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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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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균은 1540년에 태어나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시대 무신이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다. 하지만 이순신과의 갈등, 무능한 지휘, 칠천량 해전에서의 대패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전사 후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나, 그의 지휘 능력과 관련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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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원균 초상화
이름원균
한자 표기元均
평중(平仲)
아호매월당(梅月堂)
출생일1540년 2월 12일
출생지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당시 조선 경기도 진위현 여방면 내리)
사망일1597년 8월 27일 (추정)
사망지경상도 거제군 거제면 거제도 (당시 조선)
본관원주(原州)
종교유교(성리학)
배우자정경부인 윤차심
자녀1남 5녀
부모평원부원군 원준량(부), 남원 양씨 부인(모)
친척원연(동생), 원용(동생), 원전(동생), 원사립(조카)
군사 경력
소속조선군
복무 기간1567년 ~ 1597년
최종 계급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지휘삼도수군
주요 근무조산보만호, 전라좌도수군, 삼도수군통제사
주요 참전 전투/전쟁
참전 전쟁일본의 조선 침략 (1592년-1598년)
주요 전투옥포 해전
사천 해전 (1592년)
한산도 대첩
부산 해전 (1592년)
칠천량 해전
학력 및 서훈
학력1567년 식년무과 을과 급제
서훈효충장의적의협력 선무공신 1등 공신, 원릉부원군, 추증 좌찬성
로마자 표기
로마자 표기Won Gyun
매큔-라이샤워 표기Wŏn Kyun
로마자 표기 (한글 호)Pyeongjung
매큔-라이샤워 표기(한글 호)P'yŏngjung

2. 생애

1567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이일과 함께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일했다. 1583년 북방 여진 부락 토벌에 참여했으나 특별한 공을 세우지 못했고, 이후 부녕부사로 특진했다. 선조의 각별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보이나, 선조실록에 특별히 기록되지는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두 달 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수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일본군이 침입하자 전투 없이 도주했다. 이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등과 함께 일본 수군과 싸웠으나, 이순신난중일기에 원균을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등 둘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 탄핵으로 실각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했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후쿠도 타카토라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의 기습으로 대패하고 행방불명되어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었다(생존설도 있다).

사후 좌찬성(종1품)으로 추서되고 원릉군에 추봉되었다. 이순신을 함정에 빠뜨린 의혹 등으로 인해 문헌에서 매우 혹평을 받고 있어,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과 비교되어 현대 한국에서의 평가는 매우 낮다. 선조에게는 공신으로 인정받았으나, 현대 한국에서 재평가되고 있지는 않다.

2. 1. 생애 초반

1564년 아버지 원준량이 아들을 무과 초시에 규칙을 어기고 응시하게 했다는 죄로 탄핵당하면서, 원균은 무과 합격이 취소되고 다시 무과를 준비한다.[12]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후 오위에 입대하여 충순위(忠順衛[13])에 병력으로 배치된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 무과에 을과(乙科) 2위[13]로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변방에 파견되어 이일 등과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로 부임하였다. 한편 백호 윤휴는 백호전서에 그를 천거한 인물로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그를 천거 발탁했다고 하였다.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전출되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강등되어[14], 1575년(선조 9년) 잠시 거제현령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함경도 일대에서 조산보만호에 재임명되었다. 1583년(선조 17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부락을 토벌하고, 조산보만호로 참여한 공으로 부령부사(富寧府使)로 특진했다. 이어 종성부사 등 지방 수령직을 지냈으나 능력이 부족하여 고적(인사고과)에서 최하점을 받았고, 1591년(선조 24) 2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사간원에서 과거 수령 시절 보여준 부족한 능력을 비판하여 체차(직위해제)되었다.[15] 당시 사간원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병마절도사 이일을 따라 우위 부대를 지휘한 위장(衛將)인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해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이 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592년(선조 25년) 음력 1월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변방 근무 시 여진족을 토벌한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했다고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나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부령부사로 특진한 것은 기록에 남은 확실한 사실[16] 이어서 어떠한 군공을 세웠다는 추측과, 혹은 그의 친인척들이 당시 조정의 중진이었기에 이들의 지원으로 승진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시전부락 전투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전투에서 그는 예비대로서 참전해 딱히 군공을 세울 만한 일은 없었다.[17]

2. 1. 1. 출생과 가계

1540년 음력 1월 5일 현재 장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평택시 도일동에서 무인 원준량(元俊良)과 남원 양씨의 아들로 출생했다.

원주의 호족이자 고려 태조 왕건 때의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으로 병부령, 원성백에 봉작된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그의 선조들은 강원도 원주군에서 경기도 진위현으로 이주했다. 원주 원(原州元)씨의 경기도 입향조(入鄕祖)는 세종 때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던 원임(元任, 또는 원몽이라고도 함)으로 알려져 있다. 도일동의 원주 원씨 가문은 대대로 무인(武人) 집안으로 이름이 났다. 입향조였던 원임도 세종 때 무과에 급제했던 무인 출신이며, 원준량도 홍문관 교리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던 무인이었다.

외가로는 외조부 양희증(梁希曾)은 세조, 성종때의 학자인 양성지의 후손이었다. 1564년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은 아들을 무과 초시에 규칙을 어기고 응시하게 했다는 죄로 탄핵당한다.[12] 둘째 원연이 문과라는 것을 볼 때 이때 비리에 연루된 아들은 원균으로 추측된다. 이에 따라 원균은 무과합격이 취소되고 다시 무과를 준비한다.

이후 그는 오위에 입대하여 충순위(忠順衛[13])에 병력으로 배치된다. 이후 무과에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 무과에 을과(乙科) 2위[13] 로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변방에 파견되어 이일 등과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로 부임하였다. 한편 백호 윤휴는 백호전서에 그를 천거한 인물로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그를 천거 발탁했다고 하였다.

그뒤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전출되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강등되어[14], 1575년(선조 9년) 잠시 거제현령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함경도 일대에서 조산보만호에 재임명되었다. 1583년(선조 17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부락을 토벌한다. 조산보만호로 참여한 공으로 부령부사(富寧府使)로 특진했다. 이어 종성부사 등 지방 수령직을 지냈으나 능력이 부족하여 고적(인사고과)에서 최하점 거하를 받았고, 이후 1591년(선조 24) 2월 경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사간원의 과거 수령시절 보여준 부족한 능력을 비판받아 체차(직위해제)되었다.[15]

그 뒤 병마절도사 이일을 따라 우위 부대를 지휘한 위장(衛將)인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해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이 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592년(선조 25년) 음력 1월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변방 근무시 여진족을 토벌한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을 하였다고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나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부령부사로 특진을 한 것은 기록에 남은 확실한 사실[16] 이어서 어떠한 군공을 세웠다는 추측과 혹은 그의 친인척들이 당시 조정의 중진이었기에 이들의 지원으로 승진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또한 시전부락전투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전투에서 그는 예비대로서 참전을 해 딱히 군공을 세울 만한 일은 없었다.[17] 시전부락 전투에 참여한 이들은 후에 조선군의 중추로 성장하였고 이중에는 당시 원균과 동급의 신분으로 참전한 이순신 또한 있다.

원균 가계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원준량(元俊良)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어머니남원 양씨(南原楊氏)
남동생원연(元埏)원수량(元遂良)의 양자, 1543~1597
남동생원용(元墉) 또는 원훈(元塤)
남동생원전(元塼) 또는 원오(元墺)?~1597
남동생원지(元地)
여동생원주 원씨(元氏)
남동생원곤(元坤)
남동생원감(元堪)
남동생원해(元垓)


2. 1. 2. 초기 관직 생활

1540년 음력 1월 5일 평택시 도일동에서 무인 원준량(元俊良)과 남원 양씨의 아들로 출생했다. 원주 호족이자 태조 왕건 때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으로 병부령, 원성백에 봉작된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선조들은 강원도 원주군에서 경기도 진위현으로 이주했다.

1564년 아버지 원준량이 아들을 무과 초시에 규칙을 어기고 응시하게 했다는 죄로 탄핵당하면서 원균은 무과 합격이 취소되고 다시 무과를 준비한다.[12]

이후 오위에 입대하여 충순위(忠順衛[13])에 병력으로 배치된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 무과에 을과(乙科) 2위[13]로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변방에 파견되어 이일 등과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로 부임하였다.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전출되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강등되어[14], 1575년(선조 9년) 잠시 거제현령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함경도 일대에서 조산보만호에 재임명되었다. 1583년(선조 17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부락을 토벌하고, 조산보만호로 참여한 공으로 부령부사(富寧府使)로 특진했다. 이어 종성부사 등 지방 수령직을 지냈으나 능력이 부족하여 고적(인사고과)에서 최하점을 받았고, 1591년(선조 24) 2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사간원에서 과거 수령 시절 보여준 부족한 능력을 비판하여 체차(직위해제)되었다.[15]

병마절도사 이일을 따라 우위 부대를 지휘한 위장(衛將)인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해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이 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592년(선조 25년) 음력 1월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변방 근무 시 여진족을 토벌한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했다고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나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부령부사로 특진한 것은 기록에 남은 확실한 사실[16] 이어서 어떠한 군공을 세웠다는 추측과, 혹은 그의 친인척들이 당시 조정의 중진이었기에 이들의 지원으로 승진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시전부락 전투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전투에서 그는 예비대로서 참전해 딱히 군공을 세울 만한 일은 없었다.[17]

2. 2. 임진왜란

임진왜란 발발 직후, 원균은 경상우수사로서 일본군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함선을 자침시키며 후퇴했다. 이후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옥포 해전 등에서 협력하여 일본 수군에 맞섰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원균은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자 경상남도 남해안에서 왜군을 상대했으나 전황이 불리하여 퇴각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순신은 각자 지키는 지역의 한계가 있다며 처음에는 거절했다. 원균은 계속해서 부하들을 전라좌수영에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20]

이순신한산도 대첩에서 거짓 후퇴로 일본군을 유인하고, 원균이 뒤에서 추격하는 척하며 학익진을 펼쳐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승전 후, 원균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경상우수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옥포해전의 공으로 이순신은 자헌대부, 원균은 가선대부를 제수받으면서 둘 사이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원균은 크게 반발했다.[29]

이순신난중일기에서 원균을 "악인"이라고 부르며 그의 "잔혹한 행위"를 비판하고, 원균이 자신의 몰락에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1]

2. 2. 1. 전란 초기

1592년 4월 13일,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일본 함대가 경상도 동부 수군을 기습 공격하여 함선들을 모두 무력화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주력군은 다음 날 한반도에 상륙하여 북상하였다. 경상도 동부 수군의 지휘관 원균 또한 침략한 일본군에게 패배하였다. 원균은 일본군 상륙 부대가 교두보를 확보하고 부산을 성공적으로 포위할 때까지 일본 침략에 대한 해군 정보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원균은 침략한 일본군에게 함선이 노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함선을 자침시키며 후퇴했다. 남은 4척의 함선을 지휘하며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선조는 1592년 5월 2일 원균과 이순신에게 일본군과 싸울 것을 명령했다. 원균과 이순신은 이틀 후 작전을 시작했는데, 이억기는 전라도 동부 수군 지휘관이었다.

5월 7일,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옥포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

정사 기록에 따르면, 원균은 "왜군 선발대가 사천포와 곤양까지 쳐들어왔고 자신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인 노량해협까지 밀려났으니 급히 출동해 달라"라고 구원요청을 하였고, 이에 이순신이 출동하여 조선 수군의 2차 출동이 이루어졌다. 이 기간에 원균이 전공을 올렸다고 보고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1]

재야사학 기록에 따르면, 구원 요청을 받은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전라좌수영으로 돌아갔다. 5월 21일 왜선이 당포로부터 남해바다로 나오자 원균은 수군을 이끌고 교전했다. 그러나 여러 섬에 있던 왜적의 무리가 사방에서 지원하자, 원균은 왜군을 육지로 유인하여 그들의 칼날을 피하고, 다시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여 노량으로 옮겨 정박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순신이 다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곤양에서 적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사천 바다에 이르러 연달아 싸워 모두 부수었다.[2]

2. 2. 2. 이순신과의 협력 및 갈등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두 달 전, 원균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수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일본군이 침입하자 전투 없이 도주했다. 이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등과 함께 일본 수군과 싸웠지만, 둘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11]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군사들을 이끌고 경상도로 이동하여 원균의 군사들과 합류했다.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이 거짓 후퇴로 일본군을 유인하고, 원균이 뒤에서 추격하는 척하며 학익진을 펼쳐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승전 후, 원균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경상우수영으로 돌아왔다.

정사 기록에 따르면, 원균은 왜군 선발대가 사천포와 곤양까지 쳐들어오자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이순신이 출동하여 조선 수군의 2차 출동이 이루어졌다. 이 기간 동안 원균이 전공을 세웠다는 기록은 없다.

재야사학 기록에서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으로 돌아간 뒤, 5월 21일 왜선이 남해바다로 나오자 원균이 교전했으나 왜적의 지원으로 후퇴했다. 이후 이순신에게 다시 구원을 요청하여 곤양 땅에서 적을 격파하고 사천 바다까지 추격하여 연달아 싸워 모두 부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과의 관계는 난중일기에 원균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는데, 이는 단순한 성격 차이를 넘어 원균의 경쟁심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1]

2. 2. 3. 충청병사 전임과 선조의 신임

1594년 선조는 유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이 게으르지 않은지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유성룡은 이순신의 공이 크며, 수륙의 장수들 중 가장 우수하다고 답했다.[31] 그러나 선조는 유성룡이 이순신과 개인적으로 친하지 않느냐며 그의 답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후 이순신을 크게 의심하면서 원균을 특출한 용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선조는 두 사람의 체직(遞職)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31]

개전 초기에 이순신은 병력 부족에 대응하여 둔전 경영과 병력 징발에 힘써 일본 수군의 북상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31]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원균의 지원군 요청을 거절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조선 수군의 총지휘자임에도 동료인[31] 원균과의 갈등을 드러내 선조의 의심을 샀다.[32] 선조가 원균보다 이순신의 죄가 더 크다고 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이순신은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우의정 이원익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자주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선조가 이원익의 호의적인 평가에도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32] 한편 선조는 원균이 동인 강경파 일부와 서인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인식했다.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해 임명할 뜻을 밝혔다.[32] 이는 이순신의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 중에는 원균을 더 뛰어난 용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탁(鄭琢)이 원균을 적극 옹호하면서 수사의 자리에서 체직시키지 말 것을 청했다.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임되었다.[32]

1594년 음력 12월 원균은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출되었고, 충청병사 재임 중 1596년 초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을 수리하여 왜적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이 상당산성은 무리한 공사로 인해 많은 원망을 들었고, 완성된 직후 비가 오자 다시 무너져 버렸다.

충청병사로 부임한 원균은 1595년(선조 28년) 8월 사헌부에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등의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32] 이때 원균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이 선조였다.[32] 선조는 "원균은 분수를 알아 넘치지 않는다. 이런 때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라며 반박했다. 심지어 선조는 사헌부가 계속 원균의 파직을 건의하고 나서자 크게 노해 "오늘날 장수로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더라도 어찌 가벼이 탄핵해 그의 마음을 헤이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32][33][34][35]

신하들의 계속된 원균 탄핵을 두고 선조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다.

시간이 갈수록 선조는 원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32] 이는 동인이 원균을 배척하며 이순신만을 높이 평가하는 데 따른 반발로 볼 수 있다.[32] 이산해 등 소수만이 원균의 편을 들었다.

반면 선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명령을 거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이순신은 광해군이 무군사(撫軍司)에서 이순신을 불렀을 때 응하지 않았다. 이는 곧 선조의 명령에 대한 불복을 의미한다.[32] 이순신을 불신한 선조는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이후 성실하지 않았다.[36]"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사료를 살펴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1594년 1월 15일 이순신에게 광해군의 분부를 전달하는 서한이 왔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이었다. 이튿날 17일 이순신은 광해군에게 장계를 띄워 보냈다. 2월 2일 광해군에게 올린 장계의 회답이 왔고, 4일 광해군의 명령이 내려왔다. 9일 이순신은 광해군이 문책한 데 대해 답을 보냈다. 위 기록을 살펴보면, 그해 1월부터 2월 사이에 광해군과 이순신은 최소한 세 번 이상 편지를 주고받았다.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라"라는 명령에 대해 이순신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광해군이 이순신을 여러차례 불렀는데 응하지도 않았다는 선조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37]

2. 2. 4. 지휘, 통솔능력 논란



한산도 대첩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31]

이순신으로부터 병력 지원 요청을 받자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은 음력 7월 4일에 선박을 이끌고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군사들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이순신이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들이자 원균은 뒤에서 추격하는 척하며 일본군을 이순신이 파놓은 함정으로 몰아갔다. 이순신 등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순신군의 승전을 본 후 원균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경상우수영으로 되돌아왔다.[31]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는 유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유성룡은 "이때까지 지탱한 것도 이순신의 공이고, 수륙의 모든 장수들 중 가장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했다.[31] 그러나 선조는 유성룡이 이순신과 개인적으로 친하지 않느냐며 그의 답변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후 이순신을 크게 의심하면서 원균을 특출한 용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선조는 두 사람의 체직(遞職)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31]

개전 초기에 이순신은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병력이 고갈되자 그 대책으로 둔전 경영과 병력 징발 등에 주의를 기울여 일본 수군의 북상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31]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원균의 지원군 요청을 거절하다가 그와 갈등하게 된다. 조선 수군의 총지휘자인데도 동료인 원균과의 갈등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선조의 의심을 샀다.[32] 선조가 원균보다 이순신의 죄가 더 크다고 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순신은 여러 면에서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우의정 이원익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대책을 의논했다. 선조가 이원익이 이순신을 아주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도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32] 한편 선조는 원균이 동인 강경파 일부와 서인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인식했다.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 곧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해 임명할 뜻을 밝혔다.[32] 이는 그간 이순신이 세운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 중에는 원균을 더 뛰어난 용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탁(鄭琢)이 원균을 적극 옹호하면서 수사의 자리에서 체직시키지 말 것을 청했다.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임되었다.[32]

1596년 7월이몽학의 난이 일어나 김덕령 등이 하옥되는 등 전라도 지역이 불안해지자 선조는 이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원균을 다시 전라좌병사로 임명했다.[36] 이때 이원익은 선조를 배견하는 자리에서 "이순신은 경상도 장수 중 제일 훌륭합니다."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원균에 대해서는 "평상시 상관과 다툼이 있기는 하나 전투에는 제법 기용할 만 합니다."라며 유보하는 평가를 내렸다.[36] 남인 인사가 그를 비판하자 이산해는 그가 모함을 당한 것이라며 옹호하였다.

이에 선조가 원균을 호평하며 반박하자, 이원익은 즉각 "원균은 전공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코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원균에게는 미리 군사를 주어서는 안 되고 전투에 임해 군사를 주어 돌격하도록 해야 합니다. 평시에 군사를 주면 반드시 (원균을)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라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36] 원균의 용맹과 전공은 인정하나 지휘관의 자질은 없다고 혹평에 가까운 견해를 밝힌 것이다. 이 날의 대화 중에 주목되는 점은 이원익이 "쉽게 대답할 수 없다"라 하며 원균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신중하게 나왔다는 점이다.[39] 그러나 북인들과 서인들은 유성룡과 권율이순신과 친한 점을 들어 남인에서 그를 모함한다고 성토했다.

대부분의 신료들이 원균의 지휘능력에 관해서는 불신하고 있었다.[40]

1596년(선조 29년) 11월에 이르러 황신의 비밀 보고가 도착하면서 일본의 재침략 사실이 확실해졌다. 일본의 침입 목표가 전라도이고, 수륙병진으로 침략할 것이라는 내용이 그 골자였다.[36] 다음 날 윤두수는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본의 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균을 수사로 다시 기용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다.[36] 이원익도 이에 동조했다.[36] 이를 두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획책한 반간계가 먹혀든 것이다.'라는 시각도 있다.[36]

선조는 원균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총애하고 추켜세워줬다. 원균에 대한 세상의 평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고 선조가 그렇게 머리가 나쁜 임금도 아니었다. 다만 선조는 자신이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간 행동에 대해 부산진을 버리고 이순신에게로 도망간 원균을 띄워주면서 책임추궁을 회피하기 위해 원균을 총애했다. 실제로 선조는 원균을 선무 1등공신에 권율, 이순신과 같이 추서하려 할 때 원균의 군공이라 밝혔다는 내용이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 한다. 또한 덧붙여 선조 본인도 명나라에 구조를 요청했으니 스스로를 구국영웅이라 자화자찬했다.

선조가 원균을 심하게 우대한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친 일로 인하여 언제 광해군 중심의 반정을 당할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기간 중에 이몽학의 난까지 당했던 선조인지라 자기 제위를 빼앗길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광해군이 선조와는 달리 한양에 남아 분조를 꾸려 왜군에 대항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과오를 어떻게든 군공으로 미화해야만 했고 그 도구로서 원균을 사용한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폐세자시키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선조가 붕어해, 광해군이 조선 임금으로 즉위했다.

원균은 군 경력 외에도 과도한 음주와 간통 미수 등의 개인적인 결점으로 유명하다. 이순신은 그의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보고와 소문을 기록하고, 심지어 원균이 자신의 부하 아내를 유혹하려 했던 사건을 언급하며 그를 "악인"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몰락에 대해서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를 비난한다 ("원균은 온갖 수단을 다하여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1]

원균에 대한 논란은 군 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역량에 대해서도 계속되고 있다. 학자와 역사가들에게 널리 비판받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시절 이순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원균이 과도하게 매도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원균의 초기 여진족 토벌 성공은 묻혀 있고, 그의 군 경력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하려는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원균의 해군 장교로서의 실수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그 시대의 어려움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은 당파 싸움으로 인한 조정의 무능력에 있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 해군 사령관으로서의 무능함을 무시하기는 어렵고, 칠천량 해전의 결과에 대해 조정의 정치적 불안정과 우유부단함을 전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이 해전은 이전까지 해전에서 한국에게 패배하지 않았던 일본군에 맞서 한국 해군이 단 한 번의 교전으로 거의 전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좋지 않은 지휘관으로서의 유산은 더 성공적인 동료인 이순신과의 비교라는 불운한 부산물이라는 설명도 있다.

2. 3. 정유재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 함대가 경상도 동부 수군을 기습하여 함선들을 무력화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주력군은 한반도에 상륙하여 북상했다. 경상도 동부 수군 지휘관이었던 원균은 일본군에 패배했다. 원균은 일본군 상륙 부대가 부산에 교두보를 확보할 때까지 해군 정보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함선이 노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함선을 자침시키며 후퇴했다. 남은 4척의 함선으로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선조는 1592년 5월 2일 두 제독에게 일본군과 싸울 것을 명령했다. 이억기와 함께 작전을 시작한 조선 수군은 5월 7일 옥포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 이후 원균은 육군 장군으로 승진했고, 이순신은 해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옥포해전의 공으로 조정에서 이순신에게는 자헌대부를, 원균에게는 가선대부를 내렸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원균은 크게 반발했고,[29] 이때부터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그해 음력 9월 자헌대부 중추부지사(知事)로 승진하였다.

이산해


이순신남인인 유성룡과 권율과 친분이 있어 이원익동인으로부터 호평을 얻자, 윤두수 등의 서인들은 원균을 옹호했다. 동인이산해 등은 정철의 처벌 문제와 우성전의 기생 첩 문제로 유성룡, 권율 등과 알력이 있었고, 이들을 불신하여 원균을 변호하고 지원했다. 동인이 남북인으로 분당한 뒤에는 북인들 역시 원균을 옹호했다.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이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기 때문이다.[30]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를 내리게 된다.[30]

이후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은 왜군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파천된 조정에도 알려졌다. 선조는 사람을 시켜 이들의 갈등 과정을 조사하여 파악하게 된다.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는 유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 게 아닌가?"라고 물었고, 유성룡은 이순신의 공이 크다고 대답했다.[31]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을 의심하며 원균을 용장으로 보기 시작했다. 선조는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라고 언급했다.[31]

이순신은 둔전 경영과 병력 징발 등에 주의를 기울여 일본 수군의 북상을 저지하는데 공을 세웠으나,[31] 원균의 지원군 요청을 거절하며 갈등했다. 조선 수군의 총지휘자였던 이순신이 원균과의 갈등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선조의 의심을 샀다.[32] 이원익이 이순신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도 선조가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32]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해 임명하려 했으나,[32] 신료들은 원균을 더 뛰어난 용장으로 보기도 했다. 정탁(鄭琢)이 원균을 옹호하면서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임되었다.[32] 이후 율포(栗浦), 한산도(閑山島), 안골포(安骨浦), 부산포(釜山浦) 해전에 참전하여 일본 수군과 싸워 격퇴하였다.

1597년, 일본은 조선명나라와의 협상을 중단하고 재침략을 계획하며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일본 스파이들은 가토 기요마사가 곧 바다를 건널 것이라는 소식을 퍼뜨렸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가토를 사로잡을 것을 명령했지만, 이순신은 날조임을 알고 거부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쿠데타 가능성을 우려하여 처형을 명령했지만, 조정의 반대로 감금과 강등으로 낮추었다. 이순신은 권율의 지휘하에 들어갔고, 선조는 이순신을 원균으로 대체하여 수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2. 3. 1. 전라 병사 재직 시절

1594년 음력 12월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출되었고, 1596년 초 청주의 상당산성을 수리하여 왜적의 재침을 대비하였다. 이 상당산성은 무리한 공사로 인해 많은 원망을 들었고, 완성된 직후 비가 오자 다시 무너져 버렸다.[32]

충청병사로 부임한 원균은 1595년(선조 28년) 8월 사헌부에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등의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32] 이때 원균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이 선조였다.[32] 선조는 "원균은 분수를 알아 넘치지 않는다. 이런 때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라며 반박했다. 심지어 선조는 사헌부가 계속 원균의 파직을 건의하고 나서자 크게 노해 "오늘날 장수로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더라도 어찌 가벼이 탄핵해 그의 마음을 헤이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32]

신하들의 계속된 원균 탄핵을 두고 선조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다. 시간이 갈수록 선조는 원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32] 이는 동인이 원균을 배척하며 이순신만을 높이 평가하는 데 따른 반발로 볼 수 있다.[32] 동인 중에서는 이산해 등 소수만이 원균의 편을 들었다.[33][34][35]

2. 3. 2.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과 칠천량 해전

1596년 7월 이몽학의 난으로 전라도 지역이 불안해지자, 선조는 사태를 빠르게 수습하기 위해 원균을 다시 전라좌병사로 임명했다.[36] 이원익은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이순신은 경상도 장수 중 제일 훌륭합니다."라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원균에 대해서는 "평상시 상관과 다툼은 있지만 전투에는 제법 기용할 만 합니다."라며 유보적인 평가를 내렸다.[36] 남인 인사가 원균을 비판하자, 이산해는 그가 모함을 당한 것이라며 옹호하였다.

선조가 원균을 옹호하며 반박하자, 이원익은 "원균은 전공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코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원균에게는 미리 군사를 주어서는 안 되고 전투에 임해 군사를 주어 돌격하도록 해야 합니다. 평시에 군사를 주면 반드시 (원균을)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라며 제동을 걸었다.[36] 원균의 용맹과 전공은 인정하지만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것이다. 이원익이 "쉽게 대답할 수 없다"라며 원균에 대한 평가를 매우 신중하게 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39] 그러나 북인들과 서인들은 유성룡과 권율이순신과 친하다는 점을 들어 남인이 이순신을 모함한다고 비판했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원균의 지휘 능력에 대해 불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0]

1596년 11월, 황신의 비밀 보고를 통해 일본의 재침략이 확실해졌다. 일본의 침입 목표가 전라도이고, 수륙병진으로 침략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36] 다음 날 윤두수는 대책 회의에서 일본의 해로를 차단하려면 원균을 수군 지휘관으로 다시 기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36] 이원익도 이에 동의했다.[36] 이를 두고 '고니시 유키나카 등이 획책한 반간계가 먹혀든 것이다.'라는 시각도 있다.[36]

1597년 7월 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 수군에 첩자를 보냈다. 경상우수영에 파견된 첩자 요시라는 경상우수사 김응서를 속였다. '왜선(倭船)이 지금 연이어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그들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주사(舟師)로 요격한다면 오히려 이득을 취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때 원균은 왜인의 말이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도원수(都元帥) 권율은 출전을 명령하며 독려했다. 6월 말, 원균은 수군을 이끌고 웅천(熊川) 앞바다로 나갔으나 평산포만호 김축과 보성만호 안홍국이 적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고, 수군은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왔다.

당시 원균은 2월 초 이순신이 동원했던 63척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판옥선 134척을 동원했다. 그러나 왜군의 추가 지원군이 나타나자 원균은 즉시 군대를 후퇴시키고 지원군을 요청했다. 원균은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육군이 제거해 주기를 고집했고, 권율은 원균을 잡아다 곤장을 쳤다. 결국 원균은 부산포 앞바다로 향하게 된다.

1597년 7월, 부산 앞바다에서 왜군이 조선 수군을 두려워하여 도주하자,[44] 원균은 급히 추격하다가 적진 깊숙이 들어갔음을 깨닫지 못했다. 뱃사람들이 이미 수령(水嶺)을 넘었다고 하자, 놀라 급히 배를 돌려 퇴각했지만 파도 때문에 12척의 배를 잃었다. 후퇴 후 물을 구하기 위해 가덕도에 잠시 정박했는데, 가덕도의 적이 공격해 오자 원균은 400명의 병력을 남기고 급히 퇴각했다. 2월, 이순신 역시 가덕도에서 공격받았지만 1명이 전사하고 5명이 생포되자 가덕왜성을 공격했고, 요시라가 급히 건너와 포로가 된 아군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공격을 멈추기로 합의했던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결과였다.

이에 권율은 원균을 다시 불러 곤장을 치고 다시 부산포로 출전할 것을 강요했다.

1597년 7월 15일, 원균은 다시 퇴각하여 그날 저녁 온라도(溫羅島)에 도착했다. 이때 원균은 부하들에게 죽음을 각오할 것을 당부했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소. 하늘이 순리를 돕지 않으니 오늘의 계책으로는 다만 한 마음으로 순국(殉國)하는 것이 있을 뿐이오."

그날 밤, 왜적이 비밀리에 작은 정찰선(哨探船)을 보내 아군 선단 사이로 몰래 잠입했고, 병선으로 몰래 외부를 포위했지만 군에서는 이를 알지 못했다.

7월 16일 새벽, 칠천량에 정박했으나 그날 아침 조선군 선박에서 불이 나자 봉화를 올리고 급히 북을 치며 경상우수영에 위급 상황을 알렸으나 왜군이 밀려왔다. 원균 행장에 따르면 '문득 보니 적선이 사방에서 충돌해 오며 탄환을 비처럼 쏘고 함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형세가 산이 무너지는 듯, 바다를 말아올리는 듯하여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닻을 올리고 먼저 도망치자 아군은 결국 무너졌다.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삼도 수군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던 중 크게 패하고 배설 등과 함께 육지로 상륙, 거제도로 피신했다가 왜적의 칼에 맞아 전사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러나 그가 전사하면서 많은 병력을 잃은 점 때문에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또한 그의 사망 보고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처벌 논의가 나오기도 했다.

원균 행장의 내용과는 달리,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던 김완의 진술에 따르면 아군을 쫓아오는 적이 겨우 두 척이었고, 아군이 무질서하게 도주한 것이 아니라 각기 수사를 따라 후퇴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원균이 지휘권을 유지한 채로 소수의 적 때문에 수군 전체를 춘원포로 이끌었다는 것이 밝혀졌다.[45] 이는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정기수의 보고에도 나타난다.

배설이 이끄는 병력 외에 임치 첨사 홍견, 가리포 첨사 이응표, 해남 현감 류형, 녹도 만호 송여종, 조방장 배흥립 등 많은 장수들이 춘원포가 아닌 한산도로 퇴각했다는 점과 한산도가 함락된 것이 칠천량 해전 이후 일주일이 넘어서야 이루어졌다는 점에서[44] 견내량이 막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통제사 원균은 춘원포에서 육지로 도망쳤고, 수사 이억기와 최호는 적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보아 원균은 지휘 체계를 유지한 채 춘원포로 후퇴했고, 지휘를 따르지 않은 배들은 한산도로 퇴각했음을 알 수 있다. 군감들이 평가한 칠천량 해전의 전과는 시마즈 160척, 와키자카 야스하루 12척 등으로 200척을 넘지 않는데, 판옥선 외에 조선 수군의 총 병력이 300척을 넘었다는 점과 전공이 보통 과장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 해전의 승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46]

칠천량 패전 이후 원균이 죽지 않았다는 목격담도 있다.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6일 을묘 5번째 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 」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3. 사후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삼도 수군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던 중 대패하고, 거제도로 피신했다가 왜적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8세였다.[45] 그러나 그가 전사하면서 병력을 다수 잃은 점 때문에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또한 그의 사망 보고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처벌 논의가 나오기도 했다.

1603년(선조 36)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공신들을 선정할 때 그는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나, 패전을 이유로 공을 깎는 것은 부당하다는 선조 임금의 지시로 선무공신 1등으로 책정된다. 그 뒤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증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판의금부사추증되고 원릉군(元陵君)에 추봉된다.

시신은 정유재란이 종결된 후 수습되어 경기도 진위현 도일리에 안장되었다. 후일 원균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다.

3. 1. 평가와 비판

원균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며, 특히 이순신과의 관계 및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와 관련하여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이순신난중일기에서 원균을 "흉악하고 거짓된 자"라고 비판하며, 그의 됨됨이와 행동에 대해 강하게 질타했다.[56] 2008년 충무공유사 해석 과정에서 발견된 내용에 따르면, 이순신은 원균을 "하늘과 땅 사이에 없을 흉패하고 망령된 자"라고까지 표현했다.[56]

선조실록의 사관 역시 원균을 "탐욕스럽고 잔혹함이 지나치다"라고 평가했다.

당시 조정에서도 원균의 지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컸다. 이원익은 원균의 용맹함은 인정하면서도, 평상시 상관과의 불화, 군사 지휘 능력 부족 등을 지적하며 신중한 기용을 주장했다.[36] 선조가 원균을 옹호하자, 이원익은 "원균은 전공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코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하게 반박했다.[36]

1596년 이몽학의 난 이후 전라도 지역이 불안해지자, 선조는 원균을 전라좌병사로 임명했다.[36] 같은 해 11월, 일본의 재침략이 확실해지자 윤두수이원익일본의 해로 차단을 위해 원균의 수사 기용을 건의했다.[36] 이를 두고 고니시 유키나카 등이 획책한 반간계가 작용한 결과라는 시각도 있다.[36]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초래했고, 국난 극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31]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거제도에서 왜적에게 피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칠천량 패전 이후에도 원균의 생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6일 을묘 5번째 기사에는 도원수 권율이 군관 최영길의 말을 인용하여, "원균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라고 보고한 내용이 있다.

원균은 용장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실제 전투 기록에서는 용맹함을 보여준 사례가 드물다. 오히려 아군에게 가혹하고 왜적에게는 도망치는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이 있다.[52]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얼굴빛이 흙빛이며 입이 비뚤어졌다는 외모 묘사가 있다. 전라남도 곡성의 생원 오천뢰는 원균의 비만과 무능함을 빗대어 "원균의 뱃살이 원균을 져버렸네."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원균은 개인적인 결함도 많았다. 과도한 음주와 간통 미수 등의 문제로 비판받았으며,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잔혹한 행위"를 기록하고 그를 "악인"이라 칭했다.[1]

최근에는 박정희 정권 시절 이순신을 영웅화하기 위해 원균이 과도하게 폄하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의 참혹한 결과와 원균의 지휘력 부족은 부정하기 어렵다.

3. 2.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부친원준량(元俊良)평택시 도일동 출생, 무인(武人)
모친남원 양씨양희증(梁希曾)의 딸, 양성지의 후손
장인윤언성(尹彦誠)파평 윤씨 파원군(坡原君)
장모평양 조씨조우신(趙又新)의 딸
정부인정경부인 윤차심(尹次深)1546년 ~ 1642년 9월 16일[50]
적장녀청주 한씨 한억(韓嶷)의 처
측실미상
서자[51]원사웅(元士雄)1575년 ~ 1646년 이전
자부능성 구씨구삼락(具三樂)의 딸
손자원필(元珌)
자부창녕 성씨성여학(成汝學)의 딸
손자원염(元琰)
측실미상
서장녀이신춘(李新春)의 측실
서차녀원정일(元貞一)의신군(義信君) 이비(李備)의 측실
외손자이박(李珀)원평부령(原平副令), 1598년 ~ ?
외손자이경(李瓊)원계부령(原溪副令), 1601년 ~ ?
외손자이거(李琚)원흥부령(原興副令), 1602년 ~ ?
외손자이구(李玖)원창군(原昌君), 1605년 ~ ?
외손녀이혜숙(李蕙淑)1609년 ~ ?
외손녀이의숙(李懿淑)1611년 ~ ?
외손자이락(李珞)원인부령(原仁副令), 1613년 ~ ?
외손자이기숙(李己淑)1620년 ~ ?
서3녀조정견(趙廷堅)의 측실
서4녀정항(鄭沆)의 측실
남동생원연(元埏)1543년 ~ 1597년, 삼촌 원수량(元遂良)의 양자
남동생원용(元墉)원훈(元塤)으로도 불림
남동생원전(元塼)원오(元墺)로도 불림, ? ~ 1597년
남동생원지(元地)
여동생원주 원씨(元氏)
남동생원곤(元坤)
남동생원감(元堪)
남동생원해(元垓)


3. 3. 묘와 사당

사후 불천위로 지정되고[11], 고향인 진위현 도일리에 사당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당시 원균과 아들인 원사웅이 함께 전사했고, 당시 남은 핏덩이 손자로 대를 이었으며[11] 96세에 졸한 원균의 부인이 국가에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여 상신한 바 있다.[11] 그러나 아들 원사웅은 1597년 6월 19일 칠천량 해전에서 아버지 원균을 보호하다가 전사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때 전사하지 않았고 정확한 사망 년도는 불명이지만 공신회맹록에 사망 등의 이유로 논의되는 승계가 1646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47] 부인 파평윤씨는 1642년 6월 홍성군 홍주에서 사망했으나 시신을 거둘 이가 없었는데, 그해 7월 호노(戶奴)인 백종(白從)이 왕에게 상소를 올려 예장하였다.

원균의 묘소 뒤에는 선조가 하사한 말의 무덤이 있다.

  • 평택 원균장군묘 - 경기도 지정 기념물 제57호(1980), 경기 평택시 도일동 산 82
  • 원균 선무공신교서 - 원릉군 원균 선무1등공신 교서(敎書), 보물 제1133호
  • 원균 무덤 옆의 애마총: 내리저수지를 정면으로 마주한 언덕배기에 있는 묘역은 널찍했다. 원균의 묘지 아랫녘 신도비 옆에 있는 작은 무덤 앞에는 애마총이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원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천리를 달려와 신발과 담뱃대를 놓고 그 자리에서 죽은 애마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말 무덤이라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타던 애마(선조가 하사했음)가 장군이 전사한 뒤 유품 몇 가지와 한 쪽 팔을 물고 천리길을 달려 고향마을까지 가져온 뒤 죽었는데, 그 유품으로 묘를 썼다고 한다.

4. 관련 작품


  • 1971년 영화 《성웅 이순신한국어》 - 이예춘
  • 1977년 영화 《난중일기한국어》 - 최성호
  • 1985년~1986년 MBC 드라마 《임진왜란한국어》 - 신충식
  • 2004년~2005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한국어》 - 최재성 (아역 : 김학준)
  • 2015년 KBS1 드라마 《징비록한국어》 - 이일재
  • 1973년 영화 《성웅 이순신한국어》 - 고설봉
  • 1998년 오페라 《이순신한국어》 - 박경준
  • 2009년 뮤지컬 《이순신한국어》 - 한상민
  • 2009년 뮤지컬 《이순신한국어》 - 이원희
  • 2022년 영화 《한산: 용의 출현한국어》 - 손현주
  • 만화 《이순신: 전사와 수호자한국어》에서 이순신의 적대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 비디오 게임 《엠파이어즈: 현대 세계의 여명한국어》의 '이순신' 캠페인에서 원균은 한국의 반역자로 묘사되어, 먼저 한국 북부를 괴롭히는 만주 약탈자들과 동맹을 맺고 나중에는 일본 침략자들과 동맹을 맺는다. 이 묘사에서 원균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의 조공국이 되는 축소된 한국의 왕이 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국에 대한 두 차례의 공격을 모두 기획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반역은 류성룡에 의해 발각되고 그는 체포된다.

참조

[1] 서적 Nanjung Ilgi
[2] 웹사이트 International Movie Data Base: Bulmyeolui Lee Soon-shin cast list https://www.imdb.com[...] 2012-04-18
[3] TV Immortal Admiral Yi Sun-sin KBS 2004-2005
[4] TV Immortal Admiral Yi Sun-sin KBS 2004-2005
[5] 웹사이트 Ahn Sung-ki, Son Hyeon-joo, Ok Taecyeon, and Park Ji-hwan, 'Hansan' completed with dignity and courage https://entertain.na[...] 2022-06-28
[6] 웹사이트 (81)원주 원씨(原州元氏)-109,505명 http://www.seoulecon[...] 2022-08-16
[7] 뉴스 李舜臣将軍の「乱中日記」、32日分が新たに確認 http://japanese.yonh[...] 聯合ニュース 2008-04-02
[8] 기타
[9]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10] 뉴스 충무공을 둘러싼 입방아들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4-07-29
[11] 뉴스 종가기행 33 原州 元氏 原陵君 元均 http://weekly.hankoo[...] 한국일보 2007-01-22
[12] 서적 조선왕조실록 1567-06-21
[13]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http://people.aks.ac[...]
[14] 서적 거제읍지
[15] 서적 선조실록 1591-02-04
[16] 서적 융경원년정묘식년문무과방목
[17] 서적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18] 웹사이트 원균 http://100.nate.com/[...]
[19] 서적 선조실록 1595-06-28
[20] 서적 난중잡록
[21] 서적 난중잡록
[22] 서적 인간 이순신 평전
[23] 서적 난중일기
[24] 서적 이순신과 임진왜란 비봉출판사
[25] 서적 옥포파왜병장
[26]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007
[27] 서적 원균 행장
[28] 서적 이순신과 임진왜란
[29] 웹인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시스템 http://people.aks.ac[...]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11-14
[30] 서적 과학으로 파헤친 세기의 거짓말 새로운사람들 2003
[31] 서적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2] 서적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3] 서적 선조실록 1595-08-15
[34] 서적 선조실록 1595-08-16
[35] 서적 선조실록 1596-01-12
[36] 서적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7] 서적 인간 이순신 평전 북하우스 2005
[38] 서적 원균과 이순신 비봉출판사
[39] 서적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40] 실록 선조실록 1596-10-21
[41] 문서 원균 행장
[42] 실록 선조실록 #날짜 정보 부족
[43] 실록 조선왕조실록 #날짜 정보 부족
[44] 기록 조선일일기
[45] 기록 해소실기
[46] 기록 정한위략
[47] 기록 공신회맹록 1740
[48] 논문 송시열의 원균 무능함 지적 및 혹평
[49] 기록 해소실기
[50] 족보 숙경옹주 족보
[51] 기록 서자 적자 승격 기록
[52] 서적 원균과 이순신 비봉출판사
[53] 서적 인간 이순신 평전 북하우스 2005
[54] 기록 택당 이식과 이순신의 친족 관계
[55] 기록 택당 이식과 이순신 시장 관련 기록
[56] 뉴스 이순신, 원균을 ‘흉악한 도적’에 비유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4-02
[57] 기록 난중잡록 http://db.itkc.or.kr[...] 1597-07-13 #정유년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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