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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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화문은 1395년 경복궁과 함께 창건된 조선의 정문으로,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었으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으로 인해 이전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콘크리트로 복원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 고종 중건기 모습으로의 복원 사업이 진행되어 2010년 광복절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현재는 광화문광장과 함께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으며, 월대 복원과 현판 교체 등 지속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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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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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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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광화문 |
한자 | 光化門 |
로마자 표기 | Gwanghwamun |
일본어 표기 | クァンファムン (가타카나), こうかもん (히라가나) |
건축 정보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좌표 | 37°34′33.68″N 126°58′36.84″E |
상태 | 사용 중 |
완공 | 1395년 1864년 (복원) 1968년 (복원) 2010년 (복원) |
파괴 | 1592년 (임진왜란) 1950년 (한국 전쟁) |
철거 | 1927년 (이전) |
용도 | 경복궁 정문 |
2. 역사
광화문은 1395년 조선 경복궁의 정문으로 처음 건설되었다. 임진왜란(1592~1598) 때 화재로 파괴되어 250년 이상 폐허로 남아 있었다.[2][3] 고종 황제 시대의 섭정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1867년에 경복궁과 함께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을 위해 광화문을 국립민속박물관 현재 위치의 남동쪽으로 옮겼다.[4] 한국 전쟁으로 목조 구조물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1968년 박정희 정권 당시 돌 기단은 조선총독부 건물 앞으로 옮겨졌으며, 파괴된 목조 구조물은 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이때 현판은 박정희가 직접 한글로 썼다.
2006년 12월부터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거쳐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5] 문은 원래 위치보다 남쪽으로 14.5미터 이동되었고, 목조 구조물은 다시 재건되었다. 경복궁의 남북 중심축과 정확히 일치하도록 문의 위치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복원 공사에는 한국에서 엄선된 소나무가 사용되었다.[6]
광복절을 기념하여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공사 비용은 280억원이었다. 복원된 광화문의 새로운 현판이 같은 날 공개되었는데, 현판의 글씨는 고종의 중건 사업 책임자인 임태영 장군의 한자 서체를 바탕으로 하였다. 배경은 흰색이며, 양용호 장인이 그린 단청으로 테두리를 장식했다. 글씨는 오옥진 장인이 각자장 기법으로 새겼는데, 이 기법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7]
그러나 11월 초 현판에 균열이 발생하여, 문화재청은 건조한 가을 날씨로 인한 목재 수축을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전문가들은 미숙성 소나무가 사용되었고 목재가 제대로 건조되지 않았다는 의견을 제기했다.[8][9] 많은 논쟁 끝에 균열이 수리되었고, 문화재청은 2010년 12월 현판을 교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10]
2. 1. 조선 초기
정도전은 1395년(태조 4년) 경복궁과 함께 지어진 남쪽에 있던 문을 '오문'(午門)이라 불렀으나, 중국에서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 할 때 단(端)이 바르다(正)는 의미를 지녔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정문'(正門)이라 하였다.[26]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남문(南門)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여 남문이라는 이름도 사용된 것으로 본다. 이후 태종이 정문을 포함한 경복궁의 축을 중심으로 육조거리를 조성함으로써 조선의 주요 관청이 광화문을 중심으로 배열되었다.[27]1425년(세종 8년)에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지어 올렸으며, 이때 금천교와 여러 문의 이름도 함께 지었다.[28][29]
당시 광화문은 중층 문루로 지어졌으며, 누각 안에는 종과 북을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려 시간을 알렸다.[30] 1474년(성종 5년)에는 근정문, 홍례문, 광화문에 청기와를 덮으려 하였으나 검소한 덕이 아니라는 정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1]

태조 때 지은 광화문은 1592년(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전체가 소실될 때 함께 파괴되었다.[2] 이후 광해군이 정궁을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김에 따라 경복궁은 복원되지 않고 폐허로 남아있게 된다.[27] 다만 1747년(영조 23년)에 흥천사명 동종을 옮겨 광화문에 걸고,[32] 정조 통치기에는 종을 쳐 백성의 억울함을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2. 2. 임진왜란과 소실
1395년 조선 건국 직후 경복궁의 정문으로 처음 건설되었다. 원래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었다.[17] 1553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임진왜란(1592~1598)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경복궁과 함께 불타 없어졌고, 250년 이상 폐허로 남았다.[2][3]19세기에 고종 황제 시대의 섭정 흥선대원군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경복궁과 함께 광화문을 재건하였다.
2. 3. 경복궁 중건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공사는 3년 후인 1868년에 완료되었다. 광화문은 다른 건물들보다 먼저 지어져 1865년 10월에 상량(上樑)이 이루어졌다. 상량문은 이유원이 작성하였다.[33] 1865년 9월 17일에는 광화문의 현판 글씨를 쓸 사람을 정했는데, 임태영이 맡았다.[34]
광화문의 세 문 중 가운데 문을 정문(正門), 서쪽 문을 서협(西挾), 동쪽 문을 동협(東挾)이라 한다. 서협의 초루(譙樓)에는 흥천사 동종을 옮겨와 1865년 11월 9일에 걸어 시간을 알렸다.[35] 또한 이 시기에 각 문에 문배(門排)를 걸어두었다.
2. 4. 일제강점기와 이전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청사 앞을 가린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철거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 지식인들까지 철거에 반발했다. 특히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2년 9월 일본 잡지 《개조》에 '사라져가려고 하는 어느 조선 건축에 대하여'라는 글을 기고하여 광화문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이 글은 《동아일보》에 한국어 번역본으로 실리면서 반대 여론이 커졌다.[28] 결국 조선총독부는 철거 대신 1927년 광화문을 건춘문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남동쪽) 근처로 이전했다.[28]
광화문은 1395년 경복궁의 정문으로 처음 지어졌다. 처음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었다.[17] 임진왜란(1592-1598) 때 불타 없어진 후 250년 이상 폐허로 남아 있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1867년 재건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을 위해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위치로 옮겨졌다.[4]
2. 5. 한국전쟁과 파괴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설하면서 철거가 검토되었으나, 일본의 백화파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등의 노력으로 보존되었다.[17] 1927년 원래 위치에서 경복궁 북동쪽으로 이축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폭격을 맞아 광화문의 상부에 위치한 목조 부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석축만 남게 되었다.[36]
2. 6. 석조 복원과 논란
광화문은 1945년 해방 이후에도 경복궁 동측 담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폭격을 맞아 광화문의 상부에 위치한 목조 부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석축만 남게 되었다.[36]
이후 1966년부터 광화문의 복원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제2한강교 앞에 짓자는 김원룡 서울대학교 교수의 의견과 원래 위치에 다시 이전해야 한다는 의견 등 여러 의견이 있었다. 또한 석축 위의 파괴된 목조 건축물을 재건축할 때 콘크리트와 목재 중 무엇으로 지을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고, 결국 영구성과 목재난이라는 이유로 콘크리트로 제작하기로 했다. 1968년 광화문은 본래 자리로 이전한다는 뜻으로 석축은 총독부 청사 건물 앞으로 이전했으나, 석축 위 건축물은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축하여 1968년 12월 11일에 중건하였다.[37]
그러나 이렇게 재건된 광화문은 원래 모습과 달랐다. 원래 위치가 아닌 중앙청 기준으로 지었기 때문에 살짝 비틀어져 지어졌을 뿐 아니라, 재건축 상부 높이도 원래보다 높게 지어졌다. 이 때문에 건축 전부터 겉모양만 복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여론이 있었다.[38]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한글로 쓴 현판을 사용한 것도 당시 한글 전용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28]
2. 7. 목조 복원과 현재
문화재청 주도로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기존의 광화문을 고종 중건기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철거 · 해체하였다.[40] 광화문 복원 사업은 2010년 10월에 완료될 예정이었으나[41] 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로 인해 앞당겨져 8월 15일 광복절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2010년에 복원된 광화문에는 새로운 현판이 걸렸다. 현판에 적힌 이름은 조선시대에 사용된 한자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그러나 8월 초까지 나무 판에 균열이 생겨 한자 "光"의 왼쪽과 중간의 "門" 아래에 긴 수직 균열이 보이자, 문화재청은 건조한 가을 날씨를 목재 수축의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전문가들은 미성숙 소나무 판자를 사용하여 완공 기한을 맞추었고 목재가 제대로 건조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결국 많은 논쟁 끝에 균열을 수리했고, 2011년에 문화재청 측은 현판을 다시 교체해야 한다고 결론지었으며, 새 현판은 강원도에서 자연 건조 과정을 거쳐 다시 만들어졌다.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하여 광화문은 일반에 공개되었다.[6] 공사 비용은 280억원이었다. 복원된 광화문의 새로운 현판이 같은 날 공개되었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의 중건 사업 책임자인 임태영 장군의 한자 서체를 바탕으로 하였고, 배경은 흰색이며, 양용호 장인이 그린 단청으로 테두리를 장식했다. 글씨는 오옥진 장인이 각자장 기법으로 새겼는데, 이 기법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7]
1968년에 건조된 문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로 한글로 “광화문”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시민들로부터 “어색하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전문가들의 논의를 거쳐 한자 현판으로 복원하게 되었다. 이 한자 현판은 대원군 시대에 재건되었고, 1900년에 촬영된 광화문 현판(당시 조영 책임자인 임태영의 휘호)의 글씨를 디지털 처리하여 재현하여 제작되었다. 그러나 2010년 8월 15일 일반 공개 후 불과 3개월 만에 균열이 발생하여 제작에 참여했던 장인의 자비로 수리되었다. 이후 추가적인 고증 작업 결과, 현판이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가 아니라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씨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2018년 1월 문화재청이 수정 작업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19] 이 수정된 현판은 2023년 10월 15일에 공개되었다.
2. 8. 월대 복원
월대는 2018년에 복원이 시작되어 2023년에 완료되었다.[42] 조선 전기 모습은 충분히 고증할 수 없어, 고종 연간의 모습을 기준으로 복원하였다.[43] 이때 해태상 위치도 월대 앞으로 이전하였고, 광화문의 현판도 검은 바탕에 금박 글자로 복원하였다. 복원 이전에는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서 열리던 수문장 교대식을 비롯해 여러 전통 문화행사를 복원된 월대에서 개최할 예정이다.[44]3. 구조
광화문은 석축 위에 중층 목조 건물인 문루가 올라간 구조이다. 석축에는 홍예형으로 문 세 개가 나 있는데, 가운데 문이 가장 크고 서쪽과 동쪽의 문은 서로 같은 모양과 크기이다. 홍예 통로는 내외형 홍예로 문의 전면과 후면에만 홍예로 되어 있으며 통로의 천장은 평평하다. 문루는 전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나, 정면 5칸 규모인 숭례문 및 흥인지문과 규모가 비슷하여 다른 3칸 규모의 문들과 차이가 있다.[27]
3. 1. 건축 양식
광화문은 석축 위에 중층 목조 문루가 올라간 구조이다. 석축은 홍예형으로 문 세 개가 나 있는데, 가운데 것이 가장 크고 서측과 동측의 것은 서로 같은 모양과 크기이다. 홍예 통로는 내외형 홍예로 문의 전면과 후면에만 홍예로 되어 있으며 통로의 천장은 평평하다. 문루는 전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나, 정면 5칸 규모인 숭례문 및 흥인지문과 규모가 비슷하여 다른 3칸 규모의 문들과 차이가 있다. 문루 하층은 벽체를 개방하였으나, 상층은 판문을 달아두었다. 체감방식은 반칸물림이다. 공포는 다포식 공포로, 상하층 모두 외2내3출목이다. 외부제공은 양서와 수서를 함께하였고, 내부제공은 초각으로 하였으며 첨차는 교두형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에 처마는 겹처마로 하였다.[27]3. 2. 내부 구조
광화문은 석축 위에 중층 목조 문루가 올라간 구조이다. 석축은 홍예형으로 문 세 개가 나 있는데, 가운데 것이 가장 크고 서측과 동측의 것은 서로 같은 모양과 크기이다. 홍예 통로는 내외형 홍예로 문의 전면과 후면에만 홍예로 되어 있으며 통로의 천장은 평평하다. 문루는 전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나, 정면 5칸 규모인 숭례문 및 흥인지문과 규모가 비슷하여 다른 3칸 규모의 문들과 차이가 있다. 문루 하층은 벽체를 개방하였으나, 상층은 판문을 달아두었다. 체감 방식은 반칸 물림이다. 공포는 다포식 공포로, 상하층 모두 외2내3출목이다. 외부 제공은 양서와 수서를 함께 하였고, 내부 제공은 초각으로 하였으며 첨차는 교두형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에 처마는 겹처마로 하였다.[27]3. 3. 월대

광화문 월대는 길게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한 기단석과 계단석, 그리고 난간석을 두르고 내부를 흙으로 채워 만든 건축구조물이다.[49] 2023년 발굴조사 결과 전체 규모는 남북길이 48.7m, 동서너비 29.7m로 확인되었으며, 광화문 중앙문과 이어지는 어도지 기초시설은 너비 약 7m로 조성되었음이 드러났다.[50]
광화문 월대는 동·서 외곽에 잘 다듬어진 장대석(길이 120cm~270cm, 너비 30cm~50cm, 두께 20cm~40cm)을 이용하여 2단의 기단을 쌓고, 그 내부는 서로 다른 성질의 흙을 교차로 쌓아 주변보다 높게 대를 만들었다. 월대의 남쪽에는 장대석을 이용하여 계단을 조성하였는데, 그 중 어도와 연결되는 중앙부는 소맷돌을 이용하여 동·서 계단과 분리하였다. 특히, 어도계단지의 경우 일제강점기 서울전차 선로에 의해 일부 훼손되었으나 소맷돌을 받쳤던 지대석이 확인되었다.[50]
월대는 고종년간 축조 이후 크게 4단계의 변화과정이 있었다. 1단계는 월대 축조 당시로 남쪽에 경계가 나누어진 3개의 계단이 존재했으며, 당시 월대의 평면형태는 역철자형이었다. 2단계는 중앙의 어도계단지가 경사로로 변화되었고, 3단계는 경사로의 범위가 확장되고 계단이 동·서 외곽으로 축소 변형되었으며, 이 시기에 처음으로 단선(외줄) 형태의 전차선로가 설치됐다. 4단계는 전차선로의 복선(겹줄)화로 월대가 파괴되면서 난간석 등이 철거되고 광화문의 이건과 함께 도로로 사용되었다.[50]
기단석 하부는 여러 매의 지대석을 놓고 적색점토로 보강한 기초시설, 철편과 점토, 석회를 이용한 장대석 사이의 수평맞춤, 장대석의 밀림 방지를 위해 점토와 깬 돌을 섞어 보강한 뒷채움방식 건축기법으로 조성되었다.[50]
3. 4. 해치상
해태라고도 하는 해치는 전설 속의 신령한 동물이다. 풍수지리상 화산(火山)인 관악산의 기운을 억누르며 화마와 재앙으로부터 경복궁을 보호하고자, 흥선대원군이 이세욱(李世旭)이라는 석공을 시켜 1870년(고종 7년)에 월대 앞 양쪽에 석상을 세웠다.[45] 해치 석상은 하마비의 역할도 했는데, 관원들이 경복궁에 입궐하기 전에 시비와 정의를 가리는 동물인 해태를 마주하게 하는 의도도 담겼다.[46]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개막에 맞춰 전차가 경복궁 앞까지 부설되는데, 방해된다는 이유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정비한다는 이유로 철거되어[47] 근정문 처마 밑에서 거적대기를 덮은 채 5년간 보관되다가 1928년에 다시 광화문 앞에 세워졌다.[48]
4. 광화문 권역
광화문광장은 2009년 8월 1일에 시민을 위한 개방 공간으로 조성되었다.[12] 이는 서울특별시의 친환경적인 재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청계천, 서울광장과 같은 사업들이 포함된다.[13]
2011년 11월 서울특별시가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광화문의 주요 문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서울에서 세 번째로 좋아하는 활동으로 꼽았다.[14] 왕실 근위병 교대식은 매일 10시부터 15시까지 매 시간마다 광화문 앞에서 거행된다.[15]
2012년 9월 23일, 서울특별시는 세종로 550m 구간을 시범적으로 보행자 전용 구간으로 지정하고 자전거 통행은 허용했다. 이 구간은 광화문 삼거리에서 세종문화회관 앞 광화문광장을 따라 세종로 교차로까지 이어진다.[16]
4. 1. 용성문과 협생문
종로에서 육조대로를 걸어 광화문으로 접근하면 처음에는 양옆에 해치 석상이 있고, 곧이어 월대가 있었으며 문의 좌우로는 수문장이 근무하는 초소가 있었다.광화문으로 들어가면 북측으로는 흥례문, 서측으로는 용성문, 동측으로는 협생문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나온다. 경복궁 중건 후에는 광화문으로 들어간 직후 좌측과 우측에 수문장청이 있었는데, 우측에는 군사방도 있었다. 거기서 우측으로 더 들어가면 초관처소와 영군직소가 나왔다. 행랑은 두지 않았다.
용성문(用成門)은 광화문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위치한 문이다. 〈궁궐지〉에서는 2(3)칸, 기둥길이 약 5.03m, 양통 약 4.57m, 도리통 어간 약 5.49m으로 기록되어있고 북궐도형에서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록되어있다. 왕이 경복궁 후원이나 궁 밖으로 나갈 때 종종 사용되었으며, 신정왕후의 상여가 지나가는 문으로 사용되었고 그 신련을 종묘에 봉안하기 위해 옮길 때 왕과 왕세자가 지영한 곳도 용성문 밖이었다.
협생문(協生門)은 경복궁과 흥례문 사이 내부담장의 동측에 있는 문이다. 세자가 광화문과 동궁 사이를 이동할 때 사용하던 문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으로 확인되었다.[51]
4. 2. 수문장청과 군사 시설
종로에서 육조대로를 걸어 광화문으로 접근하면 처음에는 양옆에 해치 석상이 있고, 곧이어 월대가 있었으며 문의 좌우로는 수문장이 근무하는 초소가 있었다.광화문으로 들어가면 북측으로는 흥례문, 서측으로는 용성문, 동측으로는 협생문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나온다. 경복궁 중건 후 광화문으로 들어간 직후 좌측과 우측에는 수문장청이 있었고, 우측에는 군사방도 있었다. 거기서 우측으로 더 들어가면 초관처소와 영군직소가 있었다. 행랑은 두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흥례문 등 많은 건물을 허물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이 청사는 1995년에 철거되었다. 수문장청은 서측과 동측에 있었는데, 서측의 것은 정면 6칸, 측면 1.5칸의 동향 건물이다. 남쪽에서부터 청(廳) 3칸, 방 2칸, 주(廚)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측에 마루가 0.5칸 있었다.
군사방(軍士房)은 광화문과 수문장청 사이에 있던 2칸짜리 건물로, 위병소의 기능을 했다. 서측과 동측에 2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후에 1개만 남아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모두 훼철되었다.
5. 광화문광장
광화문광장은 광화문 앞 광장으로, 2009년 8월 1일에 시민을 위한 개방 공간으로 조성되었다.[12] 이는 서울특별시의 친환경적인 재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청계천과 서울광장과 같은 사업들이 포함된다.[13]
2011년 11월 서울특별시가 외국인 관광객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광화문의 주요 문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서울에서 세 번째로 좋아하는 활동으로 꼽았다.[14] 왕실 근위병 교대식은 매일 10시부터 15시까지 매 시간마다 광화문 앞에서 거행된다.[15]
2012년 9월 23일, 서울특별시는 세종로 550m 구간을 시범적으로 보행자 전용 구간으로 지정하고 자전거 통행은 허용했다. 이 구간은 광화문 삼거리에서 세종문화회관 앞 광화문광장을 따라 세종로 교차로까지 이어진다.[16]
2019년 1월 22일,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확장 및 개조를 위한 국제 설계 공모전 당선작을 결정했다. 그러나 당선작에는 이순신 및 세종대왕 동상 이전과 지면에 촛불집회를 그리는 내용이 포함되어 비판이 쇄도하였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최종 결정을 연말까지 연기하게 되었다.[22]
6. 논란
2019년 1월 22일,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확장 및 개조를 위해 광화문광장 국제 설계 공모전 당선작을 결정했다. 그러나 당선작에는 이순신 및 세종대왕 동상 이전과 지면에 촛불집회를 그리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비판이 쇄도했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최종 결정을 연말까지 연기했다.[22] 광화문은 랜드마크일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어필 장소이기도 하며, 인근 지역에서는 시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종로구 일대에서는 2017년 한 해 동안 2,563건의 시위가 있었다.[23]
7. 교통
3호선 경복궁역과 5호선 광화문역이 근처에 있다. 경복궁역은 광화문 정문과 가장 가깝다. 광화문역은 광화문광장 남쪽 끝에서 600m 거리에 있고, 1호선과 2호선이 지나는 서울시청역은 800m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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