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칠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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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주 칠중성은 선덕여왕 때 축조된 성으로, 임진강 중류 남쪽 연안에 위치하여 관서지방과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 간의 격전지였으며, 특히 638년, 660년, 675년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나당전쟁 시기에는 당나라와 신라 간의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한국 전쟁 당시 고랑포 전투와 적성 전투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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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칠중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파주 칠중성 |
| 로마자 표기 | Paju Chiljungseong |
| 유형 | 사적 |
| 지정 번호 | 437 |
| 지정일 | 2002년 1월 29일 |
| 시대 | 삼국시대 |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산148번지 외 |
| 면적 | 53,075m2 |
| 문화재청 ID | 13,04370000,31 |
2. 역사적 배경
칠중성은 해발 147m의 중성산 정상부와 그 남서쪽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퇴뫼식 산성이다. 전체 둘레는 603m이고 남북 폭은 198m, 동서 폭은 168m이다. 북동쪽이 가장 높고 서벽에 비해 동벽 부분이 현저히 낮은 형태를 보인다.
2000년 10월 27일부터 2001년 1월 15일까지 지표조사 결과 문지 3개소, 건물지 5개소, 우물지 2개소 등이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칠(七)'자가 새겨진 평기와와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우리나라 고대사의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2. 1.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
칠중성은 임진강 중류의 남쪽 연안에 위치하여 관서지방과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칠중성은 삼국시대에 잦은 전투가 벌어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신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이 성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삼국 통일 과정에서 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침공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638년(선덕여왕 7년)에 고구려 군이 칠중성을 공격했지만 알천이 격퇴했다. 660년에는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이 칠중성을 공격하여 20여일 간의 포위전 끝에 신라군이 패하고 성이 함락당했다.
통일 이후에는 나당 전쟁에서 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673년(문무왕 13년)에는 고구려군이 이근행의 당나라 군대에 궤멸당해 고구려 부흥운동이 와해되었고, 고구려군은 신라군에 흡수되었다. 675년(문무왕 15년)에 당나라가 다시 말갈과 연합해 칠중성을 공격했지만, 신라군은 소수의 피해를 입었지만 당군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2. 2. 신라-고구려 간 전투
638년(선덕여왕 7년) 고구려 군이 칠중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했으나 알천이 격퇴했다. 660년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이 20여 일간의 포위전 끝에 칠중성을 함락시켰고, 신라 현령(縣令) 필부를 비롯한 본숙(本宿), 모지(謨支), 미재(美齋) 등의 관리와 일반 백성들이 전사하였다.2. 3. 나당전쟁 시기
673년(문무왕 13년) 이근행의 당나라 군대에 고구려군이 궤멸당하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와해되었고, 고구려군은 신라군에 흡수되어 9서당 10정에 편입되었다. 675년(문무왕 15년) 당나라가 다시 말갈과 연합해 칠중성을 공격했으나, 신라군은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당군을 격퇴하였다. 이는 나중에 매소성 전투에도 영향을 끼쳤다.2. 4. 한국전쟁 시기
한국 전쟁 당시 1950년 6월 25일 ~ 6월 28일 사이에 고랑포 전투가 벌어져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 한국군이 속수무책으로 궤멸당했다. 이듬해 1951년 4월 후순에는 적성 전투에서 영국군이 주축이 된 제29보병여단이 3만 명의 중공군의 도강을 저지하기도 했었다.3. 유적 및 유물
2000년 10월 27일부터 2001년 1월 15일까지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문지 3개소, 건물지 5개소, 우물지 2개소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칠(七)자명 평기와와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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