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는 카리브해 지역에 프랑스가 식민 지배했던 지역을 통칭한다. 1635년 마르티니크섬에 최초의 프랑스 영구 식민지가 건설된 이후, 과들루프, 도미니카, 트리니다드 등 여러 섬을 프랑스가 지배했다. 현재는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생마르탱, 생바르텔레미가 프랑스의 해외 영토로 남아 있으며, 과거 프랑스령이었던 아이티, 도미니카, 세인트루시아, 그레나다 등은 독립 국가가 되었다. 프랑스어 또는 프랑스어 기반 크리올어를 사용하며,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어권 카리브로 불리기도 한다.
피에르 벨랭 드 즈낭뷔크는 카리브해에서 활동한 프랑스 상인이자 모험가로, 1635년 마르티니크 섬에 최초의 프랑스 영구 식민지인 생피에르를 건설했다. 1626년 프랑스로 돌아와 리슐리외 추기경의 지지를 얻어 생크리스토프 회사를 설립, 카리브해 지역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회사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리슐리외는 이를 아메리카 제도 회사로 재편했다. 1635년 즈낭뷔크는 100명의 프랑스 정착민들과 함께 마르티니크로 항해하여 사탕수수 농장을 위한 토지를 개간했다.
2. 역사
즈낭뷔크는 1636년 사망하였고, 그의 조카인 자크 디엘 뒤 파르케가 1637년 마르티니크 총독이 되었다.[1] 뒤 파르케는 마르티니크에 머물면서 다른 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세인트키츠 네비스(프랑스어로 ''Saint-Christophe'')에서 영국에 의해 쫓겨난 프랑스는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2] 마르티니크의 포르 로얄(포르 드 프랑스)은 프랑스 군함의 주요 항구였으며, 1638년 뒤 파르케는 생루이 요새를 건설했다. 뒤 파르케는 포르 로얄에서 남쪽으로 진출하여 1643년 세인트루시아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고, 1649년 그레나다에 프랑스 정착지를 건설했다.
1642년 아메리카 제도 회사는 20년간의 특허 연장을 받았다. 1640년대 후반 마자랭 추기경이 식민지 문제에 관심이 적어 회사는 쇠퇴, 1651년 해산하여 개발권을 여러 당사자에게 매각했다. 뒤 파르케 가문은 에 마르티니크, 그레나다, 세인트루시아를 매입했다. 샤를 위엘 뒤 쁘띠 프레는 과들루프, 마리 갈랑트, 라 데지라드, 생트 섬을 매입했다. 몰타 기사단은 생 바르텔레미와 생 마르탱을 매입했고, 이 섬들은 과들루프의 속령이 되었다. 1665년, 기사단은 프랑스 서인도 회사에 섬들을 매각했다.
도미니카는 동카리브해에 위치한 프랑스와 영국의 옛 식민지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3년 11월 3일 이 섬을 발견했다.[3] 1690년, 프랑스 목수들이 목재 야영지를 설치, 영구 정착민이 되었다. 프랑스는 노예들을 수입하여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프랑스는 1763년 도미니카에 대한 소유권을 영국에 양도했다.[3] 영국은 1805년 이 섬에 소규모 식민지를 건설했다. 도미니카인들은 영어를 사용하지만, 앤틸레스 크리올어는 제2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스페인 점령자들이 발전에 거의 기여하지 않았다. 1783년 루메 드 생 로랑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로부터 세두라 데 포블라시온을 얻어, 프랑스 농장주들과 노예, 자유 흑인, 멀라토들이 트리니다드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4] 스페인은 10년간의 세금 면제 및 토지 부여를 포함한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프랑스 혁명에 의해서도 이주가 촉진되었다. 블랑시슈, 샹 플뢰르, 파라민, 카스케이드, 카레나주, 라방티유의 지역 사회를 건설하여 크리올 정체성을 만들었다. 트리니다드의 인구는 1777년 1,400명이 채 되지 않던 것에서 1789년 말에는 15,000명이 넘었다. 1797년, 트리니다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를 가진 영국의 왕관 식민지가 되었다.이름 최대 정착지 인구 (2017년 1월)[5] 면적 (km2)[6][7][8] 인구 밀도 (명/km2) 지위 마르티니크 포르 드 프랑스 372,594 1128km2 해외 도서부 / 지역 과들루프 본토 ((바스테르 및 그랑테르) 푸앵트아피트르 375,467 1436km2 해외 도서부 / 지역 생 마르탱 생 마르탱 마리고(Marigot) 35,334 53km2 2007년 2월 22일 과들루프로부터 분리된 해외 집합체. 마리 갈랑트 그랑 부르(Grand-Bourg) 10,760 158km2 과들루프의 속령. 생 바르텔레미 생 바르텔레미 구스타비아(Gustavia) 9,961 25km2 2007년 2월 22일 과들루프로부터 분리된 해외 집합체. 생트 섬(Les Saintes) 테르 드 오(Terre-de-Haut) 2,578 13km2 과들루프의 속령. 라 데지라드 보세주르(Beauséjour) 1,448 21km2 과들루프의 속령.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842,247 2834km2
2. 1. 소앤틸레스 제도의 식민지 개척
피에르 벨랭 데스낭뷔크는 1635년 마르티니크섬에 카리브해 최초의 프랑스 영구 식민지인 생피에르를 건설했다. 데스낭뷔크는 1625년 세인트키츠섬의 바스테르에 도시를 세우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고, 1626년 프랑스로 돌아와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원을 받아 식민지 개척을 시작했다. 데스낭뷔크는 식민지 경영을 위한 생크리스토프 회사의 대표가 되었고, 리슐리외 추기경은 주주가 되었다. 그러나 회사가 성공하지 못하자 리슐리외 추기경은 생크리스토프 회사를 '아메리카 제도 회사'로 재창립했다. 1635년 데스낭뷔크는 사탕수수 농장을 세우기 위해 100명의 프랑스인을 데리고 마르티니크섬으로 갔다.[15]
마르티니크에서 반년 동안 머무른 뒤 생크리스토프로 돌아온 데스낭뷔크는 1636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데스낭뷔크의 조카 자크 디엘 뒤 파르케가 1637년 마르티니크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데스낭뷔크가 경영하던 카리브해 일대의 프랑스 식민지를 관할하게 되었다. 자크 디엘은 한동안 마르티니크에만 머물렀고 다른 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1]
이후 생크리스토프에 영국군이 들어와 세인트키츠 네비스라는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그 과정에서 추방된 프랑스인들은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로 건너가 영구 정착하였다.[16] 마르티니크의 포르루아얄은 카리브해 지역을 탐험하려는 프랑스 함대의 주요 항구로 성장했다. 1638년 자크 디엘 뒤 파르케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생루이 요새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포르루아얄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1643년 세인트루시아에 첫 마을을 세웠고, 1649년에는 그레나다에 또 다른 마을을 건설했다. 이후 그레나다는 영국 식민지가 되었지만 그레나다 크레올의 프랑스어 외래어, 프랑스 양식의 건축물, 프랑스 요리와 지명 등 프랑스의 영향이 남게 되었다.
1642년 아메리카 제도 회사의 왕실칙령이 20년 연장되었으며, 프랑스 국왕은 회사 대표를 각 섬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1640년대 말 회사 주주를 물려받은 쥘 마자랭 추기경은 식민지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고, 회사는 쇠퇴하였다. 결국 1651년 마자랭 추기경이 여러 당사자에게 개발권을 매각하고 회사를 해체하였다. 파케 가문이 마르티니크, 그레나다, 세인트루시아를 60000LVR에 매입하였고, 샤를 우엘 드 프티 프레가 과들루프, 마리갈란트섬, 라데지라드섬, 생트 제도를 매입하였다. 몰타 기사단 역시 과들루프의 종속 지역이던 생바르텔레미와 생마르탱을 매입하였으나, 1665년 신생 회사였던 프랑스 서인도 회사에 매각하였다.
2. 2. 도미니카와 트리니다드
도미니카섬은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 사이에 위치하며,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처음 상륙한 이래 200여 년 동안 고립된 채 칼리나고인들만이 거주했다. 1690년 프랑스인 목수들이 처음 들어와 삼림지를 가꾸었고, 인근 섬에서 쫓겨난 주민들도 정착했다.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와 마르티니크, 과들루프에서 노예를 수입해 농장 노동력으로 삼았으나, 1763년 영국에 소유권을 넘겼다.[17] 1805년 영국은 이 섬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현재 도미니카 연방은 독립국이며,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프랑스어와의 크리올어가 제2언어로 사용된다.
트리니다드섬은 소앤틸레스 제도 최하단에 위치하며, 스페인군이 점령했으나 식민 개척이 활발하지 않았다. 1783년 프랑스인 룸 드 생로랑(Roume de St. Laurent)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와 '세둘라 협약'을 체결하고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의 농장주들을 설득하여 노예와 노동자들을 데리고 트리니다드섬에 정착하였다.[18] 스페인은 10년간의 면세 혜택과 토지보조금 등 이주민 유치 정책을 폈고, 프랑스계 주민들은 블랑시쇠즈, 샹플뢰르, 파라맹, 카스카드, 카르나주, 라방티유 등의 마을을 건설, 현지인과 교류하여 스페인어, 프랑스어, 파투아어가 결합한 크리올어가 형성되었다. 1777년 1,400명이던 인구는 1789년 15,000명으로 급증했다. 1797년 영국 왕실 직속령이 되었으나, 프랑스어 인구는 오늘날에도 다수를 차지한다.
3. 영토 목록
면적
(km2)[6][7][8]인구 밀도
(명/km2)지위 마르티니크 포르 드 프랑스 372,594 1128km2 해외 도서부 / 지역 과들루프 본토
(바스테르 및 그랑테르)푸앵트아피트르 375,467 1436km2 해외 도서부 / 지역 생 마르탱 생 마르탱 마리고(Marigot) 35,334 53km2 2007년 2월 22일 과들루프로부터 분리된 해외 집합체. 마리 갈랑트 그랑 부르(Grand-Bourg) 10,760 158km2 과들루프의 속령. 생 바르텔레미 생 바르텔레미 구스타비아(Gustavia) 9,961 25km2 2007년 2월 22일 과들루프로부터 분리된 해외 집합체. 생트 섬(Les Saintes) 테르 드 오(Terre-de-Haut) 2,578 13km2 과들루프의 속령. 라 데지라드 보세주르(Beauséjour) 1,448 21km2 과들루프의 속령.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842,247 2834km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