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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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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덕신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항일 운동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1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참전 후에는 외무부 장관, 서독 대사 등을 지냈으며, 천도교 교령을 역임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북한을 방문, 1986년 아내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 1989년 사망하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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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최덕신
출생일1914년 9월 17일
출생지의주군, 평안북도, 일본 제국
사망일1989년 11월 14일
사망지평양, 북한
배우자류미영
로마자 표기Choe Deok-sin
한자 표기崔德新
한글 표기최덕신
공직
직위대한민국 외무부 장관
임기 시작1961년 10월 11일
임기 종료1963년 3월 15일
대통령박정희
북한 공직
직위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임기 시작알 수 없음
임기 종료1989년
주석김일성
군사 경력
소속국민혁명군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상교 (중국군)
정령 (광복군)
중장 (한국 육군)
기타
묘소애국열사릉
말레이시아 농업부 장관 카리 조하리(Khir Johari)와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 최덕신이 서울에서 양국 간 최초의 무역 협정에 서명하는 모습

2. 생애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대한민국에서 외무부 장관과 천도교 교령을 지냈으나 이후 북한으로 갔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김일성이 다녔던 만주 화성의숙의 교장 최동오이다.[8] 3·1 운동에 참여한 아버지를 따라 9세 때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를 졸업하고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독일어 통역을 맡았으며, 한국광복군 창설 시 선전과장을 맡는 등 항일 활동에 참여했다.[8] 광복 후에는 중국군에서 제대하고 광복군 화남 한적 병사 집훈 총대장으로서, 무장 해제된 일본군으로부터 약 3,000명의 조선인 병사를 모아 이들을 이끌고 귀국했다.[8]

1947년 경비사관학교 특별 3기로 입교하여[9] 군 경력을 시작했다. 제2연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1949년 포트 라일리 육군참모학교, 1950년 포트 베닝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에는 제1군단 참모장, 제8사단장, 제11사단장을 맡아 후방 빨치산 토벌 작전을 지휘했다.[17][18] 이 과정에서 1951년 2월, 제11사단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산청·함양 학살 사건을 일으켜[10] 사단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육군 예비사관학교 교장, 육군대학교 부교장, 육군 보병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19][20]

1953년 4월 판문점 휴전 회담에 한국 대표로 참여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전협정 조인식 직전 퇴장하여 한국 측 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휴전 후 제1군단장을 역임하며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고,[11] 1956년 10월 예편했다. 예편 후에는 남베트남 주재 대사(1958년 임명)로 활동하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 (1961년 10월 11일 임명), 주 서독 대사 (1963년 8월 9일 임명) 등을 지냈다.[11]

1967년 9월에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천도교 교령에 취임하여 종교계에서도 활동했다. 이후 통일원 고문, 한중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고,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77년 11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망명을 선언했다.

망명 생활 중 최홍희와의 교류 등을 통해 북한에 대한 생각이 변화했으며, 1986년 4월 아내 류미영과 함께 북한으로 영구 이주했다. 북한에서는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 1989년 11월 16일 사망했으며, 유해는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12]

2. 1. 초기 생애와 항일 무장 투쟁

평안북도 의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김일성이 다녔던 만주 화성의숙 교장 최동오이다.[8] 3·1 운동에 참여한 아버지를 따라 9세 때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를 졸업한 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독일어 통역을 맡았고, 이후 하급 부대의 작전참모가 되었다.[8]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선전과장에 취임했다.[8]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신편 제38사단 신병영 영장, 이후 신편 제1군 참모를 역임했다.[8]

광복 후 중국군에서 제대하고 광복군 화남 한적 병사 집훈 총대장으로서, 무장 해제된 일본군으로부터 약 3,000명의 조선인 병사를 모아 이들을 이끌고 귀국했다.[8]

2. 2. 대한민국 국군 복무와 한국전쟁 참전

일제강점기중국에서 활동하던 최덕신은 해방 후 1946년 5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었던 한국인 병사들을 이끌고 귀국했다.[8] 귀국 후에는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최동오와 장인 류동렬의 권유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47년 봄 육군사관학교 특별 3기로 입교하여 두 달 만에 소위로 임관했고, 곧바로 소령으로 특별 진급했다.[24][9]

이후 대전에 주둔한 제2연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연대장 임기를 마친 뒤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24] 1948년 12월 15일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 재직 중 대령으로 진급했다.[25][16] 1949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포트 라일리(Fort Riley영어)의 육군포병학교 초등군사반을, 1950년에는 포트 베닝(Fort Benning영어)의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졸업했다.[24] 귀국 후 제3사단장(1949년 5월 12일 임명)[26], 제1군단 참모장 등을 역임했다.[17]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8사단장(1950년 8월 4일 임명)[18]과 제11사단장(1950년 9월 25일 임명)으로 참전하여 주로 후방 지역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최덕신은 견벽청야 전술을 실행했다. 그러나 1951년 2월, 그가 지휘하던 11사단 9연대가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공비 협력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27][28][10] 이 사건은 산청, 함양에서도 유사한 학살이 발생하여 산청·함양·거창 사건으로도 불린다. 이 사건의 여파로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장관이 모두 사임했으며, 최덕신 역시 11사단장 직위에서 해제되었다. 하지만 사건 관련자 대부분은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시간이 지난 후 복권되었고, 이 과정에서 최덕신의 도움이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산청, 함양, 거창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이 모두 11사단 담당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단장이었던 최덕신이 이를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29]

사단장 해임 후 육군 예비사관학교 교장, 육군대학교 부교장, 육군 보병학교 교장 등을 거쳤다.[19][20] 1953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판문점 휴전 회담에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전협정 조인식 직전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한국 측 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휴전 이후에는 제1군단장(1955년 임명)을 역임하며 중장으로 진급했고, 1956년 10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2. 3.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최덕신은 1950년 10월부터 대한민국 육군 제11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후방 게릴라 토벌을 담당했다.[17] 이 과정에서 그는 견벽청야(堅壁清野) 전술을 실행했다.[10]

1951년 2월, 그가 지휘하던 11사단 소속 9연대가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공비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10][27][28] 이 사건은 산청함양 지역에서도 유사한 학살이 발생하여 “산청·함양·거창사건”이라고도 불린다.[27][28]

이 사건의 여파로 당시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장관이 모두 사임했으며, 사단장이었던 최덕신 역시 직위에서 해제되었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들은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에서 3년형 등을 선고받았음에도 대부분 1년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더욱이 법적 처벌을 피한 최덕신의 도움으로 복권되어 군으로 돌아왔고, 일부는 군 장성이나 지방자치단체장 등으로 승승장구했다.[29] 산청, 함양, 거창, 함평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모두 11사단 담당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단장인 최덕신이 이를 몰랐을 가능성은 낮다는 비판이 제기된다.[29]

2. 4. 외교관 및 천도교 교령 활동

1956년 10월 예비역으로 편입된 후, 남베트남 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외교관 활동을 시작했다.[30] 베트남 대사로 재직 중 5.16 군사정변을 맞이하였는데, 과거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 생도였던 박정희와의 인연으로 정변 직후인 1961년 10월 11일 외교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외무장관으로서 한일 외상 회담에 참여했으나, 실질적인 협상은 김종필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외무장관 시절, 독립운동가 차리석의 아내 홍매영과 아들 차영조를 돌본 일화가 있다. 임정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광복 직후 차리석이 사망하고 부여에서 어렵게 살던 모자를 외무부 장관 공관 부속실에서 지내게 했다. 최덕신은 차영조를 야간 고등공민학교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시키는 등 후원했으며, 장관 퇴임 후 사저로 이사할 때도 이들 모자와 함께했다. 최덕신의 어머니와 부인 류미영 역시 이들 모자를 잘 보살폈고, 최덕신이 서독 대사로 부임한 후에도 모자는 최덕신의 자택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33]

1963년 8월 9일, 주 서독 대사로 임명되었다.[30][31] 서독 대사 재임 중 박정희 대통령과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의 상호 방문을 성사시켰으나, 임기 중 동베를린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서독 대사 임기를 마친 후 1967년 9월, 아버지 최동오의 영향으로 천도교 교령에 취임하여 종교계에서 활동했다.[32] 이후 한국종교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며, 통일원 고문, 한중일보 사장(1972년)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32] 천도교 교령으로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를 지원하기도 했으나, 유신헌법 공포 이후 종교계의 지원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정부의 자금 지원이 끊겼다. 이후 김대중 납치 사건과 문세광 사건 등을 겪으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2. 5.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과 미국 망명

서독 대사로 재직하던 1967년, 중앙정보부가 독일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을 북한 공작원으로 몰아 납치한 '동백림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항의와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고, 당시 박정희 정권은 최덕신에게 책임을 돌리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자가 200명에 달하고 대부분 지식인이었으며, 사건이 독일에서 발생하여 독일 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최덕신은 훗날 강제 납치 사실을 인정하며 당시 양두원 참사관이 주도했고 자신은 몰랐다고 해명했지만, 대사가 모를 수 없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최덕신은 독일 정부로부터 '대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최덕신은 여비서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논란이 되면서 한국으로 귀환 조치되었고,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정부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34]

한국 귀환 후, 최덕신은 천도교 교령(1967년~1975년)을 맡으며 종교계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초기에는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아 수운회관을 건립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 유정회, 수협중앙회 등을 입주시키는 등 외형적 성과를 거두었다.[37] 그러나 정부 지원 문제 등으로 정권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또한 교령 재임 중 독선적인 운영과 군 시절 부하 기용, 신앙적 책무 외면 등으로 교단 내부의 반발을 샀다.[37]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종단 공금을 횡령하여 물러났다고 보도했으나, 교단 관계자들은 종단 분규 당시 공금 횡령이나 개인 착복은 문제 된 적이 없으며, 최덕신이 교령직을 부업처럼 여기고 다른 사회 활동에 치중하며 교단을 독선적으로 운영하고 예산을 방만하게 사용한 것이 신도들과 간부들의 반감을 산 원인이라고 증언했다.[36] 결국 최덕신은 천도교 내에서 실권을 잃고 15대 교령 임기 1년을 채우고 물러났다.[38]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동백림 사건 처리 과정에서의 책임 전가 시도, 여비서 스캔들, 천도교 운영 및 지원을 둘러싼 마찰 외에도, 박정희 정권과 노선 차이가 있던 '공해방지시민협의회'를 최덕신이 후원한 것이 박정희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천도교 재단 공금 유용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박정희가 돕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도 작용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35]

이러한 갈등 속에서 최덕신은 1976년 8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34] 망명 전부터 미국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배달민족회' 사무실을 열어두었으며, 운영은 정기용이 맡았다.[35] 미국, 서독, 일본 등을 오가며 귀국하지 않던 그는 1977년 11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 정권의 민족 말살 정책과 매국적인 군사 파쇼 정책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망명을 선언했다.

2. 6. 방북과 월북

원래 반공 성향이 강했던 최덕신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이 커지면서 1976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77년 11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 정권의 민족 말살 정책과 매국적인 군사 파쇼 정책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 체류 중, 6.25 전쟁 때 납북된 아버지 최동오의 묘소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1976년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40] 그는 애국렬사릉에 잘 안장된 부친의 묘를 보고 마음이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39] 최덕신의 맏아들 최건국은 2000년 인터뷰에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나 미국에 나가 살면서 김일성 주석의 통일토론 제의를 수락해 76년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또한 망명 중 최홍희와의 교류를 통해 북한에 대한 생각이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

최덕신은 1978년을 포함하여 이후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김일성을 만났고, 북한 당국의 환대를 받았다.[40] 그는 북한 체제를 직접 보면서 점차 북한에 동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최건국은 아버지가 북한으로 간 직접적인 계기를 김일성의 ‘인력(引力)’ 때문으로 보았다.[40]

결국 1986년 4월, 최덕신은 아내 류미영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41] 같은 해 9월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으로 영구 귀국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북한 영주권을 취득했다. 당시 남한에는 어머니와 차남 최인국을 포함한 성인 자녀들이 남아 있었으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1979년 11월 세상을 떠났다.[42]

북한에서 최덕신은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며 조국통일상도 받았다.

1989년 11월 16일 사망했으며, 11월 18일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뒤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12]

한편, 최덕신의 월북은 천도교 교세 약화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68년 100만 명에 달했던 교인 수가 2009년에는 10만 명 미만으로 크게 줄어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39]

2. 7. 가족 관계

아버지는 김일성이 다녔던 만주 화성의숙(樺成義塾)의 교장을 지낸 최동흔(崔東旿)이다. 최동흔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최덕신은 9세 때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8] 해방 후 최동흔은 북한으로 가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 겸 상무위원 등을 지냈다. 최덕신은 한국 전쟁 휴전 후 제1군단장으로 재직할 당시, 아버지의 북한행에 대한 주변의 의혹이 제기되자 아버지가 납치되었다고 주장했다.[11]

최덕신은 1976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때 미국에 거주하던 동생에게 의지하였다. 이후 1986년 4월, 아내 유미영(柳美英)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부부는 북한에서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 고위직을 역임했다. 최덕신은 1989년 사망하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12]

아들 최인국(崔仁國)은 대한민국에 남았으나, 부모의 월북으로 인해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2019년 7월 6일, 최인국이 북한에 입국하여 영주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22]

3. 북한에서의 활동

미국 망명 생활 중 최홍희를 통해 북한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1986년 4월, 아내 유미영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11]

북한에서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을 맡았으며, 이외에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여러 직위를 역임했다. 북한 정부로부터 조국통일상도 받았다.[43]

1989년 11월 16일 사망했으며,[12] 11월 18일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후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43][12] 북한에서 제작된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의 첫 부분인 1부부터 4부까지는 최덕신의 삶을 다루고 있다.[44]

4. 평가

최덕신은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한 경력이 있으나,[8] 대한민국 육군 제11사단장 재직 시절 거창 양민 학살 사건산청·함양 양민 학살 사건을 일으킨 책임자로 지목되어 군 경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10]

5·16 군사 정변 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며 외무부 장관, 주 서독 대사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외무부 장관 시절 한일 외상 회담에 참여했으나 실질적인 협상은 김종필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며,[11] 주 서독 대사 재임 중에는 동베를린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천도교 교령으로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를 도왔으나, 유신헌법 공포 이후 박정희 정권과 관계가 멀어졌다.

김대중 납치 사건과 문세광 사건 등을 겪으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 선회하였고, 결국 미국으로 망명하여 1977년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망명 생활 중 최홍희 등의 영향을 받아 북한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고, 1986년 부인 유미영과 함께 북한으로 영구 이주하였다. 북한에서는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활동하다 1989년 사망 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12]

이처럼 독립운동 참여, 대한민국 정부 고위직 역임, 반독재 투쟁, 그리고 최종적인 월북과 북한 정권 참여라는 극적인 삶의 궤적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며 논쟁적이다. 특히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과 월북 행위는 대한민국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주요 원인이 된다.

5. 학력


  • 중화민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 졸업 (1936년)[8]
  • 황푸군관학교 졸업
  • 육군사관학교 특별 제3기 졸업 (1947년)[9]
  •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 미국 포트 라일리 육군참모학교 초등군사과정 졸업 (1949년)
  • 미국 포트 베닝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과정 졸업 (1950년)
  • 육군보병학교 졸업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6. 저서


  • ''판문점 그리고 그 후'' (1972년, 뉴욕 Vantage Press)
  • ''민족과 나-통일의 길 한길에'' (정석철 역, 1984년, 통일평론사)
  • ''남한 땅에서 30년-민족 분단의 비극 속에서'' (1985년)
  • ''나와 조국: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1987년, 평양 조선외국어출판사)
  • ''민족의 활로를 찾아-민족의 운명을 생각하며'' (1987년)
  • ''30년 남한 생활: 민족 분단의 비극 속에서'' (1989년, 평양 조선외국어출판사)
  • ''조국의 품에 안겨'' (1990년, 평양 조선외국어출판사)[23]

참조

[1] 웹사이트 Choi Duk Shin, 75, Ex-South Korean Envoy https://www.nytimes.[...] 1989-11-19
[2] 웹사이트 ko:최동오와 아들 최덕신 고단한 민족사 넘나들다 애국렬사릉에 나란히 묻히다 http://www.minjog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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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저널인용 월북한 전 외무장관 최덕신, 반공투사서 북열사된 이유 https://news.naver.c[...] 중앙일보 2019-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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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저널인용 “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https://www.sisain.c[...] 시사IN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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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저널인용 MD에 사무실 낸 최덕신 전 외무장관, 방북 후 돌변 http://www.koreatime[...] 미주한국일보 2019-02-17
[36] 저널 기구한 참으로 기구한…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00-08-23
[37] 저널 대통령은 왜 천도교를 적극 도왔을까 http://www.dailian.c[...] 데일리안 2009-03-03
[38] 저널 천도교 교령의 대수(代數)에 관한 고찰 https://blog.naver.c[...] 신인간 766호(2014.7) 2014-07-03
[39] 저널 [한국의 창종자들]남북 분단 후 교세 급격히 하락 https://news.naver.c[...] 주간경향 2008-08-07
[40] 저널 최덕신씨 북한행의 '정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0-09-20
[41] 뉴스 류미영씨 평양서 사돈 상봉 불발 http://nk.chosun.com[...] 조선일보 2001-01-27
[42] 저널 최인국 '기획 월북'한 듯···부친 최덕신 전 외무장관은 '남한판 황장엽' https://news.naver.c[...] 중앙일보 2019-07-07
[43] 뉴스 한국 언론이 처음 가 본 북한 '열사릉' 〈하〉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7-07-10
[44] 뉴스 민족과 개인의 운명은 하나 - 북한의 1990년대 변화가 담긴 〈민족과 운명〉 컬처뉴스 2005-10-11
[45] 저널 "나는 한국 국적자다 떳떳하게 귀국해 가족 만나고 싶다" https://www.sisain.c[...] 시사IN 2007-11-08
[46] 저널 '월북' 류미영 아들 최인국, 영주 위해 입북.."방북신청 안해" https://news.v.daum.[...] 연합뉴스 2019-07-07
[47] 뉴스 북한,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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