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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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조는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인물이다. 983년 관료로 시작하여 1009년 서북면 도순검사로 재직하며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시해했다. 이후 중대성을 설치하고 중대사가 되었으나, 1010년 거란의 침입으로 30만 군을 이끌고 맞서 싸우다 포로로 잡혀 항복을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그는 연개소문과 비교되기도 하며, 드라마 《천추태후》와 《고려 거란 전쟁》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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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강조 |
| 한자 표기 | 康兆 |
| 로마자 표기 | Gang Jo |
| 별칭 | 진형 (進刑, Jinhyeong) |
| 기본 정보 | |
| 출생 | 964년 |
| 출생지 | 신천, 황해도 고려 |
| 사망 | 1011년 1월 1일 (약 47세) |
| 사망지 | 랴오양, 요나라 |
| 군사 경력 | |
| 복무 | 고려군 |
| 복무 기간 | ?–1010 |
| 참전 | 고려-거란 전쟁 |
| 가족 정보 | |
| 자녀 | 강씨 (딸) |
| 관직 정보 | |
| 군주 | 고려 현종 |
| 군주 칭호 | 국왕 |
| 국적 | 고려 |
| 직책 | 고려의 이부상서 및 참지정사 |
| 임기 | 1009년~1010년 |
| 기타 정보 | |
| 본관 | 신천(추정) |
2. 생애
강조는 서북면의 군사 감찰관이었다.[2] 1009년 2월 13일, 궁궐에 큰 불이 나 목종이 충격을 받아 병에 걸렸다.[2] 김치양은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의 연인이었는데,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세우고 왕위 계승 경쟁자인 대량원군을 죽이려 했다.[2]
목종은 김치양을 막기 위해 강조에게 군대를 이끌고 수도 개성으로 오라고 명했다.[2] 강조는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와서 김치양과 그의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강조는 목종을 시해하고 천추태후를 유배한 뒤, 현종 (고려)을 왕위에 앉혔다.[2]
강조는 중추원, 은대, 선휘원을 통합하여 새로 중대성을 설립하고, 스스로 중대사(中臺使)가 되어 중대성의 수장이 되었다.[2]
2. 1. 관료 생활
강조는 983년 성종 임금의 하급 궁료(下級 宮僚)로 천거된 이후 991년에 무관(武官)으로 관직에 본격 출사하였다. 997년 성종이 후계를 이을 아들 없이 죽고 목종이 보위에 오르자, 모후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여 외척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성종 때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켜 유배되었던 김치양도 다시 불려와 중용되었다. 김치양은 마음대로 정치를 하면서 1003년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 당시 강조는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사 우상시로 있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 도순검사가 되었다.목종이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김치양의 계획을 알고 황보유의를 파견하여 대량원군을 맞아 오게 하고, 전중감 이주정이 김치양측에 가담한 것을 알고 서북면 도순검부사로 임명해 떠나게 한 뒤,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에게 개경으로 와 자신을 호위할 것을 명하였다.
2. 2. 강조의 정변
1009년 1월, 목종은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중추사 우상시 겸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개경으로 올 것을 은밀히 지시하였다. 당시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문과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돌았고, 강조는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향했다. 도중 평주(황해도 평산)에서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주저했으나, 부하 장수들과 회의한 뒤 개경으로 들어가 목종을 퇴위시키고 2월 3일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웠다.[1] 이와 함께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와 그 무리들을 귀양보냈으며, 양국공(讓國公)으로 폐했던 목종을 죽였다.[1]이어 왕실의 부패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관제개혁을 실시하여 국왕의 측근 보좌기구인 은대(銀臺)와 중추(中樞) 남북원(南北院)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해 중대사(中臺使)에 올랐으며, 곧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어 당대 제일의 실권자가 되었다.[1]
강조는 서북면의 군사 감찰관(都巡檢使)이었다.[2] 1009년 2월 13일, 궁궐에 큰 불이 나 목종이 충격을 받아 병에 걸렸다.[2] 김치양은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의 연인이었는데,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세우고 왕위 계승 경쟁자인 대량원군을 죽이려 했다.[2] 목종은 김치양을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수도 개성으로 오라고 강조에게 명했다.[2] 강조는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와서 김치양과 그의 지지자들을 처형했다.[2] 그러나 강조는 또한 목종을 죽이고 천추태후를 유배했다.[2]
목종을 시해한 후, 강조는 현종 (고려)을 왕위에 앉혔다.[2] 강조는 중추원, 은대, 선휘원을 통합하여 새로 중대성을 설립했다.[2] 강조는 스스로 중대사(中臺使)가 되어 중대성의 수장이 되었다.[2]
2. 3. 제2차 고려-거란 전쟁과 최후
1010년 요나라의 황제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강조는 30만의 군사를 이끌고 통주(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거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장수 이현운과 함께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4] 요 성종은 강조의 인품에 끌려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제안했으나, 이현운만이 복종하고 강조는 살을 베는 강요에도 끝까지 복종을 거부하여 처형되었다.[7][2]요나라 군대는 흥화진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는데, 당시 흥화진의 수비는 양규 장군이었다.
이후 요나라는 통주로 향했는데, 이곳에서 강조와 30만 명의 고려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조는 요나라 군대가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좁은 길목에 매복을 설치하고, 군대를 이끌고 삼각 공격을 가했다. 요나라 군은 후퇴했고, 이 매복으로 1만 명이 사망했다. 적군은 다시 통주를 공격했지만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패배했다.
요나라 지휘관은 강조를 주요 목표로 삼아 다시 통주를 공격했으나, 요나라는 세 번째 패배를 당했다. 마지막 시도로 요나라 군대는 다시 공격해 왔지만, 이때 강조는 직접 공격을 지휘하지 않고, 승리를 확신하며 부하 중 한 명과 바둑을 두었다.[5] 동시에 요나라 장수 야율보로가 거란 군대를 이끌고 삼수(三水)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러나 강조는 거란에 대한 방어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고, 부하 중 한 명이 자신의 계획을 요나라에 알렸다. 요나라 군인들은 성의 방어선을 뚫었고, 기습 공격으로 고려군은 패배, 3만 명의 고려 군인이 죽고 강조는 사로잡혔다.[6]
3. 평가
강조는 요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여겨지지만, 연개소문과 비교하면 그의 능력과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강조는 고려에 큰 승리를 안겨주었으나, 그의 죽음은 연개소문의 죽음이 고구려에 미친 영향과 유사하게 고려에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3. 1. 긍정적 평가
강조는 영웅으로 여겨진다. 그의 치세는 침략해 온 요나라와의 전쟁 시기였지만, 목종과 역모를 꾸민 문신들을 제외하면, 강조에 의해 많은 죽음이 명령되지는 않았다. 강조는 그를 반대하는 고구려 왕을 살해한 연개소문과 비교될 수 있다.하지만 강조는 연개소문만큼 뛰어나지 못했고, 오래 통제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강조는 요나라에 대한 고려에게 큰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그의 죽음은 연개소문의 죽음이 고구려에 그랬던 것처럼 고려에게 또 다른 어려움의 시기를 가져왔다. 강조는 연개소문의 작은 규모의 버전으로 볼 수 있다.
3. 2. 부정적 평가
강조는 영웅으로 여겨지지만, 연개소문만큼 뛰어나지는 못했다. 강조는 요나라에 대한 고려의 승리를 이끌었지만, 그의 죽음은 고려에 또 다른 어려움을 가져왔다. 이는 연개소문의 죽음이 고구려에 미친 영향과 비슷하다. 따라서 강조는 연개소문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다.4.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
| 아버지 | 강태주(康泰周) |
| 딸 | 부인 강씨(夫人 康氏) |
| 사위 | 김진유 |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2024-02-24
[2]
논문
Forging the Truth: Creative Deception and National Identity in Medieval Korea
https://eastasianhis[...]
2023-11-29
[3]
논문
The Coup of Gang Jo and The Emergence of Jungdaeseong(中臺省, Palace Secretariat) in the Early Period of the Goryeo Dynasty
http://journal.kci.g[...]
2023-12-03
[4]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Land of the Morning Calm" to states in conflict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2012
[5]
위키소스
高麗史
[6]
웹사이트
http://db.history.go[...]
2018-08-24
[7]
서적
A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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