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생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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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생문 사건은 1895년 11월 김홍집 내각의 반대파가 주도하여 일어난 고종의 입궐 시도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친미·친러 세력이 반발하며, 미국 선교사들과 미국 및 러시아 공사 등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이도철 등이 춘생문과 북장문을 통해 입궐하려 했으나, 밀고와 어윤중의 설득으로 실패하고, 관련자들은 처벌받았다. 이 사건은 고종의 입지를 위협하려는 시도로, 이후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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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은 1895년 고종이 위생상의 이유로 시행한 머리를 자르는 정책으로,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반발과 을미사변으로 항일 의병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신교육과 여성 단발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 1895년 한국 - 홍범 1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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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생문 사건 | |
---|---|
사건 개요 | |
제목 | 춘생문 사건 |
한글 표기 | 춘생문사건 |
한자 표기 | 春生門事件 |
로마자 표기 | Chunsaengmun-sagon Incident |
사건 배경 | |
발생 시기 | 1969년 10월 |
관련 인물 | 김대중, 김성곤, 이후락 |
사건 내용 | |
개요 | 박정희 대통령 당시,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납치하려던 계획의 일부 |
장소 | 춘생문 (당시 중앙정보부 위치) |
목표 | 김대중 납치 및 정치적 암살 시도 |
사건 결과 | |
결과 | 미수 |
추가 정보 | 계획 일부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되지 못함 |
2. 사건의 배경
김홍집 내각의 반대파가 주동하고, 을미사변 때 외국공관으로 피신한 인사들,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등 미국 선교사, 또 주조선 미국 공사 알렌과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5] 또한 경무사 윤웅렬 등도 여기에 협조하였다.
2. 1. 을미사변
을미사변 당시 외국공관으로 피신한 인사들과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등 미국 선교사, 그리고 주조선 미국 공사 알렌과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5] 또한 경무사 윤웅렬 등도 여기에 협조하였다.2. 2. 친미·친러 세력의 반발
김홍집 내각의 반대파가 주동하고, 을미사변 때 외국공관으로 피신한 인사들, 그리고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등 미국 선교사, 또 주조선 미국 공사 알렌과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5] 또한 경무사 윤웅렬 등도 여기에 협조하였다.11월 28일 이도철과 이민굉은 동별궁에서 칙령을 칭해 남만리· 이규홍 양중대장에게 800명의 군사들을 따르게 하여 안국동을 경유하여 건춘문으로 문을 열고 궁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문을 열수가 없어 궁궐 담을 끼고 삼청동으로 올라가 북장문과 춘생문에서 담을 넘어 입궐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중추원 의관 안경수가 변절하여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밀고하였고, 친위대대장 이진호도 서리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여[6] 궁은 숙위병에게 더 철저히 호위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어윤중도 현장에 나타나 동원된 군사들에게 중지를 설득하였다. 동원된 군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군사 수십 명과 이도철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핵심 주모자들은 역모죄로 목숨을 잃었다.[7] 윤웅렬은 함경도의 북병영과 남병영의 병력들까지 동원했으나 사태가 실패하자 언더우드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 뒤로 변복하고 중국으로 도피,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1896년에 조선의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3. 춘생문의 위치
4. 사건의 전개
1895년 11월 28일, 이도철과 이민굉은 동별궁에서 칙령을 사칭해 남만리, 이규홍 두 중대장에게 800명의 군사를 이끌게 했다. 이들은 안국동을 거쳐 건춘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열리지 않아, 궁궐 담을 따라 삼청동으로 올라가 북장문과 춘생문에서 담을 넘어 입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추원 의관 안경수가 변절하여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밀고했고, 친위대대장 이진호도 서리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여[6] 궁궐 수비는 더욱 강화되었다.
어윤중은 현장에 나타나 동원된 군사들에게 중지를 설득하였다.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군사 수십 명과 이도철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주모자들은 역모죄로 목숨을 잃었다.[7] 윤웅렬은 함경도 북병영과 남병영 병력까지 동원했으나, 거사가 실패하자 언더우드 집에 피신했다. 이후 변복하고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가 1896년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11월 29일 새벽 1시경, 3발의 신호탄과 함께 약 800명의 병사와 40명의 자객들이 경복궁 춘생문 앞에 나타나 문을 열라고 외쳤다. 춘생문 수비대는 4개 소대(중대장 이겸제, 소대장 이승규·이조현·권모, 대대장 이범래)였다. 약 200명의 폭도들이 춘생문 서쪽 북장문으로 들이닥쳐 문을 부수고 침입했으나, 훈련병 5명 중 4명은 도주하고 오장은 체포되었으며, 보초병 6명은 폭도로부터 도주했다. 대대장 이범래(1개 대)는 북장문에서 폭도들을 설득했고, 임시 광화문 수비병 1개 소대가 춘생문으로 이동했다. 폭도들은 퇴각했고, 대장 이동철, 중대장 남만리·이규홍, 자객 4명, 병사 5명이 체포되었다(폭도 스스로 대장 이동철을 체포하여 투항). 폭도 별동대는 여전히 문 밖에 집결해 있었다. 어윤중의 설득으로 폭도들은 영내로 물러갔다.
리젠드르(Charles Le Gendre), 언더우드(Underwood), 아펜젤러(Appenzeller), 에비슨(Evison), 닌스테츠드(Ninstedt), 다이(Dai) 등 6명의 미국인들도 궁궐에 들어가려다 권총을 꺼내 위협했으나 초병에게 저지당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와 에비슨(Evison)은 궁궐 안에 잠입했고, 고종 앞에 나타난 언더우드(Underwood)는 물러갔다.
사건의 전개 과정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간 | 내용 |
---|---|
오전 1시경 | 3발의 신호탄과 함께 병사(약 800명)와 자객(40명)이 경복궁 춘생문 앞에 들이닥쳐 개문을 외침 |
춘생문 수비대는 4개 소대 (중대장 이겸제·소대장 이승규·이조현·권모, 대대장 이범래) | |
폭도(약 200명)가 춘생문 서쪽 북장문으로 들이닥쳐 문을 파괴하고 침입. 훈련병 5명 중 4명 도주, 오장은 체포, 보초병 6명은 폭도로부터 도주 | |
대대장 이범래(1개 대)가 북장문에서 폭도 설득 | |
임시 광화문 수비병 1개 소대를 춘생문으로 이동 | |
폭도 퇴각, 대장 이동철·중대장 남만리·이규홍 및 자객 4명, 병사 5명 체포 (폭도 스스로 대장 이동철을 체포하여 투항) | |
폭도 별동대는 여전히 문 밖에 집결 | |
어윤중의 설득으로 폭도 일동은 영내로 물러감 | |
미국인 6명(리젠드르, 언더우드, 아펜젤러, 에비슨, 닌스테츠드, 다이)이 궁궐에 돌입하려다 권총을 꺼내 위협했으나 초병에게 저지당함 | |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에비슨은 궁궐 내에 잠입 | |
고종 앞에 나타난 언더우드는 물러감 |
4. 1. 거사 준비
김홍집 내각의 반대파, 을미사변 이후 외국공관으로 피신한 인사들,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등 미국 선교사, 주조선 미국 공사 알렌과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이 직·간접적으로 춘생문 사건에 관여하였다.[5] 경무사 윤웅렬도 이 사건에 협조하였다.1895년 11월 27일, 이범진과 이민형은 경복궁 습격 준비를 시작했다.[7]
11월 28일, 이도철과 이민굉은 동별궁에서 칙령을 사칭하여 남만리, 이규홍 두 중대장에게 800명의 군사를 이끌도록 지시했다. 이들은 안국동을 거쳐 건춘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열리지 않자, 궁궐 담을 따라 삼청동으로 이동하여 북장문과 춘생문에서 담을 넘어 궁궐 진입을 시도하였다.[6]
4. 2. 1차 시도 (건춘문)
김홍집 내각의 반대파가 주동하고, 을미사변 때 외국공관으로 피신한 인사들과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등 미국 선교사, 주조선 미국 공사 알렌과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5] 또한 경무사 윤웅렬 등도 여기에 협조하였다.1895년 11월 28일 이도철과 이민굉은 동별궁에서 칙령을 칭해 남만리· 이규홍 양중대장에게 800명의 군사들을 따르게 하여 안국동을 경유하여 건춘문으로 문을 열고 궁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문을 열수가 없어 궁궐 담을 끼고 삼청동으로 올라가 북장문과 춘생문에서 담을 넘어 입궐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중추원 의관 안경수가 변절하여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밀고하였고, 친위대대장 이진호도 서리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여[6] 궁은 숙위병에게 더 철저히 호위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어윤중도 현장에 나타나 동원된 군사들에게 중지를 설득하였다. 동원된 군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군사 수십 명과 이도철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핵심 주모자들은 역모죄로 목숨을 잃었다.[7] 윤웅렬은 함경도의 북병영과 남병영의 병력들까지 동원했으나 사태가 실패하자 언더우드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 뒤로 변복하고 중국으로 도피,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896년에 조선의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4. 3. 2차 시도 (북장문, 춘생문)
1895년 11월 28일, 이도철과 이민굉은 동별궁에서 칙령을 칭해 남만리· 이규홍 양중대장에게 800명의 군사들을 따르게 하여 안국동을 경유, 건춘문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을 열 수 없어 궁궐 담을 끼고 삼청동으로 올라가 북장문과 춘생문에서 담을 넘어 입궐을 시도하였다.[5] 그러나 중추원 의관 안경수가 변절하여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밀고하였고, 친위대대장 이진호도 서리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여[6] 궁은 숙위병에게 더 철저히 호위되어 실패했다.어윤중도 현장에 나타나 동원된 군사들에게 중지를 설득하였다. 동원된 군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군사 수십 명과 이도철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핵심 주모자들은 역모죄로 목숨을 잃었다.[7] 윤웅렬은 함경도의 북병영과 남병영의 병력들까지 동원했으나 사태가 실패하자 언더우드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 뒤로 변복하고 중국으로 도피,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896년에 조선의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11월 29일의 구체적인 정황은 다음과 같다.
사건 발생 시각 | 내용 |
---|---|
오전 1시경 | 3발의 신호탄과 함께 일단의 병사(약 800명의 병사와 자객 40명)가 경복궁 춘생문 앞에 들이닥쳐 개문을 외침 |
춘생문 수비대는 4개 소대 (중대장 이겸제·소대장 이승규·이조현·권모, 대대장 이범래) | |
폭도 일단(약 200명)이 춘생문 서쪽의 북장문으로 들이닥쳐 문을 파괴하고 침입. 수비병 중 훈련병 5명 → 4명 도주, 오장은 체포되었지만, 보초병 6명 외 폭도로부터 도주 | |
대대장 이범래(1개 대)가 북장문으로부터 폭도에게 설득 | |
임시 광화문 수비병 1개 소대를 춘생문으로 향하게 함 | |
폭도는 퇴각, 대장 이동철·중대장 남만리·이규홍 및 자객 4명, 병사 5명을 체포. (폭도 스스로 대장 이동철을 체포하여 투항) | |
폭도의 별동대는 여전히 문 밖에 집결 | |
어윤중의 설득으로 폭도 일동은 그들의 영내로 물러감 | |
미국인 「리젠드르(Charles Le Gendre)」, 「언더우드(Underwood)」,「아펜젤러(Appenzeller)」,「에비슨(Evison)」,「닌스테츠드(Ninstedt)」,「다이(Dai)」 등 6명도 궁궐에 돌입하려다 권총을 꺼내 위협했으나, 초병에게 거절당함. | |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에비슨(Evison)」은 궁궐 내에 잠입 | |
고종 앞에 나타난 언더우드(Underwood), 물러감. |
4. 4. 실패와 밀고
김홍집 내각의 반대파, 을미사변 당시 외국공관으로 피신했던 인사들,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등의 미국 선교사, 그리고 주조선 미국 공사 알렌과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이 직간접적으로 이 사건에 관여하였다.[5] 경무사 윤웅렬 또한 여기에 협조하였다.1895년 11월 28일, 이도철과 이민굉은 동별궁에서 칙령을 사칭하여 남만리, 이규홍 두 중대장에게 800명의 군사를 이끌게 했다. 이들은 안국동을 거쳐 건춘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열리지 않자, 궁궐 담을 따라 삼청동으로 올라가 북장문과 춘생문에서 담을 넘어 궁궐 진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추원 의관 안경수가 변절하여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밀고하였고, 친위대대장 이진호도 서리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여[6] 궁궐 수비가 강화되어 실패했다.
어윤중은 현장에서 동원된 군사들에게 중지를 설득하였다. 군사들은 흩어졌고, 군사 수십 명과 이도철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핵심 주모자들은 역모죄로 처형되었다.[7] 윤웅렬은 함경도 북병영과 남병영의 병력까지 동원했으나 실패 후 언더우드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후 변복하고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가 1896년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1895년 11월 29일 오전 1시경, 신호탄 3발과 함께 병사 약 800명과 자객 40명이 경복궁 춘생문 앞에 나타나 문을 열라고 외쳤다. 춘생문 수비대는 4개 소대(중대장 이겸제, 소대장 이승규·이조현·권모, 대대장 이범래)였다. 폭도 약 200명이 춘생문 서쪽 북장문으로 쳐들어와 문을 부수고 침입했으나, 훈련병 5명 중 4명은 도주, 오장은 체포되었다. 보초병 6명은 폭도에게서 도망쳤다. 대대장 이범래(1개 대)가 북장문에서 폭도를 설득했고, 임시 광화문 수비병 1개 소대가 춘생문으로 이동했다. 폭도는 퇴각했고, 대장 이동철, 중대장 남만리·이규홍, 자객 4명, 병사 5명이 체포되었다. (폭도 스스로 대장 이동철을 체포하여 투항) 폭도 별동대는 여전히 문 밖에 집결해 있었다. 어윤중의 설득으로 폭도들은 영내로 돌아갔다. 미국인 「리젠드르(Charles Le Gendre)」, 언더우드(Underwood), 아펜젤러(Appenzeller), 에비슨(Evison), 닌스테츠드(Ninstedt), 다이(Dai) 등 6명도 궁궐에 들어가려다 권총을 꺼내 위협했으나 초병에게 저지당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와 에비슨(Evison)은 궁궐 안에 잠입했고, 고종 앞에 나타난 언더우드(Underwood)는 물러갔다.
4. 5. 가담자들의 도피와 체포
1895년 11월 28일 이도철과 이민굉은 동별궁에서 칙령을 칭해 남만리·이규홍 양 중대장에게 800명의 군사들을 따르게 하여 안국동을 경유, 건춘문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5] 그러나 문을 열 수가 없어 궁궐 담을 끼고 삼청동으로 올라가 북장문과 춘생문에서 담을 넘어 입궐을 시도하였다.[5] 하지만 중추원 의관 안경수가 변절하여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밀고하였고, 친위대대장 이진호도 서리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여[6] 궁은 숙위병에게 더 철저히 호위되어 실패했다.어윤중도 현장에 나타나 동원된 군사들에게 중지를 설득하였다. 동원된 군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군사 수십 명과 이도철이 체포되었다.[7] 이로 인하여 핵심 주모자들은 역모죄로 목숨을 잃었다.[7] 윤웅렬은 함경도의 북병영과 남병영의 병력들까지 동원했으나 실패하자 언더우드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 뒤 변복하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896년 조선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5. 사건의 결과
춘생문 사건 가담자들은 처벌을 받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미국인들도 해고되거나 추방되었다.[2]
5. 1. 관련자 처벌
처벌 내용 | 대상자 |
---|---|
근신 | 이완용, 이채연, 현흥택, 민상호 |
종신형 | 이민형, 이충구, 전우기, 노흥규 |
태형 100, 징역 3년 (1등 감형, 취역 면제) | 안경수, 남만리 |
3년간 지방 근신[2] (태형 100, 징역 3년에서 면제) | 이재순 |
사형 (수괴) | 이도철(대장), 임최수(시종직) |
왕궁 수비 촉탁 해고 및 왕궁 추방 | 미국인 다이와 닌스테드 |
참조
[1]
문서
李軫鎬の内通により、未遂に終わったという説もある。
[2]
문서
のちの淸安君
[3]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춘생문 사건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첩보),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s://terms.naver.[...]
[4]
서적
청와대 주변 역사·문화 유산
청와대경호실
2007
[5]
서적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참좋은친구
2019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춘생문사건 [春生門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
[7]
웹사이트
춘생문 사건 개설
http://seoul600.seou[...]
서울특별시
201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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