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클레르 리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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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릭스 클레르 리델은 프랑스 출신의 로마 가톨릭 사제로,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1861년 조선에 밀입국하여 베르뇌 주교 등과 함께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1866년 병인박해를 겪고 청나라로 탈출했다. 이후 조선 대목구의 대목으로 임명되었으나 입국이 어려웠고, 1877년 재입국했다가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어 사전인 <한불자전>과 문법서 <한불문전>을 편찬했으며, 옥중기를 통해 당시 조선의 상황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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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클레르 리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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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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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펠릭스 클레르 리델 |
직함 | 제6대 서울대교구 대주교 |
교회 | 카톨릭 교회 |
착좌 | 1870년 |
사임 | 알 수 없음 |
이전 | 알 수 없음 |
이후 | 알 수 없음 |
출생일 | 1830년7월 7일 |
출생지 | 、루아르앙페리외르 주 샤토네 |
사망일 | 1884년6월 20일 |
사망지 | 、반 |
국적 | 프랑스 |
직업 | 알 수 없음 |
2. 생애
펠릭스 클레르 리델은 1861년 조선에 들어와 천주교 전도에 힘썼으나,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청나라로 탈출했다. 그는 프랑스 정부에 조선의 상황을 알리고, 병인양요의 원인을 제공했다.[2][9][10] 1870년 조선 대목구의 제6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의 쇄국 정책으로 입국이 어려웠다.[3]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1877년 재입국했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추방되었다.[4] 이후 일본에 머물다 1882년 프랑스로 귀국, 1884년 반에서 사망했다.[5]
2. 1. 초기 생애와 조선 입국
1861년(철종 12년), 랑드르·요안노 등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11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함께 전도에 힘썼다. 그 결과 1865년(고종 2년)에는 천주교 신도수가 무려 2만 3000명에 달하였다.1866년 병인박해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3명 중 하나였던 리델[9]은 5월 8일 조선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하여, 7월 6일 청의 주푸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프랑스 극동함대(極東艦隊)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은 톈진에 있었다. 리델은 톈진으로 직행하여 조선에서 발생한 프랑스 신부들의 처형 소식을 전하고, 생존해 있는 다른 신부 두 명의 신변 보호를 위해 즉각 함대를 출항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주력함대가 돌아오는 대로 조선 원정을 단행할 것을 약속했다.[10]
병인박해로 인해 시메온-프랑수아 베르뇌 주교, Marie-Nicolas-Antoine Daveluy|마리 니콜라 앙투안 다블뤼프랑스어 주교, 그리고 7명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사형당했으나, 리델은 살아남아 청나라로 탈출하여 조선의 참상을 호소했다.[2] 당시 12명의 프랑스인 선교사 중 리델을 포함해 3명만이 살아남았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은 루아르-아틀랑티크주 샹트네(현재 낭트)에서 태어났다.[1] 1857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사제로 서품되었고, 1859년 파리 외방전도회에 소속되어 선교를 위해 1861년 조선에 밀입국했다.
2. 2. 병인박해와 탈출
1861년(철종 12년), 랑드르·요안노 등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11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함께 전도에 힘썼다. 그 결과 1865년(고종 2년)에는 천주교 신도수가 무려 2만 3000명에 달하였다.1866년 병인박해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는 3명이었는데, 리델[9]은 그 중 한 명이었다. 리델은 1866년 5월 8일 조선에서 탈출하여, 7월 6일 청나라 주푸항에 도착했다.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은 톈진에 있었다. 리델은 톈진으로 가서 조선에서 발생한 프랑스 신부 처형 소식을 전하고, 생존한 다른 두 신부의 보호를 위해 즉각 함대 출항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 반란 진압 후 주력함대가 돌아오는 대로 조선 원정을 약속했다.[10]
2. 3. 조선 대목구장 임명과 재입국 시도
리델은 1870년 시메온-프랑수아 베르뇌 주교와 Marie-Nicolas-Antoine Daveluy|label=다블뤼 주교영어의 뒤를 이어 주교 및 조선 대목구의 제6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의 쇄국 정책은 더욱 엄격해져 입국이 어려웠다.[3]강화도 조약 이후인 1876년, 리델은 2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하는 데 성공했다. 리델 본인도 1877년 조선에 재입국했으나, 이듬해 1월 28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고, 청나라 주재 프랑스 공사의 요청으로 6월 11일 석방되어 육로로 국외 추방되었다.[4]
2. 4. 프랑스 귀환과 사망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리델은 2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하는 데 성공했다. 리델 본인도 1877년 조선에 재입국했으나, 이듬해 1월 28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이송, 감옥에 갇혔다. 청나라 주재 프랑스 공사의 요청으로 6월 11일 석방되어 육로로 국외 추방되었다.[4] 이후 일본에 머물렀으나 발작을 일으켜 요양을 위해 1882년 프랑스로 귀국했다. 1884년 두 번째 발작을 일으켜 반에서 사망했다.[5]3. 저술 활동
리델은 일본으로 건너가 최초의 한국어 사전으로 불리는 <한불자전>과 <한불문전>을 편찬하고, 조선 탈출 후에는 옥중기 《나의 서울 감옥 생활》(Ma captivité dans les prisons de Séoul프랑스어)을 집필하는 등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저서들은 조선의 풍습, 천주교 역사, 활판 인쇄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3. 1. 한불자전과 한불문전
리델은 일본으로 건너가 최초의 한국어 사전으로 불리는 <한불자전>과 <한불문전>을 편찬하는 데 힘썼다.- 한불자전 (Grammaire coréenne프랑스어, 1881): 한국어 표제어와 프랑스어 해석을 같이 쓴 이중어사전이다. 요코하마의 L. Lévy et S. Salabelle에서 출판되었다.[7]
- 한불문전 (Dictionnaire coréen-français프랑스어, 1880): 요코하마의 C. Lévy에서 출판되었다.[6]
1880년에 요코하마에서 출판된 한불 사전(Dictionnaire coréen-français프랑스어)은 서양인에 의해 최초로 인쇄된 한국어 사전으로, 693페이지에 약 11만 단어를 수록하고 있다. 이 사전은 좌횡서의 한국어 출판물이며, 한자, 한글, 라틴 문자 활자가 혼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활판 인쇄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을 위한 한글 활자는 한국인 신자 최지혁이 원자를 쓰고, 한자 크기에 맞춰 5호・3호(나중에 4호도) 활자가 히라노 도미지의 활판소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는 목활자나 분합 활자(한글을 자음·모음으로 나눠, 문선 시에 합성) 이외에서는 최초의 한글 활자였다. 사전은 요코하마의 가톨릭 야마테 성당에서 편찬되었다.
1881년에는 한국어 문법서 『한어문전』(Grammaire coréenne프랑스어)을 출판했다. 이 책은 사전과 같은 5호・3호 활자를 사용했다.
3. 2. 서울에서의 옥중기
리델은 조선을 탈출한 후, 만주의 성당에서 옥중기 《나의 서울 감옥 생활》을 집필했다.당시 포도청의 대장 이경하는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고,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자 중에는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는 자가 나왔지만, 고문을 받고도 최후까지 신앙을 관철한 자가 많았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경하는 "박해로 천주교를 근절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으며, 대원군과 명성황후도 신부의 처형에는 반대하는 듯하다고 덧붙였다.[6][7][8]
참조
[1]
서적
Dallet (1874) p.589 の注1
[2]
서적
Dallet (1874) pp.567-568
[3]
서적
Dallet (1874) p.589
[4]
백과사전
カトリック百科事典
[5]
간행물
Vicarite-Apostolic of Corea. Mgr. Ridel, Bishop of Philippopolis, and Vicar-Apostolic of Corea
https://books.google[...]
[6]
서적
劉(2009) p.249
[7]
서적
劉(2009) p.252, 258-259
[8]
서적
劉(2009) p.258
[9]
백과사전
병인양요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
[10]
서적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붓으로 칼과 맞선 500년 조선전쟁사―
플래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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