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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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촐라 해군은 촐라 왕조가 아시아의 군사, 경제, 문화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치하에서 촐라는 남인도, 스리랑카 일부, 몰디브를 정복했고, 북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해양 왕국을 습격했다. 촐라는 중국, 동남아시아와 무역을 했으며, 1077년에는 중국 송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촐라 함선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지만, 비문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선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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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군은 상감 시대부터 중세 시대까지 존재했던 촐라 제국의 군대로, 강력한 상비군과 해군을 갖추고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원정을 통해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보병, 기병, 전투 코끼리로 구성된 육군과 다양한 선박을 보유한 해군을 운영했다. - 해산된 해군 - 조선 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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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 해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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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 해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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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국가 | 촐라 제국 |
소속 | 촐라군 |
종류 | 해군 |
역사 | |
활동 기간 | 기원전 300년 ~ 서기 1280년 |
지휘 구조 | 촐라군 |
해체 | 1280년 |
규모 | |
병력 | 100만 명 |
전함 | 600 ~ 1000척 |
지휘부 | |
최고 지휘관 | 촐라 황제 (Chakravarthy) - 특히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
주요 지휘관 | 발라바라이얀 반디야데반 (10세기) 비마세난 (11세기 후반) 아마라부장간 (12세기) 카루나카란 (12세기 후반) |
참여 전투 | |
주요 전투 | 팔라바 해군과의 쟁탈전 (903-08) 스리랑카 침공 (977–) 캄보디아 합병 (?-996) 스리위자야 원정 칼링가 원정 (1081-83) 판디아 계승 전쟁 (1167) 판디아 계승 전쟁 (1172) |
2. 역사
라자라자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 치하에서 촐라 왕조는 아시아의 군사, 경제, 문화 강국으로 성장했다.[20] [21] 라자라자 1세는 남인도를 정복하고 스리랑카의 일부를 합병했으며 몰디브의 최북단 환초 섬을 점령했다.[21] 라젠드라 1세는 갠지스강을 건너 파탈리푸트라의 팔라 황제 마히팔라를 격파한 승리 원정대를 북인도로 보냈고, 동남아시아의 해양 왕국들을 습격했다.[22] [18]
1187년에 작성된 시르카지의 비문에는 아마라콘 팔라바라이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아라이얀 카달콜라미탄탄 해군 장교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카라이파다이일라르의 탄달나야감으로 언급된다. 카라이파다이일라르는 "해변의 군대 또는 군대"를 의미하며, 탄달나야감이라는 칭호는 단다나야카와 유사하며 "군대의 사령관"을 의미한다. 카달콜라미탄탄이라는 칭호는 "바다가 휩쓸릴 때 떠 있던 사람"이라는 뜻이다.[26]
2. 1. 촐라 제국의 팽창 (848년 ~ 1070년)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시대에 촐라 왕조는 아시아에서 군사, 경제, 문화 강국으로 부상했다.[5][2] 라자라자 1세는 남인도를 정복하고 스리랑카 일부를 병합했으며, 몰디브 최북단 환초의 섬들을 점령했다.[2] 라젠드라 1세는 갠지스 강에 닿아 파탈리푸트라의 팔라 제국 통치자 마히팔라를 격파한 북인도 원정군을 파견했고, 동남아시아 왕국들을 침략했다.[6][3]1187년 시르카지 비문에는 아라이얀 카달콜라미탄탄(별칭 아마라콘 팔라바라이얀)이라는 해군 장교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Karaippadaiyilaar"(해안의 군대)의 "Tandalnayagam"(군대 지휘관)으로, "Kadalkolamitantaan"은 "바다가 삼켜질 때 떠다니는 자"를 의미한다.[10]
2. 1. 1.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라자라자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 치하에서 촐라 왕조는 아시아의 군사, 경제, 문화 강국이 되었다.[20][21] 라자라자 1세는 남인도를 정복하고 스리랑카의 일부를 합병했으며 몰디브의 최북단 환초 섬을 점령했다.[21] 라젠드라 1세는 갠지스강을 건너 파탈리푸트라의 팔라 황제 마히팔라를 격파한 승리 원정대를 북인도로 보냈다. 그는 또한 동남아시아의 해양 왕국들을 습격했다.[22][18]2. 2. 촐라 해군의 기록
라자라자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 치하에서 촐라 왕조는 아시아의 군사, 경제, 문화 강국이 되었다.[20][21] 라자라자 1세는 남인도를 정복하고 스리랑카의 일부를 합병했으며 몰디브의 최북단 환초 섬을 점령했다.[21] 라젠드라 1세는 승리의 원정대를 북인도로 보내 갠지스강을 건넌 후 파탈리푸트라의 팔라 황제 마히팔라를 격파했다. 그는 또한 동남아시아의 해양 왕국들을 습격했다.[22][18]1187년에 작성된 시르카지 비문에는 아마라콘 팔라바라이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아라이얀 카달콜라미탄탄 해군 장교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카라이파다이일라르의 탄달나야감으로 언급된다. 카라이파다이일라르는 "해변의 군대 또는 군대"를 의미하며, 탄달나야감이라는 칭호는 단다나야카와 유사하며 "군대의 사령관"을 의미한다. 카달콜라미탄탄이라는 칭호는 "바다가 휩쓸릴 때 떠 있던 사람"이라는 뜻이다.[26]
3. 무역, 상업, 외교
촐라는 중국 및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9세기 말, 남인도는 해양 상업 활동이 활발했으며, 촐라는 인도 아대륙 서해안과 동해안 일부를 점령하며 이러한 흐름을 주도했다.[20][19] 당나라, 샤일렌드라 왕조의 스리위자야,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국이 주요 무역 파트너였다.[22]
1088년 수마트라섬에서 발견된 타밀어 비문에는 촐라의 유명 상인 길드 '나나데사 티사이야이라투 아이누트루바르'(문자 그대로 '사방에서 온 오백 명', '천 방향'이라는 뜻)가 언급되어 있어, 당시 해외 무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20]
3. 1. 대외 무역과 해상 활동
촐라는 대외 무역과 해상 활동에 뛰어났으며,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영향력을 확장했다.[20] 1088년 수마트라섬에서 발견된 타밀어 비문에는 촐라국의 유명한 상인 길드인 나나데사 티사이야이라투 아이누트루바르(문자 그대로 '사방에서 온 오백 명', '천 방향'이라는 뜻)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어, 촐라 시대의 활발한 해외 무역을 짐작할 수 있다.[20]9세기 말, 남인도는 특히 중국인과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해양 및 상업 활동을 발전시켰다.[20] 인도 아대륙의 서해안과 동해안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촐라는 이러한 사업의 선두에 섰다.[20][19] 당나라, 샤일렌드라 왕조의 스리위자야,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국이 촐라의 주요 무역 파트너였다.[22]
송나라 기록에 따르면 1077년에 철련(촐라)의 사절단이 송나라 조정에 도착했으며,[20][21] 당시 철련의 왕은 티후아키아로라고 불렸는데, 이는 "데바 쿨로[퉁가]"( 쿨로퉁가 촐라 1세)를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다.[22] 이 대사관은 무역이 목적이었으며, 유리 제품, 향신료 등 공물과 교환한 구리 동전 81,800줄을 가지고 돌아갔다.[23]
3. 2. 중국과의 협력
촐라는 대외 무역과 해상 활동에 뛰어났으며,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영향력을 확장했다.[20] 9세기 말, 남인도는 특히 중국인과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해양 및 상업 활동을 발전시켰다.[20] 인도 아대륙의 서해안과 동해안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촐라는 이러한 모험의 선두에 섰다.[20][19] 당나라, 샤일렌드라 왕조의 스리위자야,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국이 촐라의 주요 무역 파트너였다.[22]수마트라섬에서 발견된 단편적인 타밀어 비문에는 촐라국의 유명한 상인 길드인 나나데사 티사이야이라투 아이누트루바르(문자 그대로 '사방에서 온 오백 명', '천 방향'이라는 뜻)의 이름이 인용되어 있다.[20] 비문의 연대는 1088년으로, 촐라 시대에 해외 무역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20]
중국 송나라 기록에 따르면 1077년에 철련(촐라)의 사절단이 송나라 조정에 도착했으며,[20][21] 당시 철련의 왕은 티후아키아로라고 불렸다.[22] 이 음절은 "데바 쿨로[퉁가]"( 쿨로퉁가 촐라 1세)를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대사관은 무역소였으며, "유리 제품, 향신료 등 공물품과 교환한 구리 동전 81,800줄"을 가지고 돌아간 방문객들에게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23]
4. 선박 및 무기
촐라 시대의 해상 선박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여, 해전 기술과 전투 방식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여러 기록과 정황 증거를 통해 촐라 시대 선박의 종류와 특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4. 1. 촐라 선박에 대한 기록
촐라 함선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해전에 사용된 기술과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R.C. 마줌다르는 촐라가 벌인 해전은 기본적으로 배 위에서 벌어진 육상 전투이며, 사용된 배는 군대를 수송하는 데 사용된 수송선이었다고 주장한다.[24] 촐라군이 해전을 치르지 않고 육지에서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해상과의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촐라는 초기 사타바하나, 살란카야나, 쿠룸바, 팔라바와 달리 해상이나 배와 관련된 도상학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25]

라젠드라 1세의 비문에는 배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인 칼람이라는 용어가 언급되어 있다. 서기 1088년 수마트라 바루스에서 발견된 타밀어 비문에는 마라칼람(목선)이 언급되어 있다. 배의 크기와 건조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안드라 해안의 크리슈나파티남에서 발견된 서기 1200/1256년경의 타밀어 비문에는 여러 척의 해상 선박이 언급되어 있다: 마라칼람, 토니, 칼라밤, 베디, 파다부 등이 있다. 그 크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수바얄루는 마라칼람이 가장 먼저 언급되었기 때문에 가장 큰 배였을 것으로 생각하며, 파다부보다 4배 정도 더 큰 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토니(도니라고도 발음)는 마라칼람과 같은 금액이 부과되었지만, 수바얄루에 따르면 마라칼람보다 크기가 작았을 수도 있다. 도니는 19세기에도 스리랑카와 마드라스(첸나이) 사이의 노선을 운항하며 계속 운행되었다. 도니는 길이 약 21.34m, 폭 약 6.10m, 깊이 약 3.66m에 갑판은 없었고 돛대는 하나뿐이었다.[26]
5. 해상 원정
10세기 말과 11세기 초의 촐라의 군사 작전은 사실상 약탈을 위한 습격이었다. 이는 가축, 보석 및 기타 형태의 재산이 될 수 있는 전리품을 확보하기 위해 행해졌다.[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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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Reflections on the Chola Naval Expeditions to South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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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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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ps on Hero Stones from the West Coast of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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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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