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대왕 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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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종대왕 태봉은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6호로,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탯줄을 모신 태봉이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1507년에 현재 위치에 돌방을 두어 조성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으로 옮겨졌다가 1982년 발견되어 1987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중앙에는 돌항아리가 있고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중종의 어태를 안치한 후 가평현이 가평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가평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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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대왕 태봉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중종대왕 태봉 정보 | |
![]() | |
| 이름 | 중종대왕 태봉 |
| 유형 | 향토문화재 |
| 지정 번호 | 6 |
| 지정일 | 1986년 6월 19일 |
| 시대 | 조선시대 |
| 주소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310 |
| google_map | 가평 상색리 |
2. 역사
중종대왕태봉은 조선 중종의 태(胎)를 모신 곳으로, 조선시대 태봉의 구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82년 12월, 산 주인이 장례를 위해 작업하던 중 지름 100cm, 높이 120cm의 돌항아리가 출토되면서 태봉이 발견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도굴로 인해 파손되고 방치되었던 거북 비석과 난간석 등도 함께 발견되었다.[1] 출토된 태항아리는 상색초등학교에 보관되었다가 1986년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후, 1987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태봉 중앙에는 머리가 없어진 거북돌, 보수된 빗몸돌, 새로 만든 받침돌로 구성된 태실비가 세워져 있다.[1]
中宗大王胎封중국어은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1506~1544)의 태를 모신 곳이다.
2. 1. 초기 조성
중종의 태(胎)는 1492년(성종 23년)에 처음 다른 곳에 안치되었다가, 1507년(중종 2년) 현재 위치로 옮겨져 봉안되었다. 이때 임금의 품격에 맞게 태실이 새로 조성되었음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1] 이 기록에 따르면, 중종의 어태(御胎)를 안치한 후 가평현이 가평군으로 승격되었다.[1]2. 2. 가평군 승격
『신증동국여지승람』 11권 가평현조(加平縣條)에 따르면, 1507년(중종 2년) 중종의 어태(御胎)를 안치하고 가평현을 가평군으로 승격시켰다. 이는 1492년(성종 23년)에 어느 곳인가에 태를 봉안했던 것을 1507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봉안하고, 새로 임금의 품격에 맞게 태실을 조성했음을 의미한다.[1]2. 3. 일제강점기와 훼손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중종대왕태봉을 도굴하면서 크게 파손되고 방치되었다.[1] 이 과정에서 지름 100cm, 높이 120cm인 태항아리가 출토되었고, 파손된 거북 비석과 난간석 등이 흩어져 있었다. 이는 일본이 조선 왕실의 문화와 역사를 훼손하려 한 정황으로 볼 수 있다.1982년 산주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중종대왕의 태실이 발견되었고, 출토된 태항아리는 한동안 상색초등학교로 옮겨 전시·보관되었다.[1] 이후 1986년 향토유적으로 지정되면서 1987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 4. 발견과 복원
1982년 12월, 산 주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업하던 중 지름 100cm, 높이 120cm인 돌항아리가 출토되면서 중종대왕 태봉이 발견되었다. 부근에는 파손된 거북 비석과 난간석 등이 흩어져 있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도굴로 인해 파손되고 방치되었던 것이다.[1]출토된 돌항아리는 한동안 상색초등학교에 전시·보관되었다가 1986년 향토유적으로 지정되면서 1987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태봉 중앙에는 태실비를 보수하여 세웠는데, 머리가 없어진 거북돌, 가운데를 보수하여 이어 붙인 빗몸돌, 새 돌로 만들어 덧붙인 받침돌로 구성되어 있다.[1]
3. 구조
왕실에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그 태를 봉인한 함을 태실이라 하고, 이 함을 묻은 곳을 태봉이라 한다. 중종대왕태봉은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태(탯줄)를 모신 곳이다. 처음에는 다른 곳에 보관하던 중종의 태를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인 1507년 현재 위치에 돌방을 만들고 임금의 품격에 맞게 규모와 위치를 정하여 새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 각지의 태봉 태실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고양시 서삼릉 구역으로 옮겨졌는데, 이때 중종의 태실도 파손되어 방치되었다. 1982년 산주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업하던 중 발견되어 1987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3. 1. 태항아리
중앙에 지름 100cm, 높이 150cm인 돌항아리가 있고 주위를 난간석이 두르고 있다. 그 앞으로 머리가 없어진 거북돌과 가운데를 보수하여 이어 붙인 빗몸돌, 파손된 난간석 등이 있다.3. 2. 난간석과 기타 유물
중종대왕 태봉에는 지름 100cm, 높이 150cm인 돌항아리가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난간석이 두르고 있다. 앞으로는 머리가 없어진 거북돌, 가운데를 보수하여 이어 붙인 빗몸돌, 파손된 난간석 등이 있다.[1]4. 현지 안내문
'''중종대왕태봉'''
- 中宗大王 胎峰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6호
왕실에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봉인한 함을 태실이라 한다. 그리고 이 함을 묻은 곳을 태봉이라 한다. 중종대왕태봉은 조선시대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태(탯줄)를 모신 곳으로, 처음에는 다른 곳에 보관하던 중종의 태를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인 1507년 현재 중종대왕 태봉의 자리에 돌방을 두어 임금의 품격에 맞게 그 규모와 위치를 정하여 새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태봉 태실들의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고양시 서삼릉 구역으로 옮겨졌으며, 중종의 태실도 이때 파손되어 방치되었다. 1982년 산주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중종대왕의 태실이 발견되어 1987년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중앙에 지름 100cm, 높이 150cm인 돌항아리가 있고 주위를 난간석이 두르고 있다. 그 앞으로 머리가 없어진 거북돌과 가운데를 보수하여 이어 붙인 빗몸돌, 파손된 난간석 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중종 2년 중종의 어태를 안치하고 나서 가평현을 가평군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 가평군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5.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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