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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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건국은 중국 충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주로 활동한 기업인이자 통일 운동가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대 삼성전자 프랑크푸르트 주재원으로 근무했으나, 부모의 망명과 북한 방문으로 해고되었다. 이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남북 경제 협력 기업인 한백상사 대표를 맡아 금강산 관광지 옥외광고 사업을 추진했다. 1999년 백범통일광장 건설을 건의하고, 2001년에는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의 답방을 촉구했다. 201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독일에서 사망했으며, 송두율과 함께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귀국하지 못했다.
최건국은 1942년 중국 충칭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건희, 홍사덕과 고교 동기였다. 서울에서 군 복무(공군)를 마친 후 1963년 9월부터 아버지 최덕신이 서독 대사로 발령받아 독일에서 거주했다.[1] 1970년대 중반 삼성전자의 프랑크푸르트 주재원이 되었으나, 1976년 부모의 미국 망명과 북한 방문으로 해고되었다.[1]
[1]
저널
50년간 귀국 못한 독 교민 최건국씨 파란만장 인생사
http://www.100age.or[...]
아시아투데이
2013-08-06
2. 생애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부의 동베를린 사건 조작에 당시 서독 대사였던 아버지 최덕신은 반대했다. 최건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이 사건에 연루된 유학생 출신 민주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서독 교민을 규합하여 한국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에서 활동했다. 윤이상, 송두율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다.[3]
1980년대 후반 통일운동에 뛰어들면서 북한을 자주 왕래했고, 남북 경제협력 기업인 한백상사 대표를 맡았다.[4] 1999년 8월에는 <백범통일광장 건설에 관한 건의문>을 남북한 정부에 전달하는데 관여했고,[5] 2001년 8월에는 '한반도통일연구회' 부회장 자격으로 평양에서 개최되는 '2001년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석했다.[7] 북한은 금강산 관광지와 개성공단 지역에 옥외광고 설치를 승인했고, 한백상사가 운영권을 가져왔다.[6]
2013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 참석 후, 북한의 사업 태도를 비판했다.[8] 1998년에 와서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국이 불허되었던 한국의 가족과 중국 베이징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2013년 뇌졸중으로 두 번 쓰러진 후, 2016년 2월 말 독일에서 74세로 사망했다. 송두율과 함께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귀국하지 못했지만, 40년 이상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9]
2. 1. 출생과 성장
1942년 중국 충칭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출신으로, 이건희, 홍사덕과 고교 동기다. 서울에서 군 복무(공군)를 마친 후 1963년 9월부터 독일에 거주했다. 아버지 최덕신이 서독대사로 발령받으면서부터였다.[1]
2. 2. 독일 이주와 민주화 운동
최건국은 1963년 9월부터 독일에 거주했다. 아버지 최덕신이 서독 대사로 발령받으면서부터였다.[1] 1970년대 중반 삼성전자의 프랑크푸르트 주재원이 되었으나,[2] 1976년 부모의 미국 망명과 북한 방문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반체제 인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중앙정보부가 회사에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정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기업은 없었다.[1]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부는 동베를린 사건을 조작해 발표했다. 당시 서독 대사였던 최덕신은 이 공작에 반대했다. 최건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이 사건에 연루된 유학생 출신 민주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서독 교민을 규합하여 한국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에서 활동했다. 윤이상, 정규명 박사, 송두율 교수, 이종현 전 민건 의장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2007년 당시 최건국은 오스트리아 빈에 본부를 둔 한민족통일연구회의 집행위원장이었다.[3]
2. 3. 남북 경제 협력 사업
최건국은 1980년대 후반 통일운동에 뛰어들면서 북한과 한국 기업 양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남북 경제협력 기업인 한백상사 대표로 있었는데, 한백상사는 한라산과 백두산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남북합동 자원개발사업을 목표로 했다.[4]
한때는 사업이 잘 되어 금강산 해변에 말보로 같은 해외 글로벌 기업의 입간판을 세워 영업을 하기도 했다.[4] 북한은 사상 처음으로 금강산 관광지와 개성공단 지역에 자본주의의 상징인 옥외광고 설치를 승인했는데, 최건국이 사장이던 한백상사가 운영권을 가져왔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는 장전항에 2개의 대형 광고판을 설치하여 운영토록 승인했다. 추가로 금강산 다른 관광지역 및 개성공단과 그 주변 관광지에 광고판을 설치토록 허용했다. 2000년 12월 사업 허가를 내준 것으로 1년여 만인 2002년 2월 초 광고판이 완공돼 2월 15일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됐다.[6]
1999년 8월에는 <백범통일광장 건설에 관한 건의문>을 남북한 정부에 전달하는데 관여했다. 최건국은 이 건의문을 오스트리아 대사관을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 휴전선과 38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백범통일광장'을 건설하기 위한 건의문이었다.[5]
2001년 8월에는 중립적인 '한반도통일연구회' 회장단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한국 조기 방문을 촉구했다. 최건국은 당시 부회장 자격으로 북한측 초청으로 평양에서 개최되는 '2001년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석했다.[7]
2013년 7월,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 해외동포로 초청받아 참석했던 최건국은 귀로에 들른 베이징의 한 호텔에서 사업과 관련한 북한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는 남북화해와 동포를 돕는다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20여 년 이상 대북 사업을 해왔으나, 북한의 대금 미결제 같은 약속 불이행 등으로 인해 매년 적자에 허덕이다 마침내 한계에 봉착했다고 밝혔다.[8]
2. 4. 통일 운동과 기타 활동
1970년대 후반부터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유학생 출신 민주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주화운동을 했다. 서독 교민을 규합, 한국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윤이상과 정규명 박사, 송두율 교수, 이종현 전 민건 의장 등이 주요 멤버였던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에서 활동했다.[3]
1980년대 후반 통일운동에 뛰어들면서 북한도 자주 왕래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북한과 한국 기업 양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남북 경제협력 기업인 한백상사 대표로 있었다. 한백상사는 한라산과 백두산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으로, 남북합동 자원개발사업을 목표로 했다. 한때는 알짜 중소기업 부럽지 않을 정도로 사업이 잘됐다. 금강산 해변에 말보로 같은 해외 글로벌 기업의 입간판을 세워 영업을 했을 정도였다.[4]
1999년 8월 <백범통일광장 건설에 관한 건의문>을 남북한 정부에 전달하는데 관여했다. 최건국은 이 건의문을 오스트리아 대사관을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 휴전선과 38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백범통일광장'을 건설하기 위한 건의문이었다. 남·북·해외 민간인들로 구성된 한반도통일연구회 주최로 1999년 8월 4∼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99조국통일에 관한 국제 학술회의'에서 건의문이 채택됐다. 이어 오스트리아 빈 소재 한민족통일연구회 최건국 정책위원장이 1999년 10월 안에 해외추진본부를 결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5]
북한은 사상 처음으로 금강산 관광지와 개성공단 지역에 자본주의의 상징인 옥외광고 설치를 승인했다. 최건국이 사장이던 한백상사가 운영권을 가져왔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는 장전항에 2개의 대형 광고판을 설치하여 운영토록 승인했다. 추가로 금강산 다른 관광지역 및 개성공단과 그 주변 관광지에 광고판을 설치토록 허용했다. 2000년 12월 사업 허가를 내준 것으로 1년여 만인 2002년 2월 초 광고판이 완공돼 2월 15일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됐다.[6]
2001년 8월 남북한에 중립적인 '한반도통일연구회'(회장 박헌일) 회장단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한국 조기 방문을 촉구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 방문에 대한 답방이었다. 최건국은 당시 부회장 자격으로 북한 측 초청으로 6.15 남북 공동 선언 1주년과 8.15 56주년을 맞이하여 평양에서 개최되는 '2001년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석했다.[7]
2013년 7월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 해외동포로 초청받아 참석했던 최건국은 귀로에 들른 베이징의 한 호텔에서 사업과 관련한 북한의 태도를 비판했다. “북한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국제사회에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는 없습니다.” 남북화해와 동포를 돕는다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20여 년 이상 대북 사업을 해왔으나, 북한의 대금 미결제 같은 약속 불이행 등으로 인해 매년 적자에 허덕이다 마침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8]
2. 5. 북한과의 관계와 사망
최건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통일운동에 참여하면서 북한을 자주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과 한국 기업 양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 남북 경제협력 기업인 한백상사 대표를 역임했다.[4] 한백상사는 한라산과 백두산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남북합동 자원개발사업을 목표로 했다.[4] 한때는 금강산 해변에 말보로와 같은 해외 글로벌 기업의 입간판을 세워 영업을 할 정도로 사업이 잘 되었다.[4]
1999년 8월, 최건국은 <백범통일광장 건설에 관한 건의문>을 남북한 정부에 전달하는데 관여했다. 그는 이 건의문을 오스트리아 대사관을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 이 건의문은 휴전선과 38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백범통일광장'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5]
북한은 사상 처음으로 금강산 관광지와 개성공단 지역에 자본주의의 상징인 옥외광고 설치를 승인했는데, 최건국이 사장이던 한백상사가 운영권을 가져왔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는 장전항에 2개의 대형 광고판을 설치하여 운영하도록 승인했다. 추가로 금강산 다른 관광지역 및 개성공단과 그 주변 관광지에 광고판을 설치하도록 허용했다.[6]
2001년 8월, 최건국은 '한반도통일연구회' 부회장 자격으로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개최되는 '2001년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석했다. 이 행사는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과 8.15 56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7]
2013년 7월, 최건국은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 해외동포로 초청받아 참석했다. 그는 귀로에 들른 베이징의 한 호텔에서 북한의 사업 태도를 비판했다. 그는 북한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보여줘야 국제사회에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8] 20여 년 이상 대북 사업을 해왔으나 북한의 대금 미결제 등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매년 적자에 허덕이다 결국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8]
최건국은 2013년 뇌졸중으로 두 번 쓰러진 후, 2016년 2월 말 독일에서 74세로 사망했다. 그는 송두율과 함께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귀국하지 못했다.[9]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조부 최동오 독립운동가, 6.25 전쟁 당시 납북[9] 부 최덕신 전 외무장관, 천도교 교령, 북한 국적 취득 배우자 한국 국적, 독일 파견 간호사 출신[9] 아들 (2명) 전자공학, 기계공학 전공[9] 동생 최인국 2019년 북한 입국[9] 누나 최근애 여동생 최경애, 최순애 [9]
참조
[2]
저널
"[단독] 남북 분단 비극 상징 최건국 씨 타계. 이건희, 홍사덕과 고교 동기"
http://www.asiatoday[...]
아시아투데이
2016-04-14
[3]
저널
"나는 한국 국적자다 떳떳하게 귀국해 가족 만나고 싶다"
https://www.sisain.c[...]
시사IN
2007-11-08
[4]
저널
"[기자의 눈] 남북 비극의 상징 모자 류미영, 최건국 나란히 영면"
http://www.asiatoday[...]
아시아투데이
2016-11-26
[5]
저널
"`백범통일광장' 건설 해외추진본부 이달 결성"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9-10-02
[6]
저널
"\"북한, 3월중 남북 대화 제의\" <류미영씨 장남>"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2-02-26
[7]
저널
해외동포단체 평양서 김정일 답방 촉구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1-08-14
[8]
저널
재독 대북 사업가 최건국씨, 북한도 변해야 생존
http://www.100age.or[...]
아시아투데이
2013-08-04
[9]
저널
"<인터뷰>류미영 단장 아들 최건국씨"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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