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소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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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소성 전투는 675년, 신라가 당나라의 매소성 인근 지역을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이다. 나당 전쟁의 일환으로,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매소성을 공격하자 신라는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이끄는 군대를 투입하여 당나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기병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신라는 당나라 기병 수천을 전멸시키고, 3만 380필의 말과 3만 명분의 무기를 획득했다. 매소성 전투의 승리는 676년 기벌포 해전 승리와 함께 나당 전쟁을 신라의 승리로 이끌었으며, 외세 침략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성을 지킨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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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 전투는 나당 전쟁 중 신라가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기벌포에서 벌인 해상 전투로, 신라가 승리하여 서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매소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분쟁 | 나당 전쟁 |
날짜 | 675년 9월 29일 |
장소 | 신라 매소성(현재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 |
결과 | 신라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신라 |
교전국 2 | 당나라 |
지휘관 | |
신라 지휘관 | 김원술 |
당나라 지휘관 | 이근행 |
병력 규모 | |
신라 병력 | 3만 명 |
당나라 병력 | 주변 지역 병력 20만 명 (실제 교전 병력 4만 명) |
피해 규모 | |
신라 피해 | 불명 |
당나라 피해 | 호위 기병 수천 괴멸, 말 3만 380필 손실, 3만 명분의 무기 손실, 사망 6,047명, 포로 30,380명 |
2. 배경
660년 백제와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당나라의 배신으로 인해 670년부터 나당 전쟁이 발발하였다. 675년에 당나라의 장수 이근행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 매소성 인근 지역을 공략하였고, 신라는 매소성 인근의 당나라군을 격파하기 위해 매소성을 총공격하였다.[1]
2. 1. 신라-당나라 간 갈등 고조
신라는 당나라군이 주둔한 옛 백제, 고구려의 땅을 되찾기 위해 670년 나당 전쟁을 일으켰다.[1] 672년 신라는 웅진성의 웅진 도독부를 축출하여 백제 땅을 되찾는 등 초기에는 신라에게 유리하게 전황이 형성되었다.[1]이에 당나라는 671년, 설인귀에게 수군을 끌고 백제로 향하게 하고, 육지로는 당군과 말갈족으로 편성된 군대를 동원해 압록강으로 남침하였다.[1] 육군은 672년 7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하는 등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설인귀의 수군은 신라군에 격파당하고 당으로 되돌아갔다.[1] 신라군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군은 672년 12월 백빙산 전투와 673년 호로하 전투에서 당나라군에게 대패하기도 했다.[1]
2. 2. 초기 전황 (670년 ~ 673년)
신라가 당나라군이 주둔한 옛 백제, 고구려의 땅을 찾기 위해 670년 일으킨 나당 전쟁은 672년 신라가 웅진성의 웅진 도독부를 축출하여 백제 땅을 되찾는 등 초기에 신라에게 유리하게 전황이 형성되었다.[1]이에 당나라는 671년 설인귀에게 수군을 끌고 백제로 향하게 하고, 육지로는 당군과 말갈족으로 편성된 군대를 동원해 압록강으로 남침하였다.[1] 육군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 672년 7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했지만, 설인귀의 수군은 신라군에 격파당하고 당으로 되돌아갔다.[1] 신라군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군은 672년 12월 백빙산 전투와 673년 호로하 전투에서 당나라군에게 대패하기도 했다.[1]
3. 전투 과정
670년 신라가 당나라군이 주둔한 옛 백제, 고구려 땅을 찾기 위해 일으킨 나당 전쟁은 672년 신라가 웅진성의 웅진 도독부를 축출하여 백제 땅을 되찾는 등 초기에 신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당나라는 671년, 설인귀에게 수군을 끌고 백제로 향하게 하고, 육지로는 당군과 말갈족으로 편성된 군대를 동원해 압록강으로 남침하였다. 육군은 672년 7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점령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지만, 설인귀의 수군은 신라군에 격파당하고 당으로 되돌아갔다. 672년 12월 백빙산 전투와 673년 호로하 전투에서 신라군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군은 당나라군에게 대패하기도 했다.
675년, 당나라의 장수 이근행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 매소성 인근 지역을 공략하였다.[1]
3. 1. 신라군의 전략
김유신의 둘째 아들 김원술이 이끄는 신라군 보병 3만은 매소성의 당나라군을 격파하기 위해 공격했다.[1] 신라군은 매소성 주위 초성리산성, 초성리토성, 수철성 등 3곳에 주둔하면서 장창병(길이가 긴 창), 노병, 쇠뇌 등을 활용하여 보급 부대를 호위하러 오는 당나라 기병 수천을 무찔렀다.[1]또한 신라군은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천성을 공격해 천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매소성에 주둔한 20만 당나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1] 그리고 인근 협곡의 산성까지 진을 쳐 당나라 기병과 정면 승부를 벌여 승리하면서 매소성을 지켰다.[1]
3. 2. 주요 전투
김유신의 둘째 아들 김원술이 이끄는 신라군 보병 3만 명은 매소성 인근에서 당나라 기병 수천 명을 격파했다. 신라군은 매소성 주위 초성리산성, 초성리토성, 수철성 등 3곳에 주둔하며 장창병(길이가 긴 창), 노병, 쇠뇌 등으로 무장하고, 보급 부대를 호위하기 위해 달려오는 당나라 기병을 무찔렀다.[1]또한 신라군은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천성을 공격해 천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매소성에 주둔한 20만 당나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1]
신라군은 협곡의 산성에 진을 치고 당나라 기병과 정면 승부를 벌여 승리하면서 매소성을 지켜냈다.[1]
4. 결과 및 영향
신라는 이 전투에서 당나라 기병을 거의 전멸시키고 말 3만 380필과 3만 명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1]
4. 1. 나당 전쟁 승리
신라는 이 전투에서 당군 기병 수천을 거의 전멸시키고 말 3만 380필, 3만 명분의 무기를 빼앗았다.[1]676년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나당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1]
4. 2. 역사적 의의
매소성 전투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성을 지킨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강조한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당나라 기병 수천 명을 거의 전멸시키고 말 30380필, 30000명분의 무기를 빼앗았다.[1] 676년 기벌포 해전에서도 승리하면서 나당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종결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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