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앙투안 다르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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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앙투안 다르투아는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의 장남으로, 앙굴렘 공작 칭호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망명 생활을 하였으며, 1799년 사촌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다. 나폴레옹 전쟁과 백색 테러에 참여했고, 1824년 아버지의 즉위로 왕세자가 되었지만, 보수적인 정책으로 민중의 불만을 샀다. 7월 혁명으로 다시 망명했으며, 샤를 10세의 퇴위 후 루이 19세로 불리기도 했으나, 샹보르 백작에게 양위했다. 1844년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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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앙투안 다르투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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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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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
프랑스의 도팽 | 프랑스의 도팽 |
앙굴렘 공 | 앙굴렘 공 |
마르네 백작 | 마르네 백작 |
정통 왕조파 프랑스 왕위 요구자 | 루이 19세 |
재위 기간 | |
프랑스 왕세자 | 1824년 9월 16일 - 1830년 8월 2일 |
왕위 요구자 | 1836년 11월 6일 - 1844년 6월 3일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775년 8월 6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베르사유 궁전 |
사망일 | 1844년 6월 3일 |
사망지 | 오스트리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 고리치아 |
매장일 | 1844년 6월 8일 |
매장지 | 오스트리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 노바고리차, 코스타녜비차 수도원 |
배우자 |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 (1799년 결혼) |
가문 | 부르봉 왕가 |
아버지 | 샤를 10세 |
어머니 |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아 왕녀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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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프랑스의 왕족으로, 샤를 10세와 왕비 마리 테레즈 드 사르데뉴의 장남으로 1775년 베르사유에서 태어났다. 백부 루이 16세에 의해 앙굴렘 공작 칭호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프랑스를 떠나 오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망명 중이던 1799년 러시아에서 백부 루이 18세의 권유로 사촌이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인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결혼 후에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하여 나폴레옹에 맞서 싸웠다.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끝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프랑스로 돌아와 초왕당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백색 테러를 주도하는 등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1823년에는 스페인의 자유주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개입하여 페르난도 7세의 절대 왕정 복귀를 도왔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망명 경험으로 인해 의회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여, 절대 왕정을 신봉하는 아내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1824년 아버지 샤를 10세가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자인 도팽(왕세자)이 되었다. 왕세자로서 아내와 함께 국내 시찰과 자선 활동을 펼쳤으나 대중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하자 루이 앙투안 역시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잠시 '''루이 19세'''로 불리기도 했으나 공식적인 즉위는 아니었다. 결국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오르면서 7월 왕정이 시작되었고, 루이 앙투안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후에는 주로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에서 지냈으며, 1844년 고리치아(현 이탈리아)에서 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아버지 샤를 10세가 묻힌 슬로베니아 노바고리차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루이 앙투안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샤를 10세 (당시 아르투아 백작 샤를 필리프)와 그의 아내 마리 테레즈 드 사르데뉴의 장남으로 1775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이 16세의 막내 동생이었으며, 어머니는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딸이었다. 그는 증조부인 루이 15세가 사망한 지 1년 후에 태어났으며, 백부 루이 16세에 의해 앙굴렘 공 칭호를 받았다.
1780년부터 1789년까지 루이 앙투안과 그의 남동생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은 베르사유에서 약 5km 떨어진 보르가르 성에서 세랑 후작 아르망 루이 드 세랑에게 교육을 받았다.[4]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루이 앙투안은 아버지, 남동생과 함께 프랑스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은 처음에는 토리노로 갔다가 독일을 거쳐 영국으로 이동하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1792년, 루이 앙투안은 그의 사촌인 콩데 공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이 이끄는 망명 귀족 군대에 합류했다.
1795년 6월, 그의 삼촌인 프로방스 백작이 스스로 루이 18세 국왕임을 선언했다. 그해 말, 20세의 루이 앙투안은 방데에서 왕당파 봉기를 이끌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1797년 초, 그는 동생 및 삼촌과 함께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가서 오스트리아 군대에 합류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패배하자 미타우(쿠를란트)로 피신하여 러시아 차르 파벨 1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 쿠를란트의 미타우 망명 궁정에서 1799년 6월 10일, 루이 앙투안은 그의 사촌인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이자,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직계 왕족이었다. 마리 테레즈는 1795년 파리의 탕플 감옥에서 풀려난 후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지내왔으며, 결혼은 망명 중이던 백부 루이 18세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루이 앙투안과 마리 테레즈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2. 2. 망명 생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루이 앙투안은 가족과 함께 프랑스를 떠나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인 1799년, 러시아의 쿠를란트에 망명 궁정을 세운 백부 루이 18세의 주선으로 사촌이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인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다. 결혼 이후에는 콩데 공 등 왕당파 인사들과 함께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하여 나폴레옹에 맞서 싸웠다.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끝나고 제2차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루이 앙투안은 극단적인 왕당파인 초왕당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백색 테러에 가담하여 공화파 및 나폴레옹 지지자들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다. 또한, 1820년 스페인에서 리에고 대령이 주도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1823년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에 개입하여 혁명을 진압하고 페르난도 7세의 절대 왕정 복귀를 도왔다. 이러한 반동적인 행보와는 별개로, 영국에서의 오랜 망명 생활 경험으로 인해 의회제 정치에 개인적인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절대 왕정의 강력한 신봉자였던 아내 마리 테레즈와의 갈등 요인이 되기도 했다.
1824년 아버지 샤를 10세가 즉위하면서 왕세자가 되었다. 아내와 함께 프랑스 국내를 시찰하고 자선 활동을 벌였으나,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하면서 루이 앙투안 역시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루이 19세라는 이름으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명목상 왕위를 계승했다고도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즉위로 인정받지 못한다. 국민적 지지가 거의 없었던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즉시 조카인 앙리 다르투아(앙리 5세)에게 왕위를 양보해야 했다. 그러나 루이 앙투안과 앙리 다르투아 모두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으며, 결국 의회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여 7월 왕정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 최종적으로 추방된 후, 루이 앙투안은 '드 부르봉' 대신 '드 프랑스'라는 성을 사용했다. 망명지에서는 명목상의 왕 '루이 19세' 또는 '앙굴렘 공작' 외에 '루이 앙투안 드 프랑스'로 불렸다. 1844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던 고리치아(현재 이탈리아)에서 암 투병 끝에 시력을 잃고 사망했다. 아내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는 원만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2. 3. 군사 활동
프랑스 혁명 이후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오른 루이 앙투안은 망명 생활 중에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1800년 4월, 그는 바이에른군 기병 연대를 지휘하며 프랑스 공화국군에 맞서 호엔린덴 전투에 참전하여 군사적 능력을 일부 보여주었다.[1][2]
1801년 초, 러시아의 파울 1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자, 망명 중이던 프랑스 왕족들은 프로이센의 통제하에 있던 바르샤바로 피신했다. 이후 약 10년간 루이 앙투안은 숙부인 루이 18세를 보좌하며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다. 알렉산드르 1세가 러시아 황제로 즉위한 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으나, 1807년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으로 망명지를 옮겨야 했다. 영국 버킹엄셔주의 하트웰 하우스에서 루이 18세는 망명 궁정을 다시 꾸렸고, 루이 앙투안은 매달 300GBP의 수당을 받으며 생활했다.[1] 그는 1799년 망명 중 사촌인 마리 테레즈와 결혼한 이후, 콩데 공 등 다른 망명 귀족들과 함께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했다.[3] 1807년과 1813년 두 차례에 걸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려 했으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
루이 앙투안은 1814년까지 영국에 머물다가, 왕당파 세력이 강했던 보르도로 항해했다. 1814년 3월 12일 그의 보르도 입성은 부르봉 왕정복고의 중요한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1][2] 이후 그는 웰링턴 공작과 협력하여 나폴레옹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힘을 보탰다.[1]
1815년 백일천하가 끝나고 제2차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후, 루이 앙투안은 극단적인 왕당파인 초왕당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백색 테러에 가담하여 국내 반대파 탄압에 앞장섰다.[3] 1823년에는 스페인에서 리에고 대령이 주도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에 개입하여 왕당파를 지원했고, 이를 통해 페르난도 7세가 절대 왕정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
2. 4. 왕세자 시절
1823년, 그는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의 절대 왕정 복고를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파견된 프랑스 군대(생 루이 백만 명의 아들들)를 지휘하였다. 트로카데로 전투에서의 승리로 페르난도 7세의 권력 회복에 기여했으며, 이 공적으로 '트로카데로 공'이라는 칭호를 제안받기도 했다.[5] 그러나 루이 앙투안은 영국에서의 긴 망명 생활을 통해 의회 정치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되었고, 절대 왕정을 강력히 지지하는 아내 마리 테레즈와는 이 문제로 종종 의견 충돌을 빚었다.1824년, 백부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버지 아르투아 백작 샤를이 샤를 10세로 즉위하자, 루이 앙투안은 왕위 계승자인 도팽이 되었다. 이듬해인 1825년 5월에는 랭스에서 열린 아버지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왕세자 시절, 그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 국내 여러 지역을 시찰하고 자선 활동을 펼쳤으나, 대중적인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결국 1830년 7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왕세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다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2. 5. 7월 혁명과 사망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자 분노한 시위대는 샤를 10세의 퇴위를 요구했다. 샤를 10세는 1830년 8월 2일 마지못해 퇴위 문서에 서명했다. 아버지 샤를 10세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자, 루이 앙투안 역시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서명과 자신의 서명 사이에 잠시 왕위를 계승하여 '''루이 19세'''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6] 퇴위 문서에는 "루이 앙투안"으로만 언급되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기에, 부왕의 뜻에 따라 동생의 유복자인 조카 앙리 다르투아(보르도 공작)에게 왕위를 양위하는 문서에 즉시 동의해야 했다. 그러나 샤를 10세와 루이 앙투안 모두 실제 즉위하지 못했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가 의회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어 7월 왕정이 성립되었다.결국 루이 앙투안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고, "마르네 백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2] 프랑스에서 추방된 후에는 성을 드 부르봉에서 드 프랑스로 바꾸고, 루이 19세 및 앙굴렘 공작 외에는 루이 앙투안 드 프랑스를 칭하기도 했다.
루이 앙투안과 그의 아내는 1830년 11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로 건너가, 홀리루드 궁전 근처 21번지(현재 22번지) 리젠트 테라스에 거주했다.[7][8] 당시 샤를 10세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9] 1832년,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 황제가 프라하 성을 망명 왕족들에게 제공하자 루이 앙투안과 샤를 10세는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1835년 프란츠 1세가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 페르디난트 1세는 1836년 여름 대관식을 위해 궁전이 필요하다며 프랑스 왕족에게 거처를 비워달라고 요청했다.[1] 이에 망명 중인 프랑스 왕족 일행은 프라하 성을 떠나 1836년 10월 21일 오스트리아 괴르츠(현 이탈리아 영토)의 그라펜베르크 궁전에 정착했다.[10][1]
많은 정통 왕위 계승 지지자들은 샤를 10세와 루이 앙투안의 퇴위가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1836년 샤를 10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를 정당한 국왕으로 인정했으며, 샤를 10세 사후에는 루이 앙투안을 루이 19세로서 프랑스의 정당한 국왕으로 간주했다.
루이 앙투안은 1844년 괴르츠에서 암으로 투병하다 실명한 후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부부 사이는 좋았지만 자녀는 없었다. 그의 유해는 아버지 샤를 10세가 묻힌 슬로베니아 노바고리차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코스타네비차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루이 앙투안 사후, 조카인 보르도 공작 앙리 다르투아가 앙리 5세를 칭하며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수장이 되었지만, 망명 중에는 주로 샹보르 백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참조
[1]
웹사이트
Shortest reign of a monarch
http://www.guinnessw[...]
2017-04-12
[2]
간행물
Notes de vexillologie royale française
https://books.google[...]
[3]
웹사이트
The French Royal Family: Titles and Customs
https://www.heraldic[...]
[4]
웹사이트
Le Duc d'Angoulême (1775–1844)
https://archive.org/[...]
E. Paul
2017-04-12
[5]
서적
Histoire de la France et des Français au jour le jour: 1814-1902, les chemins de la liberté
https://books.google[...]
Librairie académique Perrin
1976
[6]
서적
Guinness Book of World Records
https://books.google[...]
Sterling Publishing
1975
[7]
서적
The People of Calton Hill
Mercat Press
1993
[8]
뉴스
Newspaper article on sale of 21 Regent Terrace
http://news.scotsman[...]
The Scotsman
2002-02-09
[9]
서적
A French King at Holyrood
John Donald Publishers Ltd.
1995
[10]
웹사이트
Palazzo Strassoldo Grafenberg-Coronini – Consorzio Castelli FVG
https://consorziocas[...]
[11]
문서
루이 19세, 20분 간 왕이 된 자
베르사유, 비아 로마나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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