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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카데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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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로카데로 전투는 1823년 프랑스군이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여 일어난 전투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스페인에서 자유주의적 헌법 제정 움직임이 있었으나 국왕 페르난도 7세가 이를 거부하고 입헌군주정 지지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럽 열강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프랑스군은 트로카데로 요새를 점령하고 카디스를 함락시켜 페르난도 7세를 복위시켰다. 이 전투는 미국의 먼로 독트린 선포에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 파리의 지명 '트로카데로'의 유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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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기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주도하는 대 동맹이 스페인의 카디스를 점령하려 했으나 지휘관들의 의견 차이, 스페인군의 저항, 연합군의 약탈 행위 등으로 실패하고 철수했다.
트로카데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스페인 원정 (1823년)
1823년 8월 30일~31일 밤, 프랑스군이 트로카데로 요새를 향해 야간 진격에 나선 모습 (폴 들라로슈 작, 베르사유궁 소장)
프랑스군의 트로카데로 요새 점령 (1823년 8월 31일)
전투 정보
전투명트로카데로 전투
관련 전투스페인 원정
날짜1823년 8월 31일
장소스페인 카디스
결과프랑스 및 스페인 왕당파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왕국
교전국 1-1스페인 왕당파
교전국 2스페인 의회 지지 세력
지휘관
프랑스군 지휘관앙굴렘 공작 루이앙투안
스페인군 지휘관가르세스 장군
병력 규모
프랑스군 병력30,000명
스페인군 병력1,700명
사상자 규모
프랑스군 사상자전사 31명
프랑스군 부상자110명
스페인군 사상자전사 150명
스페인군 부상자300명
스페인군 포로1,000명

2. 배경

프랑스 제1제국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한 이후, 스페인에서는 자유주의적 사상이 반영된 1812년 스페인 헌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국왕 페르난도 7세는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1820년에는 라파엘 델 리에고가 이끄는 입헌군주정 지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 의회 (코르테스)가 있던 카디스에서 체포되어 구금 상태에 놓였다.

스페인에서의 헌정 사태에 놀란 유럽 열강들은 1822년 10월 베로나 회의를 열고 프랑스가 스페인 분쟁에 개입하여 페르난도 7세의 복귀를 돕도록 승인하였다. 당시 결정에 영국이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졌다.

2. 1. 스페인 내전

프랑스 제1제국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한 이후, 스페인에서는 자유주의적 사상이 반영된 1812년 스페인 헌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국왕 페르난도 7세는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1820년에는 라파엘 델 리에고가 이끄는 입헌군주정 지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 의회가 있던 카디스에서 체포되어 구금 상태에 놓였다.

스페인에서의 헌정 사태에 놀란 유럽 열강들은 1822년 10월 베로나 회의를 열고 프랑스가 스페인 분쟁에 개입하여 페르난도 7세의 복귀를 돕도록 승인하였다. 당시 결정에 영국이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졌다.

2. 2. 베로나 회의와 프랑스의 개입 결정

프랑스 제1제국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한 이후, 스페인에서는 자유주의적 사상이 반영된 1812년 스페인 헌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국왕 페르난도 7세는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1820년에는 라파엘 델 리에고가 이끄는 입헌군주정 지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 의회가 있던 카디스에서 체포되어 구금 상태에 놓였다.

스페인에서의 헌정 사태에 놀란 유럽 열강들은 1822년 10월 베로나 회의를 열고 프랑스가 스페인 분쟁에 개입하여 페르난도 7세의 복귀를 돕도록 승인하였다. 당시 결정에 영국이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졌다.

3. 군사 개입

1823년 4월 17일, 샤를 10세의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앙투안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진입하였다.[5][2] 프랑스군은 바스크인과 스페인 보수파로부터 환영을 받았다.[5][2] 루이앙투안은 마드리드를 공략하는 동시에 반군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산세바스티안으로 군대를 파견해 포위에 나섰다.[5][2] 이에 반군 측은 5월 23일 세비야로 철수하였다.[5][2] 마드리드 군 사령관은 개전에 앞서 비밀리에 항복하고 프랑스로 도망쳤고, 지휘력을 상실한 마드리드 수비대는 프랑스군을 막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마드리드를 점령하는 동시에 페르난도 7세가 복귀하기까지 국정을 맡을 섭정을 임명하였다.[2]

이후 프랑스군은 스페인 남부로 기수를 돌려 카디스의 반군 소탕에 나섰다. 당시 카디스 시가지로 이어지는 길목을 트로카데로 요새가 지키고 있었으며, 프랑스군은 요새 포위전에 나섰다. 1823년 8월 31일, 프랑스군은 썰물 때를 이용하여 바다 쪽으로부터 트로카데로섬에 올라 기습 총검 공격을 가했고 요새 점령에 성공했다.[5][2] 곧이어 프랑스군 보병 부대가 나서 측면 공격을 통해 트로카데로 마을을 점령하였고, 약 1,700명 남짓한 스페인군은 그대로 포로로 잡혔다.[5][2]

1888년 카디스 만의 트로카데로 위치


카디스시는 연이은 포격에도 불구하고 3주간 버티다가 1823년 9월 23일 강제로 항복하였고, 페르난도 7세는 석방되어 프랑스군에 넘겨졌다. 페르난도 7세는 반군에게 사면령을 내리기로 사전에 약속하였으나, 마음을 바꿔 반군에 대한 보복을 명하였고, 이후 몇년간 반군 3만 명이 처형되고 2만여 명이 투옥되기에 이르렀다.[5][2]

3. 1. 프랑스군의 스페인 침공

1823년 4월 17일, 샤를 10세의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앙투안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진입하였다.[5][2] 프랑스군은 바스크인과 스페인 보수파로부터 환영을 받았다.[5][2] 루이앙투안은 마드리드를 공략하는 동시에 반군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산세바스티안으로 군대를 파견해 포위에 나섰다. 이에 반군 측은 5월 23일 세비야로 철수하였다.[5][2] 마드리드 군 사령관은 개전에 앞서 비밀리에 항복하고 프랑스로 도망쳤고, 지휘력을 상실한 마드리드 수비대는 프랑스군을 막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마드리드를 점령하는 동시에 페르난도 7세가 복귀하기까지 국정을 맡을 섭정을 임명하였다.[5][2]

이후 프랑스군은 스페인 남부로 기수를 돌려 카디스의 반군 소탕에 나섰다. 당시 카디스 시가지로 이어지는 길목을 트로카데로 요새가 지키고 있었으며, 프랑스군은 요새 포위전에 나섰다. 1823년 8월 31일, 프랑스군은 썰물 때를 이용하여 바다 쪽으로부터 트로카데로섬에 올라 기습 총검 공격을 가했고 요새 점령에 성공했다.[5][2] 곧이어 프랑스군 보병 부대가 나서 측면 공격을 통해 트로카데로 마을을 점령하였고, 약 1,700명 남짓한 스페인군은 그대로 포로로 잡혔다.[5][2]

3. 2. 마드리드 점령과 섭정 임명

1823년 4월 17일, 샤를 10세의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앙투안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진입하였다.[5][2] 프랑스군은 바스크인과 스페인 보수파로부터 환영을 받았다.[5][2] 루이앙투안은 마드리드를 공략하는 동시에 반군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산세바스티안으로 군대를 파견해 포위에 나섰다.[5][2] 이에 반군 측은 5월 23일 세비야로 철수하였다.[5][2] 마드리드 군 사령관은 개전에 앞서 비밀리에 항복하고 프랑스로 도망쳤고, 지휘력을 상실한 마드리드 수비대는 프랑스군을 막지 못했다.[5][2] 프랑스군은 마드리드를 점령하는 동시에 페르난도 7세가 복귀하기까지 국정을 맡을 섭정을 임명하였다.[2]

3. 3. 트로카데로 전투



1823년 4월 17일, 샤를 10세의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앙투안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진입하였다. 프랑스군은 바스크인과 스페인 보수파로부터 환영을 받았다.[5][2] 루이앙투안은 마드리드를 공략하는 동시에 반군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산세바스티안으로 군대를 파견해 포위에 나섰다. 이에 반군 측은 5월 23일 세비야로 철수하였다. 마드리드 군 사령관은 개전에 앞서 비밀리에 항복하고 프랑스로 도망쳤고, 지휘력을 상실한 마드리드 수비대는 프랑스군을 막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마드리드를 점령하는 동시에 페르난도 7세가 복귀하기까지 국정을 맡을 섭정을 임명하였다.[5][2]

이후 프랑스군은 스페인 남부로 기수를 돌려 카디스의 반군 소탕에 나섰다. 당시 카디스 시가지로 이어지는 길목을 트로카데로 요새가 지키고 있었으며, 프랑스군은 요새 포위전에 나섰다. 1823년 8월 31일 프랑스군은 썰물 때를 이용하여 바다 쪽으로부터 트로카데로섬에 올라 기습 총검 공격을 가했고 요새 점령에 성공했다. 곧이어 프랑스군 보병 부대가 나서 측면 공격을 통해 트로카데로 마을을 점령하였고, 약 1,700명 남짓한 스페인군은 그대로 포로로 잡혔다.[5][2]

카디스시는 연이은 포격에도 불구하고 3주간 버티다가 1823년 9월 23일 강제로 항복하였고, 페르난도 7세는 석방되어 프랑스군에 넘겨졌다. 페르난도 7세는 반군에게 사면령을 내리기로 사전에 약속하였으나, 마음을 바꿔 반군에 대한 보복을 명하였고, 이후 몇년간 반군 3만 명이 처형되고 2만여 명이 투옥되기에 이르렀다.[5][2]

3. 4. 카디스 함락과 페르난도 7세 복위

1823년 4월 17일, 샤를 10세의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앙투안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진입하였다. 프랑스군은 바스크인과 스페인 보수파로부터 환영을 받았다.[5][2]

루이앙투안은 마드리드를 공략하는 동시에 반군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산세바스티안으로 군대를 파견해 포위에 나섰다. 이에 반군 측은 5월 23일 세비야로 철수하였다. 마드리드 군 사령관은 개전에 앞서 비밀리에 항복하고 프랑스로 도망쳤고, 지휘력을 상실한 마드리드 수비대는 프랑스군을 막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마드리드를 점령하는 동시에 페르난도 7세가 복귀하기까지 국정을 맡을 섭정을 임명하였다.[5][2]

이후 프랑스군은 스페인 남부로 기수를 돌려 카디스의 반군 소탕에 나섰다. 당시 카디스 시가지로 이어지는 길목을 트로카데로 요새가 지키고 있었으며, 프랑스군은 요새 포위전에 나섰다. 1823년 8월 31일, 프랑스군은 썰물 때를 이용하여 바다 쪽으로부터 트로카데로섬에 올라 기습 총검 공격을 가했고 요새 점령에 성공했다. 곧이어 프랑스군 보병 부대가 나서 측면 공격을 통해 트로카데로 마을을 점령하였고, 약 1,700명 남짓한 스페인군은 그대로 포로로 잡혔다.[5][2]

카디스시는 연이은 포격에도 불구하고 3주간 버티다가 1823년 9월 23일 강제로 항복하였고, 페르난도 7세는 석방되어 프랑스군에 넘겨졌다. 페르난도 7세는 반군에게 사면령을 내리기로 사전에 약속하였으나, 마음을 바꿔 반군에 대한 보복을 명하였고, 이후 몇년간 반군 3만 명이 처형되고 2만여 명이 투옥되기에 이르렀다.[5]

4. 여파

폴 들라로슈의 1828년 작 ''트로카데로 전투에서의 앙굴렘 공작''


트로카데로 전투는 1823년 12월 2일 미국의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유럽 열강의 개입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을 수호할 것이라는 내용의 먼로 독트린를 선포하는 계기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6][3]

전투를 승리로 이끈 루이앙투안 다르투아페르난도 7세로부터 "트로카데로의 왕자"라는 칭호를 제안받기도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여기에는 페르난도 7세가 반군을 사면하겠다던 약속을 어긴 것에 다소간 혐오감을 느낀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6]

트로카데로 요새의 함락을 기념하여 프랑스 수도 파리의 외곽 지역에 '트로카데로'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당시 파리 시는 불로뉴숲 가장자리까지 확장되었는데 새로 편입된 지역에 승전을 기념하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6]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소설 《레 미제라블》 제2권 2부 2장에서 트로카데로 전투에 대해 여러 문단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전투 자체는 "훌륭한 군사 행동"이라면서도, "1823년의 전쟁은 너그러운 스페인국을 향한 분노이자 (..) 동시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분노였다"고 평가한다.[6]

4. 1. 페르난도 7세의 보복 정치

루이앙투안 다르투아페르난도 7세로부터 "트로카데로의 왕자"라는 칭호를 제안받기도 하였으나, 페르난도 7세가 반군을 사면하겠다던 약속을 어긴 것에 혐오감을 느껴 이를 거절하였다.[6]

4. 2. 먼로 독트린 선포

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은 1823년 12월 2일 먼로 독트린을 선포하여 유럽 열강의 개입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을 수호할 것을 천명하였다.[6][3] 트로카데로 전투는 이러한 먼로 독트린 선포의 계기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4. 3. 트로카데로 지명 유래



트로카데로 요새의 함락을 기념하여 프랑스 수도 파리 외곽 지역에 '트로카데로'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당시 파리 시는 불로뉴숲 가장자리까지 확장되었는데, 새로 편입된 지역에 승전을 기념하는 이름이 붙여졌다.[6]

4. 4. 빅토르 위고의 평가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소설 《레 미제라블》 제2권 2부 2장에서 트로카데로 전투에 대해 여러 문단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위고는 전투 자체는 "훌륭한 군사 행동"이라면서도, "1823년의 전쟁은 너그러운 스페인국을 향한 분노이자 (..) 동시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분노였다"고 평가한다.[6]

5. 한국의 관점

참조

[1] 서적 Napoleon and his Marshals CreateSpace Independent Publishing Platform
[2] 서적 Dictionary of wars Routledge 2013
[3] 논문 The Origin of the Monroe Doctrine, 1775-1823 JSTOR
[4] 서적 Napoleon and his Marshals CreateSpace Independent Publishing Platform
[5] 서적 Dictionary of wars Routledge 2013
[6] 간행물 The Origin of the Monroe Doctrine, 1775-1823 J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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