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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드할리야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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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투드할리야 4세는 히타이트 제국의 왕으로, 대왕 하투실리 3세의 아들이자 무르실리 3세의 뒤를 이은 인물이다. 그는 사촌 쿠룬타와 왕위 계승 문제로 갈등을 겪었으며, 쿠룬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조약을 체결했다. 투드할리야 4세는 아시리아와의 니흐리야 전투에서 패배하고, 서부에서는 아히야와의 침입을 받는 등 대외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뭄에 대비하여 댐을 건설하고 종교 정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그의 치세 동안 히타이트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으며, 두 아들 아르누완다 3세와 슈필룰리우마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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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드할리야 4세
기본 정보
투드할리야 4세의 부조
투드할리야 4세의 부조
통치 시기기원전 1245년경 – 1215년
이전 통치자하투실리 3세
다음 통치자아르누완다 3세
아버지하투실리 3세, 무르실리 2세의 아들
어머니푸두헤파
종교히타이트 종교
가족 관계
자녀아르누완다 3세
슈필룰리우마 2세

2. 초기 생애

투드할리야는 하투실리 3세의 아들로, 형인 네리리카일리가 왕세자였으나, 아버지 하투실리 3세가 그의 형인 무와탈리 2세를 대신하여 통치하는 동안 하투샤에 있는 아버지의 궁정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무와탈리의 아들인 쿠룬타와 좋은 친구였으며, 하투실리는 그들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명령했다.[4]

하투실리 3세가 "울미-테슈프"와 조약을 체결하여 쿠룬타의 타르훈타샤 통치를 확정지은 후, 투드할리야를 형보다 높여 왕세자로 삼았다. 왕이 된 투드할리야는 그와 쿠룬타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는 청동판 조약을 작성했다.[4]

투드할리야에게는 누이 마아트호르네페루레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대왕비가 되었다.[4]

3. 치세

히타이트 제국은 아나톨리아시리아의 넓은 지역을 포함했다. 투드할리야 4세는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에 대응하기 위해 최소 13개의 댐을 건설했는데, 그 중 하나는 오늘날 알라자회육에 남아 있다.

동쪽에서는 아시리아와 경쟁하며 니흐리야 전투에서 투쿨티-니누르타 1세에게 크게 패배했다.[2] 아무르의 샤우스가무와와의 조약에서 바빌론 왕을 동등하게 언급하며 동맹 관계를 시사했다.

투드할리야 4세의 인장


남서부에서는 제국이 분열되어 타르훈타샤의 쿠룬타가 영토의 일부를 통치했다. 슈필룰리우마 2세 시기 점토판(CTH 121)에는 투드할리야 4세가 알라시아(키프로스?) 정복을 기념하는 조각상을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투드할리야 4세의 아들 아르누완다 3세와 슈필룰리우마 2세는 히타이트 제국의 마지막 두 왕이었다.

3. 1. 쿠룬타와의 관계

아버지 하투실리 3세 시대에 아나톨리아 남부 타르훈타사에서 부왕으로 봉해졌던 투드할리야의 사촌 쿠룬타는 세력을 확장하여 대왕위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주장했다. 투드할리야는 쿠룬타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서로 신들 앞에서 우호 관계를 맹세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문은 청동판에 기록되어 하투사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한편 쿠룬타가 "대왕"을 칭하는 인영도 하투사에서 발견되어, 쿠룬타가 한때 하투사에서 히타이트의 대왕으로 군림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4]

3. 2. 대외 관계

투드할리야 4세는 서쪽에서 아히야와(Ahhiyawa영어[6])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알라시아(키프로스)를 정복하여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5] 동쪽에서는 아시리아니흐리야 전투에서 패배하고 영토를 빼앗기는 등 갈등을 겪었다.

3. 2. 1. 아시리아와의 갈등

투드할리야 4세는 동쪽의 강력한 경쟁국인 아시리아와 대립했다. 기원전 1237년경 니흐리야 전투에서 아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세에게 크게 패배했다.[2] 아시리아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2만 8천 명의 히타이트인이 포로로 잡혔다고 하는데,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5] 히타이트의 동맹국이었던 미탄니는 아시리아에 병합되었다. 또한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도 아시리아의 공세를 받아 이슈와 지역을 빼앗겨 히타이트의 국경은 크게 후퇴했다.[5]

투드할리야는 아무르의 왕 샤우스가무와와의 조약에서 카란두니아스 왕을 자신과 동등하게 언급하며, 그들 사이에 동맹 혹은 묵시적인 이해 관계가 존재했음을 시사했다.[2]

3. 2. 2. 기타 대외 관계

투드할리야 4세는 서쪽 국경에서 아히야와(Ahhiyawa영어[6])의 침입으로 지배권을 상실했다.[5] 그러나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알라시아(오늘날의 키프로스)를 정복하기도 했다.[5]

3. 3. 종교 및 건축 정책

투드할리야 4세는 왕의 위신을 유지하고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 정책에 힘을 쏟았다. 이 시대는 히타이트 왕의 신성화가 절정에 달했으며, 각종 대규모 신전이 건설되었다.[4] 하투샤 유적의 "윗 마을"이라고 불리는 광대한 신전군은 대부분 투드할리야 4세 시대에 건설되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더 오래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4] 에플라툰-프나르와 야르불트의 수변 제사 유적도 투드할리야 4세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4]

투드할리야 4세가 건설했다고 여겨지는 에플라툰-프나르의 수변 제사 유적


투드할리야 4세는 가뭄에 대비하여 13개의 댐을 건설했으며, 카라쿠유와 알라자회육 근처에서 그의 비문을 동반한 댐 유적이 발견되었다.[4]

3. 4. 가뭄 대응

투드할리야 4세는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에 대응하기 위해 13개의 댐을 건설했다.[5] 카라쿠유와 알라자호유크 근처에서는 실제로 그의 비문을 동반한 댐 유적이 발견되었다. 에플라툰-프나르와 야르불트의 수변 제사 유적도 투드할리야 4세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5]

참조

[1] 서적 The Ancient Near East: c.3000–330 BC, Volume On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
[2] 서적 The Kingdom of the Hittites Ox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Context of Scripture: Volume II: Monumental Inscriptions from the Biblical World Brill
[4] 문서 トゥドハリヤの息子[[シュッピルリウマ2世]]はその碑文において、治世初期にタルフンタッシャを攻撃したと記録しており、これは王位を奪ったクルンタに対する復讐だった可能性もある。
[5] 문서 キプロス島からヒッタイトの遺物はあまり発見されていないため、間接的支配か朝貢関係であったと思われる。
[6] 문서 「[[アカイア]]」すなわち[[ギリシア]]本土の[[ミケーネ文明]]を指すとも言わ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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