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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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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타 전쟁은 1857년부터 1858년까지 유타 준주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로, 미국 연방 정부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몰몬교) 간의 갈등이 원인이 되었다. 몰몬교의 일부다처제와 종교적 독립성에 대한 연방 정부의 우려가 커지면서, 연방군은 유타 준주로 진격했고, 몰몬교도들은 이에 저항했다. 결국 평화 협정을 통해 분쟁은 종결되었지만, 유타 전쟁은 몰몬교의 고립과 유타에서의 연방 정부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마운틴 메도우 학살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으며, 이후 몰몬교는 일부다처제를 공식적으로 중단하고, 연방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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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명유타 전쟁
분쟁의 일부몰몬 전쟁
유타 원정 중인 미국 장교들
유타 전쟁 중 미국 장교들의 모습
원인유타 준주 내 몰몬교도 반란 보고
장소유타 준주 (현재의 유타주 및 와이오밍주)
기간1857년 5월 29일 ~ 1858년 4월 12일
결과미결정
유타 전쟁 평화 위원회
브리검 영이 유타 준주 주지사에서 교체됨
미국 연방 정부의 권위를 수용하는 유타 준주 시민에 대한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의 선동 및 반역 혐의에 대한 완전 사면
교전 세력
교전국 1미국
교전국 2데저렛 / 유타
지휘관 1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앨프레드 커밍 주지사
앨버트 S. 존스턴 장군
지휘관 2브리검 영 주지사
다니엘 H. 웰스 장군
롯 스미스 대위
병력 규모 12,500–3,000명
병력 규모 21,000명
부대 1미국 육군
부대 2나부 군단
무장한 몰몬교도
사상자 및 피해
민간인 사망자150명 사망 (120명은 마운틴 메도우 학살 사건에서 사망)

2. 배경

초기 교단은 독자적인 기독교 계통 종교관과 일부다처제와 같은 관습으로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어 거점을 옮겨야 했다. 1844년 일리노이주에서 초대 교주 조셉 스미스 주니어가 폭도의 습격으로 사망하자, 브리검 영 등은 서부에서 안식처를 찾아 몰몬 개척자로서 1847년 현재의 솔트레이크시티에 정착했다.

그러나 정착 후에도 미국 서부 개척지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교단과 비교단 간의 갈등은 커졌다. 연방 정부는 사실상 독립을 추구하는 교단에 압력을 가하며 1850년 솔트레이크 주변을 유타 준주로 승격시켜 국가적 관리를 주장했고, 1857년에는 군대를 파병했다.

1857년에서 1858년 사이, 제임스 뷰캐넌 미국 대통령은 유타 원정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미군을 유타 준주로 파병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신자들(몰몬교도)은 대규모 미군이 자신들을 말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우려하여 방어 준비를 했다.[8] 유혈 사태를 피해야 했고 미국 정부 또한 인명 피해 없이 목표를 달성하기를 바랐지만, 양측 모두 전쟁 준비를 했다. 몰몬교도들은 총기를 제작하거나 수리하고, 낫을 총검으로 만들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사브르(sabre)를 연마했다.

몰몬교도들의 전략은 군대와 직접 교전하는 대신 그들을 방해하고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나부 레기온(Nauvoo Legion)의 중장인 다니엘 H. 웰스는 조셉 테일러 소령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 군대의 위치나 이동 경로를 확인하는 즉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괴롭히십시오. 그들의 동물들을 놀라게 하고, 수송대에 불을 지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십시오. 그들 앞과 측면에 있는 모든 지역을 불태우십시오. 야간 기습으로 그들이 잠 못 이루게 하십시오.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거나 가능한 곳에서는 강의 여울목을 파괴하여 길을 봉쇄하십시오.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서 풀에 불을 지르는 기회를 포착하여, 가능하면 그들의 수송대를 에워싸십시오.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풀은 남기지 마십시오. 가능한 한 병력을 은폐하고 기습에 대비하십시오.

몰몬교도들은 군대의 솔트레이크 밸리 진입을 막았고, 미군이 보급품을 받는 것을 방해하여 그들을 약화시켰다.[9]

나부 레기온이라고 불리는 몰몬 민병대와 미군 사이의 대치는 오늘날 와이오밍 남서부에서 일부 재산 피해와 몇 차례의 단기적인 충돌을 포함했지만, 양측 군대 간의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

1857년 9월 11일에는 마운틴 메도우 학살이 발생했다.[10]

2. 1. 몰몬교의 서부 이주와 정착

초기 교단은 독자적인 기독교 계통 종교관과 일부다처제와 같은 관습 때문에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어 거점을 옮겨 다니는 등 이동 생활을 해야 했다.[15]

그러던 중 초대 교주 조셉 스미스 주니어1844년 일리노이주에서 폭도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브리검 영 등의 일파는 서부에 안식처를 찾아 몰몬 개척자로서 1847년 현재의 솔트레이크시티에 거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일리노이주에서 그레이트솔트레이크시티까지의 모르몬 트레일


캘리포니아로 들어가는 남쪽 루트인 옛 스페인 트레일


몰몬교도들은 1847년 여름 현재의 유타주(당시 멕시코 중앙 공화국의 알타 캘리포니아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몰몬 개척자들은 미주리주 잭슨 군과 일리노이주 노보의 역사의 이웃 공동체들과의 일련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1844년 몰몬교 창시자 조셉 스미스의 죽음으로 이어진 후 유타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브리검 영과 다른 LDS 교회 지도자들은 유타주의 고립이 몰몬교도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그들의 종교를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은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 초기 단계에서 알타 캘리포니아의 정착 지역과 누에보 메히코에 대한 통제권을 카우엔가 조약을 통해 확보했지만, 멕시코 할양지의 미국으로의 법적 이전은 1848년 전쟁을 종식시킨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LDS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정치적 궤도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그럴 의도도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1848년 서터 밀에서 금이 발견되어 유명한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를 촉발시켰을 때, 수천 명의 이주민들이 몰몬 개척자들이 정착한 지역을 직접 통과하는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주민들은 무역 기회를 가져왔지만, 몰몬교도들의 짧은 고립은 끝났다.

1849년 몰몬교도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영토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데저릿 주로 편입할 것을 제안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그들의 지역이 관례대로 영토 지위를 부여받는다면 워싱턴 D.C.에서 파견될 것이라고 믿었던 "동정심 없는 낙하산 인사들"보다는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들에 의해 통치받는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 지도부가 운영하는 주를 통해서만 종교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 의회는 1850년 타협의 일환으로 유타 준주를 창설했다.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은 LDS 교회의 회장인 브리검 영을 준주의 초대 주지사로 임명했다. 몰몬교도들은 이 임명에 만족했지만, 점차 몰몬교도들과 연방 정부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깨졌다.

1850년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브리검 영 주지사


그러나 정착 후에도 미국 서부 개척지로의 인구 유입이 계속되면서 교단과 비교단 간의 마찰은 증가했다. 연방 정부는 사실상 독립을 추구하는 교단에 대한 압력으로 1850년 솔트레이크 주변을 유타 준주로 승격시켜 국가적 관리를 주장하는 한편, 1857년에는 군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지도부는 몰몬교도들이 "복수 결혼"이라고 부르는 일부다처제를 지지했다. 추산에 따르면 후기 성도의 20%~25%가 일부다처제 가정의 구성원이었으며, 결혼 적령기에 이른 몰몬 여성의 약 3분의 1이 이 관습에 참여했다. 유타 준주에 거주하는 몰몬교도들은 1890년 윌퍼드 우드러프에 의해 교회의 공식 관행에서 제거될 때까지 일부다처제를 종교 교리로 여겼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나머지 부분은 일부다처제를 거부했으며, 일부 해설가들은 몰몬교도들을 심각한 부도덕으로 비난했다. 1856년 대통령 선거 당시 새로 결성된 공화당의 강령의 핵심 조항은 "준주에서 야만의 쌍둥이 유물인 일부다처제와 노예제를 금지하는 것"이었다.[15] 공화당은 국민 주권이라는 민주당의 원칙을 유타의 일부다처제 수용과 연결시켜 이 비난을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만들었다.

국민 주권은 1850년 타협과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의 이론적 근거였다. 이 개념은 준주에서의 노예제라는 분열적인 문제를 국가적 논쟁에서 제거하고, 지역적 의사결정을 허용하며,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공화당은 이 이론이 일부다처제를 보호한다고 비난했다. 이전에는 후기 성도들의 동맹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와 같은 유력한 민주당원들은 노예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국민 주권 개념을 지키기 위해 몰몬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일부다처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노예제에 대한 타협을 좌절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민주당에게 몰몬교에 대한 공격은 일부다처제를 국민 주권으로부터 분리하고 노예제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에서 국민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려는 이중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852년 3월, 유타 준주는 흑인 노예제와 인디언 노예제를 합법화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16][17]

2. 2. 연방 정부와의 갈등

초기 교단은 독자적인 기독교 계통 종교관과 일부다처제 등의 관습 때문에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었고, 거점을 계속 옮겨야 했다.[8]

1844년 일리노이주에서 초대 교주 조셉 스미스 주니어가 폭도의 습격으로 사망하자, 브리검 영 등은 서부에서 안식처를 찾아 몰몬 개척자로서 1847년 현재의 솔트레이크시티에 정착했다.[8]

그러나 정착 후에도 미국 서부 개척지로 인구가 계속 유입되면서 교단과 비교단 간의 갈등은 커져갔다. 연방 정부는 사실상 독립을 추구하는 교단에 압력을 가하며 1850년 솔트레이크 주변을 유타 준주로 승격시켜 국가적 관리를 주장했고, 1857년에는 군대를 파병했다.[8]

2. 3. 마운틴 메도우 학살 사건

1857년 9월 11일, 아칸소에서 캘리포니아주로 이동하던 탐사대가 솔트레이크 교외에 체류했다. 그때 교단 안에, 개척자 일행 중에 초대 지도자를 살해한 사람이 있다는 루머가 유포되었기 때문에 교단의 일부가 무장 봉기를 하여 체류지의 개척민을 습격하여 대부분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마운틴 메도우 학살 사건이다.

3. 전쟁의 전개

1857년 9월 11일, 아칸소에서 캘리포니아주로 가던 탐사대가 솔트레이크 교외에 머물렀다. 그 당시 교단 내에서는 탐사대 일행 중에 초대 지도자를 살해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교단의 일부가 무장 봉기하여 개척민들을 습격, 대부분을 학살하는 마운틴 메도우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10][11]

이에 미국 육군은 교단을 공격하며 교전 상태에 돌입했고, 이 교전을 ‘유타 전쟁’이라고 불렀다. 당시 솔트레이크는 보급이 어려운 변방이었으며, 연방 정부가 조직한 미국 육군도 몰몬교도들의 반격에 고전하였다.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지 못한 채 겨울이 다가오면서, 고립을 피하기 위해 철수해야 했다. 이러한 철수 때문에 미국 육군이 패배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다.

이듬해 1858년, 양측은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여 교단이 연방 정부가 파견한 준주의 지사를 수용하고, 정부 측은 전쟁에 가담한 다수의 신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타협을 보았다.

텍사스주 상원의원 샘 휴스턴(Sam Houston)은 유타 원정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한편,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위기를 종식시키라는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1858년 2월, 텍사스주 상원의원 샘 휴스턴(Sam Houston)은 모르몬교도들에 대한 전쟁이 "이 나라가 시작된 순간부터 현재까지 닥친 가장 두려운 재앙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참을 수 없는 악으로 여깁니다. 저는 행정부가 이러한 움직임을 지시하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해 알아야 할 정보를 얻지 못했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 4월 1일,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 사이먼 캐머런(Simon Cameron)은 "이 전쟁은 행정부의 전쟁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책임이 행정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원합니다. 저는 그들의 수행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1년이 지나기 전에 모든 국민에게 그들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라는 이유로 유타와 국경 지대의 다른 지역에서 싸울 자원봉사자를 승인하는 법안을 지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4월에 대통령은 벤저민 매컬록(Benjamin McCulloch)과 라자러스 파월(Lazarus Powell)로 구성된 공식 평화 위원회를 유타로 파견했고, 위원회는 6월에 도착했다. 위원회는 만약 모르몬교도들이 정부의 권위에 복종한다면 갈등과 관련된 모든 행위에 대해 사면을 제공했다. 여기에는 존스턴 군대를 준주로 허용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위원회는 또한 정부가 그들의 종교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그들은 새로운 주지사가 취임하고 법률이 준수되면 "인디언을 제압하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통행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군대를 제외하고는 준주에 군대의 일부를 유지할 필요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뷰캐넌은 공개적인 발언에서는 더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다.

> 유타 반란에 관한 선언

>

> ... 따라서 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은 이 선언을 발표하여 유타 준주 내 모든 공무원들이 법 집행에 최대한 충실하고 성실할 것을 명령하며, 상기 준주 내 모든 미국 시민들에게 그들의 임무 수행에 협조할 것을 명령하며, 법을 준수하는 유타 주민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반란 및 반역죄에 대해 사면을 제공하며, 이 선언을 통지받은 후에도 미국에 대한 현재 반란을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의 관용을 기대하지 말고 그들의 행위에 따라 엄격하게 처벌받을 것을 경고하며, 현재 유타에 있으며 앞으로 유타로 파병될 군대는 그 준주 주민들이 정부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제대로 인식할 때까지 철수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

>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1858년 4월 6일.

브리검 영은 유타가 미국에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뷰캐넌의 조건과 사면을 받아들였다. 뷰캐넌의 선언은 모르몬교도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소환된 선교사단의 일원인 아서 P. 웰치먼은 이 문서에 대해 "6월 – 스위트워터 상류에서 플랫 브리지로 가는 그로스벡의 캠프를 만났습니다. 이 형제들을 통해 우리는 뷰캐넌 대통령의 유타 주민들에게 보낸 선언문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로 가득 차 있었고 너무 비열해서 회사로부터 세 번의 신음을 자아냈습니다."라고 썼다.[37]

1858년 6월 19일,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의 새로 온 기자가 "이렇게 평화가 이루어졌고, 이렇게 '모르몬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렇게 역사에 기록될 수 있습니다. – 사망자 없음, 부상자 없음, 속은 사람들만 있음."라고 썼다.[38] 1858년 6월 말, 존스턴 장군 지휘하의 군대가 솔트레이크 밸리로 방해받지 않고 진입했다. 6월 26일, 솔트레이크시티의 텅 빈 거리를 지나면서 분노한 존스턴은 "15분 동안 도시를 폭격할 기회를 얻기 위해 자신의 농장을 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찰스 퍼거슨 스미스 중령은 "누가 듣든 상관없습니다. 모든 모르몬을 목에 매달아 죽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멕시코 전쟁 중에 몰몬 대대(Mormon Battalion)를 이끌었던 필립 세인트 조지 쿡(Philip St. George Cooke)은 단지 존경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7월 초, 북부 정착지의 모르몬교도들은 동부나 서부 어느 쪽에서도 더 이상 유타로 증원군이 파견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3. 1. 연방군의 파병과 몰몬교의 저항

1857년 9월 11일, 아칸소에서 캘리포니아주로 향하던 개척자 일행이 솔트레이크 교외에 머물렀다. 당시 교단 내에서는 이들 중에 초대 지도자를 살해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일부 교도들이 무장 봉기하여 개척민들을 공격, 대부분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마운틴 메도우 학살 사건이라 부른다.[10]

이에 미국 육군은 교단을 공격하며 교전 상태에 돌입했고, 이 교전을 '유타 전쟁'이라 칭한다. 당시 솔트레이크는 보급이 어려운 변방이었고, 연방 정부의 미국 육군은 몰몬교도들의 반격에 고전했다.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지 못한 채 겨울이 다가오면서, 고립을 피하기 위해 철수해야 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철수를 미국 육군의 패배로 간주하기도 한다.[11]

이듬해인 1858년, 양측은 평화적 해결을 모색, 교단은 연방 정부가 파견한 준주 지사를 수용하고 정부는 전쟁 가담자 다수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타협을 이루었다.

몰몬교도들은 군대와의 직접적인 교전 대신 방해와 약화 전략을 택했다. 나부 군단의 중장 다니엘 H. 웰스는 조셉 테일러 소령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몰몬교도들은 군대의 솔트레이크 밸리 진입을 막고, 보급품 수송을 방해하여 미군을 약화시켰다.[9]

3. 2. 전술적 대치와 협상

1857년 9월 11일, 아칸소에서 캘리포니아주로 가던 탐사대가 솔트레이크 교외에 머물렀다. 그때 교단 안에서, 개척자 일행 중에 초대 지도자를 살해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교단 일부가 무장 봉기하여 개척민들을 습격해 대부분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마운틴 메도우 학살 사건이다.[10]

미국 육군은 이에 따라 교단에 공격을 시작했고 교전 상태가 되었다. 이 교전을 ‘유타 전쟁’이라고 불렀다. 당시 솔트레이크는 보급이 어려웠으며, 연방 정부가 조직한 미국 육군도 몰몬교도들의 반격에 고전하였다.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 채 겨울이 다가오면서 고립을 피하기 위해 철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미국 육군이 패배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다.

1858년, 양측은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나부 군단이라 불리는 몰몬 민병대가 연방 정부가 파견한 준주의 지사를 받아들이고, 정부는 전쟁에 가담한 많은 신자를 처벌하지 않기로 타협을 보았다.

몰몬교도들은 군대와 직접 싸우는 대신 방해하고 약화시키는 전략을 썼다. 다니엘 H. 웰스는 조셉 테일러 소령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몰몬교도들은 군대가 솔트레이크 밸리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미군이 보급품을 받지 못하게 하여 약화시켰다.[9]

몰몬 민병대와 미군 사이의 대치는 오늘날 와이오밍 남서부에서 일부 재산 피해와 몇 차례의 단기적인 충돌을 일으켰지만, 양측 군대 간의 전투는 없었다.

긴장이 고조된 1857년 9월 11일, 무장하지 않은 남성, 여성, 어린이를 포함하여 아칸소, 미주리 등 여러 주에서 온 캘리포니아행 이주민 최소 120명이 유타 남서부 오지에서 지역 몰몬 민병대에 의해 살해되었다.[10] 이들은 처음에 이주민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이 사건은 마운틴 메도우즈 학살로 불리게 되었고, 그 배후 동기는 불분명하다.[11]

결국 미국과 후기 성도 간의 협상으로 후기 성도들은 완전한 사면(마운틴 메도우즈 학살에 연루된 사람들은 제외)을 받았고, 교회 회장 브리검 영 대신 비몰몬인 알프레드 커밍이 유타 주지사가 되었으며, 미군은 유타에 평화롭게 들어오게 되었다.

3. 3. 평화 협정과 유타 전쟁의 종결

1857년 9월 11일, 아칸소에서 캘리포니아주로 이동하던 탐사대가 솔트레이크 교외에 체류했다. 그때 교단 안에, 개척자 일행 중에 초대 지도자를 살해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유포되었기 때문에 교단의 일부가 무장 봉기를 하여 체류지의 개척민을 습격하여 대부분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마운틴 메도우 학살 사건이다.[10][11]

미국 육군은 이에 따라 교단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고 교전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교전을 ‘유타 전쟁’이라고 불렀다. 당시 솔트레이크는 보급이 어려운 변방이었으며, 연방 정부가 조직한 미국 육군도 몰몬교도들의 반격에 고전하였다.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 가운데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고립을 피하기 위해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철수로 인해 미국 육군이 패배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다.

이듬해 1858년, 양측 사이에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여 교단이 연방 정부가 파견한 준주의 지사를 수용할 것과 정부 측이 전쟁에 가담한 다수의 신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타협을 보았다.

그사이 부캐넌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위기를 종식시키라는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1858년 2월, 텍사스주 상원의원 샘 휴스턴(Sam Houston)은 모르몬 교도들에 대한 전쟁이 "이 나라가 시작된 순간부터 현재까지 닥친 가장 두려운 재앙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참을 수 없는 악으로 여깁니다. 저는 행정부가 이러한 움직임을 지시하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해 알아야 할 정보를 얻지 못했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 4월 1일,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 사이먼 캐머런(Simon Cameron)은 "이 전쟁은 행정부의 전쟁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책임이 행정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원합니다. 저는 그들의 수행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1년이 지나기 전에 모든 국민에게 그들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라는 이유로 유타와 국경 지대의 다른 지역에서 싸울 자원봉사자를 승인하는 법안을 지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4월에 대통령은 벤저민 매컬록(Benjamin McCulloch)과 라자러스 파월(Lazarus Powell)로 구성된 공식 평화 위원회를 유타로 파견했고, 위원회는 6월에 도착했다. 위원회는 만약 모르몬 교도들이 정부의 권위에 복종한다면 갈등과 관련된 모든 행위에 대해 사면을 제공했다. 여기에는 존스턴 군대를 준주로 허용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위원회는 또한 정부가 그들의 종교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주지사가 취임하고 법률이 준수되면 "인디언을 제압하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통행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군대를 제외하고는 준주에 군대의 일부를 유지할 필요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부캐넌은 공개적인 발언에서는 더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다.

> 유타 반란에 관한 선언

>

> ... 따라서 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부캐넌은 이 선언을 발표하여 유타 준주 내 모든 공무원들이 법 집행에 최대한 충실하고 성실할 것을 명령하며, 상기 준주 내 모든 미국 시민들에게 그들의 임무 수행에 협조할 것을 명령하며, 법을 준수하는 유타 주민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반란 및 반역죄에 대해 사면을 제공하며, 이 선언을 통지받은 후에도 미국에 대한 현재 반란을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의 관용을 기대하지 말고 그들의 행위에 따라 엄격하게 처벌받을 것을 경고하며, 현재 유타에 있으며 앞으로 유타로 파병될 군대는 그 준주 주민들이 정부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제대로 인식할 때까지 철수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

> 제임스 부캐넌(James Buchanan) 1858년 4월 6일.

브리검 영은 유타가 미국에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부캐넌의 조건과 사면을 받아들였다. 부캐넌의 선언은 모르몬 교도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소환된 선교사단의 일원인 아서 P. 웰치먼은 이 문서에 대해 "6월 – 스위트워터 상류에서 플랫 브리지로 가는 그로스벡의 캠프를 만났습니다. 이 형제들을 통해 우리는 부캐넌 대통령의 유타 주민들에게 보낸 선언문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로 가득 차 있었고 너무 비열해서 회사로부터 세 번의 신음을 자아냈습니다."라고 썼다.[37]

6월 19일,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의 새로 온 기자가 다소 부정확하게 "이렇게 평화가 이루어졌고, 이렇게 '모르몬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렇게 역사에 기록될 수 있습니다. – 사망자 없음, 부상자 없음, 속은 사람들만 있음."라고 썼다.[38] 1858년 6월 말, 존스턴 장군 지휘하의 군대가 솔트레이크 밸리로 방해받지 않고 진입했다. 6월 26일, 솔트레이크시티의 여전히 텅 빈 거리를 지나면서 분노한 존스턴은 "15분 동안 도시를 폭격할 기회를 얻기 위해 자신의 농장을 줄 수도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찰스 퍼거슨 스미스 중령은 "누가 들었든 상관없습니다. 모든 모르몬을 목에 매달아 죽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멕시코 전쟁 중에 몰몬 대대(Mormon Battalion)를 이끌었던 필립 세인트 조지 쿡(Philip St. George Cooke)은 단지 존경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7월 초, 북부 정착지의 모르몬 교도들은 동부나 서부 어느 쪽에서도 더 이상 유타로 증원군이 파견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4. 전쟁의 결과

유타 전쟁은 여러 면에서 복합적인 결과를 낳았다. 동부 언론은 초기에는 모르몬교의 종교적 신념과 관습을 비난했지만, 군사적 위협에 맞선 모르몬교도들의 저항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알프레드 커밍이 유타 준주의 주지사로 취임하면서 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일부 언론은 이를 '뷰캐넌의 실수'라고 칭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39]


  • 브리검 영에게 주지사 교체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은 점
  • 유타 준주의 불충성 보고서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군대를 파병하여 예산을 낭비한 점
  • 늦은 시기에 원정대를 파병하고 겨울철 보급품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은 점


유타 주민들 역시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대규모 피난으로 정착민들의 생계와 경제적 안녕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2개월간 이어진 파종기에 대부분의 농작물은 방치되었고, 가축 수도 줄었다. 1년간의 노력으로 이룩한 생활 여건 개선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고, 이후 몇 년 동안 유타 준주 전역에 빈곤이 만연했다. 아이다호주, 네바다주, 캘리포니아주의 일부 모르몬 정착지는 수십 년 동안 재정착되지 못했고, 일부는 영구히 버려졌다.

전쟁 이후 유타는 명목상 연방군의 군사 점령 상태에 놓였다. 역사학자 레너드 J. 애링턴은 "미국 육군 정예"가 모르몬 정착민들을 혐오했다고 지적했다. 군대와 지휘관, 모르몬교도들 사이의 관계는 긴장 상태였다. 다행히 플로이드 캠프의 고립된 위치 덕분에 군대는 기지 안팎에 머물면서 상호 작용은 최소화되었다. 시더 밸리에 주둔한 7,000명의 군인 근처에 사는 정착민들은 군인들에게 건설용 목재, 농산물, 제조품 등을 판매했다. 미국 남북 전쟁 발발로 1861년 군대가 플로이드 캠프를 철수하면서, 약 400만달러 상당의 잉여 물품이 헐값에 낙찰되었다.

1862년에는 새로운 군대가 도착하여 솔트레이크시티 동쪽 구릉지에 포트 더글러스를 건설했다.

유타 전쟁의 결과 중 하나는 포니 익스프레스의 탄생이었다. 전쟁 중 랏 스미스와 나부 군단은 장비업체 러셀, 메이저스 앤 웨델 소유의 마차 약 52대를 불태웠다. 정부는 이 손실을 보상하지 않았고, 장비업체는 1860년 파산을 막기 위해 정부 우편 계약을 체결하고자 포니 익스프레스를 설립했다.

정치적으로 유타 전쟁 이후 1858년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공화당이 통과시킨 주요 법안들은 남부 민주당 상원의원들의 반대나 대통령 거부권으로 무산되기 일쑤였다. 연방 정부는 교착 상태에 빠져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1860년, 지역 갈등으로 민주당은 남부와 북부로 분열되었고, 이는 간접적으로 1860년 공화당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유타 원정의 주요 원인이었던 국민 주권은 노예 문제 해결이 미국 남북 전쟁을 촉발하면서 결국 부정되었다. 남북 전쟁 발발 이후, 공화당은 1862년 모릴 반다처법과 같이 모르몬교의 일부다처제 관습을 억제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이 법률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다. 대신 링컨은 브리검 영에게 남북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대가로 모릴 반다처법을 무시할 수 있도록 묵시적으로 허가했다.[39] 1862년부터 포트 더글러스에 주둔한 연방군 사령관 패트릭 에드워드 코너 장군은 모르몬교도들과 대립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지시를 받았다.[39]

1863년 3월, 키니 판사는 일부다처제 금지법 위반 혐의로 브리검 영에 대한 영장을 발부했다. 영장은 미국 보안관에 의해 집행되었고, 영은 즉시 주청사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2,000달러의 보석금이 공탁되었고,[40] 대배심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러나 모든 구성원이 모르몬교도였던 대배심은 그해 1월 영과 아멜리아 폴섬의 결혼에 대한 증거 부족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유타 전쟁은 모르몬교의 고립과 유타에서의 권력 약화를 초래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행정부와 연방 지방 법원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지만, 준주 의회와 강력한 유언 검인 법원에서는 정치적 권위를 유지했다. 1869년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되면서, 많은 수의 "이방인"(비모르몬교도)들이 유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연방 정부의 통제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모르몬교와 연방 정부 간의 갈등, 특히 일부다처제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유타가 1896년 주(State)가 되기 전까지 거의 4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1904년부터 1907년까지의 스무트 청문회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한편, 연방 정부는 마운틴 메도우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추진했다. 학살 주모자는 오랫동안 교단에 숨어 있었으나, 교단과 연방 정부의 화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모든 책임을 지는 형태로 체포되어 학살 사건 발생지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교단 측은 연방 정부와의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고, 1890년에는 주요 갈등 원인이었던 일부다처제를 표면적으로 중단했다.

4. 1. 몰몬교의 변화

이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지도부는 몰몬교도들이 "복수 결혼"이라고 부르는 일부다처제를 지지했다. 추산에 따르면 후기 성도의 20%~25%가 일부다처제 가정의 구성원이었으며, 결혼 적령기에 이른 몰몬 여성의 약 3분의 1이 이 관습에 참여했다.[15] 유타 준주에 거주하는 몰몬교도들은 1890년 윌퍼드 우드러프에 의해 교회의 공식 관행에서 제거될 때까지 일부다처제를 종교 교리로 여겼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일부다처제를 거부했으며, 일부 해설가들은 몰몬교도들을 심각한 부도덕으로 비난했다. 1856년 대통령 선거 당시 새로 결성된 공화당의 강령의 핵심 조항은 "준주에서 야만의 쌍둥이 유물인 일부다처제와 노예제를 금지하는 것"이었다.[15] 공화당은 국민 주권이라는 민주당의 원칙을 유타의 일부다처제 수용과 연결시켜 이 비난을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만들었다.

국민 주권은 1850년 타협과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의 이론적 근거였다. 이 개념은 준주에서의 노예제라는 분열적인 문제를 국가적 논쟁에서 제거하고, 지역적 의사결정을 허용하며,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공화당은 이 이론이 일부다처제를 보호한다고 비난했다. 이전에는 후기 성도들의 동맹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와 같은 유력한 민주당원들은 노예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국민 주권 개념을 지키기 위해 몰몬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일부다처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노예제에 대한 타협을 좌절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민주당에게 몰몬교에 대한 공격은 일부다처제를 국민 주권으로부터 분리하고 노예제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에서 국민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려는 이중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유타 전쟁 이후 1858년 공화당이 하원의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통과시킨 모든 중요한 법안은 남부 민주당 상원의원들의 투표로 무산되거나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무산되었다. 연방 정부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860년까지 지역 갈등이 민주당을 남부와 북부로 분열시켜, 간접적으로 1860년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유타 원정의 주요 원인이었던 국민 주권은 노예 문제의 해결이 미국 남북 전쟁을 촉발하면서 결국 부인되었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시작되면서 공화당 다수당은 1862년 모릴 반다처법과 같이 모르몬의 일부다처제 관습을 억제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이러한 법률을 시행하지 않았다. 대신 링컨은 브리검 영에게 미국 남북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대가로 모릴 반다처법을 무시할 수 있는 묵시적 허가를 주었다.[39] 1862년부터 포트 더글러스에 주둔한 연방군 사령관인 패트릭 에드워드 코너(Patrick Edward Connor) 장군은 모르몬과 대립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지시를 받았다.[39]

결국 유타 전쟁은 모르몬의 고립과 유타에서의 권력의 느린 쇠퇴를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행정부와 연방 지방 법원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지만, 준주 의회와 강력한 유언 검인 법원에서 정치적 권위를 유지했다. 1869년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되었고, 곧 많은 수의 "이방인"들이 유타에 정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연방의 지배는 느리게 진행되었다. 모르몬과 연방 정부 사이의 갈등, 특히 일부다처제 문제에 대한 갈등은 유타가 마침내 1896년 주가 되기 전까지 거의 40년 동안 계속되었고, 아마도 1904년에서 1907년까지의 스무트 청문회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교단 측은 비교도(연방 정부)와의 마찰 해소에 노력하여, 1890년에는 마찰의 주요 원인이었던 일부다처제를 표면적으로 중단했다.

4. 2. 유타 준주의 변화

유타 전쟁의 결과, 동부의 편집자들은 여전히 모르몬교도들의 종교적 신념과 관습을 비난했지만, 군사적 위협에 맞선 그들의 영웅적인 모습은 칭찬했다. 커밍 주지사가 안전하게 취임했을 무렵, 유타 전쟁은 부캐넌 대통령에게 곤혹스러운 일이 되었다. 일부 언론에서 '부캐넌의 실책'이라고 불린 이 사건에서[39]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았다.

  • 영 주지사에게 그의 교체 사실을 공식적으로 통보하지 않은 것
  • 유타의 미국에 대한 불충성에 대한 보고서를 조사하지 않고 군대를 파병하는 데 비용을 지출한 것
  • 계절이 늦은 시기에 원정대를 파병한 것
  • 겨울철 보급품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은 것


그러나 유타 주민들은 짧은 분쟁 기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주민들의 대피로 인해 정착민들의 생계와 경제적 안녕이 적어도 그 해, 그리고 아마 그 이상까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2개월 동안 이어진 파종 기간 동안 대부분의 밭작물은 방치되었고, 가축들은 이동을 위해 줄어들었다. 생활 여건 개선을 위해 1년 동안 한 노력은 본질적으로 사라졌다. 몇 년 동안 영토 전역에 걸쳐 빈곤이 널리 퍼질 것이다. 아이더호주, 네바다주, 캘리포니아주의 여러 모르몬 정착지는 수십 년 동안 재정착되지 않았고 일부는 영구히 버려졌다.

게다가 유타는 명목상 군사 점령 상태였다. 레너드 J. 애링턴(Leonard J. Arrington) 역사가는 "미국 육군의 정예"가 모르몬 정착민들을 혐오했다고 지적했다. 군대와 지휘관들과 모르몬들 사이의 관계는 종종 긴장되었다. 다행히도 플로이드 캠프(Camp Floyd)의 거의 고립된 위치 덕분에 군대가 기지 안이나 근처에 머물면서 상호 작용이 최소화되었다. 시더 밸리(Cedar Valley)에 주둔한 7,000명의 군인 근처에 사는 정착민들은 건설용 목재, 농산물, 제조품을 군인들에게 판매했다. 군대가 미국 남북 전쟁 발발로 1861년 플로이드 캠프를 최종적으로 버렸을 때, 약 400만달러 상당의 잉여 물품이 실제 가치의 일부에 낙찰되었다.

그러나 1862년 새로운 군대가 도착하여 솔트레이크시티 동쪽 구릉지에 포트 더글러스를 건설했다.

유타 전쟁의 한 결과로 유명한 포니 익스프레스가 탄생했다. 전쟁 중 랏 스미스와 나부 레기온(Nauvoo Legion)은 장비업체 러셀, 메이저스 앤 웨델 소유의 약 52대의 마차를 불태웠다. 정부는 이러한 손실에 대해 장비업체에 보상하지 않았고, 1860년 파산을 막기 위해 정부 우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포니 익스프레스를 설립했다.

유타 전쟁 이후 1858년 공화당이 하원의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통과시킨 모든 중요한 법안은 남부 민주당 상원의원들의 투표로 무산되거나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무산되었다. 연방 정부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860년까지 지역 갈등이 민주당을 남부와 북부로 분열시켜, 간접적으로 1860년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유타 원정의 주요 원인이었던 국민 주권은 노예 문제의 해결이 미국 남북 전쟁을 촉발하면서 결국 부인되었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시작되면서 공화당 다수당은 1862년 모릴 반다처법과 같이 모르몬의 일부다처제 관습을 억제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이러한 법률을 시행하지 않았다. 대신 링컨은 브리검 영에게 미국 남북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대가로 모릴 반다처법을 무시할 수 있는 묵시적 허가를 주었다.[39] 1862년부터 포트 더글러스에 주둔한 연방군 사령관인 패트릭 에드워드 코너(Patrick Edward Connor) 장군은 모르몬과 대립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지시를 받았다.[39] 1863년 3월, 키니 판사는 일부다처제 금지법 위반으로 영에 대한 영장을 발부했다. 영장은 미국 보안관에 의해 집행되었고, 피고인은 즉시 주청사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2000USD의 보석금이 공탁되었다.[40] 대배심의 결정을 기다렸다. 모든 구성원이 모르몬인 대배심은 그 해 1월 영과 아멜리아 폴섬의 결혼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소를 거부했다.

결국 유타 전쟁은 모르몬의 고립과 유타에서의 권력의 느린 쇠퇴를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행정부와 연방 지방 법원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지만, 준주 의회와 강력한 유언 검인 법원에서 정치적 권위를 유지했다. 1869년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되었고, 곧 많은 수의 "이방인"들이 유타에 정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연방의 지배는 느리게 진행되었다. 모르몬과 연방 정부 사이의 갈등, 특히 일부다처제 문제에 대한 갈등은 유타가 마침내 1896년 주가 되기 전까지 거의 40년 동안 계속되었고, 아마도 1904년에서 1907년까지의 스무트 청문회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연방 정부는 마운틴 미도우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추진했다. 학살의 주모자는 오랫동안 교단에 숨어 있었으나, 교단과 정부의 화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모든 책임을 지는 형태로 체포되어 학살 사건 발생지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교단 측은 비교도(연방 정부)와의 마찰 해소에 노력하여, 1890년에는 마찰의 주요 원인이었던 일부다처제를 표면적으로 중단했다.

5. 유타 전쟁에 대한 평가와 해석

유타 전쟁은 여러 관점에서 평가되고 해석될 수 있다. 이 전쟁은 비교적 짧았지만, 마운틴 메도우즈 학살(120명 이상 사망)[10][11], 에이컨 학살, 포트 렘히 공격[12][13][14] 등 여러 폭력 사건으로 인해 약 15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인명 피해가 큰 분쟁이었다.

5. 1. 미국 내 평가

동부 언론들은 여전히 모르몬교도들의 종교적 신념과 관습을 비난했지만, 군사적 위협에 맞선 그들의 영웅적인 모습은 칭찬했다. 커밍 주지사가 안전하게 취임했을 무렵, 유타 전쟁은 부캐넌 대통령에게 곤혹스러운 일이 되었다. 일부 언론에서 '부캐넌의 실책'이라고 불린 이 사건에서[39]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았다.

  • 영 주지사에게 그의 교체 사실을 공식적으로 통보하지 않은 것
  • 유타의 미국에 대한 불충성에 대한 보고서를 조사하지 않고 군대를 파병하는 데 비용을 지출한 것
  • 계절이 늦은 시기에 원정대를 파병한 것
  • 겨울철 보급품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은 것


그러나 유타 주민들은 짧은 분쟁 기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주민들의 대피로 인해 정착민들의 생계와 경제적 안녕이 적어도 그 해, 그리고 아마 그 이상까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2개월 동안 이어진 파종 기간 동안 대부분의 밭작물은 방치되었고, 가축들은 이동을 위해 줄어들었다. 생활 여건 개선을 위해 1년 동안 한 노력은 본질적으로 사라졌다. 몇 년 동안 영토 전역에 걸쳐 빈곤이 널리 퍼졌다. 아이더호주, 네바다주, 캘리포니아주의 여러 모르몬 정착지는 수십 년 동안 재정착되지 않았고 일부는 영구히 버려졌다.

유타는 명목상 군사 점령 상태였다. 레너드 J. 애링턴(Leonard J. Arrington) 역사가는 "미국 육군의 정예"가 모르몬 정착민들을 혐오했다고 지적했다. 군대와 지휘관들과 모르몬들 사이의 관계는 종종 긴장되었다. 다행히도 플로이드 캠프(Camp Floyd)의 거의 고립된 위치 덕분에 군대가 기지 안이나 근처에 머물면서 상호 작용이 최소화되었다. 시더 밸리(Cedar Valley)에 주둔한 7,000명의 군인 근처에 사는 정착민들은 건설용 목재, 농산물, 제조품을 군인들에게 판매했다. 군대가 미국 남북 전쟁 발발로 1861년 플로이드 캠프를 최종적으로 버렸을 때, 약 400만달러 상당의 잉여 물품이 실제 가치의 일부에 낙찰되었다. 1862년 새로운 군대가 도착하여 솔트레이크시티 동쪽 구릉지에 포트 더글러스를 건설했다.

유타 전쟁의 한 결과로 유명한 포니 익스프레스가 탄생했다. 전쟁 중 랏 스미스와 나부 레기온(Nauvoo Legion)은 장비업체 러셀, 메이저스 앤 웨델 소유의 약 52대의 마차를 불태웠다. 정부는 이러한 손실에 대해 장비업체에 보상하지 않았고, 1860년 파산을 막기 위해 정부 우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포니 익스프레스를 설립했다.

유타 전쟁 이후 1858년 공화당이 하원의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통과시킨 모든 중요한 법안은 남부 민주당 상원의원들의 투표로 무산되거나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무산되었다. 연방 정부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860년까지 지역 갈등이 민주당을 남부와 북부로 분열시켜, 간접적으로 1860년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유타 원정의 주요 원인이었던 국민 주권은 노예 문제의 해결이 미국 남북 전쟁을 촉발하면서 결국 부인되었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시작되면서 공화당 다수당은 1862년 모릴 반다처법과 같이 모르몬의 일부다처제 관습을 억제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이러한 법률을 시행하지 않았다. 대신 링컨은 브리검 영에게 미국 남북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대가로 모릴 반다처법을 무시할 수 있는 묵시적 허가를 주었다.[39] 1862년부터 포트 더글러스에 주둔한 연방군 사령관인 패트릭 에드워드 코너(Patrick Edward Connor) 장군은 모르몬과 대립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지시를 받았다.[39] 1863년 3월, 키니 판사는 일부다처제 금지법 위반으로 영에 대한 영장을 발부했다. 영장은 미국 보안관에 의해 집행되었고, 피고인은 즉시 주청사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2000USD의 보석금이 공탁되었다.[40] 대배심의 결정을 기다렸다. 모든 구성원이 모르몬인 대배심은 그 해 1월 영과 아멜리아 폴섬의 결혼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소를 거부했다.

결국 유타 전쟁은 모르몬의 고립과 유타에서의 권력의 느린 쇠퇴를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행정부와 연방 지방 법원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지만, 준주 의회와 강력한 유언 검인 법원에서 정치적 권위를 유지했다. 1869년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되었고, 곧 많은 수의 "이방인"들이 유타에 정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연방의 지배는 느리게 진행되었다. 모르몬과 연방 정부 사이의 갈등, 특히 일부다처제 문제에 대한 갈등은 유타가 마침내 1896년 주가 되기 전까지 거의 40년 동안 계속되었고, 아마도 1904년에서 1907년까지의 스무트 청문회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6. 주요 인물

유타 전쟁 주요 인물
인물역할설명
제임스 뷰캐넌미국 대통령모르몬교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브리검 영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회장 겸 유타 준주 주지사유타 준주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다. 연방 정부에 맞서 저항을 주도했다.
알프레드 커밍유타 준주 주지사브리검 영의 후임으로 임명된 비몰몬교도 주지사이다.
대니얼 H. 웰스나부 레기온 중장몰몬 민병대 지휘관이었다. 미군을 방해하고 약화시키는 전략을 지시했다.
토머스 L. 케인펜실베이니아 출신 중재자모르몬교도의 친구로, 연방 정부와 모르몬교도 사이의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미 육군 대령, 후일 남부 연합 장군유타 원정대 지휘관이었다. 캠프 플로이드를 건설하고 유타 준주에 미군을 주둔시켰다.
필립 세인트 조지 쿡미 육군 중령몰몬 대대 지휘관 출신으로, 후기 성도들에게 존경받았다.
롯 스미스나부 레기온 기병대 지휘관미군 보급 열차를 습격하여 불태웠다.
존 테일러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사도, 3대 회장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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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서적 The Utah expedition, 1857–1858: a documentary account of the United States military movement under Colonel Albert Sidney Johnston, and the resistance by Brigham Young and the Mormon Nauvoo Legion http://books.google.[...] A. H. Clark Co. 201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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