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팔각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탑골공원 팔각정은 탑골공원 내에 위치한 팔각형 정자로,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건립되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원각사가 있었으며, 이후 장악원, 연방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역사적인 장소이며, 1969년 한국은행권 오십원 지폐에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함께 도안되었다. 건축가 심의석이 참여하여 1897년에 완공되었으며, 현재 남산 팔각정의 모본이 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97년 완공된 건축물 - 피어헤드 빌딩
피어헤드 빌딩은 1897년 윌리엄 프레임이 설계하고 프랑스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을 융합하여 건설되었으며, 1947년 카디프 항의 행정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2010년 웨일스 역사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 1897년 완공된 건축물 - 호찌민 시립 극장
호찌민 시립 극장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를 모방하여 건설된 플랑부아양 양식의 극장으로, 한때 남베트남 하원 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사이공 함락 후 다시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잔재라는 비판도 있다. - 심의석의 건축물 - 배재학당
미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설립한 배재학당은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등 저명한 동문과 개혁적 교원들을 배출하며 민족의식 고취, 독립운동,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한국의 근대 교육 기관이다. - 심의석의 건축물 -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 중 하나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교회 건축물인 벧엘예배당과 파이프 오르간 설치, 정동부인병원 설립 등의 '최초' 기록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을 배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대한제국의 건축물 -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 중 하나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교회 건축물인 벧엘예배당과 파이프 오르간 설치, 정동부인병원 설립 등의 '최초' 기록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을 배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대한제국의 건축물 - 사동궁
의친왕 이강의 사저였던 사동궁은 의왕부 설치, '이강공저', '이건공저'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현재는 종로구청이 매입하여 공영주차장과 인사동 관광홍보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탑골공원 팔각정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탑골공원 팔각정 |
로마자 표기 | Tapgol gongwon palgakjeong |
한자 표기 | 塔골公園 八角亭 |
![]()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 탑골공원) |
문화재 지정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서울특별시 |
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73 |
지정일 | 1989년 9월 11일 |
상세 정보 | |
시대 | 1897년 |
종류 | 정자 |
수량 | 1동 |
면적 | 토지 152.8m2 |
2. 역사
탑골공원 팔각정은 조선 초 원각사 터에 세워졌다. 원각사는 고려 시대 흥복사였으나 세조 10년(1464)에 중건되며 이름이 바뀌었고, 연산군 10년(1504) 폐사되었다. 이후 장악원, 연방원(기생방) 등으로 사용되다가 중종 9년(1514) 원각사 재목이 공공건물에 쓰이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는 원각사탑과 비(碑)만 남아있다.
조선 말 고종 때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栢卓安)의 건의로 1895년(또는 1896년) 도시공원이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황실공원, 탑골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부터 탑골공원으로 공식 명칭이 정해졌다.
1897년 건립된 팔각정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군악대 연주 장소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황실 관현악단이 사용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일요일에만 일반에 공개되다가 1913년 7월부터 평일에도 개방되었다.
도편수 배희한(裵喜漢)에 따르면, 경복궁 중건과 창덕궁 수리에 참여했던 궁궐 목수 최백현이 광화문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과 함께 팔각정을 지었다고 한다. 최백현은 최원식에서 배희한으로 이어지는 도편수 계보의 스승이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팔각정에서 청년 학도와 애국 시민들이 학생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 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3·1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1969년 3월 발행된 한국은행권 오십원 지폐 앞면에 국보 제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함께 팔각정이 그려졌다.[1]
2. 1. 조선 시대
탑골공원 자리에는 조선 초기에 원각사가 있었다. 원각사는 고려 시대 흥복사를 세조 10년(1464)에 중건하며 개칭한 것이다. 연산군 10년(1504)에 원각사가 폐사되고, 이듬해 장악원이 이전해왔다. 이후 연방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기생방이 되었다. 연산군 축출 후 한성부 관청으로 사용되다가, 중종 9년(1514)에 원각사의 재목이 공공건물 영선에 사용되면서 원각사는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는 원각사탑과 비(碑)만 남아 있다.2. 2.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탑골공원은 조선 말 고종 때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栢卓安)이 1895년(또는 1896년)에 도시공원으로 만들 것을 건의하여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황실공원이었으며, 탑이 있어 탑골공원이라 불렸다.탑골공원 팔각정은 1897년에 건립되었고,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군악대 연주 장소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팔각정은 황실 관현악단이 사용하던 황실 음악 연주소였다. 1913년 7월부터 평일에도 일반인에게 관현악 연주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팔각정은 3·1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1일, 청년 학도와 애국 시민들이 이곳에 모여 학생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였다.
2. 3. 대한민국
1895년(또는 1896년) 영국인 총세무사 존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栢卓安)의 건의로 도시공원이 조성되었다. 이 공원은 황실공원이었으며, 탑이 있어 탑골공원이라 불렸다. 이후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다가 1991년부터 탑골공원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다.[1]1897년 건립된 팔각정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군악대 연주 장소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황실 관현악단이 사용하던 황실 음악 연주소였으며, 일요일에 일반에 공개되어 많은 시민들이 관현악을 들으러 모였다. 1913년 7월부터는 평일에도 일반에 공개되었다.[1]
도편수 배희한(裵喜漢)에 따르면, 경복궁 중건과 창덕궁 수리에 참여했던 궁궐 목수 최백현이 광화문에 있는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과 함께 팔각정을 지었다고 한다. 최백현은 최원식에서 배희한으로 이어지는 도편수 계보의 스승이었다.[1]
1919년 3·1 운동 당시 청년 학도와 애국 시민이 이곳에 모여 학생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 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여 3·1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1969년 3월 발행된 한국은행권 오십원 지폐 앞면에 국보 제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함께 팔각정 모습이 그려졌다.[1]
3. 구조
탑골공원 팔각정은 내부 고주와 바깥쪽 평주로 내외진을 형성하는 팔각형 평면의 건물이다. 기둥, 몰익공, 운공, 겹처마, 팔각지붕, 절병통, 토수, 툇보, 익공, 대들보, 동자주, 상중도리, 각서까래, 부채꼴 모양 지붕, 충량, 찰주, 장대석, 층단식 기단, 박석, 모루단청, 낙양, 무궁화 당초, 소나무, 난초, 국화 등의 요소들이 사용되었다. 외관 비례가 훌륭하여 남산 팔각정의 모본(模本)이 되었다.
3. 1. 팔각정
탑골공원 팔각정은 팔각형 평면으로, 내부 고주와 바깥쪽 평주로 내외진을 형성하는 기둥열로 구성되어 있다. 외진 한 변의 길이는 약 3.66m이다. 평주의 높이는 약 3.35m이고, 고주의 높이는 약 4.27m이다. 평주 상부에는 몰익공(勿翼工)에 운공(雲工)이 부가되었고, 겹처마의 팔각지붕으로 되어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2단의 절병통을 설치하였고, 사래 끝에는 토수를 꽂아 마무리했다.평주와 고주 사이에는 툇보를 걸고 추녀 방향으로 기둥 외측에 익공을 설치하였다. 내부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걸었고, 고주 상부에서 대들보 머리가 내밀었는데 좌우 균형을 위해 밑에 네 방향으로 익공을 설치하였다. 대들보와 직각 방향으로도 단면이 작은 부재로 보를 걸었고, 그 상부에 동자주를 세우고 상중도리를 얹었다. 고주와 상중도리 사이에는 각서까래를 사용하여 부채꼴 모양의 지붕을 구성하였다. 지붕 중앙부는 중심에서 십자로 충량을 걸어 찰주를 받도록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을 둘러가며 장대석으로 5단 층단식 기단으로 처리하였고, 내부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이며, 외진주열 각 면에 낙양을 설치하고 무궁화 당초로 장식하였다. 머리초 사이 계풍에는 소나무, 난초, 국화 등의 그림을 넣어 한국적인 정서를 강조했다. 이 건물은 외관상 비례가 훌륭하여 남산 팔각정의 모본(模本)이 되기도 하였다.
4. 건축
4. 1. 건축가
심의석(沈宜錫)이 1897년 탑골공원 팔각정 건축에 참여하였다.[1]5. 3.1 운동과의 연관성
탑골공원 팔각정은 1919년 3월 1일, 청년학도와 애국시민들이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 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였던 3·1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1] 1969년 3월 발행된 한국은행권 오십원 지폐 앞면에는 국보 제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함께 팔각정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1]
6. 같이 보기
- - 이 문서는 내용 부분에 비어있는 링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회루
낙천정
망원정
보신각
부용정
봉황각
석파정
세검정
아소정
오운정
용양봉저정
용왕정
향원정
효사정
황학정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