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루이 (16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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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드 프랑스는 1661년 퐁텐블로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마리아 테레사의 장남이다. 그는 프랑스 왕세자(도팽)였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으며, 이 중 부르고뉴 공 루이는 루이 15세의 아버지이고, 펠리페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가 되었다. 루이는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동맹 전쟁에 참여하고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했다. 1711년 천연두로 사망했으며,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손자 루이 15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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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루이 (166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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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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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랑스의 도팽 |
출생일 | 1661년 11월 1일 |
출생지 | 퐁텐블로 궁전, 프랑스 왕국 |
사망일 | 1711년 4월 14일 |
사망지 | 뫼동 성, 프랑스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프랑스 |
배우자 |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폰 바이에른 (1680년 결혼, 1690년 사별) 마리 에밀리 드 졸리 드 쇼앵 (귀천상혼) (1695년 결혼) |
자녀 | 루이, 부르고뉴 공작 펠리페 5세 샤를, 베리 공작 (1686년~1714년) |
가문 | 부르봉 가 |
아버지 | 루이 14세 |
어머니 | 마리아 테레사 데 아우스트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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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명칭 | |
이름 | Louis de France |
별칭 | le Grand Dauphin (르 그랑 도팽) |
2. 생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의 장남 루이는 1661년 11월 1일 퐁텐블로 성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아들"(''Fils de France'')로 불렸다. 1662년 3월 24일 생제르맹앙레 성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장-밥티스트 륄리는 이를 기념하여 모테트 ''Plaude Laetare Gallia''를 작곡했다.[1]
루이는 어린 시절 왕실 유모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일곱 살 때부터 샤를 드 생트-모르와 자크-베니뉴 보쉬에에게 교육받았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대하고 상냥한 성품으로 파리와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2] 루이 14세는 아들에 대해 "나태하고, 어리석고, 둔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3]
1680년 3월 7일, 루이는 샬롱쉬르마른에서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와 결혼했다. 대동맹 전쟁 중에는 필립스부르크를 점령하며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다.[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앞두고, 루이는 자신의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차남 앙주 공작 필립에게 넘겨 부르봉 왕가의 계승 가능성을 높였다. 그는 분할 조약에 반대하며 앙주에게 모든 스페인 영토를 남긴 유언을 지지했다.
루이는 베르사유 궁전과 메동 성에 훌륭한 예술품을 소장하는 등 예술 애호가였다. 쥘 아르두앙 망사르와 장 베랭을 고용하여 메동 성을 새롭게 장식하기도 했다.
1711년 4월 14일, 루이는 천연두로 인해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루이 14세와 마리테레즈 도트리슈의 장남인 루이 드 프랑스는 1661년 11월 1일 퐁텐블로궁에서 태어났다. 루이 13세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자식을 얻은 것과는 다르게, 루이 드 프랑스는 아버지 루이 14세가 결혼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태어났다.[12] 루이 14세는 아들이 태어나자 창문으로 달려가 "왕비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발표했고, 루이 드 프랑스에게 "몽세뇌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1662년 6월 5일, 튀일리궁[12] 앞, 현 "카루젤(마상시합) 광장"에서 루이 드 프랑스의 탄생을 기념하여 대 마상시합 경기가 열렸다. 루이 드 프랑스는 교황 클레멘스 9세를 대부로, 영국 왕비 앙리에타 마리 드 프랑스를 대모로 하여 가톨릭으로 세례받았다. 7살 때까지 루이 드 프랑스는 가정 교사로 모트 부인을 두었다.
1661년 퐁텐블로 궁전에서 태어난 루이는 곧바로 왕태자로 책봉되었고, 일곱 살이 되던 해부터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의 가정교사는 모의 대주교 자크 베니뉴 보쉬에였다. 루이는 아주 총명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친절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프랑스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루이는 처음에는 왕실의 유모들, 그중에서도 쥘리 당젱과 루이즈 드 프리에 드 라 모트-오당쿠르의 보살핌을 받았다. 루이가 일곱 살이 되자 그는 여자들의 보살핌에서 벗어나 남자들의 사회에 들어갔다. 그는 샤를 드 생트-모르를 총독으로 맞이했고, 자크-베니뉴 보쉬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다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필리프 에를랑거는 그의 저서에서 루이 14세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루이 14세는 은밀하게, 루이 13세가 자신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의심스러운 질투심을 그랑 도팽에게 품었다. 어떤 왕자도 그런 감정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
> 이제 왕위 계승자로 알려진 '몽세뇨르'는 그의 어머니의 유순함과 낮은 지능을 물려받았다. 그는 평생 동안 무서운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에 갇혀 있었고, 그가 쏟아붓는 호사스러운 '애정'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를 두려워했다. '몽세뇨르'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왕의 총애에 추천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드문 탄원자들에게 숨기지 않았다.
>
> 루이 14세는 아들의 교육이 자신의 교육과 정반대가 되도록 했다. 헌신적인 어머니와 애정 많고 호감 가는 가정교사 대신, 도팽은 루이 13세를 괴롭혔던 것과 같은 방법을 무자비하게 적용한 혐오스럽고 인간 혐오적인 몽토지에 공작을 두었다. 그들은 그의 손자를 파멸시켰다.
>
> 보쉬에는 그의 뒤떨어진 제자에게 너무나 훌륭한 수업을 해서 도팽은 책, 학습,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열여덟 살이 되자 '몽세뇨르'는 거의 쓸모없는 지식을 거의 흡수하지 못했고, 그의 마음의 무관심은 그의 감각의 무관심 다음으로 컸다.[1]
그는 매우 나태했다. 성인이 된 후 그의 가장 좋아하는 오락은 소파에 누워 지팡이로 신발 끝을 두드리는 것이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대함, 상냥함, 자유분방함은 파리와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루이는 부모의 여섯 명의 적자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자녀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루이보다 11세 때인 5세에 사망한 두 번째로 오래 산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
존 B. 울프에 따르면, 루이 14세는 아들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렸다.
> ...나태하고, 어리석고, 둔하며, 그의 부르주아적 도덕성만이 그를 둘러싼 경건한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을 막았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는 사냥을 즐겼지만, 실망스러운 이 아들이 아버지와 닮은 것은 그것이 거의 전부였다.[3]
2. 2. 결혼과 가정
루이는 1680년 3월 7일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장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와 결혼했다. 프랑스에서 '도핀 마리 안 빅투아르'로 알려졌다.[6] 두 사람 사이에는 3명의 아들이 태어났다.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루이 | 1682년 | 1712년 | 부르고뉴 공, 왕세자. 루이 15세의 아버지. 프티 도팽이라고 불렸다. |
펠리페 | 1683년 | 1746년 | 앙주 공. 스페인 왕 펠리페 5세가 된다. |
샤를 | 1686년 | 1714년 | 베리 공 |
1690년 아내가 사망하자, 루이는 애인이었던 마리 에밀리 드 졸리 드 쇼왕과 비밀리에 귀천상혼을 했다.[6] 이 결혼으로 아들이 태어났지만 지방으로 보내졌고 2세에 사망했다.[6]
2. 3. 정치 및 군사적 역할
루이는 1688년 대동맹 전쟁 당시 라인란트 전선에 파견되었다. 루이는 궁정을 떠나기 전 아버지 루이 14세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았다.>내 군대를 지휘하도록 너를 보내는 것은 너의 공적을 알릴 기회를 주는 것이다. 가서 온 유럽에 그것을 보여주어라. 그래서 내가 죽을 때 왕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라.
라인 강을 건너는 교두보 중 하나인 필립스부르크는 늪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루이는 뒤라스 원수와 보방의 지도 아래 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4] 루이는 공성전의 진척 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무거운 포격 속에서 침수된 참호에서 병사들을 방문하여 자신의 용기를 드러내었다.[4] 그의 전 총독인 몽토지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필립스부르크 점령에 대해 칭찬하지 않겠다. 너에게는 좋은 군대, 폭탄, 대포, 그리고 보방이 있었다. 용감하다고 칭찬하지도 않겠다. 그 미덕은 세습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네가 관대하고, 너그러우며, 인도적이고, 잘한 사람들의 공로를 인정했다는 사실에 기뻐하겠다.[5]
루이가 필립스부르크를 점령한 것은 대규모 제국군이 라인 강을 건너 알자스를 침략하는 것을 막았다.
루이는 ''고위 평의회''에서 얻은 지위를 통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지는 수년 동안, 그리고 그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얻었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루이는 스페인 왕위에 대한 권리와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삼촌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죽어갈 때 왕위를 물려줄 상속자가 없었다. 후계자 선택은 본질적으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청구인 사이에서 갈라졌다. 부르봉 왕가의 계승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루이는 자신의 권리와 장남의 권리를 차남인 앙주 공작 필립(후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에게 넘겨주었다. 필립은 차남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고, 따라서 프랑스와 스페인은 분리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카를로스 2세의 유언장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에 대한 ''고위 평의회''에서의 논의에서 루이는 앙주에게 모든 스페인 영토를 남긴 이 유언의 수용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그는 유언을 거부하고 분할 조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했다. 비록 그 조약이 그에게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및 토스카나를 할당했지만, 이 조약은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3세와 체결되었다.
루이는 처음에는 고위 평의회에 참석만 허용되었고, 나중에는 참여할 수는 있었지만, 프랑스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자로서 그는 미래의 두각을 다투는 파벌들에 끊임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그가 맡았던 사소한 정치적 역할을 제외하고, 루이는 베르사유 궁전과 메동 성에 소장한 훌륭한 예술품으로 존경받는 등 한가로운 활동에 더 참여했다. 루이 14세는 루보아의 미망인으로부터 그를 위해 메동을 구입했다. 도팽은 쥘 아르두앙 망사르와 ''왕립 건축청'' 사무실을 고용했지만, 특히 오랫동안 그를 보좌한 "하우스 디자이너"인 장 베랭(메뉘 플레지르의 수장)을 고용하여 새로운 장식을 제공하게 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메동에서 조용히 살았고, 그가 매우 사랑했던 두 이복 여동생인 마리 안 드 부르봉과 콩데 공주와 함께했다. 이 세 사람은 도팽의 아들인 루이와 그의 사보이 출신 아내인 부르고뉴 공작 부인에 반대하는 ''메동 파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2. 4. 죽음
1701년 도팽 루이에게 뇌일혈이 발병했다.[1] 그는 1711년 4월 14일 오후 11시 30분, 49세의 나이로 뫼동에 있는 자신의 오래된 궁궐 안 침실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1]루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지는 수년 동안, 그리고 그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얻었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루이는 스페인 왕위에 대한 권리와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삼촌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죽어가면서 왕위를 물려줄 상속자가 없었다. 후계자 선택은 본질적으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청구인 사이에서 갈렸다. 부르봉 왕가의 계승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루이는 자신의 권리와 장남의 권리를 차남인 앙주 공작 필립(후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에게 넘겨주었다. 필립은 차남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고, 따라서 프랑스와 스페인은 분리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카를로스 2세의 유언장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에 관한 ''고위 평의회''에서의 논의에서 루이는 앙주에게 모든 스페인 영토를 남긴 이 유언의 수용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그는 유언을 거부하고 분할 조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했다. 비록 그 조약이 그에게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및 토스카나를 할당했지만, 이 조약은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3세와 체결되었다.
3. 자녀
도팽 루이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고, 그 중 장남 프티 도팽 루이의 아들이 루이 14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하는 루이 15세이다.
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
루이 | 1682년 8월 16일 | 1712년 2월 18일 (29세) | 부르고뉴 공작, 1696년 마리 아델라이드 드 사부아 (1685-1712)와 결혼, 슬하 3남 | |
필리프 | 1683년 12월 19일 | 1746년 7월 9일 (62세) | 앙주 공작, 이후 스페인 국왕으로 추대, 슬하 8남 3녀 | |
샤를 | 1686년 7월 31일 | 1714년 5월 5일 (27세) | 베리 공작, 1710년 루이즈 엘리자베트 도를레앙 (1695-1719)과 결혼, 미혼 |
루이는 1680년에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장녀 마리 안 드 바이에르와 결혼하여 3명의 아들을 두었다.
- 루이 (1682년 - 1712년) - 부르고뉴 공, 왕세자. 루이 15세의 아버지. 프티 도팽.
- 펠리페 (1683년 - 1746년) - 앙주 공. 스페인 왕 펠리페 5세.
- 샤를 (1686년 - 1714년) - 베리 공
1690년 아내가 사망하자, 애인이었던 마리 에밀리 드 졸리 드 쇼왕과 비밀리에 귀천상혼을 했다. 아들이 태어났지만 지방으로 보내졌고 2세에 사망했다.
드 숌 부인과의 익명의 자녀 외에도 루이는 프랑수아즈 피텔과 두 명의 사생아 딸을 두었다.[7][8]
- 안 루이즈 드 부르봉 (1695년 – 1716년 8월) – 안 에라르 다보구르의 부인.
- 샤를로트 드 플뢰리 (1697년 2월 6일 – 1750년) – 제라르 미셸 드 라 죵셰르의 부인.
다른 정부인 마리 안느 코몽 드 라 포스와의 사이에서는 딸 한 명을 두었다.[8]
- 루이즈 에밀리 드 보테다르 (1694년–1719년) – 니콜라 메스나제르의 부인.
4. 평가
루이는 평생 동안 아버지 루이 14세에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 속에 갇혀 있었다. 루이 14세는 아들의 교육을 자신의 교육과는 정반대로 시켰다.[1] 헌신적인 어머니와 가정교사 대신, 루이는 혐오스럽고 인간 혐오적인 몽토지에 공작 밑에서 가혹한 교육을 받았다. 보쉬에는 뒤떨어진 제자에게 훌륭한 수업을 했지만, 루이는 책, 학습, 역사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1]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루이는 거의 쓸모없는 지식만을 흡수했을 뿐이었다.[1]
그는 매우 나태했으며, 성인이 된 후 가장 좋아하는 오락은 소파에 누워 지팡이로 신발 끝을 두드리는 것이었다고 한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대함, 상냥함, 자유분방함 덕분에 파리와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존 B. 울프에 따르면, 루이 14세는 아들에 대해 "나태하고, 어리석고, 둔하다"고 평가했다.[3]
5. 문화적 유산
도팽판 고전은 1670년대 루이를 위해 편집된 방대한 라틴어 고전 판본으로, 다른 일부 판본과는 달리 해당 언어로만 작성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총 38명의 학자가 이 시리즈에 참여했으며, 피에르 위엣이 편집하고, 자크-베니뉴 보쉬에와 안 다씨에를 포함한 여러 공동 편집자가 그를 도왔다.
참조
[1]
서적
Louis XIV
Praeger Publishers
1970
[2]
서적
Louis the Fourteenth, and the Court of France in the Seventeenth ..., Volumen2
https://books.google[...]
Harper & brothers
2024-03-20
[3]
서적
Louis XIV
1968
[4]
서적
Louis XIV
Pimlico London
2001
[5]
문서
[6]
웹사이트
Genealogy Database by Daniel de Rauglaudre
http://roglo.eu/rogl[...]
[7]
웹사이트
Genealogy Database by Daniel de Rauglaudre
http://geneweb.inria[...]
[8]
웹사이트
Complete Genealogy of the House of Capet
http://genealogy.euw[...]
Genealogy.EU
[9]
서적
Histoire généalogique et chronologique de la maison royale de France
https://books.google[...]
La compagnie des libraires
[10]
문서
[11]
문서
[12]
뉴스
Monseigneur le Dauphin, fils de Louis XIV : introduction
https://journals.ope[...]
20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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