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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정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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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망원정 터는 양화대교 북단, 양화진 서쪽에 위치한 정자 터로, 조선 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1424년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 별서를 짓고 한강 경치를 즐기던 곳으로, 세종이 '희우정'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후 성종이 '망원정'으로 이름을 바꾸고, 연산군 때 확장 공사가 있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중단되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87년 서울특별시에서 터를 발굴하고 1989년 재건되었다. 현재는 강변북로 옆에 위치하며,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을 반영한 누각 형식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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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정 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망원정 터
서울 망원정 터
국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유형기념물
지정 번호9
지정일1990년 6월 18일
주소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8안길 23 (합정동)
시대조선시대
소유서울시
면적1,436m²
수량1동
참고서울 망원정

2. 역사

망원정은 양화대교 북단, 양화진 서쪽 강변북로 옆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한강의 경치를 굽어보는 얕은 언덕 위에 서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겨 찾던 명소 중 하나였다. 양화진은 조선시대에 한강을 건너 양천ㆍ김포 방향으로 나가는 큰 나루터로 수상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상 요충지였다.

== 조선 전기: 희우정 건립과 세종의 방문 ==

1424년,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 별서(別墅)를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며 한강의 경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25년, 가뭄이 계속되자 세종이 농민의 삶을 살피기 위해 서쪽 교외로 나왔다가 효령대군의 새 정자에 올랐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니 매우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어 주었다. 효령대군은 왕이 행차하고 정자의 이름까지 지어준 것에 감사하여 글씨로 이름을 날리던 부제학 신장(申檣)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문장을 잘 짓는 변계량(卞季良)에게 내용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 글은 《동문선》에 〈희우정 기문〉으로 실려 있다. 변계량은 기문에서 희우정의 제도와 주변 풍경을 묘사하며, 그곳에서 느끼는 감흥을 "황홀하여 날개가 돋아 푸른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라고 칭송하였다.

세종은 그 후로도 수차 희우정에 들러 군사들의 훈련을 친히 사열하고, 시를 짓고 그림도 그리게 하였다. 이 당시 따라왔던 안평대군이 그린 도원몽중도첩/桃源夢中圖帖일본어이 지금 일본 덴리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 조선 중기: 망원정으로 개칭과 문인들의 풍류 ==

효령대군이 별서(別墅)를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며 강물을 즐기던 곳에 지어진 희우정은, 1484년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효령대군으로부터 얻어 고쳐 지었다. 성종은 정자에 올라 멀리 산과 강을 잇는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망원정(望遠亭)'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월산대군은 눈 덮인 양화벌의 겨울 경치를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 칭하며 한성십영(漢城十詠) 중 하나로 꼽았다.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은 망원정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밤의 정취를 시로 읊었는데, "석양이 늦었다고 높은 다락에 안 오르리, 좋은 풍광 오래 즐기며 웃는 소리 끊이지 않네... 난간을 의지해도 평생 꿈길 찾을 수 없는데, 촛불을 잡으니 이 밤의 놀이 참으로 좋으네."라는 구절을 통해 망원정이 강변에 가깝고 누각 형식의 건물로 난간이 둘러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조선 후기: 연산군 대의 확장 공사와 중종반정 ==

1506년 7월, 연산군이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공사가 중단되면서 망원정은 옛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 일제 강점기 ==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망원정지 앞은 지금 강변북로가 되었으며, 주변 일대에는 주택가가 조성되었다.

== 해방 이후 ==

서울특별시에서는 1987년에 정자터를 발굴하고, 1989년 7월 정자를 재건하였다. 경사진 언덕에 선 이 정자는 전면은 장초석, 후면은 일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누 형식으로 재건된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 5량가 무고주(無高柱)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에 단청을 하였다. 지붕의 마루에는 양성을 하였고, 첨차 외단 상·하 익공 사이는 분리되었다. 창방 위로는 화반을 두고, '人'자 대공을 사용하여 조선초기 공포 형식을 반영하려고 하였다. 강변북로 쪽 정면 처마 아래에는 '望遠亭(망원정)', 안에는 '喜雨亭(희우정)' 현판을 달았다.

건물 왼편인 동남쪽 아래로는 솟을삼문을 내었으나, 강변북로가 바로 접하여 있어 이 문을 통해 진입하는 것은 불편하다. 건물 뒤 동쪽 아래로는 협문을 세워 일반인들 출입통로로 하였고, 그 옆에 관리실 건물이 있다. 망원정을 바로 옆에서 마주하며 한강을 내려보는 잠두봉에는 절두산 복자기념성당이 서 있다.

2. 1. 조선 전기: 희우정 건립과 세종의 방문

1424년,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 별서(別墅)를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며 한강의 경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25년, 가뭄이 계속되자 세종이 농민의 삶을 살피기 위해 서쪽 교외로 나왔다가 효령대군의 새 정자에 올랐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니 매우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어 주었다. 효령대군은 왕이 행차하고 정자의 이름까지 지어준 것에 감사하여 글씨로 이름을 날리던 부제학 신장(申檣)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문장을 잘 짓는 변계량(卞季良)에게 내용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 글은 《동문선》에 〈희우정 기문〉으로 실려 있다. 변계량은 기문에서 희우정의 제도와 주변 풍경을 묘사하며, 그곳에서 느끼는 감흥을 "황홀하여 날개가 돋아 푸른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라고 칭송하였다.

세종은 그 후로도 수차 희우정에 들러 군사들의 훈련을 친히 사열하고, 시를 짓고 그림도 그리게 하였다. 이 당시 따라왔던 안평대군이 그린 도원몽중도첩/桃源夢中圖帖일본어이 지금 일본 덴리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2. 2. 조선 중기: 망원정으로 개칭과 문인들의 풍류

효령대군이 별서(別墅)를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며 강물을 즐기던 곳에 지어진 희우정은, 1484년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효령대군으로부터 얻어 고쳐 지었다. 성종은 정자에 올라 멀리 산과 강을 잇는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망원정(望遠亭)'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월산대군은 눈 덮인 양화벌의 겨울 경치를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 칭하며 한성십영(漢城十詠) 중 하나로 꼽았다.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은 망원정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밤의 정취를 시로 읊었는데, "석양이 늦었다고 높은 다락에 안 오르리, 좋은 풍광 오래 즐기며 웃는 소리 끊이지 않네... 난간을 의지해도 평생 꿈길 찾을 수 없는데, 촛불을 잡으니 이 밤의 놀이 참으로 좋으네."라는 구절을 통해 망원정이 강변에 가깝고 누각 형식의 건물로 난간이 둘러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3. 조선 후기: 연산군 대의 확장 공사와 중종반정

1506년 7월, 연산군이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공사가 중단되면서 망원정은 옛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3. 근현대

3. 1. 일제강점기: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유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망원정이 유실되었다. 망원정지 앞은 지금 강변북로가 되었으며, 주변 일대에는 주택가가 조성되었다.

3. 2. 대한민국: 망원정 재건과 현재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망원정은 1987년 서울특별시에서 정자터를 발굴하고, 1989년에 재건되었다. 현재 망원정은 강변북로 옆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주택가가 조성되어 있다. 재건된 망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5량가 무고주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의 형태이며,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지붕 마루에는 양성을 하였고, 첨차 외단 상·하 익공 사이는 분리되었으며, 창방 위로는 화반을 두고 '人'자 대공을 사용하였다. 강변북로 쪽 정면 처마 아래에는 '望遠亭(망원정)', 안에는 '喜雨亭(희우정)' 현판을 달았다. 건물 왼편 동남쪽 아래로는 솟을삼문이 있으나, 강변북로와 바로 접하여 있어 진입이 불편하다. 건물 뒤 동쪽 아래로는 협문과 관리실 건물이 있다. 망원정 옆에는 잠두봉 절두산 순교성지가 위치하고 있다.

4. 건축

4. 1. 위치 및 조망

4. 2. 구조 및 양식

4. 3. 현판

5. 문화적 의의

5. 1. 조선시대 문인들의 교류 장소

5. 2. 문학 작품 속 망원정

6. 주변 명소

6. 1. 잠두봉 절두산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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