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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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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촐라군은 촐라 제국의 군대로, 상감 시대부터 중세 시대까지 존재했다.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시기에 강력한 상비군과 해군을 갖추었으며, 보병, 기병, 전투 코끼리로 구성된 육군과 다양한 선박을 보유한 해군을 운영했다. 촐라군은 최전성기에는 20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했고,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원정을 통해 촐라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군대는 세습 군인, 징집병, 용병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효율적인 군사 작전을 위해 다양한 부대를 조직했다. 주요 지휘관으로는 아라얀 라자라잔, 아디타 카리칼란 등이 있었으며, 여러 연대와 주둔군(카다가람)을 통해 제국을 방어하고 통치했다. 촐라 해군은 스리랑카, 몰디브 정복과 동남아시아로의 문화 전파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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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촐라의 군사 - 촐라 해군
    촐라 해군은 9세기에서 13세기 촐라 왕조의 해군으로,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시대에 전성기를 누리며 남인도, 스리랑카, 몰디브 정복과 동남아시아 해역 진출, 송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다.
촐라군
기본 정보
촐라 왕국의 깃발
촐라 깃발
창립일기원전 300년
해체일서기 1279년
국가촐라 제국
본부탄자부르, 촐라 제국
강가이콘다촐라푸람, 촐라 제국
통수권자촐라 황제
총사령관세나이탈라이바르
병력 규모 (최전성기 기준)
편제
촐라 육군전차부대
전투 코끼리부대
기병대
보병대
보조부대
벨라이카라파다이갈 (친위대)
촐라 해군칸니 (전술 훈련대)
탈람 (자립 단위대)
만달람 (특수부대)
가남 (함대 중대)
애니 (전투부대)
피리부 (함대)
역사
전쟁칼링가 및 벵골 합병, 1019–1024
촐라-찰루키아 전쟁
판디아 내전 (1169–1177)
침공아누라다푸라 정복, 993
스리비자야 침공, 1025
카다람 침공, 1068
칼링가 침공, 1097
칼링가 침공, 1110
전투비자야푸라 전투 (기원전 161년 또는 162년)
벤니 전투 (130년)
타콜람 전투 (949년)
칸달루르 살라이 전투 (988년)
도누르 전투 (1007년)
코팜 전투 (1054년)
쿠달-상가맘 전투 (1062년)
비자야와다 전투 (1068)
네투르 전투 (1188년)

2. 상감 시대 (기원전 300년 ~ 기원후 300년)

촐라군의 군대 모집 방법이나 영구 병력 수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봉건 시대에는 전사와 군인의 자녀들이 기사도 정신과 타밀 무술 전통에 따라 자연스럽게 군에 합류했다. 이들은 강한 무술 전통을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았으며, 자부심과 의욕이 넘치는 정예병이었다. 일부 연대는 고유의 군사 관습과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며, 소속 병사들은 높은 자긍심을 보였다.

상감 시대 타밀어 문헌에 '카다감'이라는 군사 훈련 조직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타밀 사회에서는 정기적인 군사 훈련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팔라얌 시스템은 전사, 농부, 장인, 상인 등으로 구성된 봉건적 계급 구조였으며, 각 계급 간의 구분은 엄격하게 지켜졌다. 타밀 전사들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일상생활에서도 칼을 소지했다. 이러한 무술 전통과 관습은 훗날 영국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현재 인도군에는 남인도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부대인 마드라스 연대가 남아있다.

촐라에는 '닐라이푸람'이라고 불리는 군사 식민지가 존재했으며, 이곳에는 여러 요새가 있었다. 특히 북판디아 국가의 케랄라싱가 발라나두에는 순다라, 쿨라세카라, 비크라마, 비라, 파라크라마 판디아 등 판디아 왕의 다섯 가지 칭호에서 이름을 딴 5개의 닐라이푸람이 있었다.

상감 시대 문헌들의 연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초기 촐라 군대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2. 1. 카리칼라 촐라

카리칼라 촐라는 ''파티나팔라이''에 언급된 모든 인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카리칼라'는 '코끼리 사냥꾼' 또는 '그을린 다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가 젊은 시절에 겪은 화재 사고를 언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티나팔라이''는 이 사고와 왕자가 탈출하여 촐라 왕위를 차지하게 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파티나팔라이''는 당시 촐라의 수도인 카베리파티남에 대한 시이며, 카리칼라가 체라와 판디아를 상대로 벌인 수많은 전투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촐라 군대가 체라와 판디아 왕이 이끄는 (약) 12명의 지배자 연합을 격파한 유명한 벤니 전투도 포함되어 있다. 이 전투 후, 체라 왕은 수치를 느껴 (등에 부상을 입고) 자살했다. 카리칼라는 이로써 자신에게 대항하여 결성된 연합을 깨뜨리고, 체라와 판디아 왕국을 정복하여 타밀라캄에 촐라의 패권을 확립했다. 벤니 전투 이후 카리칼라는 바카이파란탈라이 전투에서 9명의 소규모 추장 연합을 격파했다. 그는 또한 스리랑카를 침략하여 칼라나이 댐 건설에 노예로 동원하기 위해 12,000명의 싱할라족을 데려갔다.[1]

3. 중세 촐라 군대 (9세기 ~ 13세기)

촐라 왕조는 칼라브라와 팔라바 왕조의 쇠퇴를 틈타 비자얄라야 촐라 시기에 재건되었다.[2] 비자얄라야 촐라는 서기 852년, 판디아에 선전포고하여 그들을 격파했고, 이후 촐라는 강력해져 팔라바도 탄자부르 지역에서 몰락했다. 중세 촐라 제국은 고대 타밀 왕 카리카라를 왕조의 조상으로 여겼다.[2]

라자라자 1세는 강력한 상비군과 상당한 해군을 창설하였으며,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 아래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육군은 보병, 기병전투 코끼리 군단으로 구성되었다. 고대 힌두 문학에서 발견된 전통적인 전차 군단의 증거는 없으며, 대신 궁병(빌라리갈)과 같은 다른 병과들이 있었다.

최전성기의 촐라군은 총 200만의 병사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 송나라의 지리학자 조여괄은 1225년경에 쓴 글에서 촐라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其國與西天竺相攻戰。其國有象軍六萬,象高七八尺。戰時象頂上有屋,兵士滿中,遠則放箭,近則用槍。|기국여서천축상공전。기국유상군육만,상고칠팔척。전시상정상유옥,병사만중,원즉방전,근즉용창。중국어

>이 국가는 인도 서부 왕국과 전쟁 중이다. 정부는 높이가 7~8 피트인 6만 마리의 코끼리를 소유하고 있다. 이 코끼리와 싸울 때 이 코끼리는 집을 등지고, 이 집은 원거리에서 화살을 쏘고 가까운 곳에서 창으로 싸우는 병사들로 가득 차 있다.[12]

촐라의 군대 모집 방법이나 군대의 영구 병력 수에 대한 기록은 없다. 봉건 시대에 전사와 군인의 자녀는 기사도 정신과 타밀 무술 전통에 따라 쉽게 군대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매우 강한 무술 전통을 가진 매우 의욕적이고 전문적으로 훈련된 세력이었다. 일부 연대는 군 관습과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연대의 구성원은 높은 수준의 훈련, 자부심 및 자존심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상감 시대 타밀어에 카다감이라고 불리는 군주가 있다는 것은 정기적인 훈련과 군사 관행이 타밀 무술 전통의 일부로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팔라얌 시스템은 전사, 농부, 장인 및 상인의 봉건적 계급 구조를 기반으로 하며 구성 계급의 카스트 지위 간의 구별이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이들의 군사적 능력에 의해 시스템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타밀 전사들은 이 사회를 상징하기 위해 일상 생활에서 칼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무술 전통과 관습은 나중에 영국인에 의해 불법화되었으며, 오늘날 인도군에는 남인도 전체의 유일한 부대 역할을 하는 마드라스 연대가 있다.

또한 촐라에는 닐라이푸람으로 알려진 군사 식민지가 존재하였는데, 이 곳에는 여러 요새가 있었으며, 특히 북판디아 국가의 케랄라싱가 발라나두에는 판디아의 다섯 가지 관상적 이름인 순다라, 쿨라세카라, 비크라마, 비라, 파라크라마 판디아에서 이름을 딴 5개의 닐라이푸람이 있었다.

3. 1. 조직 및 관리

촐라군은 '차투르랑가발라'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편제를 따랐으며, 이는 전차, 코끼리, 기병,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고대 힌두 문학에서 언급되는 전차 군단의 증거는 없고, 대신 궁병(빌라리갈)과 같은 다른 병과들이 존재했다.[12] 촐라군은 행정, 병참, 의료 등 다양한 부대를 조직하여 효율적인 군사 작전을 지원했다.

촐라군의 연대는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사원 건립 및 관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들은 사원 관리를 위임받거나, 이자를 받고 성전에서 돈을 빌려 현금으로 지불하기도 했다.

촐라군의 주요 직급은 다음과 같다.

직급설명현대 대응 직급
세나티파티육군의 군주육군 원수
탈라파티칼라피티의 해군 계급장성급 장교
아나파티그룹의 수장대령



상비군은 여러 '세나이'로 조직되었으며, 각 세나이는 배치 위치 및 역할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었다. 세나이는 가장 큰 군 조직 단위였으며, 군대는 1~3개의 세나이를 가졌다.[14]

세나이는 자체 자원을 갖춘 자립형 군대인 '탈람'으로 나뉘었다. 탈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3 야나이파다이 - 각각 300 ~ 500마리의 코끼리가 있는 코끼리 군단.
  • 3 쿠디라이파다이 - 각각 500 ~ 1000마리의 말을 가진 기병대.
  • 6 칼라트파다이 - 각각 2000 ~ 3000명으로 이루어진 보병대
  • 2 탈파다이 - 1000 ~ 2000명의 남자와 500 ~ 1000마리의 말과 보병 및 기갑 부대가 혼합된 보조부대로, 촐라군이 철수할 때 후위 역할을 하거나 게릴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2 마라투바라니 - 마차 및 의료 지원을 받는 200-300명의 의사로 구성된 의무대
  • 1 또는 2 오시파다이 - 타격대


탈람은 다시 탈람의 3분의 1인 '애니'로 세분화되었다.

  • 1 야나이파다이
  • 1 쿠디라이파다이
  • 2 칼라트파디이
  • 2 탈파다이


탄자부르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연대들이 언급되어 있다.[15][16]

  • 웃타마- 촐라-테린다-안달라가타랄르
  • 페룬다나투 아나이야칼(코끼리 군단)
  • 판디아-촐라-테린다-빌릴리갈(궁병대)
  • 니갈릴리 - 촐라 테린다-우다닐라이-쿠디라이체체바가르(기병대)
  • 뭄마디-촐라 테린다 - 아나이파가르(코끼리 군단)
  • 비라 - 촐라 - 아누카르
  • 파란타카 - 콩가발라르(경보병대)
  • 뭄마디-촐라 테린다 - 파리바라타르
  • 케랄란타카-테린다-파리바라타르
  • 물라파리바라-비테루(일명 자나나타-테린다-파리바라타르)
  • 싱갈란타카-테린다-파리바라타르
  • 시루다투 바두가칼라바르
  • 발란가이-파람바다이갈리라르
  • 시루다나투-발란가이-벨라이카라파다이갈
  • 아라기야-촐라 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아리두르갈란가나-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찬다파라크라마-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일라이야-라자라자-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크샤트리야시카마니-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무르타비크라마바라나-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라자칸디라바-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라자라자-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라자비노다-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라나무키야-비마-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비크라마바라나-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 케랄란타카-바살-티루메이카파르
  • 아누카-바살-티루메이카파르(개인 경비병)
  • 파리바라메이카파르갈(개인 경비병)
  • 팔라바가이 - 파람파다이갈리라르
  • 페룬다나투-발란가이-벨라이카라파다이갈


군대는 지역 수비대 형태로 '카다감스''(Kadagams)''라고 불리는 전국 각 주둔지에 주둔하였다.[18]

촐라군은 세습 군인 가문의 군인, 다양한 부족에서 징집된 군인, 여러 상인과 무역상에서 제공된 인력, 그리고 용병으로 구성되었다.[3] 부대 외에도, 식량 보급 부대인 ''나다푸''와 해군 및 물류 부대인 ''파야남''이 있었다.[4]

3. 2. 유명한 장군

이름활동 시기주요 업적
세나티파티 아라얀 라자라잔11세기라젠드라 1세의 남동생이자 촐라 군대의 최고위 장군. 서부 찰루키아 왕조, 소마밤시 왕조, 팔라 왕국, 캄보자 팔라 왕조에 대한 승리를 이끌었다.
세나티파티 아브라메야 팔라반10세기~11세기라자라자 촐라의 총사령관. 988년 칸달루르 살라이 전투와 라젠드라 왕자가 군대를 이끈 994년 쿠다말라이 전투에서 지휘관을 맡았다.
세나티파티 아디타 카리칼란10세기북부 군대의 지휘관. 판디아 왕조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셰부르 전투에서 판디아 왕 베에라판디안을 격파했다.
세나티파티 발라바라얀 반디야데반10~11세기아누라다푸라에 대한 촐라 정복 기간 동안 라자라자 1세라젠드라 1세스리랑카 전선 군대 지휘관이었다.
세나티파티 카루나카라 톤다이만11세기 후반쿨로퉁가 촐라 1세 치세 동안 유명한 장군. 아난타바르만 왕의 칼링가 군대를 격파하고 랑카를 약탈했다. 자프나 반도의 카루나카라 필라이야르 사원은 그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으며, 스리랑카의 톤다이마나루 마을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세나티파티 나라로카비란11세기 후반쿨로퉁가 촐라 1세와 그의 후계자 비크라마 촐라 치세 동안의 장군. 남부 깊숙한 곳에서 많은 촐라 작전을 이끌었고 판디아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세나티파티 팔루베타라이야르 마라반 칸다나르10세기 후반파란타카 촐라 2세 치세 동안 중요한 장군. 아누라다푸라에 대한 촐라 정복 기간 동안 활발하게 배치된 팔루베타라이야르 연대를 강화했다.
탈라파티 티루치트람발라무다이얀 페루마남비12세기 후반판디아 내전 (1169–1177) 동안 라자디라자 촐라 2세를 대신하여 전투에서 폴론나루와 군대 장군 랑카푸라 단다나타와 자가드 비자야를 격파하고 판디아 왕국을 성공적으로 재정복했다.
아니파티 안난 팔라바라얀12세기 후반폴론나루와를 침략하여 파라크라마바후가 촐라 나두 침략을 준비하는 것을 파괴하고 파라크라마바후의 조카이자 폴론나루와 왕위 경쟁자인 싱할라 왕자 스리 발라바를 지원했다.


3. 3. 연대

탄자부르 비문을 통해 70여 개의 촐라군 연대 이름이 확인되었다.[15][16] 대부분 연대 이름은 왕이나 왕자의 칭호에서 유래했다.

촐라군은 주로 카이콜라르(직조공)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평시에는 직조업에 종사하고 전시에는 군인으로 복무했다.[5][6] 카이콜라르는 왕실 재무부에서 정기적으로 급여를 받는 상비군이었다.

다음은 탄자부르 비문에 언급된 주요 연대들이다.

연대 이름설명
웃타마-촐라-테린다-안달라가타랄르
페룬다나투 아나이야칼코끼리 부대
판디아-촐라-테린다-빌릴리갈궁병대
니갈릴리-촐라 테린다-우다닐라이-쿠디라이체체바가르기병대
뭄마디-촐라 테린다-아나이파가르코끼리 부대
비라-촐라-아누카르
파란타카-콩가발라르경보병대
뭄마디-촐라 테린다-파리바라타르
케랄란타카-테린다-파리바라타르
물라파리바라-비테루(일명 자나나타-테린다-파리바라타르)
싱갈란타카-테린다-파리바라타르
시루다투 바두가칼라바르
발란가이-파람바다이갈리라르
시루다나투-발란가이-벨라이카라파다이갈
아라기야-촐라 테린다-발란가이-벨라이카라르
아리두르갈란가나-테린다-발랑가이-벨라이카라르
찬다파라크라마-테린다-발랑가이-벨라이카라르
일라이야-라자라자-테린다-발랑가이-벨라이카라르
크샤트리야시카마니-테린다-발랑가이-벨라이카라르
무르타비크라마바라나-테린다-발랑가이-벨라이카라르
라자칸디라바-테린다-발랑가이-벨라이카라르
라자라자-테린다-발랑가이-벨라이카라르
라자비노다-테린다-발랑가이-벨라이카라르
라나무키야-비마-테린다-발랑가이-벨라이카라르
비크라마바라나-테린다-발랑가이-벨라이카라르
케랄란타카-바살-티루메이카파르
아누카-바살-티루메이카파르개인 경호원
파리바라메이카파르갈개인 경호원
팔라바가이-파람파다이갈리라르
페룬다나투-발란가이-벨라이카라파다이갈



벨라이카라파다이갈 또는 벨라이카라르는 "근위 연대" 또는 "왕의 연대"를 의미하며, 충성심과 용맹을 기리기 위해 주어지는 왕실 칭호였다. 촐라 군대에는 코끼리 부대, 기병대, 보병 등 다양한 병종이 존재했다.[17]

4. 주둔군 (카다가람)

촐라국은 전국 각지에 '''카다가람'''(கடகாம்ta)이라 불리는 주둔군을 설치하여 안보와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18] 정복 지역에도 주둔군을 배치하여 반란을 억제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9]

마하밤사의 기록에 따르면, 스리랑카에서는 촐라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벨라이카라파다이갈을 용병으로 고용하려 했으나, 이들은 이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아누라다푸라 정복 이후 라자라자 1세라젠드라 1세 시기 스리랑카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발라바라이얀 반디야데반폴론나루와에 주둔하며 섬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싱할라 군대의 재정복 시도를 막았다.[8] 판디아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한 후, 쿨로퉁가 촐라 1세는 촐라 영토에서 판디아로 가는 주요 경로를 따라 여러 군사 식민지에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코타루와 타밀나두의 사우스 아르코트 지역 근처 마다빌라감 등지에 주둔군이 설치되었다.[9]

5. 해군

촐라 해군은 촐라 제국의 해군과 다른 여러 해군 군기로 구성되었다. 10세기 촐라 제국의 실론 섬과 스리위자야(현재의 인도네시아) 정복을 계기로 시바파 힌두교, 타밀 건축 및 타밀 문화가 동남아시아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파란타카 1세 치세에도 스리랑카의 수많은 침략에 상당한 해군이 관여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라젠드라 촐라의 해군이 스리위자야에서 거둔 승리는 수세기의 해군 전통의 절정이었다. 모든 타밀 왕국들은 무기고에 일종의 해군을 지녔다.

촐라는 고대 전통을 이어가고 해군력을 키우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스리랑카몰디브의 정복과 중국에 파견된 대사관은 촐라 해군의 성공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촐라 제독은 이 기간 동안 많은 동남아시아 왕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라자라자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의 치세 동안 촐라 해군에는 100만 이상의 해군 병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해군에는 많은 종류의 선박(콜란디아 포함)과 해군 무기가 사용되었다.[1] 촐라 왕조의 해상 세력은 주로 무역과 수송에 사용되는 선박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왕조는 해상 전투를 위한 전용 함선을 갖추지 않았다. 대신, 이러한 선박들은 육군을 해외로 수송하는 데 사용되었다. 촐라 해상 세력은 칼라무카, 만타이, 산다니 등 여러 종류의 선박으로 구성되었다. 칼라무카는 충각을 갖춘 군함이었고, 만타이는 최대 500명의 승객을 수송할 수 있는 화물선이었다. 산다니는 말과 코끼리를 해외로 수송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되었다. 해상 전투용으로 설계된 선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촐라 왕조는 무역과 수송 목적을 위한 선박의 전략적 활용을 통해 강력한 해상 세력을 유지했다.[10][11]

참조

[1] 서적 Walking to Kataragama https://books.google[...] International Centre for Ethnic Studies
[2] 웹사이트 Epigraphia Indica Vol V https://archive.org/[...] Manager of Publications, Delhi
[3] 문서 Sastri 1992b: 745-7
[4] 서적 The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from 3500 B.C. to the Present
[5] 서적 Kaikolar https://books.google[...] New Age International
[6] 웹사이트 Kaikolappadai https://drive.google[...]
[7] 문서 The Travancore state manual, Volume 1, page 192
[8] 서적 A Global History of Pre-Modern Warfare: Before the Rise of the West, 10,000 BCE–1500 C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1-09-14
[9] 문서 South Indian Inscriptions, vol. 3
[10] 서적 The History and Culture of the Indian People, Volume V: The Struggle for Empire https://archive.org/[...] Bharatiya Vidya Bhavan
[11] 서적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Reflections on the Chola naval expeditions to Southeast Asia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12] 문서 The kings themselves used to fight in battlefields riding on such war elephants. There are a few occasions of the king dying in the battlefield on these elephants. [[Parantaka I]]'s son Rajaditya died at Sripurambayam. The Chola king [[Rajadhiraja Chola I]] died on an elephant fighting the Chalukya army at Thakolam The epithet Yanai-mel-thunjiya (who died on an elephant) is attached to these kings in their inscriptions indicating their valour.
[13] 서적 The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from 3500 B.C. to the Present
[14] 문서 Historical Military Heritage of the Tamils By Ca. Vē. Cuppiramaṇiyan̲, Ka.Ta. Tirunāvukkaracu, International Institute of Tamil Studies, Pages 152-156
[15] 웹인용 Kaikolar https://books.google[...]
[16] 웹인용 Kaikolappadai https://drive.google[...]
[17] 문서 The Travancore state manual, Volume 1, page 192
[18] 문서 South Indian Inscriptions, vol.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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