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페르디난도 2세 (나폴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페르디난도 2세는 나폴리의 왕 알폰소 2세의 아들로, 1495년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침공과 국민들의 불만으로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인간적이고 자비로운 왕"으로 시민들에게 사랑받았으나, 샤를 8세에게 결투를 거절당하고 나폴리를 떠나 이탈리아 군주들의 지원을 받아 나폴리를 탈환했다. 1496년 이복 고모 조반나와 결혼했으나, 같은 해 사망했으며, 그의 삼촌 페데리코가 왕위를 계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96년 사망 - 윤호 (평정공)
    윤호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아버지이며 영원부원군에 봉해졌고,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결단력 부족으로 비판받기도 했으며, 아들 윤탕로와 함께 『파천집』과 『구급간이방』을 편찬했고 시호는 평정이다.
  • 1496년 사망 - 히노 도미코
    히노 도미코는 무로마치 시대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정실로, 막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오닌의 난 권력 다툼 개입, 쇼군 후계자 옹립 역할 수행, 막부 좌지우지, 민중 반발 야기 등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며, 후지와라 도미코로 불렸다는 주장도 있고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 1469년 출생 - 마누엘 1세 (포르투갈)
    마누엘 1세는 1495년부터 1521년까지 포르투갈을 통치한 왕으로, 중앙 집권화와 해상 무역로 개척을 통해 포르투갈의 번영을 이끌었으며, 마누엘 양식을 발전시키고 유대인 정책을 펼쳤다.
  • 1469년 출생 - 토마스 카예탄
    토마스 카예탄은 이탈리아 출신의 도미니코회 수도사이자 신학자, 철학자, 추기경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 연구에 매진하여 토마스주의 학파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으며, 교황권 옹호와 종교 개혁 시기 마르틴 루터 가르침 조사 등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철학, 신학 외에 경제 분야에서도 유비 개념 옹호와 무역의 도덕성에 대한 고찰로 알려져 있다.
  • 트라스타마라가 - 후안 1세 (카스티야)
    후안 1세 (카스티야)는 엔리케 2세의 아들로 카스티야의 왕이 되었으며, 포르투갈 병합 시도 실패, 유대인 관용 정책, 아르메니아 왕 구출 등의 활동을 했고, 아라곤의 엘레오노르와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와 결혼했으며, 낙마 사고로 사망하여 아들 엔리케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 트라스타마라가 -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 분쟁의 중심인물로, 엔리케 4세의 딸로 인정받았으나 사생아 의혹 속에 이사벨 1세와 왕위를 다투다 왕위 계승권을 잃고 자신을 여왕으로 여기며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페르디난도 2세 (나폴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드리아노 피오렌티노의 페르디난도 다라고나 카푸아 공작 메달
아드리아노 피오렌티노의 카푸아 공작 시절 페르디난도 다라고나 메달
군주 칭호나폴리 국왕
재위 기간1495년 1월 23일 – 1496년 9월 7일
이전 통치자알폰소 2세
다음 통치자페데리코
배우자조반나 디 나폴리
왕가트라스타마라 가문
아버지알폰소 2세
어머니이폴리타 마리아 스포르차
출생일1467년 6월 26일
출생지나폴리, 나폴리 왕국
사망일1496년 9월 7일 (29세)
사망지솜마베수비아나, 나폴리 왕국
매장지산 도메니코 마조레
별칭페란디노(Ferrandino)

2. 생애

페르디난도 2세는 나폴리의 왕 알폰소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알폰소 2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침공 위협과 국내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1495년 아들 페르디난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14]

그러나 즉위 직후 샤를 8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나폴리를 방어하지 못하고 이스키아섬으로 피신해야 했다. 프랑스군이 나폴리를 점령했지만, 곧 이탈리아 도시들이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하고 스페인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가 바뀌었다. 페르디난도는 스페인의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나폴리를 되찾았다.[18][23]

왕국을 되찾은 페르디난도는 1496년 그의 고모인 조반나 디 나폴리와 결혼했으나, 같은 해 9월 7일 후사 없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 세력을 거의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는 숙부인 페데리코 1세에게 계승되었다.

2. 1. 탄생과 초기 생애

페르디난도는 1467년 6월 26일 나폴리의 카스텔 카푸아노에서 알폰소 2세와 그의 아내 이폴리타 마리아 스포르차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알폰소는 아브루초 전선에서 피렌체인들과 싸우고 있었고, 할아버지 페란테 왕은 테라 디 라보로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이폴리타 혼자 출산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정당한 상속자가 태어났기에 그의 탄생은 큰 기쁨으로 환영받았다. 그는 7월 5일에 세례를 받았고,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페르디난도, 어머니가 빈첸초 페레리 성인에게 헌신했기에 빈첸초라는 이름을 받았다.[1] 알레산드로 쿠톨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불행한 왕 페르디난도가 될 자가 이처럼 세상에 나왔다. 페란테 왕, 그의 가족, 모든 나폴리 사람들은 그를 크게 기뻐하며 맞이했고, 그의 짧은 생애 동안 고통은 전혀 아끼지 않았다 [...]"

페르디난도, 당시 카푸아 공작의 어린 시절 초상화가 그려진 나폴리 알바렐로. 대략 1475-1480년경.


어머니 이폴리타가 그녀의 어머니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페르디난도가 "진주처럼 아름답다"고 묘사되어 있으며,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변덕스러운 신생아였다고 전해진다.[2] 그는 아울루스 야누스 파라시우스[3], 가브리엘레 알틸리오, 그리고 차리테오를 가정교사로 두었는데, 특히 차리테오는 어린 페르디난도를 깊은 헌신과 충성심으로 따랐다.[4]

페르디난도는 이미 14세에 전쟁에서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가졌다. 할아버지 페란테 왕은 그를 왕의 부관으로 아브루초에 파견하여 베네치아 함대의 공격으로부터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는 오트란토 재정복 이후 베네치아와 페라라 사이에 소금 전쟁(1482-1484)이 발발하여, 페란테 왕이 사위인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1세 데스테를 돕기 위해 개입해야 했던 시기였다.[5] 이후 몇 년 동안, 페르디난도는 1485년에서 1486년 사이에 페란테 왕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던 두 번째 남작 반란 기간 동안 반란을 일으킨 남작들과 싸우며 왕국을 지속적으로 방어했다.[5]

약 20세였던 1486년 여름, 페르디난도는 말에서 떨어지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다. 조반니 사바디노 데글리 아리엔티에 따르면, 그는 "정신적 위대함과 용맹함으로 인해 튼튼한 말을 요구했는데, 그 말이 그를 떨어뜨려 그가 죽은 줄 알고 데려갔다"고 한다. 그는 1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고, 어머니 이폴리타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간청한 끝에 아들이 회복되었다고 전해진다.[6] 당시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으나 이후 심한 열에 시달리며 생명이 위태로웠고,[7][8] 사람들은 그가 어머니의 기도로 살아났다고 믿었다. 아버지 알폰소는 서원물로서 은으로 된 페르디난도의 형상을 만들어 로레토의 산타 마리아 교회에 기증했다.[9]

1491년 그의 동생 피에트로가 병으로 사망하자, 페르디난도는 나폴리와 그의 늙은 할아버지 페란테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페란테는 이미 왕국을 덮칠 끔찍한 전쟁을 예감하고 있었다. 1494년 1월 25일 페란테 왕이 사망하고, 아버지 알폰소 2세가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알폰소 2세는 즉위하자마자 루도비코 일 모로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공작의 영지인 바리 시를 점령했다. 이는 루도비코가 그의 조카이자 알폰소의 사위인 잔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로부터 밀라노 공국을 찬탈했기 때문이었다.[10][11] 이에 루도비코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게 이탈리아 침공을 허가하여 나폴리 왕국을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이 본래 앙주 가문의 것이었으나 아라곤 왕가가 찬탈했다고 믿고 있었다.[10][11]

페란디노 칼라브리아 공작의 메달, 아드리아노 피오렌티노, 1494년 제작.


나폴리 왕국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페르디난도는 항상 정직하게 행동했으며, 매우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부과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 1494년 10월에 그는 포를리 백작부인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동맹으로서 로마냐에서 프랑스 군과 싸웠다. 그러나 10월 20일과 21일 사이에 일어난 이른바 모르다노 약탈 사건 때, 프랑스 군이 모르다노 시 주변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포위 공격을 가하고 동시에 페르디난도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병력이 적었던 페르디난도는 장군들의 조언에 따라 백작부인의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12] 이에 격분한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고, 페르디난도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파엔차를 떠나 체세나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포를리의 연대기 작가 레오네 코벨리는 페르디난도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정직하게 행동했으며, 오히려 카테리나 백작부인이 그의 부하들을 보내 페르디난도를 약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기록했다.[12]

: "베르테노로와 체세나 사람들은 그에게 더 이상 식량을 공급하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칼라브리아 공작과 그는 꺼려했다. [...] 칼라브리아 공작은 이 땅과 나라에서 확실히 정직하게 행동했고, 우리의 적이 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친구였을 때 그는 포도원이나 가지가 손상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의 진영은 자유로웠고, 그에게 식량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은 잘 지불되고 보호받고 존경받기를 바랐으며, 나는 그 진영의 부정직함을 결코 알지 못했다. [...]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충분히 신용을 주었으니, 사람들이 그를 따라가 말, 무기, 옷을 훔치고 가져가도록 보냈기 때문이다."

: — 레오네 코벨리, "포를리의 연대기"

페란디노의 사후 초상화, 17세기 이탈리아 학교.


자료들은 그가 항상 프랑스 군과의 충돌을 갈망하고 그의 전쟁 기술을 시험하려 했다고 묘사한다. 실제로 그는 1494년 9월 16일, 이몰라 근처에서 프랑스 군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했지만 적들은 응하지 않았다. 이틀 후, 그는 적의 사령관 잔프란체스코 산세베리노 다라곤, 카이아초 백작에게 사자를 보내 결투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다시 프랑스 사령관 로베르트 스튜어트 다우비니에게 도전하여 프랑스 군이 이를 받아들였지만, 카이아초 백작이 결투를 막아 결국 소규모 전투로 만족해야 했다.[13]

2. 2. 프랑스의 침공과 나폴리 왕위 계승

페르디난도는 나폴리의 왕 알폰소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알폰소 2세는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의 침공 위협과 국내의 불만으로 왕위 계승이 불안정해지자, 1495년 아들 페르디난도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페르디난도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지지를 호소하려 로마로 갔으나, 교황은 결국 프랑스에 굴복했다. 페르디난도는 교황이 제안한 안전 통행증을 거절하고 나폴리로 돌아왔다.[14]

아버지 알폰소 2세는 잔혹함으로 인해 나폴리 시민들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페르디난도는 "인간적이고 자비로운 왕"으로 여겨져 백성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즉위 직후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가 부당하게 빼앗았던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수년간 감옥에 갇혀 있던 이들을 풀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고자 노력했다.[15] 페르디난도는 샤를 8세에게 왕국의 소유권을 놓고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으나, 샤를 8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6]

카푸아 공작 페르디난디노의 메달. 아드리아노 피오렌티노, 1494년 이전, 워싱턴 국립 미술관


그러나 페르디난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폴리의 여러 도시들이 프랑스군에 항복하고 지휘관들이 배신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페르디난도는 나폴리를 지킬 수 없게 되자, 시민들에게 15일 안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가족과 함께 이스키아섬으로 피신했다. 그는 새 카스텔(Castel Nuovo) 방어를 아발로스 가문의 알폰소에게 맡기고, 4,000명의 스위스 용병을 배치했다.[17][18] 이스키아 요새의 성주 후스토 델라 칸디나(Justo della Candida)마저 배신하여 성문을 막았으나, 페르디난도는 기지를 발휘하여 성주를 처단하고 요새를 장악했다.[14][19][20]

멜키오레 페라이올로의 "15세기 비유 연대기"에 묘사된 프랑스군의 나폴리 입성 (1495년 2월 22일)


1495년 2월 22일, 샤를 8세나폴리에 입성하여 카스텔 카푸아노에 거처를 정했다. 그는 페르디난도에게 왕위 포기를 종용하며 프랑스 내 영지를 제안했지만, 페르디난도의 숙부 페데리코는 "왕으로 태어났으니 왕으로 살다 죽을 것"이라며 거절 의사를 분명히 했다. 샤를 8세는 나폴리 귀족들의 일부 지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관직에 프랑스인들을 임명하는 등 오만한 통치로 민심을 잃었다. 이러한 실책은 이탈리아의 다른 국가들이 반(反)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디난도가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1495년 5월, 제노바 함대와의 해전 패배로 해상 지원을 잃고, 나폴리 민심이 아라곤 왕가 쪽으로 기울자 샤를 8세는 프랑스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포르노보 전투에서 동맹군에게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페르디난도는 이스키아섬에서 메시나로 건너가 사촌인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스페인의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스페인 원정군(기병 600명, 보병 1,500명)이 도착했고[23][18], 페르디난도는 이들과 함께 칼라브리아로 상륙하여 프랑스군을 공격했다.[18]

세미나라 전투 중 쓰러진 페르디난도(왼쪽 흰 말 위)를 구하는 카푸아의 존(오른쪽 방패와 칼을 든 기사)


1495년 6월 28일, 세미나라 전투에서 페르디난도는 용감히 싸웠으나[24], 칼라브리아 민병대가 후퇴하면서 연합군은 패배했다. 페르디난도는 프랑스군 지휘관 도비니(d'Aubigny)에게 말이 베여 위험에 처했지만, 카푸아의 존(John of Capua)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26] 페르디난도는 이 패배를 통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전쟁의 지휘권을 곤살로 데 코르도바에게 맡긴 후, 메시나로 돌아갔다.[18]

페르디난도 2세의 동전


세미나라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리 시민들의 지지 덕분에 페르디난도는 곧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곤살로 데 코르도바는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칼라브리아를 서서히 탈환했고, 프랑스 용병들은 급료 미지급 문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귀국했다. 남은 프랑스군은 아텔라(Atella)에서 포위되어 항복했다. 1495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마침내 나폴리로 돌아왔고, 시민들은 꽃과 향수를 뿌리며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27][18] 페르디난도가 1496년 9월 7일 사망할 무렵, 나폴리 왕국에서 프랑스군은 거의 완전히 축출되었다.

1496년 페르디난도는 아버지 알폰소 2세의 이복 여동생이자 자신의 고모인 조반나 디 나폴리와 결혼했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그 해에 사망했다. 왕위는 그의 숙부인 페데리코 1세가 계승했다.

2. 3. 결혼과 사망

샤를 8세의 군대를 몰아내고 왕국을 되찾은 페르디난도 2세는 1496년 그의 고모인 조반나와 결혼했다. 조반나는 페르디난도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아라곤의 호안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알폰소 2세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결혼 당시 페르디난도는 29세, 조반나는 18세였다. 결혼식은 소마 베수비아나에서 열렸으며, 페르디난도는 조반나를 여왕으로 책봉하고 직접 대관식을 거행했다.

알리프란도 카프리올리가 1596년에 그린 "저명한 선장 100인의 초상화"에 묘사된 페르디난도 2세


그러나 결혼 직후 페르디난도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전에 앓았던 말라리아가 재발한 것으로 보이며, 건강 회복을 기원하며 나폴리의 안눈치아타 교회로 옮겨졌다가 카스텔 누오보로 이동했다.[18] 밀라노 역사가 베르나르디노 코리오는 페르디난도가 왕국을 거의 회복한 후 조반나와 결혼하여 애정을 나누다가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나폴리에서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28]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결혼보다는 왕국을 되찾기 위해 수년간 전쟁에 참여하며 겪은 육체적 고생과 질병이 더 큰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페르디난도는 유언으로 삼촌 페데리코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1496년 10월 7일 카스텔 카푸아노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자아냈으며, 안장 제작 장인 줄리아노 파사로는 당시 사람들이 페르디난도의 젊은 나이와 업적을 기리며 그의 죽음을 매우 애통해하는 분위기를 기록으로 남겼다.[18] 페르디난도는 산 도메니코 성당의 성구실에 그의 할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의 무덤 근처에 안장되었다.[18]

페르디난도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그의 삼촌인 페데리코 1세에게 계승되었다. 페데리코 1세는 아라곤 왕조의 마지막 나폴리 국왕이 되었다. 페르디난도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후 아라곤 가문의 쇠퇴는 당시 여러 문학 작품에서 애도의 대상이 되었다.

3. 성격 및 외모



페르디난디노 왕의 초상화로 추정됨. 알리프란도 카프리올리가 만든 16세기 조각과 유사성을 보인다.


사후 페르디난도 판화, c. 1600-1700.


동시대 자료들은 페르디난도 2세를 용감하고[30] 지도력을 갖춘 인물로 묘사한다. 매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폴리 왕국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정직하게 행동했으며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부과할 줄 알았다.[12] 그는 번영에 들뜨거나 역경에 좌절하지 않았고, 밝은 얼굴로 모든 이에게 감사를 표하는 겸손함을 지녔다고 전해진다.[29] 카스틸리오네는 그의 이러한 성품을 높이 평가했다. 빈첸초 칼메타는 그를 "고결한 정신의 왕자이며, 자연과 우연이 줄 수 있는 모든 은총을 갖춘 자"라고 칭했고,[31] 익명의 베네치아 연대기 작가는 그가 "활기차고, 친절하며, 온순하고, 관습적이며, 덕이 있는" 진정한 군주였으며 "시저의 마음"으로 군대를 이끌었다고 기록했다.[32] 카밀로 포르치오는 그가 아버지 알폰소 2세와는 달리 진정한 영광을 추구했으며, 요절하지 않았다면 이를 성취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시인 차리테오는 페르디난도가 "아버지와 같은 대담한 심장과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인간미를 지녔다"고 묘사했다.

신체적으로 페르디난도는 잘생긴 청년으로, 몸매가 좋고 밝은 눈, 넓은 가슴을 가진 건장하고 근육질의 체격이었다.[16] 카스틸리오네에 따르면, 그는 어떤 질병으로 인해 머리를 높이 드는 습관이 있었으며, 자신의 좋은 몸매를 알고 있어 때때로 짧은 상의를 입기도 했다.[33]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체 단련을 받아 민첩했으며, 점프, 달리기, 도약, 펜싱, 승마에 능숙했고, 특히 기마 시합과 토너먼트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여 자주 우승했다.[29] 그는 프랑스 군과의 전투를 갈망하며 자신의 전쟁 기술을 시험해보고 싶어 했고, 여러 차례 프랑스 지휘관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다.[13]

페르디난도는 문학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가브리엘레 알틸리오와 아울로 지아노 파라시오와 같은 학자들을 스승으로 두었으며,[3] 여가 시간에는 직접 시를 짓는 것을 즐겼다. 예를 들어, 프랑스 침공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나폴리를 떠난 신하에게 이탈리아의 짧은 서정시 형식인 스트람보토(strambotto)를 다음과 같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34]

:누가 나의 떠남에 만족하는가,


:누가 기뻐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웃는가,


:누가 불평하고 누가 불평하는가,


:누가 그것으로 고통받고 누가 절망하는가.


:누가 나를 이 고통 속으로 끌어들이고 밀어내는가,


:누가 유감스러워하고 누가 유감스러워하는가.


:나의 불쌍한 영혼이 스스로를 고문한다


:이 불 속에서 그것은 소모되고 침묵한다.

페르디난도는 아버지 알폰소 2세나 할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와는 달리 고정된 애인을 두거나 사생아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동시대의 다른 귀족들처럼 자유로운 성 관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매력과 여성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보여주는 일화가 베르나르도 도비치의 편지를 통해 전해진다.[35]

18세기 판화 속의 추기경 베르나르도 도비치 다 비비에나


1494년 10월, 체세나에 주둔 중이던 페르디난도에게 카테리나 곤차가(Caterina Gonzaga)라는 귀족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4년 전 페르디난도의 초상화를 보고 그의 명성을 들은 뒤 그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왔다고 전해졌다. 페르디난도는 처음에는 이것이 함정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신원 확인 후 비밀리에 만나 관계를 맺었다.[36] 그러나 도비치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디난도는 나중에 이 여성에게 "악마보다 더한 지루함"을 느꼈다고 고백하며, 그녀가 다시 만나고 싶다면 직접 군영으로 찾아와야 할 것이고, 오더라도 친구인 알폰소 2세 다발로스에게 넘겨주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당시 귀족 사회의 일면과 페르디난도의 성격을 보여준다.[37]

또한 페르디난도는 자신의 외모와 매력을 정치적, 외교적 목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카테리나 스포르차와의 동맹을 모색할 당시, 그는 잘생긴 남성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카테리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나폴리 스타일로 몸에 꼭 맞고 아름답게 차려입었다"고 도비치는 기록했다. 도비치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서로 긁적였으며", 카테리나의 당시 연인이었던 자코모 페오(Giacomo Feo)가 질투심을 드러냈다고 덧붙였다.[12]

4. 대중 문화에서의 등장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 등장하는 페르디난도 캐릭터는 역사적 인물인 페르디난도를 모델로 하고 있다.
  •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된 캐나다 텔레비전 드라마 ''보르지아''에서 페르디난도 역은 스웨덴 배우 마티아스 바렐라가 맡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이름 외에는 역사적 인물인 페르디난도와 공통점이 없다.

5. 훈장


  • 에르민 훈장 기사

참조

[1] 서적 Breve storia di Re Ferrandino
[2] 서적 Lettere
[3] 웹사이트 FERDINANDO II d'Aragona, re di Napoli, detto Ferrandino in "Enciclopedia Italiana" https://www.treccani[...]
[4] 웹사이트 Ferdinando II d'Aragona re di Napoli, detto Ferrandino in "Enciclopedia machiavelliana" https://www.treccani[...]
[5] 웹사이트 FERDINANDO II d'Aragona, re di Napoli, detto Ferrandino https://www.treccani[...]
[6] 서적 Gynevera de le clare donne
[7] 간행물 Archivio Storico per le Province Napoletane, Nuova serie Anno IX. – XLVIII. dell'intera collezione 1923
[8] 간행물 Corrispondenza degli ambasciatori fiorentini a Napoli, Volume 8 2002
[9] 문서 Documenti per la storia: Effemeridi delle cose fatte per il duca di Calabria (1484-1491) di Joampiero Leostello ... da un codice della Biblioteca nazionale di Parigi 1883
[10] 문서 1921
[11] 문서 1565
[12] 서적 Caterina Sforza
[13] 서적 La spedizione di Carlo VIII
[14] 서적 Storia d'Italia
[15] 서적 Napoli Aragonese
[16] 서적 Storie e leggende napoletane
[17] 서적 Diurnali
[18] 서적 Le vite de Re di Napoli, Raccolte succintamente con ogni accuratezza
[19] 웹사이트 Ferrandino d'Aragona e "l'omicidio d'autore" sul Castello Aragonese https://www.isclano.[...] 2015-09-28
[20] 웹사이트 Ferrandino d'Aragona http://www.ilportale[...]
[21] 웹사이트 Carlino (Con stemma coronato) https://numismatica-[...]
[22] 서적 Vite de' re di Napoli https://books.google[...]
[23] 문서 Prescott, 272
[24] 서적 Historia
[25] 문서 Prescott, 277
[26] 문서 Roscoe, ''Leo X'', p. 135. Roscoe dichiara che il di Capua fosse paggio di Ferdinando e fratello del duca di Termoli.
[27] 서적 Cronica di Napoli
[28] 문서 1565
[29] 서적 Effemeridi delle cose fatte per il Duca di Calabria
[30] 서적 Mappamondo Istorico Cioè Ordinata Narrazione Dei Quattro Sommi Imperi Del Mondo Da ... toccante le vite de' primi Dominanti in Sicilia, e de' Re di Napoli ...
[31] 서적 Collettanee grece, latine, e vulgari per diuersi auctori moderni, nella morte de lardente Seraphino Aquilano, per Gioanne Philotheo Achillino bolognese in uno corpo redutte https://books.google[...]
[32] 서적 Rerum italicarum Scriptores https://books.google[...] Forni
[33] 서적 Il Cortegiano
[34] 서적 Discussioni e ricerche letterarie
[35] 서적 Giuliano de' Medici: il crepuscolo del Rinascimento
[36] 서적 Rinascimento segreto. Il mondo del Segretario da Petrarca a Machiavelli
[37] 서적 Quaderno, Volumi 1-5
[38] 서적 Rinascimento: rivista dell'istituto nazionale di studi sul Rinascimento, volumi 5-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