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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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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은 아테네에 위치한 기념물로, 펜텔리 대리석으로 건축되었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아테네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개선문은 높이 18m, 폭 13.5m, 깊이 2.3m로, 코린트식 기둥과 아치형 통로, 그리고 두 개의 비문을 특징으로 한다. 비문은 "이곳은 테세우스의 옛 도시인 아테네이다"와 "이곳은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지, 테세우스의 도시는 아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초기에는 아테네의 구역을 나누는 경계로 해석되었으나, 현재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도시 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개선문은 현재 아테네 지하철 아크로폴리 역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대기 오염으로 인해 훼손되고 있지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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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
기본 정보
아티카 06-13 아테네 24 하드리아누스의 아치
하드리아누스의 아치
종류아치
위치그리스 아티카 아테네
길이325 m
13.5 m
높이18 m
재료대리석
건축 시기131년 또는 132년
건축가알 수 없음
소유주공공 재산
관리그리스 문화관광부
공개 여부
명칭
그리스어(압시 다 투 아드리아누)
그리스어 (다른 표기)(필리 투 아드리아누)
영어Hadrian's Arch (하드리아누스의 아치)
영어 (다른 표기)Hadrian's Gate (하드리아누스의 문)
역사
시대헬레니즘 시대
문화고대 로마
관련 인물하드리아누스 황제
건축학적 세부 사항
구조 시스템석조 건축 구조 (대리석)
원기둥높이 17m × 지름 2m × 104개

2. 건설 및 디자인

이 기념물은 파르테논 신전 등 아테네의 주요 건축물에 사용된 펜텔리 산의 펜텔리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개선문에 사용된 대리석은 최고급은 아니었다.[3] 아치는 대리석을 쌓고 클램프로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높이 18m, 폭 13.5m, 깊이 2.3m이다.

하부 층에는 폭 6.5m의 아치형 통로가 있고, 코린트식 오더 주두로 장식된 필라스터가 통로를 받치고 있다. 상부 층은 코린트식 기둥과 필라스터로 세 개의 직사각형 개구부로 나뉘어져 있다.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은 로마 개선문과 비교했을 때 디자인 차이가 크다.[5] 로마 개선문은 상부 층(다락)이 크고 단단하며 헌정 비문과 조각 장식, 사두 마차 등 주요 조각품을 설치했지만,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은 상부 층이 정교하여 주요 장식을 설치할 수 없는 디자인이다.

2. 1. 재료 및 디자인

이 기념물은 전체가 펜텔리 산에서 채석한 펜텔리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펜텔리 대리석은 파르테논 신전 등 아테네의 주요 건축물에 사용되었지만, 품질은 다양했다. 개선문에 사용된 대리석은 최고급은 아니었고, 포함물이 더 많았다.[3] 아치는 시멘트나 모르타르 없이 대리석을 쌓고 클램프로 연결하여 만들었다. 높이는 18m, 폭은 13.5m, 깊이는 2.3m이며, 앞뒤와 좌우가 완전히 대칭적인 디자인이다.

하부 층에는 폭 6.5m의 아치형 통로가 있고, 코린트식 오더 주두로 장식된 필라스터가 통로를 받치고 있다. 이와 비슷하지만 더 높은 필라스터가 하부 층 바깥쪽 모서리에 있다. 바깥쪽 필라스터와 아치형 개구부 사이는 사각형 돌로 채워져 가장자리 디자인을 강조했다.[3] 통로 양쪽에는 코린트식 기둥이 벽 중앙에서 돌출된 사각형 기단 위에 있었다. 하부 층은 덴틸과 돌출된 게이손이 있는 이오니아식 아키트레이브로 장식되었다.

상부 층은 코린트식 기둥과 필라스터로 세 개의 직사각형 개구부로 나뉘어져 있다. 바깥쪽 개구부 각각은 하부 층처럼 덴틸과 게이손이 있는 이오니아식 아키트레이브로 장식되었다. 중앙 개구부는 덴틸, 게이손, 시마 위에 놓인 삼각 페디먼트를 지지하는 코린트식 반 기둥이 있는 안타로 측면이 구성되었다. 페디먼트 꼭대기에는 작은 식물성 아크로테리온이 있었다. 상부 층 중앙 개구부는 원래 얇은 돌 스크린으로 막혀 있었으나, 현재는 슬롯만 남아있다.[4] 상부 층 중앙의 아이딜과 같은 틈새 디자인은 ''스카에나 프론스''(고대 무대 건물의 정면)와 유사하며, 두 번째 폼페이 양식 벽화의 아이딜 표현을 연상시킨다.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은 로마 개선문과 비교했을 때 디자인 차이가 크다.[5] 로마 개선문은 하부 층 아치형 통로 수가 다양하고, 긴 축을 따라 보조 통로가 있기도 하다.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은 단일 통로를 가진 이중 통로 아치라는 점에서 로마 개선문의 건축 양식에 속한다. 그러나 로마 개선문은 대개 크고 단단한 상부 층(다락)을 가지고 있으며, 헌정 비문과 조각 장식으로 채워져 있다. 또한, 로마 개선문은 사두 마차 등 주요 조각품을 지지했다. 반면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은 상부 층이 정교하여 주요 장식을 설치할 수 없는 디자인이다.

2. 2. 조각 장식

하단부 상단에는 건축 형태에 흔히 사용되는 방식처럼, 상단부 중앙의 작은 신전 형태의 틈새 양쪽에 조각상이 놓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테세우스하드리아누스가 이 두 조각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며, 이는 비문에 근거한다.[6] 워드-퍼킨스는 아치 상단부에 하단부의 돌출된 코린트식 기둥 위에 여러 조각상이 추가로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과 정반대로, 윌러스는 하단부 상단에 조각상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종류의 다웰링(dowel)에 대한 증거가 없으며, 조각상이 올려지기에는 상단 표면의 석재가 너무 거칠게 다듬어졌다고 주장한다.[7] 윌러스는 아치 하단부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지만, 상단부에 대한 면밀한 연구는 허가되지 않아 그의 상단부에 대한 주장은 이전에 발표된 측정 및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다. 쿠레메노스는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아치에 채색된 부조가 있었고, 아마도 중앙 개구부에 조각상이 있었을 것이며, 이는 비잔틴 시대에 제거되고 대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8] 기념물에 대한 완전한 조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3. 비문

개선문 아치 하단부 아키트레이브에는 두 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들은 아치형 입구 위 양쪽에 하나씩 위치해 있다.


  • 북서쪽 (아크로폴리스 방향) 비문: ΑΙΔ' ΕIΣΙΝ ΑΘΗΝΑΙ ΘΗΣΕΩΣ Η ΠΡΙΝ ΠΟΛΙΣ|이곳은 테세우스의 옛 도시인 아테네이다.el
  • 남동쪽 (올림페이온을 바라보는 쪽) 비문: ΑΙΔ' ΕΙΣ' ΑΔΡΙΑΝΟΥ ΚΟΥΧΙ ΘΗΣΕΩΣ ΠΟΛΙΣ|이곳은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지, 테세우스의 도시는 아니다.el[9]


아리스티데스의 필사본에 있는 고대 ''주석''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아테네의 성벽을 확장하면서 도시의 구역과 신구역 경계에 이와 의미는 같지만 정확한 문구는 다른 이중 비문을 새겼다고 한다.[10]

3. 1. 비문의 내용

아치의 하단부 아키트레이브에는 두 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양쪽 모두 아치형 입구 위에 하나씩 새겨져 있다. 북서쪽 면(아크로폴리스 방향)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 ΑΙΔ' ΕΙΣΙΝ ΑΘΗΝΑΙ ΘΗΣΕΩΣ Η ΠΡΙΝ ΠΟΛΙΣ (이곳은 테세우스의 옛 도시인 아테네이다.)


남동쪽 면(올림페이온을 바라보는 쪽)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 ΑΙΔ' ΕΙΣ' ΑΔΡΙΑΝΟΥ ΚΟΥΧΙ ΘΗΣΕΩΣ ΠΟΛΙΣ (이곳은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지, 테세우스의 도시는 아니다.)[9]


아리스티데스의 필사본에 있는 고대 ''주석''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아테네의) 도시 성벽을 확장하면서 아테네의 구역과 신구역의 경계에 아치의 비문과 의미는 같지만 정확한 문구는 다른 이중 비문을 새겼다고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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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스는 비문이 아테네를 테세우스의 옛 도시와 하드리아누스의 새 도시(''하드리아노폴리스'')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도시 전체를 재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14] 이러한 관점에서 비문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 이곳은 한때 테세우스의 도시였던 아테네이다.
  • 이곳은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지, 테세우스의 도시는 아니다.


한쪽은 아테네의 일부를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도시 전체를 황제의 것으로 주장한다.

3. 2. 비문의 해석과 논쟁

아키트레이브의 아치 하단부에는 두 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양쪽 모두 아치형 입구 위에 하나씩 있다. 북서쪽 면(아크로폴리스 방향)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 ΑΙΔ' ΕΙΣΙΝ ΑΘΗΝΑΙ ΘΗΣΕΩΣ Η ΠΡΙΝ ΠΟΛΙΣ (이곳은 테세우스의 옛 도시인 아테네이다.)


남동쪽 면(올림페이온을 바라보는 쪽)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 ΑΙΔ' ΕΙΣ' ΑΔΡΙΑΝΟΥ ΚΟΥΧΙ ΘΗΣΕΩΣ ΠΟΛΙΣ (이곳은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지, 테세우스의 도시는 아니다.)[9]


아리스티데스의 필사본에 있는 고대 ''주석''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아테네의) 도시 성벽을 확장하면서 아테네의 구역과 신구역의 경계에 아치의 비문과 의미는 같지만 정확한 문구는 다른 이중 비문을 새겼다고 한다.[10] 초기에는 이 비문들과 ''scholium''을 근거로 아치가 테미스토클레스 성벽 선상에 위치해 있으며, 테세우스의 옛 도시와 하드리아누스의 새 도시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11] 이러한 관점에서 두 번째 비문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아테네 동쪽의 새로운 도시 구역을 언급하며, 이 지역을 ''하드리아노폴리스''라고 불렀다.[12] 이 새로운 로마 시대의 도시는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시대에 고대 그리스 도시에 추가된 것으로 여겨졌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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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애덤스는 비문이 아테네를 두 개의 도시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도시 전체를 재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14] 즉, '이곳은 한때 테세우스의 도시였던 아테네이다. 이곳은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지, 테세우스의 도시는 아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애덤스는 아치가 테미스토클레스 성벽 선상에 있었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이후 테미스토클레스 성벽의 문이 아치에서 동쪽으로 약 140m 떨어진 곳에서 발굴되면서 이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751-53년에 아치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완전한 건축 연구를 수행한 스튜어트와 레베트는 아치가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이후 발굴을 통해 아치가 현대 리시크라테스 거리와 거의 같은 노선에 있는 고대 도로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아치는 이 거리를 따라 북서쪽으로 207m 떨어진 리시크라테스 기념비를 향하고 있다.[15]

4. 위치

아크로폴리 역에서 북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제우스 신전 외곽 도로 옆에 있다.[9] 이 아치는 북서쪽으로 207m 떨어진 리시크라테스 기념비를 향하고 있으며, 현대 리시크라테스 거리와 거의 같은 노선에 있는 고대 도로와 일치한다.[15]

아치의 하단부 아키트레이브에는 두 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양쪽 모두 아치형 입구 위에 하나씩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ΑΙΔ' ΕΙΣΙΝ ΑΘΗΝΑΙ ΘΗΣΕΩΣ Η ΠΡΙΝ ΠΟΛΙΣ|아이데 에이신 아테나이 테세오스 헤 프린 폴리스|이곳은 테세우스의 옛 도시인 아테네이다.grc

  • 남동쪽 면(올림페이온을 바라보는 쪽):

ΑΙΔ' ΕΙΣ' ΑΔΡΙΑΝΟΥ ΚΟΥΧΙ ΘΗΣΕΩΣ ΠΟΛΙΣ|아이데 에이스 하드리아누 쿠키 테세오스 폴리스|이곳은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지, 테세우스의 도시는 아니다.grc[9]

아리스티데스의 필사본에 있는 고대 ''주석''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아테네의 도시 성벽을 확장하면서 아테네의 구역과 신구역의 경계에 아치의 비문과 의미는 같지만 정확한 문구는 다른 이중 비문을 새겼다고 한다.[10]

5. 보존 상태

18세기 중반에 스튜어트와 레베트에 의해 건축학적으로 기록되었을 당시, 개선문의 기단은 약 약 0.91m 높이의 흙 속에 묻혀 있었다. 따라서 거의 19세기에 걸쳐 매장되어 보호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문은 현대에 들어서도 놀라운 상태를 유지했다. 하단 기둥은 사라졌지만, 개선문은 전체 높이로 보존되어 현대의 아말리아 대로를 굽어보고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대기 오염으로 기념물이 훼손되어 석재에 광범위한 변색이 일어나고 비문이 손상되었다.[16]

1950년대 개선문

6. 후원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의 후원은 아테네 국가 또는 새로 결성된 모든 그리스 도시의 협회인 '''판헬레네스'''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 학자들은 아테네인들이 개선문을 세웠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개선문의 재료와 실행의 품질이 아테네의 다른 하드리아누스 시대 건축물에 미치지 못하고, 아테네를 매우 사랑했던 황제가 자신의 작품에 그런 비문을 새길 정도로 오만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에 근거한 것이다.[17] 2세기 후반, 엘레우시스의 데메테르와 코레 신전에 동일한 규모와 디자인의 아치 두 개가 세워졌으며, '''판헬레네스'''가 황제(아마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헌정했다. 이 아치들은 신전으로 들어가는 정문 양쪽에 위치했으며, 각각 메가라로 가는 길과 항구의 끝에 서 있었다.[18] 남동쪽 아치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ΤΟΙΝ ΘΕΟΙΝ ΚΑΙ ΤΩΙ ΑΥΤΟΚ[Ρ]ΑΤΟΡΙ ΟΙ ΠΑΝΕ[ΛΛΗ]ΝΕΣ (두 여신과 황제에게, '''판헬레네스''').

수십 년,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두 곳에서 동일한 디자인을 사용하여 두 황제를 기렸다는 사실은 '''판헬레네스'''가 두 곳 모두의 아치를 세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18]

참조

[1] 문서 It was a major honor for the emperor to visit any city, and such an honor demanded that appropriate respect be shown.
[2] 간행물 Kouremenos 2022
[3] 문서 The technique of drafted edges refers to the cutting in of a decorative band around the visible edges of a stone.
[4] 간행물 Kouremenos 2022
[5] 문서 e.g. the Arch of Trajan at Benevento or the Arch of Constantine in Rome
[6] 문서 Graindor; Travlos
[7] 문서 Willers hypothesizes that the screen in the center opening of the upper level may have been intended for painted decoration, or that the decorative program of the arch may simply not have been completed.
[8] 간행물 Kouremenos 2022
[9] 문서 IG II² 5185
[10] 문서 Cited in the entry for IG II² 5185: a scholium to a text of the Panathenaicos by Aristides that reads: Ο Αδριανος ελθων και μειζονα ποιησας τον περιβολον ενθα μεν ην προ του τειχος το ταλαιον εγραψε - '''τουτο ο Θησευς εκτισε και ουκ Αδριανος''' – ενθα δε αυτον εκτισεν, - '''τουτο Αδριανος και ου Θησευς ωικοδομησεν'''.
[11] 문서 Graindor says that the arch marks the perimeter of the city of Theseus. Travlos agrees.
[12] 문서 It was a known practice for Greek inscriptions to be on the side of a boundary marker that they referred to, as Vanderpool discusses. The biographer Plutarch, in his Life of Theseus (25.3), discusses such a monument between the Peloponnesus and Attica.
[13] 문서 The proposition that this area was an entirely new creation of Hadrian has been contested.
[14] 문서 Adams takes issue with the interpretation of the preposition ΠΡΙΝ until recently accepted, and he offers the alternate sense of once (but no longer).
[15] 문서 Stuart and Revett
[16] 문서 The center of the SE inscription is effectively illegible; the NW inscription is in much better condition, although the stone (white marble) has become nearly black.
[17] 문서 Graindor. Travlos and Kouremenos agree that it was the Athenians. The simple Philhellenism of the emperor Hadrian has been a commonplace in scholarly discussions. Willers, however, has discussed the pragmatic politics of Hadrian's interest in Greek cities and culture.
[18] 간행물 Wil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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