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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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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짐 볼저는 1935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정치인이다. 그는 1972년 국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998년 은퇴할 때까지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86년부터 1997년까지 국민당 대표를 역임했다. 볼저는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뉴질랜드 총리를 지냈으며, 재임 기간 중 경제 개혁, 선거 제도 개편, 마오리족 정책 등을 추진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주미 뉴질랜드 대사, 뉴질랜드 우체국 사장, 키위뱅크 사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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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볼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8년의 볼저
2018년의 볼저
존칭 접두사더 라이트 아너러블
이름짐 볼저
출생 이름제임스 브렌던 볼저
출생일1935년 5월 31일
출생지오푸나케, 뉴질랜드
자녀9명
부모대니얼 볼저
세실리아 도일
정당국민당
직업정치인, 사업가
뉴질랜드 수상
대수35대
임기 시작1990년 11월 2일
임기 종료1997년 12월 8일
군주엘리자베스 2세
총독폴 리브스
캐서린 티자드
마이클 하디 보이스
이전 수상마이크 무어
다음 수상제니 시플리
부총리돈 매키넌
윈스턴 피터스
뉴질랜드 국민당 대표
대수7대
임기 시작1986년 3월 26일
임기 종료1997년 12월 8일
부대표조지 게어
돈 매키넌
이전 대표짐 맥레이
다음 대표제니 시플리
야당 대표
대수25대
임기 시작1986년 3월 26일
임기 종료1990년 11월 2일
총리데이비드 랭
제프리 파머
마이크 무어
부대표조지 게어
돈 매키넌
이전 대표짐 맥레이
다음 대표마이크 무어
장관 경력
직책제27대 노동부 장관
임기 시작1978년 12월 13일
임기 종료1984년 7월 26일
총리로버트 멀둔
이전 장관피터 고든
다음 장관스탠 로저
직책제39대 이민부 장관
임기 시작1978년 12월 13일
임기 종료1981년 2월 12일
총리로버트 멀둔
이전 장관프랭크 길
다음 장관오지 말콤
직책제1대 수산부 장관
임기 시작1977년 3월 8일
임기 종료1978년 12월 13일
총리로버트 멀둔
다음 장관던컨 맥킨타이어
국회의원
지역구킹 컨트리
의회뉴질랜드
임기 시작1972년 11월 25일
임기 종료1998년 4월 9일
다음 의원셰인 아던

2. 어린 시절

볼저는 1935년 타라나키의 오푸나케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 출신으로, 1930년 아일랜드 웨크스퍼드주 고리에서 이민 온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어린 시절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3] 15세에 오푸나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낙농장에서 일했다.[4]

1962년 라호투 근처에 자신의 농장을 구입했고, 연방 농민에 적극 참여하여 1962년 지부 의장, 1970년 하위 지방 의장, 1971년 와이카토 지방 부회장을 역임했다. 와이카토와 킹컨트리 농업 자문 위원회 회원이었다.

1963년 조안 리델과 결혼했고, 2년 후 테 쿠이티에 있는 자신의 양과 쇠고기 농장으로 이사했다.[1] 이 기간 동안 지역 농민 정치에 참여했으며, 국민당 에그몬트 지부와 테 쿠이티 지부에서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 재무장관 로버트 멀둔과 함께 지역 농민들의 어려움을 확인하기도 했다.[1]

2. 1. 가계 및 출생

짐 볼저는 1935년 타라나키 오푸나케에서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1930년 아일랜드 웨크스퍼드주 고리에서 이민 온 대니얼과 세실리아 볼저였다. 볼저는 다섯 자녀 중 한 명이었으며,[1] 어린 시절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회고했다.[3]

15세에 오푸나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족 낙농장에서 일했으며,[4] 1963년 조안 리델과 결혼했다. 2년 후, 볼저 부부는 테 쿠이티에 자신의 양과 쇠고기 농장을 마련하여 이주했다.[1]

2. 2. 학창 시절 및 농부 생활

그는 아일랜드계로 타라나키에서 태어났다. 15세가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 농장 일을 도왔다.[1]

볼저는 1935년 타라나키의 오푸나케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30년 고리, 웨크스퍼드주에서 이민 온 대니얼과 세실리아(옛 성은 도일) 볼저 사이의 다섯 자녀 중 한 명이었다.[1] 그는 어린 시절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지배되었다고 말했다.[3] 15세에 오푸나케 고등학교를 떠나 가족의 낙농장에서 일했다.[4] 1962년 라호투 근처에 자신의 농장을 구입했다. 연방 농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62년 지부 의장, 1970년 하위 지방 의장, 1971년 와이카토 지방 부회장을 역임했다. 와이카토와 킹컨트리 농업 자문 위원회의 회원이었다.

1963년 조안 리델과 결혼했고, 2년 후 테 쿠이티에 있는 자신의 양과 쇠고기 농장으로 이사했다.[1] 이 기간 동안 지역 농민 정치에 참여했다. 국민당의 에그몬트 지부에 가입했고, 나중에는 테 쿠이티 지부의 임원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당시 재무장관 로버트 멀둔과 함께 그 지역 농민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동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볼저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멀둔의 적대적인 태도에 익숙해졌다.[1]

3. 정치 경력

1972년 뉴질랜드 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치 생활을 시작한 짐 볼저는 곧바로 총선에 출마하여 킹 컨트리(King Country, 후일 타라나키-킹 컨트리(Taranaki-King Country)) 지역구 의원 후보로 선출되었고, 당선까지 되었다. 1998년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이 지역구에서 9선 의원을 역임했다.

1975년 로버트 멀둔 수상의 국민당 정부에서 초대 수산부 장관 및 농업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다. 1984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패배한 후, 볼저는 짐 맥레이와 함께 로버트 멀둔에게 당수직에 도전했다. 맥레이는 당수가 되었지만, 볼저는 부당수로 선출되었다. 1986년 볼저는 다시 당수직에 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87년 총선에서 데이비드 랭이 이끄는 노동당에게 패배했지만, 1990년 총선에서는 뉴질랜드 선거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며 국민당을 집권 여당으로 이끌었고, 짐 볼저는 총리로 임명되어 제4차 국민당 정부를 시작하였다.

1996년 총선에서 국민당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뉴질랜드 제일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윈스턴 피터스는 국민당 정책에 반대했지만, 연립 정부에 참여하여 부총리 겸 수입 장관을 맡았다. 1997년 짐 볼저가 해외 순방 중이던 때에 제니 쉴리를 중심으로 한 당내 세력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했고, 귀국 후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제니 쉴리가 후임 총리로 취임했다.

3. 1. 의회 의원(1972-1998)

1972년, 짐 볼저는 뉴질랜드 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곧바로 총선에 출마하여 킹 컨츄리(King Country, 후일 타라나키-킹 컨츄리(Taranaki-King Country)) 지역구 의원 후보로 선출되었고, 당선까지 되었다. 1998년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이 지역구에서 무려 9선 의원을 역임했다.

볼저의 의정 활동 기간은 다음과 같다:

임기시작 년도종료 년도정당선거구
37대1972년1975년뉴질랜드 국민당킹컨트리
38대1975년1978년뉴질랜드 국민당킹컨트리
39대1978년1981년뉴질랜드 국민당킹컨트리
40대1981년1984년뉴질랜드 국민당킹컨트리
41대1984년1987년뉴질랜드 국민당킹컨트리
42대1987년1990년뉴질랜드 국민당킹컨트리
43대1990년1993년뉴질랜드 국민당킹컨트리
44대1993년1996년뉴질랜드 국민당킹컨트리
45대1996년1998년뉴질랜드 국민당타라나키-킹컨트리


3. 1. 1. 로버트 멀둔과의 만남

1972년 짐 볼저는 북섬 서부 시골 지역의 킹컨트리 선거구에서 뉴질랜드 국가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 선거구는 전통적으로 국가당의 텃밭이었고, 볼저는 쉽게 당선되었다.[5] 1974년, 새로 취임한 당수 로버트 멀둔은 볼저를 국가당의 농촌 업무 대변인으로 임명했다.[5]

1975년 제3차 국가당 정부가 출범하면서 볼저는 농림수산부 장관과 마오리족 담당 장관의 국회 차관으로 임명되었다.[6] 1977년 멀둔은 볼저를 내각으로 승진시켜 어업부 장관 겸 농업부 차관으로 임명했다. 1978년 총선 이후에는 노동부 장관과 이민부 장관을 겸임하게 되었다.[6]

1980년대 후반, 볼저는 멀둔을 당수직에서 물러나게 하고자 했던 '대령들' (데릭 퀴글리, 짐 맥레이, 조지 가이어 등)의 주요 인물이었다.[3] 이들은 멀둔보다 경제적으로 더 자유주의적이고 전통적인 국가당 철학에 부합하는 부당수 브라이언 탈보이스를 당수로 추대하려 했다. '대령들의 쿠데타'로 알려진 이 시도는 멀둔이 해외에 있는 동안 진행되었으나, 탈보이스가 공개적인 도전을 꺼리면서 실패했고, 멀둔은 귀국 후 당수직을 유지했다.

1984년 총선에서 국가당이 패배한 후, 볼저는 노동 및 고용 부문 야당 간부를 맡았다.[7] 볼저와 부당수 짐 맥레이는 모두 멀둔에게 당수직을 도전했고, 맥레이가 당수가 되었지만 볼저는 부당수(그리고 야당 부당수)로 선출되었다.[8] 맥레이는 볼저를 무역 및 산업 부문 야당 간부로 임명했다가 나중에 농업 부문 야당 간부로 자리를 옮기게 했다.[9]

3. 1. 2. 제3차 국민당 정부(1975-1984)

1975년 로버트 멀둔 수상의 제3차 국가당 정부에서 초대 수산부 장관으로 내정되었고, 이후 농업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다.[6] 같은 해 제3차 국가당 정부가 출범했을 때 볼저는 농림수산부 장관과 마오리족 담당 장관의 국회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77년 멀둔은 그를 내각으로 승진시켜 어업부 장관 겸 농업부 차관으로 임명했다. 1978년 선거 이후 그는 노동부 장관과 이민부 장관이 되었다.[6]

1980년 후반 볼저는 멀둔을 당수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당이 전통적인 국가당 정책으로 복귀하도록 하려고 시도한 '대령들'(데릭 퀴글리, 짐 맥레이, 조지 가이어 등)의 주요 멤버였다.[3] '대령들의 쿠데타'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이들은 멀둔보다 경제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전통적인 국가당 철학과 조화를 이루는 그의 부당수 브라이언 탈보이스를 대신하여 멀둔을 대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탈보이스는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것을 꺼렸고, 멀둔이 돌아와 당수직을 유지함에 따라 이 시도는 실패했다.

3. 1. 3. '대령들의 쿠데타'(1980)

1980년 후반, 볼저는 로버트 멀둔을 당수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당이 전통적인 국가당 정책으로 복귀하도록 하려고 시도한 '대령들'(데릭 퀴글리, 짐 맥레이, 조지 가이어 등)의 주요 일원이었다.[3] '대령들의 쿠데타'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이들은 멀둔보다 경제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전통적인 국가당 철학과 조화를 이루는 그의 부당수 브라이언 탈보이스를 대신하여 멀둔을 대체하려고 했다. 대령들은 멀둔이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그를 상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탈보이스는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것을 꺼렸고, 멀둔이 돌아와서 당수직을 유지함에 따라 이 시도는 실패했다.

3. 1. 4. 야당 부당수(1984-1986)

1984년 뉴질랜드 총선에서 국민당이 패배하여 야당이 된 후, 볼저는 당시 국민당 부당수였던 짐 맥레이와 함께 전직 수상이자 당시 당수인 로버트 멀둔에게 당수직을 놓고 도전했다. 맥레이는 멀둔을 물리치고 당수가 되었지만, 볼저는 경선에서 패했다. 하지만 볼저는 부당수(그리고 야당 부당수)로 선출되었다.[7] 맥레이는 볼저를 무역 및 산업 부문 야당 간부로 임명했다가 나중에 농업 부문 야당 간부로 전환했다.[8][9]

3. 2. 국민당 당수(1986-1997)

1984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패배한 후, 짐 볼저는 당시 국민당 부당수였던 짐 맥네이와 함께 전직 총리이자 당시 당수였던 로버트 멀둔에게 당수직에 도전했다. 짐 맥네이는 경선에서 승리하여 당수가 되었지만, 짐 볼저는 패배했다. 그러나 1986년, 짐 볼저는 다시 도전하여 국민당 당수가 되었다.[10]

1987년 총선에서 짐 볼저는 데이비드 랭이 이끄는 노동당에게 패배했지만, 1990년 총선에서는 뉴질랜드 선거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며 국민당을 집권 여당으로 이끌었다. 이로써 짐 볼저는 총리로 임명되었고, 제4차 국민당 정부가 시작되었다.[12]

1996년 총선에서 국민당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뉴질랜드 제일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뉴질랜드 제일당의 당수 윈스턴 피터스는 국민당의 정책에 반대했지만, 연립 정부에 참여하여 부총리 겸 수입 장관을 맡았다. 이러한 연립 정부 구성은 국민당 내부에서 많은 반발을 샀고, 결국 1997년 짐 볼저가 해외 순방 중이던 때에 당시 교통부 장관이었던 제니 쉴리를 중심으로 한 당내 세력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했다. 짐 볼저는 귀국 후 당내 반대 세력에 의해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제니 쉴리가 후임 총리로 취임했다.

3. 2. 1. 야당 당수(1986-1990)

1986년, 볼저는 맥레이의 지도력에 성공적으로 도전했다.[10] 초기 볼저는 법과 질서를 중시하는 접근 방식을 추구하며, 노동당의 "무법 상태" 척결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사형제 재도입에 대한 국민투표를 제안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짐 볼저는 인기 있는 데이비드 랭과 1987년 뉴질랜드 총선에서 맞붙었지만, 랭의 인기에 미치지 못했다. 랭은 볼저를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위를 마사지하는 순회 마사지사"라고 묘사했다.[11] 볼저 지휘하의 국가당은 노동당 정부의 로저노믹스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이용하여 1990년 뉴질랜드 총선에서 국가당 역사상 최대 다수당(그리고 뉴질랜드 역사상 최대 다수당)을 차지했다. 볼저는 55세의 나이로 총리가 되었다.[12]

3. 3. 뉴질랜드 총리(1990-1997)

짐 볼저는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뉴질랜드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경제, 외교, 선거 제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을 추진했다.

볼저 정부는 출범 직후 뉴질랜드 은행 구제 금융을 실시해야 했다.[13] 첫 예산에서는 "모든 예산의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보건 및 복지 분야의 공공 지출을 삭감했다.[14] 또한 1991년 고용 계약법을 통해 노사 관계 합의를 해체하여 노조 가입률 감소를 초래했다.[17]

선거 제도 개혁에도 관여하여 국민투표를 통해 혼합-비례 대표제(MMP) 도입을 이끌었다.[12] 1993년 총선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국민당이 승리하여 정권을 유지했다.[21]

1995년에는 케이브 크릭 재해로 인해 보존부 관리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21] 또한 프랑스의 핵실험에 반대하며 뉴질랜드 함정을 파견하기도 했다.

1996년 총선에서는 뉴질랜드제일당과의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4] 이 과정에서 윈스턴 피터스에게 부총리 겸 재무장관 직책을 부여하는 등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

볼저 총리 시대에는 로저노믹스(Rogernomics)를 계승한 경제 개혁이 추진되었으며, 루스 리처드슨(Ruth Richardson), 돈 매키논(Don McKinnon), 빌 버치(Bill Birch) 등이 주요 직책을 맡았다.

3. 3. 1. 제1기(1990-1993)

그는 여러 정책들을 검토 및 이행하였으며, 특히 경제, 외교 등의 정책을 이행하였다. 또한 선거 투표 방식을 개편하였고, 뉴질랜드가 영연방 국가에서 공화국으로 탈바꿈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 관련 정책도 이행하였다. 이러한 획기적이고 국민들의 호응을 받은 정책은 1993년 총선과 1996년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뉴질랜드 국민당이 계속 집권 여당으로, 그가 수상직을 재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13][14][15][16][17][18][12][19][20] 1993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총리 취임 3일 후, 볼저 정부는 당시 뉴질랜드 최대 은행이었던 뉴질랜드 은행을 구제해야 했다. 구제 비용은 3.8억달러였지만, 예산을 수정한 후 정부는 7.4억달러를 차입해야 했다.[13] 이는 볼저 정부의 방향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의 총리직 첫 예산은 "모든 예산의 어머니"라고 불렸다.[14] 볼저의 재무 장관인 루스 리처드슨은 공공 지출, 특히 보건 및 복지 분야에서 획기적인 감축을 단행했다. 실업 수당은 주당 14USD 삭감되었고, 질병 수당은 27.04USD 삭감되었으며, 가족 수당은 25USD에서 27USD 삭감되었고, 가족 수당에 대한 보편적 지급은 완전히 폐지되었다.[15] 리처드슨 장관은 또한 이전에는 정부가 부담하던 무료 서비스였던 병원과 학교에서 많은 사용자 부담 제도를 도입했다.[16] 첫 예산은 특히 연금에 대한 세금 할증을 없애겠다는 국가당의 공약과 고등 교육 수업료 폐지 공약을 철회했다.[14]

또 다른 주요 논란이 된 법안은 1894년 이후 지속되어 온 노사 관계 합의를 사실상 해체한 1991년 고용 계약법이었다. 이 법 개정의 즉각적인 결과로 이 법 통과 후 10년 동안 노조 가입률이 급격히 감소했다.[17] 그의 정부는 또한 1991년 건축법을 도입했는데, 이는 뉴질랜드의 이후 누수 주택 문제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인으로 일부 사람들에게 여겨진다.[18]

볼저는 선거 제도 개혁에 반대했지만,[12] 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가 영국식 '선착순' 선거 제도에서 비례 대표제로 바꿔야 하는지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1992년 뉴질랜드 국민들은 혼합-비례 대표제(MMP)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데 투표했다. 이는 1993년 총선과 함께 실시된 구속력 있는 국민투표에서 확인되었으며, 국가당이 승리했다. 볼저는 원래 양원제 시스템으로의 복귀를 제안했는데, 상원은 단기이전투표로 선출된다.[12] 하지만 선거 제도 개혁에 대한 지지에 직면하여 이를 철회했다.[19] 그의 실용주의와 권위 의식으로 그는 "위대한 선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0]

수상 취임 후에도 기본 노선은 롱기 정권의 경제 정책인 로저노믹스(Rogernomics)를 계승하여 뉴질랜드의 경제·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정권의 중요 직책인 재무장관에는 여성 정치인 루스 리처드슨(Ruth Richardson)을, 부수상 겸 외무장관에는 돈 매키논(Don McKinnon)을 임명했다. 노동당이 내세운 핵무기 반대 원칙도 계승하여 노동당과의 협력에도 나섰다. 볼저 정권은 1993년 총선에서도 재선되었고, 롱기 정권의 경제 개혁으로 인한 타격을 복구하는 한편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추진하는 등 다음 경제 개혁도 실시했다.

3. 3. 2. 제2기(1993-1996)

1993년 뉴질랜드 총선에서 국민당은 간신히 정권을 유지했다. 이는 경기가 약간 회복되고 야당이 세 개의 경쟁 정당으로 분열된 덕분이었다. 짐 볼저 자신은 편안한 승리를 예상했고, 선거 결과에 "여론 조사는 엿 먹어라"라고 외쳤다. 국민당의 전례 없는 18석의 압승은 사실상 사라졌고, 뉴질랜드는 1931년 이후 처음으로 선거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교수형 선거구)에 직면했다. 국민당은 정부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50석에서 한 석이 부족했다.[21] 며칠 후 최종 특별 투표 결과, 국민당은 선거일에 잃었던 와이타키 선거구를 유지했고, 노동당으로부터 획득한 유일한 선거구인 웰링턴 중앙 선거구도 유지하여 1석의 과반수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회에서 실질적인 과반수를 확보하기 위해 야당 의원석에서 의장(노동당의 피터 탭셀(Peter Tapsell))을 선출해야 했다.[21]

이 선거 결과 이후 볼저는 다른 정당과 협력해야 할 필요성을 표명하고, 루스 리처드슨(Ruth Richardson)을 강등시키고 더 온건한 인물로 여겨지는 빌 버치(Bill Birch)를 임명했다. 버치 재임 기간 동안 보건[21] 및 교육과 같은 핵심 분야에 대한 지출이 증가했다. 그의 정부는 1994년 재정 책임법(Fiscal Responsibility Act 1994)을 통과시켰다. 1994년 답변 연설 토론에서 볼저는 뉴질랜드 공화국을 옹호했지만, 자신의 견해가 아일랜드계 유산과 관련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22]

1995년 4월, 케이브 크릭(Cave Creek) 재해가 경치 감상대가 붕괴되어 14명이 사망하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 감상대는 1994년 뉴질랜드 보존부(Department of Conservation, DOC)에 의해 설치되었고, 이후 조사에서 감상대 건설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건설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DOC가 붕괴에 대한 책임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소는 없었지만(국가는 자체적으로 기소할 수 없기 때문) 피해자 유족들에게 260만달러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볼저는 처음에 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를 비판하며, 감상대가 "본질적으로 고정시키는 데 필요한 약 20USD어치의 볼트가 부족했기 때문에" 붕괴했다고 주장했다.[21] 보존부 장관 데니스 마셜(Denis Marshall)은 부서 관리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마셜을 비난했지만, 보존지역 관리에 대한 정부 정책 전체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도 있었다. 마셜은 결국 사고 발생 1년이 조금 지난 1996년 5월 사임했다. 새로운 장관 닉 스미스(Nick Smith)가 임명되었고, 국가공무원위원회(Public Service Commission)에 의해 부서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실시되었다.

볼저의 두 번째 임기에는 프랑스가 무루로아(Moruroa)에서 핵실험을 재개하여 뉴질랜드와 다른 태평양 국가들의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볼저는 뉴질랜드 요트 선수들의 반핵 시위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의 정부는 함정 HMNZS 투이(Tui)를 파견하여 선단을 지원했다.

뉴질랜드 최고 항소 법원으로서의 사법위원회(Judicial Committee of the Privy Council)의 지위를 종식시키려는 제안은 볼저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의회 승인을 얻지 못했다(그러나 헬렌 클락의 5대 노동당 정부는 2003년 뉴질랜드 대법원(Supreme Court of New Zealand)을 설립하면서 항소권을 대체했다). 볼저 정부는 1996년 영국 훈장(Orders, decorations, and medals of the United Kingdom) 수여를 중단하고 뉴질랜드 훈장 제도(New Zealand Honours System)를 도입했다. 2007년 "볼저 시대"에 관한 회의에서 볼저는 뉴질랜드 공화국이 되는 문제에 대해 여왕과 이야기한 것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왕 폐하께 뉴질랜드가 언젠가는 자체적으로 국가원수를 선출할 것이라는 제 견해에 대해 한두 번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합리적인 방식으로 그 문제를 논의했고, 그녀는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으며 제 목을 베지도 않았습니다."[23] 새로운 MMP 환경에서 일부 국민당 의원들은 1995년 중반 새로운 정당인 유나이티드 뉴질랜드(United New Zealand)로 이탈했고, 다른 분파 정당들이 등장했다.

수상 취임 후에도 기본 노선은 롱기 정권의 경제 정책인 로저노믹스(Rogernomics)를 계승하여 뉴질랜드의 경제·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정권의 중요 직책인 재무장관에는 루스 리처드슨(Ruth Richardson)을, 부수상 겸 외무장관에는 돈 매키논(Don McKinnon)을 임명했다. 노동당이 내세운 핵무기 반대 원칙도 계승하여 노동당과의 협력에도 나섰다. 볼저 정권은 1993년 총선에서 재선되었고, 롱기 정권의 경제 개혁으로 인한 타격을 복구하는 한편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3. 3. 3. 제3기(1996-1997)

1996년 선거에서 윈스턴 피터스가 이끄는 뉴질랜드제일당이 권력의 균형을 잡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볼저 정부는 연립 정부 협상이 시작되는 동안 임시 정부 역할을 유지했다. 국가당이 여전히 가장 큰 정당이었지만, 볼거와 헬렌 클라크가 이끄는 노동당 모두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다. 어느 정당도 뉴질랜드제일당의 지지 없이는 정부를 운영할 수 없었기에, 피터스는 사실상 차기 총리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1996년 12월, 피터스는 국가당과 연정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볼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연정 협정으로 피터스는 부총리 겸 재무장관이 되었다. 재무장관 직책은 피터스를 위해 특별히 신설되었으며, 기존 재무부 장관직보다 상위 직책이었다. 볼거는 또한 정책상의 양보를 했고, 피터스에게 뉴질랜드제일당에서 장관을 선출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는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에서 소규모 연정 파트너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볼거가 1991년 안락사에 대한 피터스의 반대로 그를 내각에서 해임했기 때문에, 볼거와 피터스가 함께 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4]

4. 정계 은퇴 이후

1997년, 제니 시플리가 짐 볼저에게 경선 도전을 신청하였으나, 당시 해외에 있던 볼저는 귀국 후 지지 부족을 깨닫고 12월 8일 사임하였다.[24] 1998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정계 은퇴 이후 주미뉴질랜드대사직을 맡았고, 뉴질랜드 우체국(New Zealand Post) 사장, 키위뱅크(Kiwi Bank) 사장직을 역임하였다.[24] 2007년에는 와이카토 대학교(Waikato University) 총장으로 선임되었다.[26] 또한 자신이 이끌던 국민당 정부에서 민영화했지만 노동당 정부가 다시 공영화시킨 키위레일(KiwiRail) 사장으로 임명되었다.[27] 볼저는 이에 대해 "내 삶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28]

2018년 6월 5일, 볼저는 노동당 정부의 공정 임금 협약 실무 그룹장으로 임명되었다.[32] 2022년 현재 볼저는 북섬에 있는 보호지역인 테 우레웨라(Te Urewera) 이사회 이사이다.[33]

볼저는 뉴질랜드 라디오(Radio New Zealand)의 가이언 에스피너(Guyon Espiner)와의 인터뷰에서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또한 노동조합의 권력이 부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29] 그는 2021년 현대 국가당이 자본주의를 재구상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사회적 불평등이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며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지구를 파괴하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31]

5. 사상 및 평가

짐 볼저는 총리 취임 후에도 로저노믹스(Rogernomics)를 계승하여 뉴질랜드의 경제·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루스 리처드슨(Ruth Richardson)을 재무장관에, 돈 매키논(Don McKinnon)을 부수상 겸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노동당의 핵무기 반대 원칙을 계승하며 노동당과의 협력에도 나섰다. 1993년 총선에서 재선된 볼저 정권은 경제 개혁으로 인한 타격을 복구하고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5. 1. 중도 진보적 관점

볼저는 뉴질랜드 라디오(Radio New Zealand)의 가이언 에스피너(Guyon Espiner)와의 인터뷰에서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으며, 노동조합의 권력이 부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29] 일각에서는 이를 이전의 자유시장 개혁에 대한 그의 고집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30] 2021년, 볼저는 현대 국가당이 자본주의를 재구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분열을 야기하고 있으며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지구를 파괴하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31]

2018년 6월 5일, 볼저는 노동당 정부의 공정 임금 협약 실무 그룹장으로 임명되어, 그 해 말까지 업계 전반의 공정 임금 협약 설계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임무를 맡았다.[32]

5. 2. 자유 시장 경제 비판

뉴질랜드 라디오(Radio New Zealand)의 가이언 에스피너(Guyon Espiner)와의 인터뷰에서 볼저는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으며, 노동조합의 권력이 부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29] 일각에서는 이를 이전의 자유시장 개혁에 대한 그의 고집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30] 그는 2021년 현대 국가당이 자본주의를 재구상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사회적 불평등이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며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지구를 파괴하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31]

5. 3. 종교

볼저와 그의 아내 조앤은 로마 가톨릭 신자이며, 볼저 자신은 종교적이지만 "심오하게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3] 그는 의회 양심 투표에서 낙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반대표를 던졌다.[37] 또한 콜레기움 인터내셔널 회원이다.[38]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72년 선거하원의원 (킹 컨츄리 선거구)37대뉴질랜드 국민당48.0%7,107표1위
킹 컨츄리 하원의원 당선
1975년 선거하원의원 (킹 컨츄리 선거구)38대뉴질랜드 국민당56.1%9,180표1위
1978년 선거하원의원 (킹 컨츄리 선거구)39대뉴질랜드 국민당44.6%6,804표1위
1981년 선거하원의원 (킹 컨츄리 선거구)40대뉴질랜드 국민당49.1%7,937표1위
1984년 선거하원의원 (킹 컨츄리 선거구)41대뉴질랜드 국민당55.1%10,040표1위
1987년 선거하원의원 (킹 컨츄리 선거구)42대뉴질랜드 국민당64.2%10,942표1위
1990년 선거하원의원 (킹 컨츄리 선거구)43대뉴질랜드 국민당64.4%10,406표1위
1993년 선거하원의원 (킹 컨츄리 선거구)44대뉴질랜드 국민당51.8%8,396표1위
1996년 선거하원의원 (타라나키 킹 컨츄리 선거구)45대뉴질랜드 국민당54.0%14,934표1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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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Craanford native, Cecilia (104) passes away in New Zealand http://www.enniscort[...] 2006-04-00
[3] 뉴스 The Bolger challenge 1985-12-16
[4] 웹사이트 Jim Bolger biography http://www.michaelba[...] 1997-12-00
[5] 뉴스 Muldoon names Spokesmen 1974-07-11
[6] 웹사이트 Rt Hon Jim Bolger http://executive.gov[...] New Zealand Government
[7] 뉴스 Line-up For Opposition 1984-07-28
[8] 뉴스 National shadow cabinet named 1984-11-30
[9] 뉴스 Muldoon main loser in Nat line-up 1986-02-11
[10] 학술지 Law and Order and the 1987 New Zealand Election 1988-12-00
[11] 뉴스 NZ politicians' best and worst insults https://www.newshub.[...]
[12] 웹사이트 NZ History online: Biographies – Jim Bolger http://www.nzhistory[...] Ministry for Culture and Heritage 201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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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사이트 Revolution (part four) https://www.youtube.[...]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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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Bolger: A view from the top – my seven years as Prime Minister Vi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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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웹사이트 Rt Hon. James Bolger Bio http://usnzcouncil.o[...] New Zealand Council
[25] 웹사이트 Finding truth in shades of grey http://www.stuff.co.[...] 2011-09-14
[26] 웹사이트 The University of Waikato Annual Report 2007 https://www.waikato.[...] University of Waik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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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뉴스 Former prime minister Jim Bolger denounces capitalism, says National Party 'disappointing' https://www.nzherald[...] 2021-11-28
[32] 뉴스 Workplace shake up in Government's sights – Jim Bolger to lead pay working group https://www.stuff.co[...] 2018-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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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Honoured by the Queen – New Zealand New Zealand Who's Who Aotearoa
[35] 웹사이트 New Year honours list 1998 https://dpmc.govt.nz[...] Department of the Prime Minister and Cabinet 1997-12-31
[36] 뉴스 Sir John Key says honours is rite of passage for former prime ministers, and doesn't recall negativity around his knighthood https://www.stuff.co[...] 2023-06-05
[37] 서적 The Right to Live: The Abortion Battle of New Zealand Haelan Books 1985
[38] 웹사이트 Members http://collegium-int[...] Collegium International
[39] 서적 New Zealand Under MMP: A New Politics? Auckland University Press 1996
[40] 서적 Surviving the Change: How Firms Adjusted to the New Environment https://books.google[...] New Zealand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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