850년 9월 16일 정규군 대위로 진급했다.[4][22]

2. 1. 멕시코-미국 전쟁

1845년부터 1846년까지 펨버턴은 제4 미국 포병 연대 소속으로 텍사스 공화국이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되기 전 텍사스의 미국 육군 점령에 참여했다.[4][23] 이후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하자 멕시코로 파견되었다. 그는 1846년 5월 8일 팔로알토 전투와 다음 날인 5월 9일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 참전했다.[4][23] 같은 해 가을 몬테레이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4][23], 9월 23일 "몬테레이에서의 여러 전투에서 용감한 행동을 한 공로"로 명예 대위로 진급했다.[4][22]

1847년에는 미국 육군의 멕시코 작전에 참여하여 3월 베라크루스 포위전, 4월 세로 고르도 전투, 5월 아마조크 인근 소규모 교전, 8월 산 안토니오 점령 및 추루부스코 전투 등 여러 전투를 치렀다.[5][24] 특히 9월 8일 몰리노 델 레이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소령으로 진급했다.[5][24] 이후 9월 13일 차풀테펙 성 공격과 그날 및 다음 날 벌어진 멕시코 시티 전투에도 참여했으나,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3][22][21]

펨버턴은 1846년 8월 4일부터 1849년 5월 1일까지 명예 준장 윌리엄 J. 워스의 부관으로 복무했으며[4][22], 이 시기 훗날 남북 전쟁에서 적수로 만나게 될 율리시스 S. 그랜트와 같은 부서에서 참모 장교로 함께 근무했다.[4] 그는 전쟁 후 멕시코 시티 점령 기간 동안 복무한 미군 장교들이 설립한 군사 단체인 1847년 아즈텍 클럽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4]

2. 2. 멕시코-미국 전쟁 이후

멕시코 전쟁 이후, 펨버턴과 제4 포병대는 1849년 플로리다주 펜서콜라 근처 포트 피켄스에서 주둔 근무를 했다.[4][22] 이후 1849년1850년에는 세미놀 전쟁에서 세미놀 족에 맞서 플로리다에서 싸웠다.[4][22] 제4 포병대는 1850년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뉴올리언스 막사로 돌아와 주둔 근무를 했고, 펨버턴은 9월 16일 미국 육군 정규군 대위로 진급했다.[4][22]

그 다음 1851년1852년에는 워싱턴 D.C. 인근 포토맥 강변의 메릴랜드주 포트 워싱턴에서 근무했으며, 1852년부터 1856년까지는 뉴욕주 포트 해밀턴에서 근무했다.[4][22] 1856년부터 1857년까지는 제4 포병대와 함께 다시 플로리다에서 세미놀 전쟁에 참전했다.[4][22]

1857년부터 1858년까지 펨버턴과 제4 포병대는 캔자스주의 포트 리번워스에서 변경 임무를 수행했고, 1858년에는 유타 전쟁에 참여했다.[4][22] 이후 1859년에는 뉴멕시코 준주의 포트 카니에, 1859년부터 1861년까지는 미네소타주의 포트 리지리에 주둔했다.[4][22] 1861년 4월 서부에서 돌아온 후, 그는 1861년 볼티모어 폭동 중이던 4월 18일과 19일, 수송 중인 연대를 지휘하여 볼티모어를 통과, 포트 맥헨리로 이동했다.[4] 이후 1861년 4월 워싱턴 D.C.의 워싱턴 병기창에서 잠시 주둔 근무를 했다.[4][22]

3. 남북 전쟁

1861년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자유주 출신이고 두 동생이 북군을 위해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펨버턴은 남부 연합군에 합류하기 위해 미국 육군에서 사임했다. 가족과 전 지휘관 윈필드 스콧의 만류에도 그의 사임은 4월 29일자로 승인되었다.[3][21] 이러한 결정에는 버지니아 출신 아내의 영향과 전쟁 전 여러 해 동안 남부 주에서 복무했던 경험이 작용했다.[7][25]

그는 3월 28일 남부 연합군 중령으로 임명되었고, 미 육군 사임 당일인 4월 29일에는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드 주변 및 내부 군대의 부관장 보좌가 되었다. 이후 빠르게 진급하여 5월 8일 대령이 되었고, 다음 날에는 버지니아 임시군의 포병 중령으로 임명되었다.[8][21] 버지니아 임시군이 남부 연합 정규군(PACS)에 통합되면서, 1861년 6월 15일 포병 소령으로 임명되었고, 불과 이틀 뒤인 6월 17일에는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첫 여단 지휘는 노퍽 지역에서 이루어졌으며, 6월부터 11월까지 제1여단(다른 자료에서는 제10여단[21])을 이끌었다.[3]

1862년 1월 14일, 펨버턴은 소장으로 진급하여 사우스캐롤라이나 및 조지아 남부 연합 부서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3월 14일부터 8월 29일까지[3][21] 찰스턴에 본부를 두었다. 그러나 그의 까다로운 성격, 필요하다면 지역을 포기하겠다는 공개 발언[9][26], 그리고 북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두 주의 주지사들은 남부 연합 대통령 데이비스에게 그의 해임을 요청했다. 마침 데이비스는 미시시피의 새로운 부서 지휘관이 필요했고, P.G.T. 보레가드 장군에게도 역할이 필요했기에, 펨버턴을 서부로 보내고 비교적 인기가 높았던 보레가드를 찰스턴에 배치했다.[10][27]

1862년 10월 10일, 펨버턴은 중장으로 진급하여[3][21] 요새 도시 빅스버그와 미시시피 강 방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그에게 이 지역의 성공적인 방어를 최우선 목표로 삼으라고 지시했다.[11] 그러나 펨버턴은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과의 빅스버그 전투에서 패배하여 1863년 7월 4일 항복했다. 빅스버그 함락은 남부 연합에게 결정적인 전략적 손실이었으며, 북군이 미시시피 강 전역을 통제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13] (자세한 내용은 #빅스버그 문단 참조)

항복 후 펨버턴은 1863년 10월 13일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어 리치먼드로 돌아왔으나, 빅스버그 함락의 책임 문제로 약 8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했다.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을 비롯한 고위 장교들은 그를 기용하는 것을 꺼렸지만, 데이비스 대통령은 펨버턴의 방어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신뢰를 유지했다.[14] 펨버턴은 데이비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어떤 역할이든 맡겨달라고 요청했다.[14]

1864년 5월 9일, 펨버턴은 장교직을 사임했으나, 데이비스는 사흘 뒤 그에게 포병 중령 직위를 제안했다.[3][21] 펨버턴은 이를 수락하며 남부 연합과 남부 연합 대의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15][32] 그는 1865년 1월 9일까지 리치먼드 방어 포병 부대를 지휘했으며, 1월 7일부터는 포병 감찰관으로 임명되어[3]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했다. 그는 4월 12일 솔즈베리에서 북군에게 체포되었다.[16] 그의 최종 가석방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3]

3. 1. 빅스버그

1862년 사우스캐롤라이나조지아 남부 연합 부서를 지휘하던 펨버턴은 그의 북부 출신 배경과 방어 전략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두 주 주지사로부터 해임 요구를 받았다.[9][10] 이에 남부 연합 대통령 데이비스는 그를 서부로 보내 미시시피의 새로운 부서 지휘를 맡겼다.[10]

1862년 10월 10일, 펨버턴은 중장으로 진급하여[3][21] 요새 도시 빅스버그와 미시시피 강 방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그에게 "이들 주의 성공적인 방어를 사령관으로서의 첫 번째이자 주요 목표로 삼으십시오"라고 지시하며 높은 기대를 보였다.[11]

빅스버그 전투는 미국 남북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가 되었다. 펨버턴은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이끄는 압도적인 북군에 맞서 45일간 빅스버그를 방어했으나, 결국 1863년 7월 4일 항복했다. 빅스버그 함락은 남부 연합에게 치명적인 전략적 손실이었으며, 이로 인해 북군은 미시시피 강 전역을 통제하게 되었다.[13][30] 이는 남부 연합의 서부 전선과 본토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항복 후 펨버턴은 1863년 10월 13일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어 리치먼드로 돌아왔으나, 빅스버그 함락의 책임을 지고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14] 데이비스 대통령은 빅스버그 방어 결정 자체는 옳았다고 보며 펨버턴에 대한 신뢰를 유지했지만[14], 고위 장교들의 반대로 인해 한동안 임무를 받지 못했다. 1864년 5월 9일 장교직을 사임한 그는 데이비스의 제안으로 포병 중령으로 임관하여[3][21] 남부 연합에 대한 충성을 보이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했다.[15][32]

3. 1. 1. 빅스버그 포위전

빅스버그 군 사령관으로서의 펨버턴


빅스버그 포위전; 1863년 6월 25일부터 7월 4일까지의 위치


1862년 10월 10일, 펨버턴은 중장으로 진급하여[3][21] 요새 도시인 빅스버그와 미시시피 강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는 미시시피 방면군과 동루이지애나 방면군으로 알려졌다. 남부 연합 대통령 데이비스는 그에게 "이들 주의 성공적인 방어를 사령관으로서의 첫 번째이자 주요 목표로 삼으십시오"라고 지시했다. 펨버턴은 10월 14일 잭슨에 있는 새로운 사령부에 도착했다.[11]

그의 부대는 얼 반 돈과 스털링 프라이스 소장이 지휘하는 5만 명 미만으로 구성되었으며, 빅스버그와 포트 허드슨에는 약 24,000명의 상시 주둔군이 있었다.[10][27] 펨버턴 휘하의 병사들은 코린트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11] 펨버턴은 과거 멕시코-미국 전쟁의 동료였던 공격적인 미국 육군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이끄는 7만 명 이상(다른 자료에서는 10만 명 이상[28])의 북군과 빅스버그 작전에서 맞서 싸웠다.

데이비스와 조지프 E. 존스턴 장군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펨버턴과 그의 미시시피 군은 잭슨 주변에 집결하는 존스턴의 병력과 합류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빅스버그와의 연락 및 방어를 유지하려 했다.[29] 그러나 존스턴이 회합 장소를 변경하라는 다른 명령을 내리면서 펨버턴은 방향을 바꿔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1863년 5월 16일 챔피언힐 전투에서 그랜트의 군대와 우연히 충돌하여 큰 패배를 겪었다. 펨버턴은 5월 17일 빅 블랙 강 전투로 후퇴하여 다시 싸웠으나 더 큰 손실을 입었다.[12]

빅스버그 국립 군사 공원에 있는 펨버턴의 동상


펨버턴은 빅스버그를 방어하기로 결심하고 5월 18일 패배한 병사들을 이끌고 방어선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셔먼이 12월 치카소 바이유 전투에서 점령에 실패했던 헤인스 블러프의 고지를 포기했다. 존스턴은 이 고지가 함락되면 빅스버그를 지킬 수 없으니, 도시를 포기하고 31,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탈출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펨버턴은 이 조언을 거부했다. 그는 북부 출신이라는 자신의 평판 때문에 빅스버그를 포기하면 반역자로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6주 이상 포위된 상태로 버텼지만, 그동안 군인과 민간인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1863년 7월 2일 저녁, 45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펨버턴은 4명의 사단 지휘관들에게 병사들이 성공적인 철수를 위한 행군과 피로를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서면으로 물었다. 4명 모두 불가능하다고 답하자, 다음 날인 7월 3일 펨버턴은 그랜트에게 휴전을 요청하여 항복 조건을 논의할 시간을 가졌다. 결국 7월 4일 오전 10시, 펨버턴은 빅스버그 시와 그의 군대를 그랜트에게 항복했다. 처음 그랜트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으나, 협상을 통해 남부 연합군 병사들이 가석방되는 조건으로 합의되었다. 항복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13][30]

...우리 방어선에서 행군을 나갈 수 있으며, 장교들은 그들의 개인 화기와 의류를 가져갈 수 있고, 야전, 참모, 기병 장교는 각각 말 한 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병들은 모든 의류를 가질 수 있지만 다른 재산은 가질 수 없습니다.[13][30]


펨버턴은 장교 2,166명과 병사 27,230명, 대포 172문, 그리고 거의 60,000정의 머스켓과 소총을 그랜트에게 넘겼다.[13][30]

빅스버그 항복은 7월 9일 포트 허드슨 포위전의 성공과 함께 북군이 미시시피 강 전체를 통제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트랜스미시피 전역의 에드먼드 커비 스미스 중장이 지휘하는 남부 연합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머지 남부 연합 지역과 완전히 차단되었으며, 이는 남부 연합에게 큰 전략적 손실이었다.

4. 전후

전쟁이 끝난 후, 펨버턴은 1866년부터 1876년까지 버지니아주 워렌턴 근처의 농장에서 살았다. 이 시기 그는 빅스버그 작전을 두고 존스턴과 불화를 겪기도 했다.[2] 1876년 이후에는 펜실베이니아주로 이주했다. 이주한 지 5년 후, 펜실베이니아주 펜린 마을에서 사망했으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로렐 힐 묘지에 안장되었다.

펨버턴을 기리는 동상이 빅스버그 국립군사공원에 세워졌다.

5. 죽음과 유산

존 C. 펨버턴의 묘비, 로렐 힐 묘지


전후 펨버턴은 1866년부터 1876년까지 버지니아주 워렌턴 인근 자신의 농장에서 살았으며, 이후 펜실베이니아주로 이주했다. 그는 1881년 7월 13일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 카운티 로어 그위네드 타운십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미망인 마사 톰슨 펨버턴은 1907년까지 생존했다.

펨버턴의 시신은 필라델피아 로렐 힐 묘지에 그의 부모가 묻힌 곳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조지 미드 장군과 존 A. 달그렌 제독(그의 형제도 남부 연합 장군으로 복무했다)을 포함한 여러 유명 인사의 가족들은 뉘우치지 않는 남부 연합군 펨버턴의 시신을 로렐 힐 묘지에 안장하는 것에 항의했다. 다른 곳에 안장하기로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묘지에 안장되었으며,[17] 그는 필라델피아에 묻힌 유일한 남부 연합군 장군이다.[18]

에드먼드 토마스 퀸이 조각한 펨버턴의 동상이 빅스버그 국립 군사 공원에 세워졌다. 그의 손자 역시 존 C. 펨버턴[19]으로, 1942년에 그의 할아버지의 빅스버그 방어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또한, 그는 할아버지에 관한 가족 서류와 연구 자료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기증했으며, 이 대학은 이 자료를 특별 컬렉션으로 보관하고 있다.[20]

참조

[1] 서적 Pemberto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2-05
[2] 웹사이트 John C. Pemberton https://www.battlefi[...] 2020-08-03
[3] 문서 Eicher, p. 423.
[4] 웹사이트 Military biography of John C. Pemberton http://www.library.c[...] 2008-09-04
[5] 문서 "for Gallant and Meritorious Conduct in the Battle of Molino del Rey"
[6] 서적 "Generals in Gray: Lives of the Confederate Commanders."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1959
[7] 웹사이트 US National Park Service biography of Pemberton https://www.nps.gov/[...] 2017-01-20
[8] 문서 Although this army was organized as a state establishment that was something more than a militia and which would become part of the Confederate States Army, it was not the Provisional Army of the Confederate States (PACS) and did not become part of it until after May 23, 1861, Virginia's vote to declare secession.
[9] 웹사이트 Civil War Home biography of Pemberton http://www.civilwarh[...] 2008-09-07
[10] 문서 Foote Vol. I, pp. 776–78.
[11] 문서 Winters, p. 171.
[12] 웹사이트 Battle of Big Black River https://www.britanni[...] 2020-08-04
[13] 문서 Foote Vol. II, pp. 606–13.
[14] 문서 Foote Vol. II, p. 645.
[15] 문서 'Foote, Vol II. p. 646. "In this capacity Pemberton served out the war, often in the thick of battle, thereby demonstrating a greater devotion to the cause he had adopted than did many who had inherited it as a birthright."'
[16] 문서 Foote Vol. III, p. 967.
[17] 웹사이트 John C Pemberton https://www.remember[...] 2022-12-20
[18] 서적 Philadelphia Graveyards and Cemeteries https://books.google[...] Arcadia Publishing 2024-11-26
[19] 뉴스 John C. Pemberton https://www.nytimes.[...] 1984-10-27
[20] 웹사이트 Collection Number: 00586. Collection Title: John C. Pemberton Papers, 1814–1942 (bulk 1922–1941) http://finding-aids.[...]
[21] 문서 Eicher, p. 423.
[22] 웹사이트 "Military biography of John C. Pemberton" http://www.library.c[...] www.library.ci.corpus-christi.tx.us 2008-09-04
[23] 문서 "for Gallant Conduct in the several Conflicts at [Monterrey]"
[24] 문서 "for Gallant and Meritorious Conduct in the Battle of Molino del Rey"
[25] 웹사이트 "US National Park Service biography of Pemberton" http://www.nps.gov/a[...] www.nps.gov 2008-09-07
[26] 웹사이트 "Civil War Home biography of Pemberton" http://www.civilwarh[...] www.civilwarhome.com 2008-09-07
[27] 문서 Foote Vol. I, pp. 776-78.
[28] 문서 グラントとペンバートンはメキシコで同じ師団の参謀補だった。
[29] 문서 これはペンバートンが両方を遂行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ので、ある意味で矛盾する命令だったが、そうしようとした。
[30] 문서 Foote Vol. II, pp. 606-13.
[31] 문서 Foote Vol. II, p. 645.
[32] 문서 'Foote, Vol II. p. 646. "ペンバートンは戦争の残り期間を、しばしば戦いの真っただ中でこの任務を遂行し、それによって南部生まれの者がその生得権として引き継いだ者達が成したよりも多くのことを南軍に対して捧げていることを示した。"'
[33] 문서 Foote Vol. III, p. 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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