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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귀스타브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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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귀스타브 로즈는 프랑스 해군 장교로, 프랑스-멕시코 전쟁에 참전했으며, 1865년에는 프랑스 극동 기지 사령관으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근무했다. 1866년, 조선에서 일어난 병인박해를 빌미로 군함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여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강화도를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나, 조선의 저항에 직면하여 철수했다. 이후 프랑스로 귀환하여 여러 직책을 수행하다가 1882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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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귀스타브 로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즈 제독의 초상화
출생일1812년 11월 28일
출생지툴롱
사망일1883년
사망지파리
소속프랑스 해군
복무 기간해당 정보 없음
최종 계급해군 중장
지휘해당 정보 없음
참전해당 정보 없음
훈장해당 정보 없음
관련 인물해당 정보 없음
이후 활동해당 정보 없음

2. 초기 생애 및 경력

프랑스 출신으로 해군 장교로서 복무하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젊은 해군 소장(부제독)으로서 로즈는 프랑스 - 멕시코 전쟁 (1862년)에 참전했다. 1865년에는 프랑스 극동 기지 사령관(Station des mers de Chine)으로 임명되어 본부가 있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사령관 업무를 수행했다.

2. 1. 프랑스 해군 복무

프랑스 출신으로 해군 장교로서 복무하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젊은 해군 소장(부제독)으로서 로즈는 프랑스 - 멕시코 전쟁 (1862년)에 참전했다. 1865년에는 프랑스 극동 기지 사령관(Station des mers de Chine)으로 임명되어 본부가 있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사령관 업무를 수행했다.

3. 병인양요 (1866)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1830~1884)로부터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순교 소식을 전달받은 로즈는 무력 보복을 결정한다.[2] 로즈는 청나라의 중재 제의를 거부한 채 군함 세 척을 이끌고 불법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병인양요를 일으켰다.[2] 1866년 음력 9월에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오늘날의 인천 앞바다에 다다랐으며, 음력 9월 18일(양력 10월 25일) 한성부(서울)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까지 진출했다.[3] 이에 조선 정부는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함대에서는 3척의 소(小)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음력 9월 25일에 퇴각했다.[4]

강화도를 불법 침공중인 프랑스 함대 (1866년)


1866년 음력 10월 11일, 로즈는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300명을 포함, 총 800명 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 근처로 진출하였다. 음력 10월 14일 프랑스 함정 4척과 해병대 일부가 강화도 갑곶진(甲串鎭) 부근 고지를 점령하고 한강 수로를 봉쇄했다. 음력 10월 16일 프랑스군 전군이 동원되어 강화성을 점령하고 여러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양회진, 통진(通津), 광성진(廣城津), 부평(富平), 제물포 등의 요충지와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에 병력을 파견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고, 음력 10월 19일 프랑스 측에 공문을 보내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로즈는 조선 측의 선교사 처형 등 천주교 탄압 행위를 비난하며 전권대신의 파견을 요구하였다.

음력 10월 26일, 120여 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던 중 한성근 부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음력 11월 7일, 강화부를 점령했던 프랑스군 160여 명은 정족산성 공격을 시도했으나, 양헌수 부대의 공격으로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고, 장녕전 등 관아를 불태우고 갑곶진으로 퇴각했다.

프랑스 측 기록에 따르면, 병인양요 전체 기간 동안 프랑스군의 피해는 전사자 3명, 부상자 35명이 전부였다. 로즈는 추가 교전이 불리하다고 판단, 음력 11월 18일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철거하고 성내 관아에 불을 지른 뒤 약탈한 은괴,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청나라로 철수했다.

이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고 하며 양화나루 옆의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였다.[5] 이때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6]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쇄국정책도 훨씬 강화되었다.

3. 1. 배경: 병인박해와 리델 신부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1830~1884)로부터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순교 소식을 전달받은 로즈는 무력 보복을 결정한다.[2] 로즈는 청나라의 중재 제의를 거부한 채 군함 세 척을 이끌고 불법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병인양요를 일으켰다.[2] 1866년 음력 9월에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오늘날의 인천 앞바다에 다다랐으며, 음력 9월 18일(양력 10월 25일) 한성부(서울)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까지 진출했다.[3] 이에 조선 정부는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함대에서는 3척의 소(小)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음력 9월 25일에 퇴각했다.[4]

3. 2. 조선 침공

1866년, 극동함대 사령관으로 천진에 머물던 중 병인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1830~1884)로부터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순교 소식을 전달받은 후 무력 보복을 결정했다.[2] 로즈는 청나라의 중재 제의를 거부한 채 군함 세 척을 이끌고 불법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병인양요를 일으켰다.[2] 1866년 음력 9월에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오늘날의 인천 앞바다에 다다랐으며, 음력 9월 18일(양력 10월 25일) 한성부(서울)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까지 진출했다.[3] 이에 조선 정부는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함대는 3척의 소(小)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음력 9월 25일에 퇴각했다.[4]

3. 3. 강화도 점령과 약탈



1866년 음력 10월 11일, 로즈는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300명을 포함, 총 800명 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 근처로 진출하였다. 음력 10월 14일 프랑스 함정 4척과 해병대 일부가 강화도 갑곶진(甲串鎭) 부근 고지를 점령하고 한강 수로를 봉쇄했다. 음력 10월 16일 프랑스군 전군이 동원되어 강화성을 점령하고 여러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양회진, 통진(通津), 광성진(廣城津), 부평(富平), 제물포 등의 요충지와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에 병력을 파견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고, 음력 10월 19일 프랑스 측에 공문을 보내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로즈는 조선 측의 선교사 처형 등 천주교 탄압 행위를 비난하며 전권대신의 파견을 요구하였다.

3. 4. 조선의 저항과 프랑스군 철수

음력 10월 26일, 120여 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던 중 한성근 부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음력 11월 7일, 강화부를 점령했던 프랑스군 160여 명은 정족산성 공격을 시도했으나, 양헌수 부대의 공격으로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고, 장녕전 등 관아를 불태우고 갑곶진으로 퇴각했다.

프랑스 측 기록에 따르면, 병인양요 전체 기간 동안 프랑스군의 피해는 전사자 3명, 부상자 35명이 전부였다. 로즈는 추가 교전이 불리하다고 판단, 음력 11월 18일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철거하고 성내 관아에 불을 지른 뒤 약탈한 은괴,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청나라로 철수했다.

3. 5. 병인양요의 결과

이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고 하며 양화나루 옆의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였다.[5] 이때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6]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쇄국정책도 훨씬 강화되었다.

4. 이후 생애

1867년 1월 13일 일본 요코하마로 돌아갔으며, 1868년에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1869년 부제독으로 승진하여 해군 본부 협의회(Conseil d'amirauté)에서 근무하였다. 1869년부터 1871년 보불전쟁 기간에는 '''Préfet Maritime de la Manche et de la Mer du Nord'''라는 이름으로 브르타뉴 연안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1875년 지중해 소함대 사령관(Escadre de la Méditerranée)으로 임명되었다.

로즈는 1882년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4. 1. 프랑스 귀환 및 후속 경력

1867년 1월 13일 일본 요코하마로 돌아갔으며, 1868년에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1869년 부제독으로 승진하여 해군 본부 협의회(Conseil d'amirauté)에서 근무하였다. 1869년부터 1871년 보불전쟁 기간에는 '''Préfet Maritime de la Manche et de la Mer du Nord'''라는 이름으로 브르타뉴 연안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1875년 지중해 소함대 사령관(Escadre de la Méditerranée)으로 임명되었다.

4. 2. 사망

로즈는 1882년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5. 비판 및 부정적 평가

5. 1. 조선에 대한 침략 행위

5. 2. 문화재 약탈

5. 3. 외교적 문제 야기

6. 한국 역사에 미친 영향

6. 1. 쇄국정책 강화

6. 2. 대외 관계 인식 변화

참조

[1]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 서적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 휴머니스트 2003-04-28
[3]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4]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5]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6] 웹사이트 문명과 야만 https://terms.naver.[...] 201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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