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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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덕궁 후원은 창덕궁의 북쪽에 위치한 정원으로, 다양한 건축물과 연못, 정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경당 일대, 주합루 일대, 애련지 일대, 옥류천 일대, 존덕정 일대, 신선원전 일대, 대보단 일대 등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구역마다 독특한 특징을 가진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대보단은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의 소중화 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헐리고 신선원전으로 대체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여러 정자와 건물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대보단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로 나뉜다. 긍정적 평가는 대보단이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부정적 평가는 대보단이 조선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이게 만든 상징적인 존재였다고 비판한다. 특히, 『중앙일보』는 대보단, 만동묘, 조종암 대통묘 등을 조선이 변혁 기회를 놓치고 모화사상에 젖어 퇴행을 반복한 역사적 증거로 지적한다. 서강대학교 계승범 교수는 저서 『정지된 시간』에서 대보단 제례가 조선이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한 "의식의 족쇄"였다고 평가했다.[3]
2. 건축
2. 1. 연경당 일대
연경당, 선향재(善香齋), 농수정, 장락문, 장양문, 수인문, 통벽문
2. 2. 주합루 일대
주합루(宙合樓)는 규장각(奎章閣)의 기능을 수행하던 곳으로, 정조 즉위년에 창건되었다.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위층은 열람실로 사용되었다. 주합루 서쪽의 서향각(書香閣)은 책을 보관하던 건물이다.[1] 어수문(魚水門)은 주합루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통치자는 백성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2]
희우정(喜雨亭)은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것을 기뻐하며 정조가 지은 정자이다.[3]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에는 정조가 직접 쓴 사정기가 새겨져 있다.[4]
부용정(芙蓉亭)은 연꽃 모양의 정자로, 부용지(芙蓉池)라는 연못가에 위치한다. 영화당(映花堂)은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 시험을 치르던 장소였다. 춘당대(春塘臺)는 영화당 앞 너른 마당으로, 과거 시험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천석정(千石亭)은 숲 속에 있는 정자로,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라고도 불린다.
2. 3. 애련지 일대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을 중심으로, 불로문(不老門), 금마문(金馬門)이 이 영역의 정문 역할을 하며, 숙종(肅宗) 대에 지어진 이안재(易安齋)와 기오헌(倚斗閤), 운경거(雲磬居)가 자리하고 있다.
2. 4. 옥류천 일대
후원의 깊은 곳에서 발원한 옥류천은 소요암(逍遙巖)에서 옥류천(玉流泉)을 이룬다. 소요암이 보이는 곳에 소요정(逍遙亭)이 세워져 있다. 초가지붕을 인 청의정(淸漪亭)과 소요정 사이에 인조가 팠다고 전해지는 어정(御井)이 있으며, 어정의 샘물을 마시고 돌아가는 왕이 쉬도록 취한정(翠寒亭)을 세웠다. 옥류천 주위에는 후원 내에서 유일하게 높은 기단 위에 지어진 태극정(太極亭)이 있는데, 소요정·청의정·태극정을 한데 묶어 상림삼정(上林三亭)이라 칭한다. 행랑채와 같이 건립된 농산정(籠山亭), 존덕지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길에 지어진 취규정(聚奎亭)이 있다.
2. 5. 존덕정 일대
육각형의 이중 지붕이 특징인 존덕정(尊德亭)은 존덕지(尊德池)에 있는 정자로, 인조 때 만들어졌으며 당시에는 육각정이라고 불렸다. 지붕이 부채꼴 모양인 관람정(觀纜亭)은 구조가 간결한 승재정(勝在亭)과 함께 반도지(半島池)에 건립되어 있다. 이 권역에는 왕세자가 독서하던 건물인 폄우사(砭愚榭) 또한 존재한다.
2. 6. 신선원전 일대
신선원전 일대는 신선원전과 몽답정(夢踏亭), 괘궁정(掛弓亭) 등으로 나타낼 수 있다. 현재 개방 사업 구간이 아니라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신선원전 위치는 대보단의 위치라기보다 대보단보다 동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 7. 대보단 일대
1704년(숙종 30년)에 준공되었다. 제를 지내기 위한 제단으로, 각 면의 길이가 약 12미터 남짓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 대보단(大報壇)의 부속 건물은 만세송은(萬世誦恩)이 있었다. 일제는 중국에게 제를 지내는 단을 허용할 수 없었기에 대보단을 없애고 덕수궁의 선원전을 옮겨 신선원전을 만들었다. 창덕궁에는 이미 선원전이 있었기에 원래 선원전을 구선원전이라 한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숭명반청" 의식이 강하여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멸시하고, 조선이야말로 명이 멸망한 후의 중화를 계승하는 "소중화"라고 여겼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조선을 구원해준 신종에게는 "재조지은"이, 태조에게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준 "대조지은"이, 의종에게는 병자호란 때 원군을 보내준 은혜가 있다고 하여 매년 국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1894년까지 이어졌다. 대보단은 창덕궁의 북서쪽에 있었으나, 한일 병합 후인 1921년에 대보단을 헐고 그 자리에 신선원전을 건립하였다.
이씨 조선이 멸망한 명나라 황제를 모신 장소로는 이 외에도 만동묘나 조종암 등이 있다. 『중앙일보』는 이들이 조선의 변혁 기회를 계속 놓치고 소중화주의에 젖어 퇴행을 반복한 역사적 사실의 증거라고 지적하고 있다.
2. 8. 기타 건물
3. 대보단에 대한 평가
3. 1. 긍정적 평가
大報壇|대보단중국어은 숙종 30년인 1704년에 준공되었다. 제를 지내기 위한 제단으로, 각 면의 길이가 약 12m 남짓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 부속 건물로는 만세송은(萬世誦恩)이 있었다. 일제는 중국에게 제를 지내는 단을 허용할 수 없었기에 大報壇|대보단중국어을 없애고 덕수궁의 선원전을 옮겨 신선원전을 만들었다. 창덕궁에는 이미 선원전이 있었기에, 원래 선원전을 구선원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3. 2. 부정적 평가
1704년(숙종 30년)에 준공된 대보단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으로, 각 면의 길이가 약 12m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숭명반청" 의식이 강하여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멸시하고, 조선이야말로 명이 멸망한 후의 중화를 계승하는 "소중화"라고 여겼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조선을 구원해준 신종에게는 "재조지은"이, 태조에게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준 "대조지은"이, 의종에게는 병자호란 때 원군을 보내준 은혜가 있다고 하여 매년 국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1894년까지 이어졌다. 대보단은 창덕궁의 북서쪽에 있었으나, 한일 병합 후인 1921년에 대보단을 헐고 그 자리에 신선원전이 건립되었다.
이씨 조선이 멸망한 명나라 황제를 모신 장소로는 이 외에도 만동묘나 조종암 대통묘 등이 있다. 『중앙일보』는 이들이 조선의 변혁 기회를 계속 놓치고 모화사상에 젖어 퇴행을 반복한 역사적 사실의 증거라고 지적하고 있다.
계승범(서강대학교)은 저서 『정지된 시간』에서 대보단 제례가 조선이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한 "의식의 족쇄"였다고 평가했다.[3]
4. 갤러리
참조
[1]
뉴스
朝鮮儒教思想から見た韓国の対日観 ―日韓相互不理解の淵源を探る―
https://ippjapan.org[...]
平和政策研究所
2019-09-18
[2]
뉴스
韓経:【コラム】後期朝鮮時代に回帰するのか=韓国
https://japanese.joi[...]
2018-11-09
[3]
뉴스
'근대 조선' 발목 잡은 대보단(大報壇)을 아시나요
http://news.chosun.c[...]
2011-07-13
[4]
서적
숙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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