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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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환은 기원전 209년 흉노에게 패배한 동호에서 분리된 민족으로, 랴오닝 지역에 정착했다. 전한 시대에는 흉노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으며, 후한 시대에는 한나라와 관계를 맺고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후한 말기에는 세력이 분열되어 각지에서 왕을 칭하며 세력을 다투다 조조에게 토벌당했다. 이후 한족, 선비족 등과 융합되어 문화적 정체성을 잃었고, 4세기에는 동호 계열의 잡다한 부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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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 | |
---|---|
기본 정보 | |
![]() | |
시기 | 기원전 3세기 ~ 3세기 |
위치 | 현재의 중국 북부 |
민족 | 원시 몽골족 |
언어 | 오환어 |
종교 | 샤머니즘 |
역사 | |
기원 | 동호 |
주요 사건 | 백랑산 전투 오환족 반란 |
사회 | |
사회 구조 | 부족 연맹 |
문화 | |
장례 풍습 | 시신 화장 |
같이 보기 | |
관련 민족 | 선비족 흉노 한족 |
2. 역사
서기 49년(건무 25년), 오환의 '''학단'''은 무리를 이끌고 낙양으로 가서 황제를 만나 후왕(侯王)으로 봉해졌다. 그의 무리는 요동속국, 요서, 우북평, 어양, 광양, 상곡, 대군, 안문, 태원, 삭방에 걸쳐 있었다.[5]
영평 연간(서기 58년~75년)에 '''흠지분'''은 어양에서 종인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요동태수 채융이 군사를 모아 흠지분을 죽이고 그 무리들을 격파했다.
안제 시대(106년~125년)에는 '''무하'''가 선비, 흉노와 연합하여 어양, 우북평, 안문에서 자신의 무리와 함께 대군, 상곡, 탁, 오원을 약탈했다. 이에 후한은 하희를 보내 이들을 공격했고, 흉노는 항복하고 선비와 오환은 각각 새 밖으로 돌아갔다.
무하가 후한 변경에서 쫓겨난 후, '''융말외'''는 후한에 귀부하여 도위 관직을 얻었고 왕후 돌귀, 거연 등을 거느리고 경엽을 따라 새를 나가 선비를 공격해 전공을 세웠다. 이후 융말외, 돌귀, 거연은 솔중왕으로 봉해졌고 속백(비단 묶음)을 하사받았다.
오환 내부에서는 구력거, 난루, 소복연, 오연 등이 각각 왕을 자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 구력거는 요서 오환대인으로 5천여 락(落)을 이끌고 왕이라 자칭하였으며, 장순 등과 함께 청주, 서주, 기주, 유주 등지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 난루는 상곡 오환대인으로 9천여 락(落)을 이끌고 왕이라 자칭하였다.
- 소복연은 요동속국 오환대인으로 천여 락(落)을 이끌고 초왕(峭王)을 자칭하였다.
- 오연은 우북평 오환대인으로 8백여 락(落)을 이끌고 한로왕(汗魯王)을 자칭하였다.
답돈은 구력거의 조카로, 구력거 사후 그를 대신해 오환의 대인이 되었다.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쳤으며, 이후 소복연, 오연 등과 함께 원소에게 선우로 봉해졌다. 누반이 장성하자, 그에게 자리를 돌려주고 자신은 누반 휘하의 왕이 되었다. 원상이 조조에게 패하고 도망쳐 오자 받아주었으나, 유성에서 조조와 싸우다 원상과 함께 전사했다.
누반은 구력거의 아들로, 장성하고 나서 소복연을 통해 선우로 추대되었다. 속부환은 답돈 사후 누반, 오연 등과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붙잡혀 참수되었다.
구루돈은 우북평 오환대인으로, 원상, 답돈, 호류섭과 함께 요서로 달아났다. 관구검 군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호류섭과 함께 5천여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호류섭은 요서 오환대인으로 요서 오환도독 솔중왕에 봉해졌다.
다음은 오환의 주요 인물과 그들의 활동을 정리한 표이다.
인물 | 부족/지역 | 주요 활동 | 비고 |
---|---|---|---|
학단 | 서기 49년, 무리를 이끌고 낙양으로 가서 황제를 만나고 후왕으로 봉해짐 | ||
흠지분 | 어양 | 영평 연간(서기 58년~75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요동태수 채융에게 진압됨 | |
무하 | 안제(106-125) 때 선비, 흉노와 연합하여 약탈을 일삼았으나, 후한의 공격으로 격퇴됨 | ||
융말외 | 무하가 쫓겨난 후 후한에 귀부하여 도위 관직을 얻고, 선비를 공격하여 전공을 세움. 솔중왕으로 봉해짐 | ||
구력거 | 요서 | 5천여 락을 이끌고 왕을 자칭, 장순 등과 함께 청주, 서주, 기주, 유주 등지에서 노략질 | |
난루 | 상곡 | 9천여 락을 이끌고 왕을 자칭 | |
소복연 | 요동속국 | 천여 락을 이끌고 초왕을 자칭 | |
오연 | 우북평 | 8백여 락을 이끌고 한로왕을 자칭 | |
답돈 | 구력거의 조카,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격파, 선우로 봉해짐. 조조와의 유성 전투에서 전사 | ||
누반 | 구력거의 아들, 소복연을 통해 선우로 추대됨 | ||
속부환 | 답돈 사후 누반, 오연 등과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참수됨 | ||
구루돈 | 우북평 | 원상, 답돈 등과 요서로 도망쳤다가 관구검에게 항복 | |
호류섭 | 요서 | 요서 오환도독 솔중왕, 관구검에게 항복 |
2. 1. 흉노 복속과 성장
동호가 흉노에게 패배한 후, 오환은 랴오닝 주변에 살던 남부 동호였다. 초기에는 흉노에게 복속되어 매년 소, 말, 양 가죽을 세금으로 바쳐야 했다. 이를 내지 못하면 처자식이 끌려갔다.[5]기원전 121년, 전한의 장군 곽거병이 흉노의 동쪽을 격파한 후, 오환은 중국 북부 국경에 설치된 다섯 개의 군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에 정착하여 흉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환의 추장들은 매년 장안에 방문하여 보상을 받았다.
기원전 78년, 오환은 흉노 선우의 무덤을 약탈했고, 분노한 흉노의 공격을 받았다. 전한은 오환을 지원하려 했으나 늦었고, 오히려 오환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기원전 71년, 오환은 한, 정령, 우손과 연합하여 흉노를 격파했다. 서기 7년, 한나라는 오환을 설득하여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게 했으나, 흉노의 공격으로 다시 복속되었다.
서기 49년, 요서 지역의 오환 장로 학단은 한나라에 귀순하여 조공을 바쳤다. 서기 58년, 선비 추장 편하는 어양군에서 문제를 일으킨 오환 지도자 흠지분을 죽였다. 서기 109년, 오환은 선비와 함께 오원군을 공격하여 한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서기 168년, 오환은 자체 지도자 하에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주요 지도자로는 남루(상곡), 구력거(요서), 소복연(요동 속국), 오연(우북평) 등이 있었다.
187년, 구력거는 장춘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190년에 유우에게 항복하고 193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촌 답돈이 섭정이 되었고, 195년 원소를 지지하여 공손찬에 대항했다.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많은 오환인들이 조조에게 항복하여 그의 기병으로 복무했다. 누반과 소복연은 공손강에게 도망쳤으나 살해당했다.
조조는 오환을 대군에 위치한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이후 오환은 점차 문화적 정체성을 잃고 주변 민족들과 융합되었다.
2. 2. 후한과의 관계
후한과의 관계는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에 오환은 흉노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한나라가 강성해지면서 한나라와 협력 관계를 맺기도 했다.건무 25년(49년), 오환의 대인 학단 등 9,000여 명이 부하들을 이끌고 한나라 조정에 와서 왕이나 후(侯)로 봉해졌다. 이들은 요동속국, 요서, 우북평, 어양, 광양, 상곡, 대군, 안문, 태원, 삭방 등지에 거주하며 한나라의 번병(蕃兵) 역할을 수행했다.[5]
그러나 오환은 때때로 한나라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영평 연간(58년~75년)에는 어양에서 흠지분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요동태수 채융에게 진압되었다. 안제 시대(106년~125년)에는 무하가 선비, 흉노와 연합하여 변경을 약탈했으나, 하희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후 오환의 융말외는 한나라에 귀부하여 도위 관직을 얻었고, 순제 시대에는 돌귀, 거연 등과 함께 선비를 공격하여 공을 세워 솔중왕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오환 내부에서는 여러 세력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주요 세력으로는 구력거, 난루, 소복연, 오연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각각 왕을 자칭하며 할거했다.
구력거는 장순의 난에 가담했다가 공손찬에게 패배했고, 이후 유우에게 항복했다. 구력거 사후 그의 조카 답돈이 세력을 이어받아 원소를 도왔으나, 백랑산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답돈의 사후, 누반과 속부환 등은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공손강에게 붙잡혀 참수되었다.
구루돈과 호류섭은 관구검에게 항복하여 각각 솔중왕에 봉해졌다.
이처럼 오환은 한나라와 협력과 반목을 반복하면서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2. 3. 조조에게 토벌
구력거, 난루, 소복연, 오연 등 오환의 유력자들은 각각 왕을 자칭하며 세력을 떨쳤다. 187년에 장순이 구력거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우가 부임하면서 진압되었다. 구력거 사후 그의 조카 답돈이 실권을 장악하고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격파하는데 기여했다. 원소는 이들에게 선우 칭호를 내렸다.206년, 조조는 유성을 공격하여 백랑산 전투에서 답돈을 죽이고 오환족을 크게 격파했다. 살아남은 오환족은 요동군으로 도망쳤으나 공손강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조는 오환족을 내지로 이주시키고, 그들의 기병을 군대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삼군오환의 기병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237년에는 관구검이 요동을 토벌할 때 구루돈과 호류 등이 항복하여, 오환족은 한나라에 복속되었다.
2. 4. 소멸
오환은 기원전 209년경 동호가 흉노에게 패배한 후, 선비와 함께 동호에서 분리되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선비의 언어와 문화는 오환과 같았다.[5] 기원전 121년까지 오환은 흉노에 조공을 바쳤으나, 이후 전한의 곽거병에 의해 중국 북부 국경 지역에 설치된 다섯 개 군에 정착하여 흉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환 추장들은 매년 장안에 방문하여 보상을 받았다.서기 49년, 요서 지역의 오환 장로 하단은 한나라에 귀순하여 조공을 바쳤다. 서기 58년에는 선비 추장 편하가 오환 지도자 신지본을 살해했고, 109년에는 오환이 선비와 함께 오원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168년, 오환은 자체 지도자를 중심으로 독립을 확립하려 했으며, 이들 중 가장 큰 집단은 난루, 구력거, 소복연, 오연 등이 이끌었다.
187년, 구력거는 장춘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193년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조카 답돈이 섭정이 되었고, 195년 답돈, 남루, 소복연은 원소를 지지하여 공손찬에 대항했다.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답돈이 조조에게 패배하고 전사하면서 많은 오환인들이 조조에게 항복하여 그의 기병으로 복무했다. 누반과 소복연은 공손강에게 도망쳤으나 살해당했다.
조조는 오환을 대군에 위치한 세 그룹으로 나누었으나, 이후에도 오환 추장들은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218년 조장이 그들의 마지막 세력을 완전히 파괴했고, 선비족이 오환의 빈자리를 빠르게 채웠다.
오환은 점차 한족, 선비족 등 주변 민족과 융합되면서 문화적 정체성을 잃어갔다. 4세기경에는 "오환"이라는 단어가 동호 계열의 다양한 부족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고, 북위 말기에는 한족과 완전히 동화되었다. 오환의 일부는 고막해로 알려졌다가 10세기에 거란족에게 흡수되었다.
경초 원년(237년) 가을, 관구검이 요동을 토벌할 때 우북평 오환 선우 구루돈과 요서 오환 도독 · 솔중왕 호류는 5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구루돈은 동생 아라반을 보내 조공물을 바쳤고, 조정은 구루돈 휘하 주요 지휘자 30여 명을 왕으로 봉하고, 여(가마)와 말 등을 하사했다.
다음은 오환의 주요 인물과 그들의 활동을 정리한 표이다.
인물 | 부족/지역 | 주요 활동 | 비고 |
---|---|---|---|
학단 | 서기 49년, 무리를 이끌고 낙양으로 가서 황제를 만나고 후왕으로 봉해짐 | ||
흠지분 | 어양 | 영평 연간(서기 58년~75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요동태수 채융에게 진압됨 | |
무하 | 후한 안제(106-125) 때 선비, 흉노와 연합하여 약탈을 일삼았으나, 후한의 공격으로 격퇴됨 | ||
융말외 | 무하가 쫓겨난 후 후한에 귀부하여 도위 관직을 얻고, 선비를 공격하여 전공을 세움. 솔중왕으로 봉해짐 | ||
구력거 | 요서 | 5천여 락을 이끌고 왕을 자칭, 장순 등과 함께 청주, 서주, 기주, 유주 등지에서 노략질 | |
난루 | 상곡 | 9천여 락을 이끌고 왕을 자칭 | |
소복연 | 요동속국 | 천여 락을 이끌고 초왕을 자칭 | |
오연 | 우북평 | 8백여 락을 이끌고 한로왕을 자칭 | |
답돈 | 구력거의 조카,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격파, 선우로 봉해짐. 조조와의 유성 전투에서 전사 | ||
누반 | 구력거의 아들, 소복연을 통해 선우로 추대됨 | ||
속부환 | 답돈 사후 누반, 오연 등과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참수됨 | ||
구루돈 | 우북평 | 원상, 답돈 등과 요서로 도망쳤다가 관구검에게 항복 | |
호류섭 | 요서 | 요서 오환도독 솔중왕, 관구검에게 항복 |
오환은 말을 타고 활쏘기를 잘했으며,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해진 거처가 없었다. 이들은 갈대로 만든 오두막을 집으로 삼았고, 입구는 모두 동쪽을 향하게 했다. 낮에는 짐승을 사냥하여 고기를 먹고 젖을 마셨으며, 털과 솜털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6] 젊은이를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를 천대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성품이 사납고 오만했다.[6]
3. 문화
병이 나면 쑥뜸을 뜨거나, 뜨겁게 달군 돌이나 흙으로 찜질을 했다. 또한 아픈 곳을 칼로 째 피를 내거나, 천지산천의 신에게 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침이나 약은 사용하지 않았다.[6]
전쟁에서 죽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며, 시신은 염습하여 관에 넣었다. 장례식 때는 노래하고 춤추며 망자를 보냈고, 개를 살찌게 길러 죽은 자의 영혼을 호위하여 적산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적산은 요동 서북쪽 수천 리에 있는 산으로, 중국인들이 죽으면 혼이 태산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것과 비슷하다.[6]
귀신을 공경하고 하늘, 땅, 해, 달, 별, 산천에 제사를 지냈으며, 용맹했던 대인에게도 소와 양을 바쳐 제사 지내고 제사가 끝나면 모두 불태웠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제사를 먼저 지냈다.[6]
오환족은 뻐꾸기의 울음소리를 기준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시기를 정했다. 이들은 백주(白酒)를 만들 수 있었지만 누룩은 만들지 못했고, 쌀은 중국에 의존했다. 대인은 활, 화살, 안장, 굴레 등을 만들고 쇠를 두드려 병기를 만들었으며, 가죽에 무늬와 수를 놓고 모직물을 짜는 기술이 있었다.[1]
오환의 법은 대인의 말을 어기거나 도둑질을 멈추지 않으면 사형에 처했다.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지면 마을끼리 보복을 했고, 보복이 멈추지 않으면 대인이 판결했다. 죄인은 소나 양을 바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부모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았다. 도망친 자는 대인에게 잡히면 마을에서 받아주지 않고 옹광 땅으로 쫓아냈다.[6]
3. 1. 혼인과 가정
오환은 결혼할 때에는 먼저 은밀히 정을 통해 여자를 빼앗아 간다. 반년 혹은 100일이 지난 후에 중매인을 보내 말, 소, 양을 선물로 하여 신부 맞이 의례를 행한다.[6] 사위는 아내를 따라 아내의 친정에 들어가 아내 집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아침마다 절을 하지만, 자신의 부모에게는 절을 하지 않는다.[6] 아내 집을 위해 2년간 하인 노릇을 하면 아내 쪽에서는 후한 선물을 하여 딸을 내보내는데, 이때의 주거와 물품은 모두 아내 집에서 마련한다.[6] 이로 인해 오환의 관습에서는 모든 일이 부인의 지시로 결정되지만, 전투에 관한 일만은 남자 스스로 결정한다.[6] 아버지와 아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마주보고 무릎을 꿇고 앉으며, 모두 머리를 깎고 있는데, 이것이 가볍고 좋은 듯하다.[6] 부인은 시집갈 때가 되어서야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여 가르마를 타고 땋아 머리(髻)를 만들고, 거기에 구결(句決: 모자의 일종)을 씌우며, 금이나 벽옥으로 장식한다.[6] 아버지나 형이 죽으면 그 남겨진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거나 형수(아내의 언니)로 삼는 레비라트 결혼을 한다.[6] 망부에게 남동생이 없어 데려갈 수 없는 과부는 자신의 아이에게 남편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은 백숙모(백부/숙부의 아내)의 첩이 된다. 그녀가 죽으면 원래 남편과 함께 장례를 치른다.[6]
3. 2. 산업
오환족은 기마 궁술에 능숙하여 말을 타고 다니며 활쏘기를 잘 했다. 이들은 물과 풀을 따라 유목 생활을 하였으므로 정해진 거처가 없었다. 이들은 빈약한 갈대 오두막을 집으로 삼았는데, 입구를 모두 동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낮에는 짐승을 사냥하여 고기를 먹고 젖을 마셨으며, 털과 솜털로 옷을 해 입었다.
오환족은 새와 짐승이 번식하는 시기를 알아차려 사계절을 구분하였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릴 때에는 뻐꾸기의 울음을 징후로 삼았다. 이들의 땅은 푸른 기장과 동장(東牆)을 기르기에 적합했는데, 동장은 쑥과 유사하고 열매는 아욱과 같으며 10월에 익는다. 오환족은 백주(白酒)를 만들 줄은 알았으나, 누룩은 만들 줄 몰랐다. 쌀은 늘 중국에 의존하였다.
오환의 부족장인 대인(大人)은 활, 화살, 안장, 굴레를 만들 수 있었고, 쇠를 두드려 병기를 만들었으며, 가죽에 무늬와 수를 놓고 모직물을 짰다.[1]
3. 3. 질병과 장례
시신을 안치하는 데에는 관을 사용한다. 죽은 직후에는 곡을 하지만, 장례식 때는 노래와 춤으로 죽은 자를 보낸다. 충분히 살찌운 개를 채색된 밧줄로 묶어, 죽은 자가 탔던 말이나 그 의복, 생전의 장식품과 함께 묶어 불을 질러 화장한다. 특히 그 개는 죽은 자의 신령(혼)을 보호하여 적산(赤山)까지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매장하는 날에는 밤이 되면 친족과 옛 친구들이 모여 둥글게 앉아 개와 말을 끌고 차례로 그 자리를 돈다. 노래하거나 곡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던져 주기도 한다. 죽은 자의 혼이 험한 곳을 곧게 지나가 악령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무사히 적산에 도착할 수 있도록 두 사람에게 주문을 외게 한다. 그것이 끝나면 개와 말을 죽여 의복과 함께 태운다. 그들은 귀신을 숭배하고, 천지(天地)와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천(山川)을 제사하며, 죽은 어른 중 무용(武勇)이 뛰어난 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소와 양을 바쳐 제사한다. 제사가 끝나면 바쳐진 물건은 모두 태워 버린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먼저 그 일부를 신에게 바친다.
3. 4. 형벌
오환의 형벌은 어른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도둑질을 멈추지 않는 자는 사형이었다. 살해 사건이 발생하면 부락 간 보복이 허용되었으나, 보복이 멈추지 않을 경우 어른에게 판결을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자는 소나 양을 내어 생명을 속죄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나 형을 죽인 경우에는 죄가 되지 않았다. 도망자가 어른에게 붙잡히면, 어느 부락도 받아주지 않고 옹광의 땅으로 내쫓았다. 옹광의 땅은 산이 없고, 사막과 물웅덩이, 풀과 나무만 자라며, 살무사가 많은 정령의 서남쪽, 오손의 동북쪽 지역으로, 이곳으로 쫓아내 고통을 주었다.
4. 주요 인물
이름 | 부족 | 주요 활동 | 비고 |
---|---|---|---|
학단 | 49년 (광무제 시대), 무리를 이끌고 낙양으로 가서 황제를 만나고 후왕으로 봉해짐. 요동속국, 요서, 우북평, 어양, 광양, 상곡, 대군, 안문, 태원, 삭방군에 무리가 분포. | ||
흠지분 | 어양 | 58년~75년 (영평 연간), 종인들을 이끌고 반란. 요동태수 채융에게 토벌됨. | |
무하 | 106년~125년 (안제 시대), 어양, 우북평, 안문에서 선비, 흉노와 연합하여 약탈. 대사농 하희에게 격퇴됨. | ||
융말외 | 후한에 귀부하여 도위 관직, 왕후 돌귀, 거연 등과 오환교위 경엽을 따라 선비를 공격. 솔중왕으로 봉해짐. | ||
구력거 | 요서 | 5천여 락을 이끌고 왕을 자칭, 장순과 함께 청주, 서주, 기주, 유주 등지에서 노략. | |
난루 | 상곡 | 9천여 락을 이끌고 왕을 자칭. | |
소복연 | 요동속국 | 천여 락을 이끌고 초왕을 자칭. | |
오연 | 우북평 | 8백여 락을 이끌고 한로왕을 자칭. | |
답돈 | 요서 | 구력거 사후 대인, 원소를 도움. 조조에게 패사. | |
누반 | 구력거의 아들. 장성 후 소복연에 의해 선우로 추대. | ||
속부환 | 답돈 사후 누반, 오연 등과 요동으로 도주, 참수됨. | ||
구루돈 | 우북평 | 원상, 답돈 등과 요서로 도주, 관구검에게 항복. | |
호류 | 요서 | 요서 오환도독 솔중왕, 관구검에게 항복. | |
어질거 | 117년, 한과 함께 선비의 연휴를 토벌. | ||
아견 | 140년, 남흉노와 함께 반란. | ||
강거 | 140년, 남흉노와 함께 반란. | ||
나루 | 상곡 | 선우 대행. | |
보부로 | 대군 | 선우 대행, 216년 조공. | |
능신저 | 대군, 우북평 | 218년, 가비능과 연합하여 반란. | |
수무로 | 대군 | 가비능의 부하. | |
골진 | 대군 | 위의 국경 지대를 침공, 전예에게 참살됨. |
5. 언어
앤드루 시머넥(Andrew Shimunek, 2017)은 오환어(또는 시머넥의 재구성에 따르면 "아와르"/"아바르")를 가장 분기된 파라-몽골어로 분류한다.[4]
오환족의 조상은 동호라고 『삼국지』나 『후한서』 등 중국 사서가 전하고 있다. 그러나, 동호의 언어 계통에 관해서는 퉁구스어설, 몽골어설, 퉁구스어와 몽골어의 혼합설 등 명확하지 않다. 또한, 오환과 동족으로 여겨지는 선비에 대해서도 몽골설, 튀르크어설, 몽골어와 튀르크어의 혼종설 등 여러 설이 있다.
"오환"이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그중 3가지 설이 유력하게 여겨졌다.
- 백조고길의 ukhagan(몽골어: 지식·총명)설: 백조는 북방 민족의 존칭으로 "총명"의 의미를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흉노에서는 태자를 "좌도기왕"이라고 하고, "도기(토기)"는 "현명(총명)"의 의미이며, 돌궐, 회흘의 군주 호칭 가한의 존칭 "비가 가한(빌게가간)"의 "비가(빌게, bilgä)"는 "현명(총명)"의 의미이다. 몽골의 존호에 "설선(tsetsen)"이 있는 것도 "총명"의 의미라고 보고, "오환(ukhagan)"은 동호의 왕이 부여한 칭호 중 하나라고 했다.
- 풍가승의 ubusun(몽골어: 풀)설: 풍가는 먼저 오환(wūhuán, 우환)과 우문(yŭwén, 우문)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자치통감』 권81 태강 6년 주에서 인용한 『하씨성원』에서 "우문 씨는 염제의 후손이며, 그 후, 풀의 효능을 시험했기 때문에, 선비어로 풀을 의미하는 '기분(qífén/sìfén, 시펀)'에서, 기분 씨라고 칭하고, 그 후 와전되어 '우문 씨'가 되었다"라고 한 점을 근거로, 장성 부근의 몽골어에서 풀을 의미하는 ebesu/ebesun, 카르카(할하)어에서 풀을 의미하는 ubusu/ubusun, 부랴트어에서 풀을 의미하는 öbuhim/öböhon에서, "오환(wūhuán)"의 어원은 "풀(ubusun)"이라고 했다.
- 정겸의 ulan(몽골어: 붉은색)설: 정겸은 오환은 오환산이라는 산의 이름에서 유래한 족명이라는 사서의 기재를 준수하여, 몽골어로 붉은색을 우란(ulan)이라고 하고, 『왕침위서』에 나오는 적산은 ulan 산의 의역이며, 오환산은 그 음역이며 오환은 "붉은색"의 의미라고 했다.
이 3가지 설 중에서는 정겸의 ulan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만, 이를 입증할 사료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3가지 설 외에 『북아시아사 연구』를 저술한 내전음풍은 "오환=귀순래강자"라는 설을 제창했다.
- 내전음풍의 귀순래강자설: 내전은 3가지 관점에서 "오환"은 "귀순"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첫째, 흉노의 도기선우가 호한야선우에게 패하여 자살하고, 그 아들인 왕정이 한에 투항하여 신성후에 봉해졌을 때, 『한서』 경무소선원성공신표 제5에서 도기선우를 "흉노 오환 도기선우"라고 기록한 것은, 도기선우의 아들인 왕정이 한에 귀순했기 때문에 "흉노의 귀순한 도기선우"라는 의미로 왕정 등이 부친을 추칭한 것이 아닌가. 둘째, 왕망의 시건국 2년(10년) 9월, 신의 서역 무기교위사 진량과 종대가 한 대장군을 칭하고, 무기교위사 조호(조고)를 살해하고 흉노에 귀순했을 때, 오주류약제선우는 그들을 크게 환영하여 선우정(궁중)에 머무르게 하고 "오환도장군"의 칭호를 수여했다고 『한서』 흉노전, 왕망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귀의래강의 대장군"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셋째, 선비 대왕의 탁발십익건이 339년에 대국의 여러 제도를 세웠을 때, 『위서』 관씨지에서 "그 여러 방면에서 귀부한 자들을 통틀어 오환이라고 하고, 각기 많고 적음에 따라 추서장이라고 칭한다"라고 한 것을, 오환=귀순래부자의 거증으로 보고, 이들 3가지 명증을 통해 "오환"은 동호인이 흉노에 귀부했기 때문에 "귀순"이라는 의미의 "오환"이라는 족명을 수여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근대 몽골어에서 투하 노예를 unagan이라고 하며,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또한, Edwin G. Pulleyblank는 고대 중국인들은 외국어의 "a"를 종종 "오"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 음성상으로는 오환의 고음은 ah-hwar일 가능성이 강하며, 오환은 오히려 후세 유럽에 침입한 아시아 유목 민족 Awar(아바르족)를 표기한 것이 아닌가 하고 보고 있다. 만약 오환이 Awar를 표기한 것이고, Awar가 몽골어의 abarga(뱀·미동)와 연결된다면, 오환족은 튀르크·몽골족에 보편적으로 보이는 늑대를 토템 짐승으로 하지만, 그 늑대를 벌레(뱀)라는 은어로 불렀던 유연족의 조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오환의 원래 음과 원래 의미를 결정적으로 단정하기 위해서는, 향후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참조
[1]
논문
Phonological Notes on Hàn Period Transcriptions of Foreign Names and Words
Studies in Chinese and Sino-Tibetan Linguistics: Dialect, Phonology, Transcription and Text
[2]
서적
The Chinese and Their Neighbors in Prehistoric and Early Historic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
간행물
Heterarchy and hierarchy among the ancient Mongolian nomads
https://cyberleninka[...]
[4]
서적
Languages of Ancient Southern Mongolia and North China: a Historical-Comparative Study of the Serbi or Xianbei Branch of the Serbi-Mongolic Language Family, with an Analysis of Northeastern Frontier Chinese and Old Tibetan Phonology
Harrassowitz Verlag
[5]
서적
《魏晋南北朝史论丛》
Commercial Press
2010-12-01
[6]
문서
관(冠)의 일종으로, 걸어다니면 흔들리는 장식으로 만들어 머리에 쓰는 관(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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