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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테레즈 도트리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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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는 1638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펠리페 4세와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의 딸이다. 그녀는 프랑스 루이 14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50만 에퀴의 지참금을 받기로 했지만, 스페인 재정 문제로 인해 지참금은 지불되지 않았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루이 14세의 외도에도 인내하며 왕위 계승을 위해 노력했다. 1683년 사망했으며, 그녀의 손자인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스페인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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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테레즈 도트리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앙리 및 샤를 보브랭의 마리 테레즈, 프랑스 왕비 초상화
앙리 및 샤를 보브랭의 초상화
칭호프랑스 왕비
재위 기간1660년 6월 9일 – 1683년 7월 30일
출생일1638년 9월 10일
출생지엘 에스코리알, 카스티야 왕관
사망일1683년 7월 30일
사망지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왕국
배우자루이 14세 (1660년 결혼)
자녀루이, 그랑 도팽
마리 테레즈, 마담 로얄
앙주 공 필리프 샤를
앙주 공 루이 프랑수아
가문합스부르크 가문
아버지펠리페 4세
어머니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1663년 앙리 쥘 드 부르봉과 안 드 바이에른의 결혼식에서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의 서명
프랑스 왕비
배우자루이 14세
결혼일1660년 6월 9일
결혼 장소나바라 왕국, 생장드뤼즈
사망 장소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매장 장소프랑스, 생드니, 생드니 대성당

2. 어린 시절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가 그린 초상화, 1645년경


벨라스케스가 그린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초상화(14세). 그녀의 헤어스타일과 넓은 버슬(Pannier (clothing))이 달린 드레스는 당시 스페인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다.


엘 에스코리알에서 태어난[5] 마리아 테레사 공주는 펠리페 4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의 딸이었다. 성녀 테레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6]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서, 오스트리아 대공비 칭호를 사용할 자격이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마리아 테레사 데 아우스트리아, 프랑스에서는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로 알려져 있었다.

마리아 테레사는 왕실 가정교사 루이사 마갈다레나 데 헤수스[7]에게 양육되었다. 종교 교육은 처음에는 후안 데 팔마[8]가, 후에는 스페인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덕이 높은 것으로 인정받은 바스케스 신부[9]가 담당하였다. 마리아 테레사가 여섯 살 때 프랑스의 엘리자베트가 사망했고, 공주는 자신보다 불과 5살 많은 계모 마리아나와 매우 가까웠다.[16]

프랑스와 달리, 스페인에는 살리카 법이 없었기 때문에 여성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1646년 형인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사망하자 그녀는 스페인 제국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1657년 남동생 펠리페 프로스페로가 태어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1661년 11월 1일부터 6일까지, 그리고 카를로스 2세가 되는 찰스 왕자가 태어날 때까지 다시 한번 잠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2. 1. 유년기

1638년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의 엘 에스코리알에서 펠리페 4세와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의 딸로 태어났다. 외삼촌은 루이 13세이며, 루이 14세는 외사촌 오빠이다.[16]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마리 테레즈가 6살 때인 1644년에 사망했고, 오빠 발타사르 카를로스도 1646년에 요절했다.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가 아버지 펠리페 4세의 후처로 들어오면서, 마리 테레즈는 고종사촌 언니를 새어머니로 맞이하게 되었다.[16]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으로 인해 주걱턱, 작은 키, 다소 둔한 지능 등 유전적 특징을 가지고 태어났다. 마리 테레즈는 왕실의 가정교사 루이사 마갈다레나 데 헤수스(Luisa Magdalena de Jesus)[7]에게 양육되었다. 그녀의 종교 교육은 처음에는 후안 데 팔마(Juan de Palma)[8]가 담당하였고, 후에 스페인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덕이 높은 것으로 인정받은 바스케스 신부(Father Vasquez)[9]가 어린 공주의 영적 교육을 맡았다.

프랑스와 달리, 스페인에는 살리카 법이 없었기 때문에 여성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마리아 테레사의 형인 발타사르 카를로스 아스투리아스 왕자가 1646년에 사망하자 그녀는 광대한 스페인 제국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1657년에 그녀의 남동생인 필리프 프로스페로 아스투리아스 왕자가 태어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그녀는 필리프 왕자가 사망한 1661년 11월 1일부터 6일까지, 그리고 후에 스페인의 왕 찰스 2세가 되는 찰스 왕자가 태어날 때까지 다시 한 번 잠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2. 2. 혼담과 결혼

1658년, 프랑스스페인 간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양국 왕실 간의 결혼이 제안되었다.[10] 마리아 테레사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이중 사촌 관계였다. 루이 14세의 아버지인 루이 13세는 마리아 테레사의 어머니의 형제였고, 마리아 테레사의 아버지는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안나의 형제였다.

스페인이 지연시키는 동안, 프랑스 수상 마자랭 추기경은 루이 14세를 위해 마르게리타 요란다와의 결혼을 추진하는 척했다. 1658년 11월 프랑스 왕가와 사보이아 가문의 리옹 회담 소식을 들은 펠리페 4세는 프랑스-사보이아 연합에 대해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외쳤다고 한다. 펠리페 4세는 평화와 왕실 결혼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특별 사절을 프랑스 궁정으로 보냈다.

결혼 계약 협상은 치열했다. 특히 스페인이 프랑스에 종속되는 형태의 두 나라 또는 왕관의 연합을 막고자 했던 외교관들은 마리아 테레사와 그녀의 자녀가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는 포기 조항을 포함시키려고 했다. 결혼 계약은 결국 1659년 11월 피레네 조약의 조항 중 하나로 마련되었다.[11] 계약서는 마리아 테레사가 자신과 모든 자손을 위해 스페인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마자랭과 리옹은 50만 에퀴의 스페인 지참금 전액 지불을 조건으로 포기를 허용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지참금을 지불할 수 없었고, 프랑스는 합의된 금액을 받지 못했다.

피레네 섬 회담, 1660년 6월;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와 그의 대리 남편인 루이 14세에게 인계된다.


1660년 6월 2일, 마리아 테레사는 푸엔테라비아에서 대리 결혼으로 루이 14세와 결혼했다. 루이스 멘데스 데 아로가 신랑 역할을 맡았다. 펠리페 4세와 스페인 조정 전체는 비다소아 강의 국경에 있는 피레네 섬까지 신부를 호위했다. 루이 14세와 그의 조정은 1660년 6월 7일 피레네 섬 회담에서 그녀를 만났고, 그녀는 프랑스에 입성했다. 6월 9일, 최근 재건된 성 요한 세례자 교회인 생장드뤼즈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2. 2. 1. 약혼과 파혼

스페인은 1474년 이사벨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한 이래 여성의 왕권 상속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기에[18], 마리테레즈는 장성한 장녀로서 왕실의 상속녀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17]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루이 14세와 혼담이 오갔으나,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가문인 오스트리아 황실과의 혼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19]

이에 따라 스페인은 고모인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장남이자 사촌 오빠이며 로마인의 왕페르디난트 4세 황태자와의 약혼을 추진하였다.[19] 페르디난트 4세는 마리 테레즈의 의붓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친오빠이기도 했다. 만약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왕권이 같은 가문으로 넘어가길 바랐기 때문에 추진한 약혼이었다. 이를 통해 과거 카를 5세의 시대처럼 다시 동군연합이 탄생하여 옛 영광이 재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20]

그러나 1654년에 황태자 페르디난트 4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혼담은 페르디난트 3세의 차남인 레오폴트(훗날 레오폴트 1세)와의 혼인 여부를 놓고 다시 진행되었으나 쉽게 성사되지 못했다.[21][22][23]

2. 2. 2. 전쟁과 반란

17세기 들어 독일 내 신구교 영주 간의 무력 충돌인 30년 전쟁이 발발했다.[26] 만약 독일 지역이 가톨릭 세력으로 통일될 경우, 스페인과 독일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국가 안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27][28] 1631년부터 신교 제후들을 물밑에서 지원하던[29] 프랑스는 신교 세력의 전세가 계속 불리해지자 1635년에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가문에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30] 기나긴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되었다.[31]

그러나 베스트팔렌 조약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과 프랑스는 접경 지역에서 갈등을 지속하며 전쟁을 이어갔다. 스페인에서는 1640년에 포르투갈의 독립 투쟁이 시작되었고,[32][33] 카탈루냐 지방에서 반란이 발생했는데, 프랑스는 포르투갈과 카탈루냐를 지원했다.[34] 이에 스페인은 1650년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2차 프롱드의 난을 지원하며 맞섰다. 양국 간의 전쟁은 1658년 6월 프랑스군이 됭케르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종전 협상으로 이어졌다.[35]

2. 2. 3. 페레네 조약

스페인프랑스는 종전 협상을 통해 여러 사항에 합의했으며, 마리 테레즈루이 14세의 혼담도 논의하였다. 1659년 양국은 피레네 조약을 체결하며 결혼에 최종 합의하였다.[37] 이 결혼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결합을 원했던 루이 14세의 모후 안 도트리슈의 바람과 프랑스 재상 쥘 마자랭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추진되었다.

결혼 조건 중 하나는 마리 테레즈가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50만 에퀴의 지참금을 프랑스에 지불하는 것이었다.[38]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재정난을 겪던 스페인은 지참금을 완불할 능력이 없었다.[39] 이는 훗날 카를로스 2세 사후 스페인 왕위가 마리 테레즈의 모계 혈통을 이어받은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에게 돌아가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가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3. 결혼 생활

1660년 6월 9일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혼했다.[40][41] 마리 테레즈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고, 시어머니이자 고모인 안 도트리슈와 함께 기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치나 문학에는 관심이 없었고, 카드 놀이를 즐겼는데, 룰을 잘 몰랐지만 판돈을 크게 걸어 곤궁한 귀족들이 이를 이용하기도 했다. 안 도트리슈는 처음에는 마리 테레즈를 도왔지만, 나중에는 다른 궁정 사람들처럼 그녀를 무시하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마리 테레즈에게 실망하여 곧 마음이 떠났다. 그는 수많은 정부들과 염문을 뿌렸는데, 마리 테레즈는 남편의 외도를 가장 늦게 알아차리곤 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위해 루이 14세는 1주일에 세 번 마리 테레즈의 침실을 방문했다.[42]

마리 테레즈는 남편의 정부들을 참았지만, 그의 무신앙에는 분개했고, 세속적인 궁정을 혐오했다. 결국 궁정을 떠나 수녀원 등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몇몇 외교 행사를 제외하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스페인에서부터 좋아했던 마시는 초콜릿과 충실한 시녀들뿐이었다.[43]

4. 말년과 죽음

루이 14세는 중년에 이르러 마담 드 맹트농이 간음죄를 더 이상 짓지 말라고 조언하자 왕비에게 좀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부부 사이가 좋아지자 마리 테레즈는 맹트농에게 고마워했다.[44]

1683년 7월 30일 베르사유에서 45세로 사망하였다. 왕비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왕실 의사의 오진으로 적절하지 못한 치료를 받고 사망했기 때문에, 한동안 궁정 내에서는 독살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는 암이 사인으로 추정된다.[45] 루이 14세는 "그녀가 나를 처음으로 슬프게 하는군"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루이 14세는 마담 드 맹트농과 비밀리에 결혼하였다.[46] 마리 테레즈는 3남 3녀를 낳았지만, 장남 '그랑 도팽' 루이를 제외하고 모두 요절했다. 장남 루이 역시 1711년에 사망했고, 마리 테레즈의 손자 3명 중 2명도 일찍 사망했다. 1715년 남편 루이 14세 사망 당시 마리 테레즈의 직계 후손 중 생존자는 손자 펠리페 5세와 증손자 루이(훗날 루이 15세)뿐이었다.

펠리페 5세1700년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을 거치긴 했으나, 그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 마리 테레즈를 통해 물려받은 모계 혈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4. 1. 말년

루이 14세는 중년에 이르러 1680년 사악한 저주 사건에 휘말린 마담 드 몽테스팡을 버리고, 마담 드 맹트농이 간음죄를 더 이상 짓지 말라고 조언하자 왕비에게 좀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부부 사이가 좋아지자 마리 테레즈는 맹트농에게 고마워했다.[44]

4. 2. 사망

1683년 7월 30일 베르사유에서 45세로 사망하였다. 왕비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왕실 의사의 오진으로 적절하지 못한 치료를 받고 사망했기 때문에, 한동안 궁정 내에서는 독살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는 암이 사인으로 추정된다.[45] 루이 14세는 "그녀가 나를 처음으로 슬프게 하는군"이라는 말을 남겼다.

4. 3. 사후

루이 14세는 마담 드 맹트농과 비밀리에 결혼하였다.[46] 마리 테레즈는 3남 3녀를 낳았지만, 장남 '그랑 도팽' 루이를 제외하고 모두 요절했다. 장남 루이 역시 1711년에 사망했고, 그가 낳은 마리 테레즈의 손자 3명 중 2명도 일찍 사망했다. 1715년 남편 루이 14세 사망 당시 마리 테레즈의 직계 후손 중 생존자는 손자 펠리페 5세와 증손자 루이(훗날 루이 15세)뿐이었다.

펠리페 5세는 1700년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을 거치긴 했으나, 펠리페 5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 마리 테레즈를 통해 물려받은 모계 혈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5. 에피소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로 유명하지만, 장자크 루소가 《고백록》에서 이보다 20년 앞서 어느 공주가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그런 말을 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어, 실제로는 마리 테레즈가 이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7][48]

하지만 이 말은 악의적으로 왜곡된 표현이다. 실제로 마리 테레즈는 백성들이 빵이 없어 굶주린다는 이야기에 "빵이 없다면 파이 껍질이라도 갖다 주라"고 말하며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6. 자녀

사진이름생일사망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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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 루이1661년 11월 1일1711년 4월 14일 (49세)슬하 3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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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엘리자베트1662년 11월 18일1662년 12월 30일요절
마리 안1664년 11월 16일1664년 12월 26일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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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테레즈1667년 1월 2일1672년 3월 1일 (5세)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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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샤를1668년 8월 5일1671년 7월 10일 (2세)요절
루이 프랑수아1672년 6월 14일1672년 11월 4일요절



3남 3녀를 낳았으나 장남 루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루이는 '그랑 도팽'으로 불렸으며, 루이 15세의 조부이자 펠리페 5세의 부친이다.

한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모레의 흑인 수녀)라는 사생아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right 그녀는 모레의 여인이라고도 불렸는데, 퐁텐블로 궁전 주변 모레쉬르루앙의 수도원에서 살았으며 루이 14세로부터 연금을 받았다.[13] 그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마리 테레즈 왕비와 흑인 소인 시종 나보(Nabo)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 루이 14세와 흑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 왕가의 보호를 받던 어린 고아라는 설 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13] 마리 테레즈 왕비나 그랑 도팽 등 왕족과 생 시몽 공작, 몽테스팡 후작 부인 등 궁정의 고위 귀족들이 그녀가 있던 수도원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13]

7. 계보

필리페 4세할아버지:
필리페 3세증조부:
필리페 2세증조모:
아나 [1]할머니:
마르가레테 (오스트리아 대공녀)증조부:
카를 2세증조모:
마리아 안나 (바이에른 공녀) [2]어머니:
이사벨 [3]할아버지:
앙리 4세증조부:
앙투안증조모:
잔느 (나바라 여왕)할머니:
마리 드 메디시증조부:
프란체스코 1세 (토스카나 대공)증조모:
조반나 (오스트리아 대공녀) [4]



계보 속에는 여러 건의 삼촌과 조카의 결혼이 포함되어 있다.

# 막시밀리안 2세와 필리페 2세의 여동생 마리아는 삼촌과 조카 사이로, 둘의 결혼으로 아나가 태어났다.

# 카를 2세의 왕비 마리아 안나는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와 카를 2세의 누나 안나 사이의 딸로, 삼촌과 조카 간의 결혼이다.

# 이사벨은 루이 13세의 여동생이자, 찰스 1세의 왕비 앙리에트 마리의 언니이다.

# 조반나는 페르디난트 1세의 딸이며, 필리페 2세의 사촌이다.

마리 테레즈의 할아버지인 필리페 3세는 합스부르크 가 출신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와 근친혼을 하였다. 필리페 3세의 아버지인 필리페 2세 역시 합스부르크 가 출신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자신의 친누이인 에스파냐의 마리아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아나와 결혼하였다.[16]

참조

[1] 논문 La Belle Charite II: Racine, Molière and the Pastor Fido http://www.tandfonli[...] 1969-06-01
[2] 논문 Matrimony and Monarchy: The Failure of Bourbon-Habsburg Matrimonial Alliance https://jhss-uok.com[...] 2019-01-01
[3] 서적 Creating a State https://doi.org/10.1[...] Macmillan Education UK 2023-09-18
[4] 서적 Dance, Spectacle, and the Body Politick, 1250–1750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2008-06-25
[5] 웹사이트 Marie-Therese D'autriche https://www.chateauv[...] 2023-11-25
[6] 문서 1869-01-01
[7] 웹사이트 Luisa Enríquez Manrique de Lara | Real Academia de la Historia http://dbe.rah.es/bi[...]
[8] 웹사이트 Juan de Palma | Real Academia de la Historia https://dbe.rah.es/b[...] 2022-04-04
[9] 문서 1869-01-01
[10] 서적 A Palace for a King: The Buen Retiro and the Court of Philip IV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1980-01-01
[11] 서적 Spain Under the Habsburgs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2023-11-27
[12] 웹사이트 Marie-Thérèse of Austria : queen of France https://www.britanni[...] Encyclopedia Britannica 2023-01-28
[13] 웹사이트 La Madurese de motet Fille du roi soleill https://www.pointdev[...]
[14]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15] 문서 펠리페 5세는 카를로스 2세의 조카손자, 정확하게는 진외종손 자격으로 왕위계승권을 획득하였다.
[16] 문서 마리아는 곧 자신의 외삼촌과 결혼한 것이다.
[17] 서적 마리 테레즈의 유년시절 네이버 지식백과 2006-08-10
[18] 문서 이사벨 1세 사후에 그녀의 딸 광녀 후아나가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부계인 남손후계만 상속받는 살리카 법을 스페인에는 적용받지 않는 전통이 생겼다.
[19] 웹인용 Ferdinand IV: Vain hopes http://www.habsburge[...] The World of the Habsburgs 2015-08-01
[20] 서적 마리 테레즈의 유년시절 네이버 지식백과 2006-08-10
[21] 백과사전 Ferdinand IV (King of Bohemia) http://www.britannic[...] 2013-12-14
[22] 서적 마리 테레즈의 유년시절 네이버 지식백과 2006-08-10
[23] 문서 결국 레오폴트 1세와의 혼인은 펠리페 4세의 장성한 차녀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성사되어 1666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24] 웹사이트 30년 전쟁 - ‘로마제국’은 ‘신성’해야 하는가? https://terms.naver.[...]
[25] 서적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을류문화사 2015-01-01
[26] 백과사전 30년전쟁
[27]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28] 문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일족이 통치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1492년 레콩키스타 완성이후 종교순혈주의에 입각하여 이교도를 추방하고 카톨릭 국가가 되었다. 또한 1516년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도 카톨릭을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지역이 카톨릭화 될경우에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둘러싸이게 되는 프랑스는 국가안위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지난 16세기 전반에 카를 5세의 통치영역이 비대해져 유럽의 힘이 균형이 무너졌던 경우와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는 것이다.
[29] 백과사전 30년전쟁
[30] 웹사이트 드디어 프랑스가 움직이다 - 30년 전쟁
[31]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32] 서적 스페인 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3-05-14
[33] 문서 포르투갈은 지난 1580년에 펠리페 2세에 의해 병합되었으나 스페인의 오랜전쟁, 해상권 상실, 차별정책, 경기침체 등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켰다.
[34] 서적 스페인 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3-05-14
[35]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36] 문서 왕자가 두명이나 태어났으므로 스페인 왕권이 오랜 숙적인 프랑스로 넘어갈 확률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도 부담감이 적어서 혼인협상에 입하게 되었다.
[37] 서적 Europe in the Seventeenth Century Macmillan 1966
[38] 서적 프랑스인의 역사 소나무 1991
[39] 서적 Louis XIV https://archive.org/[...] W.W. Norton & Company, Inc 1968
[40] 웹사이트 멩트농 부인 김복래 2006-08-10
[41] 웹사이트 마리-테레즈의 우울한 궁정생활 김복래 2006-08-10
[42] 서적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지안출판사 2012
[43] 웹사이트 루이 14세의 첫사랑 마리 만시니 https://terms.naver.[...] 김복래 2006-08-10
[44] 웹사이트 멩트농 부인 https://terms.naver.[...] 김복래 2006-08-10
[45] 웹사이트 멩트농 부인 김복래 2006-08-10
[46] 웹사이트 멩트농 후작 부인 김복래, 위키미디어 커먼즈 2005-08-01
[47] 서적 역사의 오류 열음사 2008
[48] 서적 CEO 마음을 읽다 위즈덤하우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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