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테레즈 도트리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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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는 1638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펠리페 4세와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의 딸이다. 그녀는 프랑스 루이 14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50만 에퀴의 지참금을 받기로 했지만, 스페인 재정 문제로 인해 지참금은 지불되지 않았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루이 14세의 외도에도 인내하며 왕위 계승을 위해 노력했다. 1683년 사망했으며, 그녀의 손자인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스페인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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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테레즈 도트리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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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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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랑스 왕비 |
재위 기간 | 1660년 6월 9일 – 1683년 7월 30일 |
출생일 | 1638년 9월 10일 |
출생지 | 엘 에스코리알, 카스티야 왕관 |
사망일 | 1683년 7월 30일 |
사망지 |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왕국 |
배우자 | 루이 14세 (1660년 결혼) |
자녀 | 루이, 그랑 도팽 마리 테레즈, 마담 로얄 앙주 공 필리프 샤를 앙주 공 루이 프랑수아 |
가문 | 합스부르크 가문 |
아버지 | 펠리페 4세 |
어머니 |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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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비 | |
배우자 | 루이 14세 |
결혼일 | 1660년 6월 9일 |
결혼 장소 | 나바라 왕국, 생장드뤼즈 |
사망 장소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매장 장소 | 프랑스, 생드니, 생드니 대성당 |
2. 어린 시절
엘 에스코리알에서 태어난[5] 마리아 테레사 공주는 펠리페 4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의 딸이었다. 성녀 테레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6]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서, 오스트리아 대공비 칭호를 사용할 자격이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마리아 테레사 데 아우스트리아, 프랑스에서는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로 알려져 있었다.
마리아 테레사는 왕실 가정교사 루이사 마갈다레나 데 헤수스[7]에게 양육되었다. 종교 교육은 처음에는 후안 데 팔마[8]가, 후에는 스페인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덕이 높은 것으로 인정받은 바스케스 신부[9]가 담당하였다. 마리아 테레사가 여섯 살 때 프랑스의 엘리자베트가 사망했고, 공주는 자신보다 불과 5살 많은 계모 마리아나와 매우 가까웠다.[16]
프랑스와 달리, 스페인에는 살리카 법이 없었기 때문에 여성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1646년 형인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사망하자 그녀는 스페인 제국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1657년 남동생 펠리페 프로스페로가 태어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1661년 11월 1일부터 6일까지, 그리고 카를로스 2세가 되는 찰스 왕자가 태어날 때까지 다시 한번 잠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2. 1. 유년기
1638년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의 엘 에스코리알에서 펠리페 4세와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의 딸로 태어났다. 외삼촌은 루이 13세이며, 루이 14세는 외사촌 오빠이다.[16]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마리 테레즈가 6살 때인 1644년에 사망했고, 오빠 발타사르 카를로스도 1646년에 요절했다.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가 아버지 펠리페 4세의 후처로 들어오면서, 마리 테레즈는 고종사촌 언니를 새어머니로 맞이하게 되었다.[16]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으로 인해 주걱턱, 작은 키, 다소 둔한 지능 등 유전적 특징을 가지고 태어났다. 마리 테레즈는 왕실의 가정교사 루이사 마갈다레나 데 헤수스(Luisa Magdalena de Jesus)[7]에게 양육되었다. 그녀의 종교 교육은 처음에는 후안 데 팔마(Juan de Palma)[8]가 담당하였고, 후에 스페인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덕이 높은 것으로 인정받은 바스케스 신부(Father Vasquez)[9]가 어린 공주의 영적 교육을 맡았다.
프랑스와 달리, 스페인에는 살리카 법이 없었기 때문에 여성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마리아 테레사의 형인 발타사르 카를로스 아스투리아스 왕자가 1646년에 사망하자 그녀는 광대한 스페인 제국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1657년에 그녀의 남동생인 필리프 프로스페로 아스투리아스 왕자가 태어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그녀는 필리프 왕자가 사망한 1661년 11월 1일부터 6일까지, 그리고 후에 스페인의 왕 찰스 2세가 되는 찰스 왕자가 태어날 때까지 다시 한 번 잠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2. 2. 혼담과 결혼
1658년,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양국 왕실 간의 결혼이 제안되었다.[10] 마리아 테레사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이중 사촌 관계였다. 루이 14세의 아버지인 루이 13세는 마리아 테레사의 어머니의 형제였고, 마리아 테레사의 아버지는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안나의 형제였다.스페인이 지연시키는 동안, 프랑스 수상 마자랭 추기경은 루이 14세를 위해 마르게리타 요란다와의 결혼을 추진하는 척했다. 1658년 11월 프랑스 왕가와 사보이아 가문의 리옹 회담 소식을 들은 펠리페 4세는 프랑스-사보이아 연합에 대해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외쳤다고 한다. 펠리페 4세는 평화와 왕실 결혼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특별 사절을 프랑스 궁정으로 보냈다.
결혼 계약 협상은 치열했다. 특히 스페인이 프랑스에 종속되는 형태의 두 나라 또는 왕관의 연합을 막고자 했던 외교관들은 마리아 테레사와 그녀의 자녀가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는 포기 조항을 포함시키려고 했다. 결혼 계약은 결국 1659년 11월 피레네 조약의 조항 중 하나로 마련되었다.[11] 계약서는 마리아 테레사가 자신과 모든 자손을 위해 스페인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마자랭과 리옹은 50만 에퀴의 스페인 지참금 전액 지불을 조건으로 포기를 허용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지참금을 지불할 수 없었고, 프랑스는 합의된 금액을 받지 못했다.

1660년 6월 2일, 마리아 테레사는 푸엔테라비아에서 대리 결혼으로 루이 14세와 결혼했다. 루이스 멘데스 데 아로가 신랑 역할을 맡았다. 펠리페 4세와 스페인 조정 전체는 비다소아 강의 국경에 있는 피레네 섬까지 신부를 호위했다. 루이 14세와 그의 조정은 1660년 6월 7일 피레네 섬 회담에서 그녀를 만났고, 그녀는 프랑스에 입성했다. 6월 9일, 최근 재건된 성 요한 세례자 교회인 생장드뤼즈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2. 2. 1. 약혼과 파혼
스페인은 1474년 이사벨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한 이래 여성의 왕권 상속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기에[18], 마리테레즈는 장성한 장녀로서 왕실의 상속녀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17]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루이 14세와 혼담이 오갔으나,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가문인 오스트리아 황실과의 혼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19]이에 따라 스페인은 고모인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장남이자 사촌 오빠이며 로마인의 왕인 페르디난트 4세 황태자와의 약혼을 추진하였다.[19] 페르디난트 4세는 마리 테레즈의 의붓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친오빠이기도 했다. 만약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왕권이 같은 가문으로 넘어가길 바랐기 때문에 추진한 약혼이었다. 이를 통해 과거 카를 5세의 시대처럼 다시 동군연합이 탄생하여 옛 영광이 재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20]
그러나 1654년에 황태자 페르디난트 4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혼담은 페르디난트 3세의 차남인 레오폴트(훗날 레오폴트 1세)와의 혼인 여부를 놓고 다시 진행되었으나 쉽게 성사되지 못했다.[21][22][23]
2. 2. 2. 전쟁과 반란
17세기 들어 독일 내 신구교 영주 간의 무력 충돌인 30년 전쟁이 발발했다.[26] 만약 독일 지역이 가톨릭 세력으로 통일될 경우, 스페인과 독일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국가 안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27][28] 1631년부터 신교 제후들을 물밑에서 지원하던[29] 프랑스는 신교 세력의 전세가 계속 불리해지자 1635년에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가문에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30] 기나긴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되었다.[31]그러나 베스트팔렌 조약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과 프랑스는 접경 지역에서 갈등을 지속하며 전쟁을 이어갔다. 스페인에서는 1640년에 포르투갈의 독립 투쟁이 시작되었고,[32][33] 카탈루냐 지방에서 반란이 발생했는데, 프랑스는 포르투갈과 카탈루냐를 지원했다.[34] 이에 스페인은 1650년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2차 프롱드의 난을 지원하며 맞섰다. 양국 간의 전쟁은 1658년 6월 프랑스군이 됭케르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종전 협상으로 이어졌다.[35]
2. 2. 3. 페레네 조약
스페인과 프랑스는 종전 협상을 통해 여러 사항에 합의했으며, 마리 테레즈와 루이 14세의 혼담도 논의하였다. 1659년 양국은 피레네 조약을 체결하며 결혼에 최종 합의하였다.[37] 이 결혼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결합을 원했던 루이 14세의 모후 안 도트리슈의 바람과 프랑스 재상 쥘 마자랭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추진되었다.결혼 조건 중 하나는 마리 테레즈가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50만 에퀴의 지참금을 프랑스에 지불하는 것이었다.[38]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재정난을 겪던 스페인은 지참금을 완불할 능력이 없었다.[39] 이는 훗날 카를로스 2세 사후 스페인 왕위가 마리 테레즈의 모계 혈통을 이어받은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에게 돌아가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가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3. 결혼 생활
1660년 6월 9일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혼했다.[40][41] 마리 테레즈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고, 시어머니이자 고모인 안 도트리슈와 함께 기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치나 문학에는 관심이 없었고, 카드 놀이를 즐겼는데, 룰을 잘 몰랐지만 판돈을 크게 걸어 곤궁한 귀족들이 이를 이용하기도 했다. 안 도트리슈는 처음에는 마리 테레즈를 도왔지만, 나중에는 다른 궁정 사람들처럼 그녀를 무시하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마리 테레즈에게 실망하여 곧 마음이 떠났다. 그는 수많은 정부들과 염문을 뿌렸는데, 마리 테레즈는 남편의 외도를 가장 늦게 알아차리곤 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위해 루이 14세는 1주일에 세 번 마리 테레즈의 침실을 방문했다.[42]
마리 테레즈는 남편의 정부들을 참았지만, 그의 무신앙에는 분개했고, 세속적인 궁정을 혐오했다. 결국 궁정을 떠나 수녀원 등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몇몇 외교 행사를 제외하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스페인에서부터 좋아했던 마시는 초콜릿과 충실한 시녀들뿐이었다.[43]
4. 말년과 죽음
루이 14세는 중년에 이르러 마담 드 맹트농이 간음죄를 더 이상 짓지 말라고 조언하자 왕비에게 좀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부부 사이가 좋아지자 마리 테레즈는 맹트농에게 고마워했다.[44]
1683년 7월 30일 베르사유에서 45세로 사망하였다. 왕비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왕실 의사의 오진으로 적절하지 못한 치료를 받고 사망했기 때문에, 한동안 궁정 내에서는 독살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는 암이 사인으로 추정된다.[45] 루이 14세는 "그녀가 나를 처음으로 슬프게 하는군"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루이 14세는 마담 드 맹트농과 비밀리에 결혼하였다.[46] 마리 테레즈는 3남 3녀를 낳았지만, 장남 '그랑 도팽' 루이를 제외하고 모두 요절했다. 장남 루이 역시 1711년에 사망했고, 마리 테레즈의 손자 3명 중 2명도 일찍 사망했다. 1715년 남편 루이 14세 사망 당시 마리 테레즈의 직계 후손 중 생존자는 손자 펠리페 5세와 증손자 루이(훗날 루이 15세)뿐이었다.
펠리페 5세는 1700년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을 거치긴 했으나, 그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 마리 테레즈를 통해 물려받은 모계 혈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4. 1. 말년
루이 14세는 중년에 이르러 1680년 사악한 저주 사건에 휘말린 마담 드 몽테스팡을 버리고, 마담 드 맹트농이 간음죄를 더 이상 짓지 말라고 조언하자 왕비에게 좀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부부 사이가 좋아지자 마리 테레즈는 맹트농에게 고마워했다.[44]4. 2. 사망
1683년 7월 30일 베르사유에서 45세로 사망하였다. 왕비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왕실 의사의 오진으로 적절하지 못한 치료를 받고 사망했기 때문에, 한동안 궁정 내에서는 독살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는 암이 사인으로 추정된다.[45] 루이 14세는 "그녀가 나를 처음으로 슬프게 하는군"이라는 말을 남겼다.4. 3. 사후
루이 14세는 마담 드 맹트농과 비밀리에 결혼하였다.[46] 마리 테레즈는 3남 3녀를 낳았지만, 장남 '그랑 도팽' 루이를 제외하고 모두 요절했다. 장남 루이 역시 1711년에 사망했고, 그가 낳은 마리 테레즈의 손자 3명 중 2명도 일찍 사망했다. 1715년 남편 루이 14세 사망 당시 마리 테레즈의 직계 후손 중 생존자는 손자 펠리페 5세와 증손자 루이(훗날 루이 15세)뿐이었다.펠리페 5세는 1700년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을 거치긴 했으나, 펠리페 5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 마리 테레즈를 통해 물려받은 모계 혈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5. 에피소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로 유명하지만, 장자크 루소가 《고백록》에서 이보다 20년 앞서 어느 공주가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그런 말을 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어, 실제로는 마리 테레즈가 이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7][48]
하지만 이 말은 악의적으로 왜곡된 표현이다. 실제로 마리 테레즈는 백성들이 빵이 없어 굶주린다는 이야기에 "빵이 없다면 파이 껍질이라도 갖다 주라"고 말하며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6. 자녀
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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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세자 루이 | 1661년 11월 1일 | 1711년 4월 14일 (49세) | 슬하 3남 |
![]() | 안 엘리자베트 | 1662년 11월 18일 | 1662년 12월 30일 | 요절 |
마리 안 | 1664년 11월 16일 | 1664년 12월 26일 | 요절 | |
![]() | 마리 테레즈 | 1667년 1월 2일 | 1672년 3월 1일 (5세) | 요절 |
![]() | 필리프 샤를 | 1668년 8월 5일 | 1671년 7월 10일 (2세) | 요절 |
루이 프랑수아 | 1672년 6월 14일 | 1672년 11월 4일 | 요절 |
3남 3녀를 낳았으나 장남 루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루이는 '그랑 도팽'으로 불렸으며, 루이 15세의 조부이자 펠리페 5세의 부친이다.
한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모레의 흑인 수녀)라는 사생아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right 그녀는 모레의 몰 여인이라고도 불렸는데, 퐁텐블로 궁전 주변 모레쉬르루앙의 수도원에서 살았으며 루이 14세로부터 연금을 받았다.[13] 그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마리 테레즈 왕비와 흑인 소인 시종 나보(Nabo)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 루이 14세와 흑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 왕가의 보호를 받던 어린 고아라는 설 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13] 마리 테레즈 왕비나 그랑 도팽 등 왕족과 생 시몽 공작, 몽테스팡 후작 부인 등 궁정의 고위 귀족들이 그녀가 있던 수도원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13]
7. 계보
필리페 4세
필리페 3세
필리페 2세
아나 [1]
마르가레테 (오스트리아 대공녀)
카를 2세
마리아 안나 (바이에른 공녀) [2]
이사벨 [3]
앙리 4세
앙투안
잔느 (나바라 여왕)
마리 드 메디시
프란체스코 1세 (토스카나 대공)
조반나 (오스트리아 대공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