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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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부는 전한 시대와 신나라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외교관과 군인으로 활약했다. 그는 전한 평제 시기에 흉노 사절단의 부교위로 참여했으며, 신나라 시기에는 흉노에 파견되는 사절단에 참여하여 인장 격을 낮추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남양 태수가 되어 유인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녹림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여 양구사와 함께 전사했다. 
견부는 전한 말부터 신나라 초기까지 활동한 인물로, 처음에는 외교 분야에서 활약하다가 나중에는 군사 분야에서 활동했다. 전한 평제 시기에는 흉노와의 외교 협상에 참여했고,[1] 신나라 건국 후에는 남양태수로 임명되어 유인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황 4년(23년)에 전사했다.[4] 
진부는 왕망의 부하로서 처음에는 흉노와의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신 건국 이후 남양태수로 임명되어 반(反) 왕망 세력을 색출하고 진압하는 데 힘썼다. 이통이 반신 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씨 일족을 모두 처형하고, 잠팽의 모친을 구속하는 등 가혹한 방법을 사용했다. 지황 3년(22년) 말, 유연과 왕광 등의 반란군을 요격하여 승리했으나, 23년 왕상이 이끄는 하강군이 반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2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전사했다.[1]
2. 생애
역할 시기 주요 내용 외교관 전한 평제 ~ 신나라 건국 초기 흉노와의 외교 협상에 참여하여 한나라의 이익을 도모함.[1] 남양태수 지황 3년(22년) ~ 지황 4년(23년) 유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녹림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함.[4],[5],[6] 
견부는 왕망의 신나라에 충성했지만, 가혹하고 강압적인 통치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1. 전한 시기 외교 활동
전한 평제 시기, 흉노가 전한 서역도호부에 원한을 품고 투항한 거사후왕과 거호래왕을 돌려보내도록 명하는 사절단에서 중랑장 한륭(韓隆)·왕창(王昌) 다음 부교위로 참여했다. 이후 전한과 흉노가 계속 교섭하여 중국인·오손인·중국의 인수를 받은 서역인·오환인이 흉노에 투항하면 받지 못하게 했고, 이 4개조를 흉노에 전하는 사절단에서 또 중랑장 왕준·왕창 다음 부교위로 참여했다.[1] 시건국 원년(9년), 신나라가 창건되자 흉노에 오위장 왕준 다음으로 사절단에 참여했는데, 이 사절단의 임무는 흉노에게 주는 인장의 격을 새(璽)에서 장(章)으로 낮추는 것이었다.[1]
2. 2. 신나라 시기 남양태수 임명과 반란 진압
견부는 전한 말 흉노와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평제 시기에는 흉노에 투항한 한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내도록 설득하는 사절단에 부교위로 참여했고, 신나라 건국 후에는 흉노에게 주는 인장의 격을 낮추는 임무를 맡은 사절단에도 참여했다.[1]
이후 남양태수로 임명된 견부는 지황 3년(22년) 11월, 유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강경하게 진압했다.[4] 유인의 반란에 가담한 이통을 왕망에게 보고하고, 이통의 가족과 친척 64명을 처형했다.[2] 또한, 극양 현장 잠팽이 가족과 함께 도망쳐 오자, 잠팽의 어머니와 아내를 구금하기도 했다.[3]
2. 2. 1. 녹림군과의 전투와 최후
전한 평제 시기, 흉노가 전한 서역도호부에 원한을 품고 투항한 거사후왕과 거호래왕을 돌려보내도록 명하는 사절단에서 중랑장 한륭(韓隆)·왕창(王昌) 다음 부교위로 참여했다. 이후 전한과 흉노가 계속 교섭하여 중국인·오손인·중국의 인수를 받은 서역인·오환인이 흉노에 투항하면 받지 못하게 했고, 이 4개조를 흉노에 전하는 사절단에서 또 중랑장 왕준·왕창 다음 부교위로 참여했다. 시건국 원년(9년), 신나라가 창건되고서 흉노에 오위장 왕준 다음으로 사절단으로 갔는데, 이 사절단의 임무는 흉노에게 주는 인장의 격을 새(璽)에서 장(章)으로 낮추는 것이었다.[1]
이후 전수대부가 되었는데, 지황 3년(22년) 11월[6], 전수군에서 전한의 종실인 유인이 반란을 일으켰다.[4] 전수군의 저명한 씨족 이씨 가문의 이통이 유인에 가담하자, 이를 왕망에게 보고했다. 마침 장안에서는 이통의 아버지 이수(李守)가 반신 활동을 벌이다 들통나 사로잡혔는데, 이를 들은 왕망은 분노해 이수를 죽였고, 전수군에서도 이통의 형제들과 문중 64명을 죽이고 그 시체를 전수군 치소가 있는 완현의 시장에서 불태웠다.[2] 유인은 녹림군 중 신시병과 평림병을 끌어들여, 장취(長聚)·당자향(唐子鄕)을 도륙하고 호양위(湖陽尉)를 죽이고 극양(棘陽)현을 함락했으며 완까지 공격하려 들었다.[4] 극양현장 잠팽이 일가족을 거느리고 달아나 오자, 극양을 지키지 못한 것에 분노해 잠팽의 어머니와 아내를 구금하고 공적으로 보상하게 했다.[3]
전수속정 양구사(梁丘賜)와 함께 소장안취(小長安聚)에서 녹림군과 싸웠는데, 안개가 짙은 틈을 타 녹림군을 크게 무찔렀다. 유인의 동생 유중·누나 유원과 그의 세 딸을 추격해 살해했고,[4] 그 외에도 유지의 처자와 유가의 처자 등 유인의 일족 수십 명을 죽였다.
유인이 물러나 극양을 지키자, 승세를 타서 치중을 남양군 비양현 남(藍)향에 두고 정병 10만을 거느리고 황순수(黃淳水)를 건너 비수(沘水)에 이르렀다. 그 두 강 사이에 영채를 세우고 다리를 끊어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보였다. 유인은 돌아가려는 신시병과 평림병을 회유하고 다른 녹림군의 일파인 하강병까지 끌어들여, 사흘을 쉰 후 군을 6부로 나누어 밤중에 기습을 해, 신나라 군은 남향에 둔 치중들을 모조리 빼앗겼다. 다음날, 유인의 한군이 남서쪽에서 공격해 오고, 하강병은 남동쪽에서 양구사를 공격해 오니, 밥 먹을 때 즈음에 둘 다 군대가 무너져 내려 흩어져 달아났으나 추격이 거세 목이 잘리고 물에 빠져 죽은 이가 2만여 명에 이르렀다. 진부도 양구사와 함께 목이 잘렸다.[4] 지황 4년(23년) 정월 갑자일 초하루(그레고리력으로는 23년 2월 22일)의 일이었다.[5][6]
2. 3. 연표
3. 평가
3. 1. 부정적 평가
왕망의 부하로, 처음에는 흉노와의 외교 사무에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 건국 이후에는 남양태수로 임명되어, 반(反) 왕망 세력 색출 및 진압에 종사했다. 이통이 반신 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완의 명가인 이씨 일족을 모두 처형하고, 반신군에 패배하여 극양(남양군)에서 철수한 현장 잠팽의 모친을 구속하는 등 가혹하고 강압적인 수법을 사용했다. 지황 3년(22년) 말, 유연과 왕광 등의 반란군을 요격하여 승리하고 유연의 일족 수십 명도 살해했으나, 23년 유연이 왕상이 이끄는 하강군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반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결국 2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전사했다.[1]
참조
[1] 
서적
 
흉노전제64 하
 
[2] 
서적
 
이왕등내열전제5 중 이통
 
[3] 
서적
 
풍잠가열전제7 중 잠팽
 
[4] 
서적
 
종실사왕삼후전 중 제무왕
 
[5] 
서적
 
왕망전제69 하
 
[6] 
서적
 
광무제기제1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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