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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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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채문은 고려 현종 때의 무신으로,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화주 방비를 맡았으며 서경 방어에 참여했다. 서경이 거란에 항복하려 하자 사신단을 살해하고 항복문서를 없앴으나, 현종의 항복으로 서경 밖으로 쫓겨났다. 이후 현종을 호종하여 1010년부터 1011년까지 현종의 피난길을 지켰으며, 거란이 물러간 후 공신으로 인정받았다. 덕종 때 1등 공신으로 추록되었으며, KBS 드라마 《천추태후》와 《고려 거란 전쟁》에서 배우가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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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채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지채문
원어 이름智蔡文
채문(蔡文)
호간(浩幹)
국적고려
성별남성
출생일964년
출생지미상
사망일1026년
사망지미상
자녀지맹
본관봉주
서훈일등공신 추록
복무고려군
계급정3품 상장군
참전고려-거란 전쟁
주군고려 현종
직책
직책중랑장
임기1010년~1016년
군주고려 현종
군주 칭호국왕
직책 2
직책 2우상시
임기 21016년~1026년
군주 2고려 현종
군주 칭호 2국왕
직책 3
직책 3우복야
임기 31026년
군주 3고려 현종
군주 칭호 3국왕

2. 생애

지채문은 고려 현종 때의 장군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고 왕을 호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010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중랑장으로서 하공진, 유종과 함께 화주(和州)의 방비를 맡았다.[1]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갈 때 채충순 등과 함께 금군 50여 명을 이끌고 호위했다.[1] 거란이 물러난 뒤 공주에서 전 30결을 받았다.[1]

2. 1. 거란의 2차 침입 방어 (1010년)

1010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중랑장으로서 하공진, 유종과 함께 화주(和州)의 방비를 맡았다.[1] 하공진과 유종이 조공하러 온 여진족 추장 일행 95명을 몰살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여진은 억울하게 여겨 거란강조의 정변을 알리고 원한을 갚아줄 것을 호소하였다.[1] 이에 요 성종은 여진의 협력을 약속받고 "고려강조가 임금 송(誦)을 시해하고 순(詢)을 임금으로 세워 대역하였으니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어야 하겠다."라며 침입해 왔다.[1]

요군이 서경으로 임박하자 지채문과 탁사정은 서경을 방비하였다.[1] 지채문은 탁사정과 합류하여 서경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서경이 요나라에 항복하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단독으로 서경으로 진군하였으나, 서경은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1] 이에 최창이 성문 밖에서 분대어사 조자기(曹子奇)를 불러 겨우 입성하였다.[1] 서경에 입성한 지채문은 서경유수 원종석을 만나 항복을 철회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여, 최창과 상의하여 독단으로 일을 돌이킬 수 없도록 요나라 사신단을 살해하고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항복문서를 없앴다.[1] 그러나 여론은 변하지 않았다.[1] 이때 고려의 국왕인 현종마저 요 성종에게 표를 올려 항복할 뜻을 전했다.[1] 그리하여 지채문은 서경 밖으로 쫓겨났으며 서경 수비군 중에서는 대장군 정충절만이 그를 따랐다.[1]

현종의 항복 표문을 받은 요 성종은 거란인을 새로운 서경유수로 임명하고 1천 명의 호위를 붙여 서경으로 보냈다.[1] 그러나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이 대군을 이끌고 서경에 도착하여 서경을 장악했다.[1] 때마침 요 성종이 보낸 서경유수 올름이 서경에 도착하였는데, 탁사정은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요 성종이 임명한 서경부유수 한기를 갑자기 습격하여 이들을 괴멸시켰다.[1] 요 성종은 노하여 선발대를 보내 서경을 공략하였으나 지채문이 이를 요격하여 격파하였다.[1] 그러나 곧 요 성종의 본대가 도착하자 고려군은 패퇴하였고 서경은 포위되었다.[1]

탁사정은 백전노장 대도수와 상의하여 대도수는 동문으로 출격하여 요군의 측면을 혼란시키면 탁사정은 서문으로 나아가 요군의 후방을 기습하는 계획을 세웠다.[1] 대도수는 기꺼이 임무를 맡았으나 실제 전투에서 탁사정은 성문이 열리자마자 도주해버렸고 대도수는 사로잡혔다.[1]

2. 2. 현종 호종 (1010년 ~ 1011년)

1010년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갈 때, 지채문은 탁사정과 함께 서경을 방어했으나 함락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이후 현종의 피난길에 채충순 등과 함께 금군 50여 명을 이끌고 호위했다.

적성현 단조역에서 견영이 행궁을 침범하려 하자 이를 막았고, 창화현에서 현리가 난을 일으키자 채충순, 주저 등과 왕을 피신시켰다. 광주에서 왕후를 찾고, 여양현에서 현안지 등 16명에게 중윤을 제수하여 민심을 수습할 것을 건의했다. 삼례에서 전주절도사 조용겸의 전횡을 막고 전주로 돌려보냈다. 나주까지 현종을 무사히 호종한 공으로, 거란이 물러난 뒤 공주에서 전 30결을 받았다.[1]

3. 사후

1031년(덕종 즉위년) 현종 때 남행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으로 추록되었다.[1]

덕종 즉위 후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1]

고 상장군(上將軍)·좌복야(左僕射) 지채문은 선왕께서 남쪽으로 파천하셨을 때 홀로 충절을 온전히 지켜 으뜸가는 공훈을 세웠으니 이제 그 공훈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하노라.|고 상장군(上將軍)·좌복야(左僕射) 지채문은 선왕께서 남쪽으로 파천하셨을 때 홀로 충절을 온전히 지켜 으뜸가는 공훈을 세웠으니 이제 그 공훈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하노라.중국어

4. 가족

관계이름
아들지맹
손자지우
증손자지숙연
증손자지총연
증손자지녹연


5. 대중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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