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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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윤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869년 과거에 급제하여 교리, 지평 등을 지냈다.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근대 문물을 시찰하고, 서북경략사로서 청나라, 러시아 등과 국경을 정하는 데 노력했다. 갑오개혁 당시 김홍집 내각의 탁지부대신을 지냈으나, 아관파천 이후 친일파로 몰려 피신하던 중 살해되었다. 저서로는 《종정연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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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중 |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어윤중 |
한자 이름 | 魚允中 |
로마자 표기 | O Yun-jung |
상세 정보 | |
직업 | 조선의 문신, 정치인 |
2. 생애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1869년 별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2]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서 청나라, 러시아 제국과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했으며, 두만강(圖們江)과 압록강(鴨綠江) 연안의 국경 지대를 조사하고, 조선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선 획정에 힘썼으며, 중강 무역 장정, 회녕 통상 장정 등을 협정했다.[2]
사후 규장각 대제학으로 특별 증직되고 1909년 7월에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2] 저서로는 「종정연표」가 있다.
2. 1. 초기 관직 생활
1869년 별시 병과에 합격하여 교리, 지평 등을 지냈다.[2]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881년 일본에 교육생들을 파견시키는 업무를 맡았다.[2] 암행어사 시절 백성들의 존경과 흠모의 관심 대상이었던 신재효를 잠시 감찰하기도 했다.[2]1881년 4월 고종의 명을 받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9월 귀국하여 일본 대장성과 농상무성의 업무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개국 정책을 주장했다.[2] 같은 달 상하이로 건너가 현지 관리를 접견하고, 강남기기제조국 등을 시찰했으며, 10월에는 톈진으로 가서 이홍장과 주복 등을 알현하고 양무운동을 시찰했다.[2] 이듬해 문의관에 임명되어 톈진과 베이징에 파견되었다.[2] 같은 해 6월 임오군란 소식을 접하고 김윤식과 함께 청나라 군대의 출병을 요청하고, 수행하는 형태로 귀국했다.[2]
이후 대외 교섭 업무에 종사하여, 1882년 미국-조선 수호통상조약 조문 작성에 참여했고, 중조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성립에도 관여했다.[2]
2. 2. 개화 정책 추진
서북경략사로서 청나라, 러시아 제국과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했다. 1881년 일본에 교육생들을 파견시키는 업무를 맡았다.[2] 1886년에는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역적으로 연좌되어 굶어 죽은 스승 박원양 내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가 심순택 등에게 심한 비판을 받고 이를 해명하기도 하였다.그 후 승지, 참판 등을 거쳐 1893년 양호순무사로서 보은집회를 해산시켰다.[2] 윤치호는 해평 윤씨 집안의 서자 출신의 무관 윤웅렬의 아들이었는데, 윤웅렬은 아들의 앞날을 위해 농업학교나 기술학교 대신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윤웅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윤치호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어윤중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을 설득시켜 윤치호를 도진샤에 입학하게 했다.
2. 3. 갑오개혁과 최후
1894년 김홍집 내각의 탁지부대신으로 갑오개혁에 참여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친일파로 몰려 피신하던 중, 경기도 용인에서 살해되었다.[2]3. 대외 관계 및 활동
1881년 4월, 고종의 명을 받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9월에 귀국했다. 그는 일본 대장성과 농상무성의 업무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개국 정책을 주장했다. 같은 달 안에 상하이로 건너가 현지 관리를 접견하고, 강남기기제조국 등을 시찰했으며, 10월에는 톈진으로 가서 이홍장과 주복 등을 알현하고 양무운동을 시찰했다.[2] 이듬해에는 문의관에 임명되어 톈진과 베이징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임오군란 소식을 접하고 김윤식과 함께 청나라 군대의 출병을 요청하고, 수행하는 형태로 귀국했다.[2]
이후 대외 교섭 업무에 종사하여, 1882년 미국-조선 수호통상조약 조문 작성에 참여했다.[2] 또한 중조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의 성립에도 관여했다. 1883년에는 평안도와 함경도의 국경 무역 문제 처리와 지방 간의 행정을 감독하기 위한 임시 관직인 서북경략사에 임명되어,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의 국경 지대를 조사하고, 조선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선 획정에 힘썼으며, 중강 무역 장정, 회녕 통상 장정, 중조 상민 수륙 무역 장정 등을 협정했다.[2]
4. 사상과 평가
어윤중은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서북경략사로서 청나라, 러시아 제국 등과 국경을 정하는 데 노력했다.[1] 1881년 일본에 교육생들을 파견시키는 업무를 맡았고, 암행어사 시절 백성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던 신재효를 잠시 감찰하기도 했다.[1]
1886년에는 갑신정변 실패 후 역적으로 연좌되어 굶어 죽은 스승 박원양 내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가 심순택 등에게 심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1]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증조부 | 어재상(魚在象) |
친할아버지 | 어명능(魚命能) |
아버지 | 어약우(魚若愚) |
어머니(생모) | 여주 이씨 |
이복 남동생 | 어윤수(魚允修) |
이복 남동생 | 어윤랑(魚允浪) |
서숙부 | 어취우(魚就愚) |
서숙부 | 어창우(魚昌愚) |
서숙부 | 어현중(魚玄仲) |
사촌 | 어윤적(魚允迪) |
사촌 | 어윤희(魚允姬) |
외할아버지 | 이용규(李容逵)[3] |
참조
[1]
웹사이트
어윤중(魚允中)
http://encykorea.aks[...]
2022-07-08
[2]
웹사이트
2월17일, 116년 전 오늘… 여장한 어윤중 “꽃가마 피습 당해 죽었다”
https://www.cbinews.[...]
2012-02-16
[3]
웹사이트
조선조 방목
http://kdaq.empa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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