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극동 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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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극동 전대는 1884년 6월 27일 통킹 연안 해군 사단과 극동 해군 사단의 통합으로 창설되었다. 이 전대는 아메데 쿠르베 제독의 지휘 하에 청불 전쟁에 참전하여 기륭 포격전, 푸저우 해전, 펑후 제도 작전 등 주요 작전을 수행했다. 전쟁 중에는 함선 손실도 있었으나, 1885년 4월 청불 전쟁 종전 무렵에는 다양한 종류의 함선으로 구성된 대규모 전력을 갖추었다. 쿠르베 제독 사망 이후 세바스티앙 레스페 제독이 지휘권을 승계했으며, 전쟁 이후 극동 해군 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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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극동 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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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882년 극동에서 프랑스의 이권은 사이공에 주둔한 코친차이나 해군과 요코하마에 주둔한 극동 해군, 이 두 개의 해군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코친차이나 해군 사단(''division navale de Cochinchine'')은 싱가포르와 하이난 해협 사이의 해안 항해와 코친차이나 및 캄보디아 강을 따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극동 해군 사단(''division navale de l'Extrême-Orient'')은 중국 해안과 중국 및 일본 주변 해역을 순찰했다.[16]
1882년, 프랑스의 극동 지역 이권은 코친차이나 해군 사단(division navale de Cochinchine프랑스어)과 극동 해군 사단(division navale de l'Extrême-Orient프랑스어)이라는 두 개의 해군 사단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코친차이나 해군 사단은 사이공에 주둔하며 싱가포르와 하이난 해협 사이의 해안 항해와 코친차이나 및 캄보디아 강을 따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극동 해군 사단은 요코하마에 주둔하며 중국 해안과 중국 및 일본 주변 해역을 순찰했다.[1]
극동 편대는 박러 매복 작전 소식에 따라 1884년 6월 27일 통킹 연안 해군 사단과 극동 해군 사단을 합병하여 공식적으로 구성되었다. 통킹 연안 해군 사단은 1883년 7월부터 아메데 쿠르베 제독의 지휘를 받았으며, 철갑함 바야르(기함)와 아떼롱트, 순양함 샤토르노, 경프리깃 아믈랑과 파스발, 포함 렁스, 비페르, 아스픽, 수송선 드락과 손, 그리고 어뢰정 45번과 46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8]
극동 전대는 청불 전쟁 중 여러 작전에 투입되었다. 철갑함 ''라 갈리소니에르'', 순양함 ''빌라르'', 그리고 포함 ''뤼탱''은 레스페 제독의 지휘 아래 1884년 8월 5일 기륭 포격전에 참여했다. 8월 5일 오후 레스페가 기륭 점령을 위해 상륙시킨 병력은 ''바야르''와 ''빌라르''의 상륙 부대로, 각각 ''프리게이트 함장'' 마틴과 ''해군 중위'' 자크미에가 지휘했다. 두 부대는 8월 6일 아침 중국군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해안으로 전투 후퇴를 해야 했으며, 그곳에서 다시 배에 탑승했다. 이 작전에서 프랑스군은 2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11]
함대의 함선은 전투에서 손실된 것은 없었지만, 다른 원인으로 인한 손실이 몇 건 있었다. 경프리깃함 fr (fr 함장)은 1884년 7월 민강에서 좌초되어 수리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12] 1884년 11월 15일, 순양함 fr에서 보일러가 폭발하여 13명의 선원이 화상을 입어 사망했다.[13]
[1]
문서
1882년 4월, 앙리 리비에르가 통킹에 개입한 것은 코친차이나 해군 사단의 함선들을 동원해서였다. 리비에르가 꺼우저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한 후, 프랑스가 통킹에 대한 개입을 늘리면서 1883년 5월 말 통킹만을 순찰하기 위해 해군 사단이 창설되었다. 이 새로운 통킹 해안 해군 사단(''division navale des côtes du Tonkin'')의 지휘는 아메데 쿠르베 제독에게 맡겨졌다.[17] 또한, 1883년 여름에는 다수의 급파선과 포함으로 구성된 통킹 함대(''flotille de Tonkin'')가 창설되어 통킹 주둔 프랑스 최고 사령관인 알렉상드르 외젠 부에(1833–87) 준장에게 지휘권이 부여되어 내륙 작전을 수행했다.
3. 창설
1882년 4월, 앙리 리비에르는 코친차이나 해군 사단의 함선을 동원하여 통킹에 개입했다. 종이 다리 전투에서 리비에르가 패배하고 사망하자, 프랑스는 통킹에 대한 개입을 늘렸다. 1883년 5월 말, 통킹 만을 순찰하기 위해 아메데 쿠르베 제독을 지휘관으로 하는 통킹 해안 해군 사단(''division navale des côtes du Tonkin'')이 창설되었다.[2] 또한 1883년 여름에는 다수의 급파선과 포함으로 구성된 통킹 함대(''flotille de Tonkin'')가 창설되어, 통킹 주둔 프랑스 최고 사령관인 알렉상드르-외젠 부에(1833–87) 준장이 내륙 작전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4. 구성
1884년 3월 이후 세바스티앙 레스페 제독이 지휘하는 극동 해군 사단은 철갑함 라 갈리소니에르(기함)와 트리옹팡트, 순양함 데스탱, 뒤귀에-트루앙 및 볼타, 포함 뤼탱으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전대는 쿠르베를 사령관으로, 레스페를 부사령관으로 두었다.[18]
1884년 10월에는 레반트 기지에서 순양함 리고 드 주누이와, 인도양 기지에서 니엘리가, 샹플랭이 전대에 합류했다.[4] 1884년 11월 말에는 태평양 기지에서 네 번째 순양함 에클레뢰르가 도착했다.[5] 1885년 1월에는 누벨칼레도니에서 순양함 뒤샤포와, 프랑스에서 순양함 라페루즈가 전대에 합류했다.[6] 1885년 3월 말 경에는 태평양 기지에서 전속된 순양함 케르겔렌이 전대에 합류했다. 통킹의 프랑스 해군은 1885년 봄에 순양함 파베르와 라 클로슈트리로 강력하게 증원되었고, 통킹 소함대의 일부로 알롱만 기지에 있던 해상 포함 ''Jaguar'' 또한 이 시기에 극동 전대로 전속되었다.
1885년 4월, 아드리앙-바르텔레미-루이 르니에 제독의 지휘 하에 프랑스에서 파견된 세 번째 해군 사단이 전대에 증원되었다. 르니에 사단은 철갑함 튀렌(기함), 순양함 마공, 프리모게, 롤랑, 포함 ''코메트''와 ''Sagittaire''로 구성되었다. 사단에는 어뢰정 2척(44호와 45호)과, 중국과의 적대 행위 기간 동안 프랑스 정부가 임대 및 무장한 민간 선박인 '보조 순양함' ''Château-Yquem''도 동행했다.[7] 르니에 사단은 해군 작전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늦게 극동 해역에 도착했지만, 일부 선박은 1885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계속된 프랑스 양쯔강 봉쇄에 참여했다.
1885년 4월, 청불 전쟁이 끝날 무렵 전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아메데 쿠르베 제독은 1885년 6월 11일 페스카도르 제도 마궁 항에서 기함 ''Bayard''에서 사망했고, 세바스티앙 레스페 제독이 잠시 전대 지휘권을 승계했다. 1885년 7월 25일 프랑스 정부는 1883년과 거의 동일한 규모의 극동 해군 사단을 재편성했다. 레스페 제독의 지휘 하에 르니에가 부사령관을 맡은 사단은 철갑함 라 갈리소니에르(기함), 튀렌 및 트리옹팡트, 순양함 라페루즈, 프리모게, 샹플랭 및 롤랑, 포함 ''Vipère'' 및 ''Sagittaire''로 구성되었다.[9] 다른 선박들은 프랑스로 귀환하거나, 통킹으로 전속되거나, 전 세계에 있는 프랑스 함대의 다양한 기지로 보내졌다.
1885년 6월 말, 프랑스 함선들은 매일 한 척씩 출항했다. ''D’Estaing''과 케르겔렌이 가장 먼저 출발하여 어뢰정 제50호와 제44호를 사이공까지 예인한 다음 프랑스로 향했다. ''Villars''와 에클레뢰르가 그 뒤를 따랐고, ''Château-Yquem''은 알롱만으로 병력, 포병 및 노새를 수송했다. 그 후 ''Annamite''가 아픈 사람들을 본국으로 수송하기 위해 떠났다. ''Duguay-Trouin''과 ''Châteaurenault''가 그 다음으로 프랑스로 돌아갔다. 마공과 파베르는 태평양 기지로 돌아갔고 리고 드 주누이는 레반트 기지로 돌아갔다. 얼마 후 아탈란테는 사이공에서 퇴역했고, 니엘리는 인도양 기지에 합류했으며, 라 클로슈트리, ''Lutin'' 및 ''Comète''는 통킹으로 떠나 드 코르시 장군의 지휘 하에 합류했다.[10]
5. 주요 작전
다른 함선들은 푸저우 해전(1884년 8월 23일), 기륭 전투에서의 다양한 작전(1884년 10월 1일부터 8일까지 기륭 및 단수이 상륙 작전 포함), 포르모사 봉쇄(1884년 10월~1885년 4월), 스푸 해전(1885년 2월 14일), 소위 전해 해전(1885년 3월 1일), 펑후 제도 작전(1885년 3월) 및 양쯔강의 '쌀 봉쇄'(1885년 3월~6월)에 참여했다.
개별 선박들의 활약도 있었다. 1884년 여름 중국 남해 함대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상하이로 파견된 경프리게이트 ''파르세발''은 1884년 9월 우쑹 요새의 포격 아래에서 과감한 야간 탈출을 시도했다.
6. 손실
푸저우 해전에 참전했던 어뢰정 45호는 1885년 3월 21일, 양쯔강 입구를 봉쇄하고 있는 프랑스 함대에 합류하기 위해 닝보로 항해하던 중 해상에서 손실되었다.[14] 푸저우 해전에서 중국 코르벳함 zh를 공격하여 격침시킨 어뢰정 46호는 중불 전쟁이 끝난 직후인 1885년 4월 30일 마궁 해상에서 손실되었다.[15] 두 어뢰정 모두 예인 중에 손실되었으며 (각각 fr와 fr에 의해), 두 경우 모두 예인 로프가 끊어진 후 침몰했다. 두 사건 모두 사상자는 없었다.
함선의 승무원과 함대의 상륙 부대의 전투 손실은 적었다. 함대는 푸저우 해전과 그 후 민강 하강에서 경미한 손실을 입었고, 지룽 전역 중 단수이 전투에서 실패한 상륙 작전으로 1884년 10월 8일에 비교적 더 큰 사상자를 냈다. 스푸 해전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미미했다. 펑후 제도 전역 이후 4개월간 펑후 제도를 점령하는 동안 몇몇 선원들이 콜레라로 사망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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