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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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진 상륙 작전은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침공 당시 소련 태평양 함대가 북한 청진시에 감행한 상륙 작전이다. 요새화된 청진에는 약 4,000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소련군은 제한된 병력으로 작전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소련군은 13일 어뢰정의 기습 상륙으로 시작하여, 해병대와 증원군의 투입을 통해 15일 청진을 거의 장악했다. 이후 잔적 소탕을 거쳐 17일 청진을 완전히 점령했으며, 이 작전으로 다수의 소련군과 일본군이 포상과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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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 상륙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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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명칭 | 세이신 작전 |
관련 전쟁 | 소련-일본 전쟁의 일부, 제2차 세계 대전 |
날짜 | 1945년 8월 13일 – 1945년 8월 17일 |
장소 | 일제강점기 북부 청진 |
결과 | 소련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소련 | 이반 유마셰프, 바실리 트루신 |
일본 | 니시와키 소키치, 타쿠미 히로시 |
전투 부대 | |
소련 | 소련 태평양 함대 140 정찰대 13 해병 여단 355 해병 대대 62 기관총 대대 극동 전선군 335 소총 사단 205 소총 연대 390 기관총 대대 393 소총 사단 |
일본 | 라남 군관구 제19 사단 73 보병 연대 76 보병 연대 19 정찰 연대 라남 보병 학교 대대 제3 군 제79 사단 289 보병 연대 79 기병 연대 지역 경찰 |
병력 규모 | |
소련 | 6,500명 이상 |
일본 | 4,000–5,700명 |
피해 규모 | |
소련 | 230–300명 사망 및 실종 |
일본 | 227명 사망 |
2. 작전 배경
1945년 8월,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개시했다. 이와 동시에 소련 태평양 함대는 한반도 북동부 해안을 따라 상륙 작전을 개시하여 일본군의 후방을 공격하고 주요 항구를 점령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웅기(오늘날의 선봉)와 라진 항구를 점령했다.[1]
2. 1. 소련군의 전략
소련군의 만주 침공 동안, 키릴 메레츠코프가 지휘하는 제1 극동 전선은 북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다. 이와 동시에 태평양 함대는 웅기(오늘날의 선봉)와 라진의 항구를 점령하여 일본 관동군의 보급 및 퇴로를 차단하고자 했다.[1]이반 유마셰프 제독은 청진시 항구 상륙 작전을 명령했다. 청진은 이전 항구들과 달리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고, 일본 제3군의 무라카미 케이사쿠 중장 휘하 약 4,000명의 강력한 일본 수비대가 있었다.[1]
소련군 원수 메레츠코프는 제1 극동 전선의 공세가 성공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8월 12일 청진 상륙 작전을 취소했다. 그러나 함대 사령부는 상륙 작전을 계속 준비했고, 유마셰프는 극동 소련군 총사령관 A. M. 바실레프스키로부터 작전 수행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메레츠코프의 결정으로 인해, 함대는 소총 사단을 지원받지 못하고 제한된 수의 병력으로 작전을 진행해야 했다.[1]
유마셰프는 항구에 대한 강력한 사전 공습을 명령했고(8월 9일부터 13일까지 매일 폭격), 사전 정찰 그룹 상륙 후 상륙 병력의 전력을 증강하는 계획은 변경되지 않았다.[1]
8월 9일부터 청진 항구에 대한 지속적인 공습으로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약 10척의 일본 선박이 침몰했다. 8월 12일, 일부 소련 선박이 항구에 진입하여 일본 군함이 없음을 확인했다. 작전 출발점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소련 지휘부는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1]
3. 양측의 전력
(작전 중 관동군 후퇴 부대 합류: 보병 연대 2개 → 친위 보병 사단)
상륙 부대: 바실리 트루신 소장
작전 총괄: 이반 유마셰프 제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